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연표
(Biography of Johann Strauss Jr.)
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보눙에 전시되어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초상화
연도(나이) |
주요 사항 |
1825 |
현재의 비엔나 7구 노이바우의 레르헨펠더슈트라쎄 15번지에서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스로서 태어남. 당시에는 비엔나 교외인 장크트 울리히였음. |
1832 (7) |
잘만스도르프 여름집에서 첫번째 왈츠인 '첫번째 생각'(Erster Gedanke)를 즉흥적으로 작곡함. 현재는 19구 되블링의 드라이마르크슈타인가쎄 13번지임.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가 그의 사후에 자선목적으로 출판하였음.) |
1836 (11) |
1구 프라이융에 있는 쇼텐슈티프트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함. |
1841 (16) |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요망에 따라 폴리테흐닉 인스티투트(Politechnik Institute)의 상업연구부에 입학함. |
1843 (18) |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거나 작곡을 하는 바람에 폴리테흐닉을 나가야 했음. |
1844 (19) |
키르헤 암 호프에서 처음으로 '층계송'(Graduale)을 연주함. 자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13구에 있는 페르디난트 돔마이어 카지노(오늘날의 파르크호텔 쇤브룬)에서 지휘자 및 연주자로 데뷔함. |
1848 (23) |
비엔나 혁명이 일어남. 프랑스에서 시작한 혁명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로 확산됨. |
1849 (24) |
9월 25일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성홍열로서 세상을 떠남.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장 큰 성공은 그 전해에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승전한 것을 기념하여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한 것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되블링 공동묘지의 요셉 란너의 묘지 옆에 안장됨.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오케스트라를 자기의 오케스트라와 합병함. |
1856 (31) |
비엔나 호프부르크에서 모차르트 기념 콘서트를 감독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남. 리스트가 슈페를(Sperl) 무도회장의 슈트라우스 콘서트에 참석함. 러시아 생페터스부르크 인근의 파블로브스크에서 러시아에서의 첫 여름을 지냄. 그후의 러시아 순회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음. |
1861 (36) |
팔레 토데스코(Palais Todesco)에서 헨리에타 '예티' 트레프즈를 만남. |
1862 (37) |
8월 27일 슈테판성당에서 예티 트레프즈와 결혼식을 올림. 결혼후 두 사람은 1870년부터 1878년 예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현재의 13구 막싱거슈트랄쎄 18번지(당시에는 헤첸도르퍼 슈트라세)에 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얼마후 매각하였다. 이 집에서 오페레타 '박쥐'를 작곡. |
1867 (42)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나우 발처)를 작곡함. |
1868 (43) |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Geshichten aus dem Wienerwald)를 작곡함. |
1871 (46) |
첫 오페레타인 '인디고와 40인의 도적'(Indigo und die vierzig Räuber)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됨. |
1874 (49) |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박쥐'(Der Fledermaus)의 초연이 있었음. |
1878 (53) |
4월 7일 예티가 세상을 떠남. 5월 28일 브레슬라우(현재의 폴란드의 도시) 출신의 소프라노로서 릴리라는 애칭의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4구의 칼스키르헤에서 결혼함. |
1882 (57) |
릴리와 헤어짐. 4구 뷔덴의 이겔가쎄 4번지(현재의 요한 수트라우스 가쎄 4번지) 자택의 모임에서 아델레를 만남. 아델레는 나중에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됨. |
1883 (58) |
'베니스의 하룻 밤'(Einer Nacht in Venedig)이 베를린에서 초연됨. 대본이 진부하여서 성공하지 못함. 그후 수정본을 만들어 비엔나에서 공연하여 세계적인 인정을 받음. |
1885 (60) |
'집시남작'(Der Zigeunerbaron)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됨. 그는 개신교도인 아델레와 결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코부르크의 작손 시민권을 얻음. |
1886 (61) |
개신교로 개종하고 아델레와 결혼함. |
1899 (74) |
이겔가쎄 4번지(현재의 요한 슈트라우스 가쎄 4번지)의 저택에서 세상을 떠남. 3일후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 묘역에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의 옆 자리에 안장됨. |
1907 |
바로 아래 동생인 에두아르드가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악보 등 모든 자료를 불태워 없앴다고 함. |
1930 |
아델레가 세상을 떠남.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묘지에 합장됨. |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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