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여인들...민나 플라너(Minna Planer)

정준극 2013. 2. 8. 13:33

민나 플라너(Minna Planer)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민나' 플라너

                 

여배우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는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이다.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배우이다. 1809년 작소니왕국의 외데란(Oederan)에서 태어났으므로 바그너보다는 4년 연상이다. 바그너와 민나는 1836년에 결혼했다. 바그너가 23세의 청년이었고 민나는 27세였다. 두 사람은 30년 동안 부부로서 지냈다. 다만, 마지막 10년은 여러 사정으로 거의 떨어져서 살았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겉으로는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 때문에 깨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아서 불화가 계속되었고 결국 결별은 당연한 순서였다. 민나는 바그너와 결별한지 8년 후인 1866년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였다. 드레스덴의 알테 안넨프리드호프(Alte Annenfriedhof)에 민나 플라너의 묘지가 있다. 민나는 바그너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마다 바그너와 함께 그 사건들을 겪어 나갔다. 바그너와 함께 빚쟁이들을 피해서 라트비아의 리가로 갔던 일, 파리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리가를 떠나 런던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했던 일, 파리에서 오페라의 실패로 빈곤한 생활로 연명하던 일, 바그너가 드레스덴 봉기에 관련되어 독일에서 수배되자 그와 함께 유럽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던 일, 바그너와 베젠동크 부인이 밀애에 빠졌던 일 등 파란만장한 바그너 생애의 중심에 함께 있었다. 민나 플라너는 어떤 여자였으며 바그너와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고 또 결혼생활을 어떠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민나 플라너는 비록 한때 인기 여배우였지만 위대한 바그너의 평생 반려자로서는 문제가 많았으며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에 비하면 한마디로 수준미달이었다.

 

민나 플라너의 아버지는 작소니왕국의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제대한 사람이었다. 살림이 넉넉치 못해서 민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싸우는 것이었다. 민나는 예쁘장하고 매력적으로 생겼다. 그러다보니 좋게말해서 사랑스러웠고 나쁘게 말해서 바람끼가 많았다. 민나는 10대 소녀일 때 작소니왕국의 근위병 대위인 에른스트 루돌프 폰 아인지델이라는 사람에게 유혹당하여 원조교제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폰 아인지델 대위는 민나가 임신하자 돌연 민나를 멀리하고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며 떨어지고자 했다. 민나의 부모는 민나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자 시골에 있는 친척 집으로 보냈다. 얼마후 딸이 태어났다. 나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애칭으로는 네티(Netty)라고 불렀다. 민나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있어서 네티를 동생이라고 하며 키웠다.

 

민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예쁘장한 모습에 가련하게 울고불고 하는 연기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었다. 주로 맡은 역할은 당연히 비운의 가련한 소녀 역할 즉, 에어스테 리브하베린(Erste Liebhaberin)의 역할이었다. 에어스테 리브하베린이란 누구나 첫눈에 동정심을 갖게 해주는 가련한 처녀를 말한다. 신파조 연극에서는 그런 역할이 의례 주인공이었다. 민나는 인기가 높아져서 데사우, 알텐부르크, 마그데부르크, 드레스덴 등 독일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연극에 출연했다. 주가가 높아진 민나는 주역이 아니면 맡지 아니하는 위치가 되었다. 출연료도 많이 받았다. 찬미자들이 많이 생겼다. 민나는 배우로서 연기력도 좋았지만 미모도 한 몫했다. 어떤 찬미자는 민나의 미모를 창조주의 최대 걸작이라면서 아첨성 찬사를 보냈다. 민나의 초상화를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마 그 찬미자의 눈에는 민나가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런 찬미자 중의 하나가 바그너였다. 바그너가 민나에게 보낸 이른바 러브레터를 보면 요즘의 기준으로서 유치찬란한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감동적인 표현이었다. 예를 들면 "당신과 헤어진지 24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그 24시간이 마치 영겁의 세월과 같았습니다. 어찌하여 나는 이같은 헤어짐에 익숙하여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당신이 없다는 것은 마치 나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운운"이다. 

민나 플라너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민나는 1834년 여름에 마그데부르크의 하인리히 베트만 극단에 속하여 있으면서 할레(Halle) 부근의 바드 라우흐슈태트(Bad Lauchstädt)라는 곳에서 여름 시즌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다. 바그너도 마침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있었다.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의 오페라단으로부터 지휘자로 오라는 요청을 받고는 조건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왔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하기 위해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왔던 것이었다. 바그너는 우연히 민나가 묵고 있는 호텔에 방을 구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민나를 로비에서 민나를 보고 '아, 저 여자다'라고 생각하고는 차마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민나가 묵고 있는 방의 바로 아랫층 방에 투숙함으로서 민나를 그리워하였다. 다음날, 바그너는 민나가 마그데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민나와 계속 만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의 지휘자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때 바그너는 약관의 21세 였다. 그렇게 하여 민나와 바그너의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민나는 미모의 인기 여배우였고 바그너는 지지리도 못난 음악가에 불과했다. 그래서 민나는 바그너가 너무 집요하게 접근하므로 바그너를 떨쳐 버리기 위해 그야말로 여러 노력을 다 기울였다. 바그너로부터 잠적하여 찾지 못하게 했으며 다른 남자들과 공공연히 애정행각을 벌여 바그너로 하여금 실망하여 제풀에 물러나도록 시도하기도 했다. 민나는 그저 바그너와 자기가 절대로 맞지 않는 커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그너도 고집이라면 한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민나가 자기를 멀리하면 할수록 마치 자석처럼 더 달라 붙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만일 나와 결혼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날카로운 칼로 당신의 가슴을 찌르는 일 밖에 없다'면서 위협을 서슴치 않았다. 대단한 바그너였다. 민나는 겁에 질려서 바그너의 청혼을 받아 들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사람은 모두 한 성질하는 사람들이어서 데이트하면서 시간만 있으면 죽어라고 싸웠다. 그래서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바그너는 밤새도록 분노로서 고함을 치고 방 안의 물건들을 내 던지는 일이 많았고 민나는 그런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몇 시간이고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져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바그너는 후회심을 이기지 못하여 민나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결국 민나는 바그너의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을 승낙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마치 폭풍우가 불어 닥치는 것과 같았다. 민나도 문제가 많았지만 오히려 바그너 쪽이 문제가 더 많았다. 바그너는 질투심이 많았고 소유욕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자주 싸웠다. 싸움은 대체로 민나의 눈물로서 막을 내렸다.

 

[지나친 열정]

바드 라우스슈태트에서의 여름 시즌이 끝나고 그해 10월에 민나의 연극단이 마그데부르크로 돌아갈 즈음에 두 사람은 누가 보던지 둘도 없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1835년 2월에 바그너는 민나와 약혼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나이를 속였다. 바그너는 원래의 나이에 한 살 더 붙여서 얘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성년자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민나는 원래 나이에서 네살이나 빼고 말했다. 마치 수줍은 23세의 처녀처럼 믿게 했다. 바그너는 비록 민나와 약혼했지만 민나의 열성 팬들 때문에 속이 상해서 화를 내는 일은 빈번했다. 1835년 11월에, 민나는 말도 없이 갑자기 베를린으로 떠났다. 나중에 알아보니 베를린의 쾨니히스버그 극장에서 역할을 맡게 되어 갔다는 것이다. 마그데부르크 연극단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베를린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마 바그너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민나가 말도 없이 떠나자 바그너는 분노와 함께 절망에 빠졌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어 제발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와서 당장 결혼식을 올리자고 간청했다. 결국 민나는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온 민나는 시즌말까지 머물다가 다시 저 멀리 쾨니히스버그로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와 함께 있기 위해 쾨니히스버그 에 있는 어떤 작은 극단의 부지휘자라는 직책을 어쩔수 없이 맡았다. 마침내 민나와 바그너는 1836년 11월 26일 쾨니히스버그의 트라그하임(Tragheim)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으면서도 두 사람의 말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결혼식 도중에 주례를 맡은 목사님 앞에서도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바그너와 민나가 1936년 11월 26일에 결혼식을 올린 쾨니히스버그의 트라그하임 교회(Tragheimer Kirche). 1930년대의 모습. 이 교회는 2차 대전 중인 1944년 극심한 폭격을 받았고 1945년에는 쾨니히스버그 전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교회의 물건들은 소련군이 칼리닌그라드로 가져 갔다가 1950년 중반에 모두 파괴하였다.

 

[가출, 또 가출]

결혼후 얼마 되지 않아서 민나는 바그너라는 청년의 부인이라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던 존경받고 사랑받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가장 골치꺼리가 허구헌날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나도 그렇지만 바그너도 사치성이 있었다. 쾨니히스버그에서의 보조 지휘자의 자리는 별로 급여가 많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사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최상의 비단과 화려한 공단과 벨베트를 좋아하였다. 바그너는 집에서 입는 가운이 하나 필요해도 유명 상점에서 아주 깐깐하게 맞추어 입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사치만 부렸으니 빚만 늘어날수 밖에 없었다. 바그너는 쾨니히스버그는 물론, 멀리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빚을 졌다. 민나는 바그너에게 빚을 받으로 온 사람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피곤했다. 바그너는 쥐꼬리만한 돈을 벌었으며 민나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해 나갔으므로 사실상 민나가 가장이었다. 민나는 인기인이었고 바그너는 무명의 지휘자였다. 민나에게는 찬미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결혼한 다음 해인 1937년 5월 31일에, 민나는 찬미자 중의 하나인 디트리히라고 하는 쾨니히스버그의 상인과 함께 가출했다. 민나는 딸 네티를 데리고 가출했다. 바그너는 바로 그날 아침에 빚쟁이들이 고소하는 바람에 지방법원의 판사에게 갔었기 때문에  민나가 가출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바그너는 피스톨과 채찍을 들고 민나를 찾으러 나섰다. 바그너는 민나의 행방을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결국 민나가 드레스덴에 있는 민나의 부모 집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 민나는 바그너에게 맨날 빚쟁이들만 상대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서 집을 나왔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다시는 빚을 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민나를 설득하여 겨우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화해도 잠시뿐이었다. 두달 후인 7월에 민나는 다시 디트리히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 분노가 극도에 달한 바그너는 민나와 디트리히를 찾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하며 나섰으나 이번에는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였다. 민나가 마음이 변해서(일설에는 바그너에게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바그너에게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0월이었다. 바그너가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음악감독의 자리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빚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바그너는 그때부터 돈이 많을 듯한 여인들을 일부러 만나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한 후에 돈을 얻어 내는 치사한 방법을 구사했다. 그 중에는 유명한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도 있었다. 슈뢰더 드브리앙은 바그너의 허울 좋은 서비스에 대하여 1000 탈러를 지불했다. 알비네 프로만이라는 여자는 예쁘지도 않고 젊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여자는 몰래 감추어둔 현찰이 많았다. 유명한 소프라노인 앙리에트 뷔스트(Henriette Wüst)와의 애정행각은 앙리에트의 남편이 저축해둔 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때의 민나 플라너

 

[방랑하는 바그너]

민나도 리가의 극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바그너와 민나는 리가에서 2년 동안 잘 견디며 살았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1839년 1월에 음악감독의 자리를 내놓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리가까지 몰려온 빚쟁이들을 피해서 멀리 잠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와 민나는 기르던 개 한마리만 데리고 리가에서 가까운 러시아 국경을 넘어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갔다가 다시 파리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파리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의 공연이 준비되고 있다고 하므로 만일 '리엔치'가 성공을 거둔다면 돈도 많이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나는 4월 18일에 리가에서 마지막이 되는 무대 출연을 했다. 쉴러의 '마리아 스투아르트'였다. 민나는 이 공연에서 받는 출연료로 리가에서 파리까지 가는 여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마침내 7월 10일, 두 사람은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안전하게 건넜다. 국경 수비대에게 발견된다면 총살을 면치 못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두 사람은 국경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탄 마차가 도중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바그너는 별로 다친데가 없었지만 민나는 상처를 입었다. 나중에 민나의 딸인 네티는 그때의 마차사고로 민나가 유산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알고보니 민나는 바그너의 아이 갖지 않았었다고 한다. 바그너와 민나는 발트해의 항구인 필라우(Pillau: Baltiysk)에서 테티스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런던으로 향하였다. 필라우는 러시아 땅이지만 독일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필라우를 떠난 배는 심한 폭풍우 때문에 표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어떤 표르드에 겨우 정박하였다. 아무튼 바그너와 민나는 필라우를 떠난지 24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보통 같으면 기껏해야 8일 걸리는 일정이었다. 런던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이들은 마침내 파리로 가는 증기선을 탔다.

  

'방랑하는 화란인'의 무대. 화란인 역에 베이스 브린 터플

 

[빚때문에 감옥생활]

바그너와 민나는 1839년부터 1942년까지 3년 동안 파리에서 지냈다. 무척 가난하게 지냈다. 바그너의 기대는 무너졌다. 파리오페라가 '리엔치'의 공연에 관심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파리오페라는 바그너의 신작인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가야 했다. 민나는 파리에 있는 독일인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바그너를 석방하는데 필요한 돈을 구해야 했다. 그러던 바그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드레스덴 궁정극장이 '리엔치'를 공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바그너는 1842년 4월에 파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갔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궁정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민나가 소원하던 사회적 지위와 생활의 안정을 기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봉기에 연루되어 당국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취리히로 도피하였다. 바그너가 궁정카펠마이스터 자리를 버리고 취리히로 도망가자 민나는 당황하고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민나는 취리히를 드레스덴보다 형편 없는 시골 도시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카펠마이스터의 부인'(Frau Kappelmeister)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잃게 되어 한탄을 금치 못했다.

 

바그너가 그런 민나를 설득하여 취리히로 오게 한 것은 몇 달 후인 8월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그너의 이상적인 세계관, 또는 작품관과 민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데 있었다. 민나는 지휘자로서 바그너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하여는 점점 흥미를 잃고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나로서는 예전과는 달리 바그너의 활동에 의지할수 밖에 없었다. 다시 무대에 서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나는 바그너에게 종속되어 갈수록 혹시 결국은 바그너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더구나 민나는 심장질환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는 아편을 처방해 주었다. 그만큼 통증이 심했다.

 

그런데 바그너는 민나가 드레스덴을 떠나 바그너가 있는 취리히로 올 때 쯤에는 부유한 보르도 상인의 부인인 제시 라소(Jessie Laussot)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제시 라소는 바그너에게 매년 3천 프랑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남편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수상한 낌새를 갖자 그리스로 함께 도망갈 계획까지 세웠다. 바그너는 취리히에 온 민나에게 정식으로 작별인사까지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제시 라소의 남편이 두 사람의 도망계획을 알고는 바그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그리스 도피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리고는 1년에 3천 프랑씩 보조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했다. 그후 제시 라소는 보르도로 돌아가야 했다. 바그너도 기회를 엿보아 프랑스로 제시를 쫓아 가려고 했으나 프랑스 비자가 없어서 국경에서 당장 쫓겨났다. 이 때 바그너는 '위대한 사랑이 인간의 비겁함으로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바그너는 민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제시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무조건 민나에게 돌아가겠다고 나섰다. 민나는 바보는 아니지만 바그너를 어쩔수 없이 받아 주었다.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1850년에 민나와 아주 헤어질 생각을 하고 여러 궁리를 했다. 그때 바그너는 21세밖에 되지 않은 제시 라소(Jessie Lassot)라는 여자와 불륜의 연애를 했었다. 영국출신의 제시는 파리에서 보르도 와인 사업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우연히 바그너를 만나 사랑의 불꽃을 태웠다. 바그너와 제시는 저 멀리 극동으로까지 가서 세상과 작별하고 살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가 극동은 너무 멀므로 그리스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민나가 이 계획을 눈치채고 제시의 친정 어머니와 함께 두 사람의 도피계획을 중단시켰다. 이로 인하여 바그너는 결국 민나에게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 일단 민나에게 돌아간 바그너는 어쩐 일인지 민나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서 두 사람은 마치 결혼 전에 정열을 불태웠던 것처럼 지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바그너와 민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은 것은 마틸데 베젠동크와 뜨거운 관계에 있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바그너는 1857년에 취리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는 중에 베젠동크와 열애의 관계에 들어갔다.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과 좀 수상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증거가 없어서 가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1858년 4월에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민나는 두 사람이 간통을 했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바그너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민나가 편지의 내용을 과대해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중에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추가로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편지에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을 '바람둥이 여자'(hussy), 또는 '순결하지 않은 여자'(filthy woman)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었다. 민나는 이로 미루어보아 베젠동크 부인이 바그너를 유혹하였고 바그너는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고 추측했다.

 

바그너와 한때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제씨 라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나와 민나는 결국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바그너는 베니스로 여행을 떠났고 민나는 온천에서 치료를 받으면 심장질환에 좋다는 말을 듣고 브레스텐버그(Brestenberg)로 갔다. 당시 민나는 심장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민나는 베젠동크 부인에 대하여 유감이 많았다. 그래서 드레스덴으로 돌아가기 전에 베젠동크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민나는 편지에서 '피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결혼한지 거의 32년이나 되는 나와 나의 남편을 갈라 놓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당신에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민나는 나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지나치게 가증스러운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라고 말했다. 물론 베젠동크 부인과 바그너를 빗대어서 한 말이다.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에 대하여는 별도로 소개코자 한다.

 

바그너가 열정의 불꽃을 태웠던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

                 

[파리, 그리고 말년]

바그너는 1859년 11월에 '탄호이저' 수정본을 파리오페라에서 공연되기를 바라면서 파리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연락하여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파리에서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나는 그래도 남편인 바그너의 요청을 받아 들여 파리로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만나면 다투고 싸웠다. 두 사람은 모처럼 파리에서 재회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민나는 '탄호이저' 수정본으로서는 파리에서 돈을 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리엔치'로서 돈을 벌수 있다고 믿었다. '탄호이저'는 대실패였다. 1861년 7월에 바그너는 비엔나로 갔고 민나는 다시 온천요양을 위해 바드 조덴(Bad Soden)으로 갔다가 이어서 드레스덴으로 갔다. 드레스덴에는 민나의 딸 나탈리(네티)와 민나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바그너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62년 2월, 민나는 바그너가 살고 있는 뷔스바덴의 비브리히(Biebrich)를 깜짝 방문하였다. 오랫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래도 부부인지라 과거는 다 잊고 서로 잘해보자고 다짐했다. 두 사람의 생활을 누가 보던지 다정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오래 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민나가 바그너와 재회한지 며칠 후에 베젠동크 부인이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민나가 난리를 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바그너는 나중에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마치 10일 동안 지옥에 있었던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1862년 6월에 바그너는 도저히 더 이상 민나와 살수 없어서 이혼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민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민나는 오히려 바그너에게 지난 일은 다 잊고 드레스덴에 가서 함께 지내자고 계속 간청했다. 드레스덴에는 민나의 딸인 나탈리와 민나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가서 살 생각이 없었다. 비록 이혼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베젠동크 편지사건 이후 민나와 바그너는 한 지붕 아래에서 산 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는 민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나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다. 민나 바그너는 1866년 드레스덴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민나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1870년 오래전부터 사랑하던 코지마 리스트와 결혼하였다.

 

드레스덴에 있는 민나 바그너의 묘지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가 공개되어서였다. 민나가 간직하고 있던 바그너와의 편지들은 민나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딸인 나탈리가 보관하게 되었다. 나탈리는 나중에 미국의 작가인 메리 버렐(Mary Burrell)에게 그 편지들을 대부분 팔았다. 메리 버렐은 바그너에 대한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메리 버렐은 바그너 자서전이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중에 바그너 편지들을 중심으로 하고 민나의 편지도 포함한 '버렐 콜렉션'이 1950년에 출판되었다. 버렐 여사가 나탈리로부터 매입한 민나-바그너 편지들은 현재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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