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여인들...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 1

정준극 2013. 2. 10. 18:33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 1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 리스트. 1878년

 

코지마 리스트는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겸 지휘자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다. 리스트가 태어날 당시의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하여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리스트는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가 사랑하여서 태어났다. 마리 다구는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작가로서 리스트와 한동안 동거생활을 하였다. 코지마는 처음에 한스 폰 빌로브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와 결혼하였으나 나중에 바그너와 눈이 맞아 스위스로 도망갔고 결국 바그너와 결혼하여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코지마가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된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코지마는 와 함께음악사에 길이 남을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였다. 바그너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창설한 것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 특히 '파르지팔'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을 증진하는 일에 여생을 헌신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바그너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된 지그프리트 바그너이다. 아무튼 코지마의 생애도 바그너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코지마는 1837년 12월 24일 북부 이탈리아의 코모 롬바르디아에서 태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코지마의 아버지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의 여류작가로서 귀족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었다. 코지마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 그리고 가정교사와 함께 지냈다. 코지마는 20세가 되는 1857년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 1830-1894)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대체적으로 이들의 결혼생활을 사랑이 없는 것이었다. 코지마는 한스 폰 뷜로브와 결혼한지 6년 후에 바그너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바그너는 코지마보다 24세나 연상이었다. 결국 코지마는 바그너와 1870년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주관하였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레퍼토리를 바그너의 10개 오페라로 구성된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eyreuth Canon)으로 확대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오로지 코지마 바그너의 헌신적인 기여때문이었다.

 

코지마의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 젊은 시절의 모습

 

코지마가 20년에 걸친 바이로이트의 감독으로 활동하는 중에 일부 사람들이 극장무대의 혁신을 주장했지만 코지마는 를 반대하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오리지널 제작 의도를 대한으로 존중하여 오페라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코지마는 그런 주장을 그가 1907년에 은퇴한 후에도 후임자들이 계승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코지마는 독일이 문화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바그너의 주장에 대하여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코지마가 바이로이트의 감독으로 있을 때에 바이로이트는 점차 반유태주의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성향은 바이로이트가 출범한지 수십년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30년에 코지마가 세상을 떠나자 나치가 그런 사상을 추종하였다. 그래서 코지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부흥발전시킨 인물로서 인정을 받고 있찌만 한편으로는 과연 페스티벌을 정치와 인종문제로 연결시키는 것이 옳으냐는 논란을 낳게 했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이제 코지마의 출생배경과 성장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잘 아는대로 코지마의 아버지는 프란츠 리스트이고 어머니는 마리 다구이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부인(Marie, Comtesse d'Agoult)을 만난 것은 21세 때인 1832년이었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보다 6년 연상으로 파리 사교계의 여류였다. 마리의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이름난 은행가 가문의 출신이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귀족인 라비니 백작(Comte de Lavigny)이었다. 마리는 1827년에 다구백작인 샤를르(Charles, Comte d'Agoult)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두 딸을 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그때 마리는 리스트를 만났다. 리스트는 그 놀라운 피아노 재능으로서 파리 사교계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파리 사교계의 두 인물이 만났으니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마리와 리스트는 서로 지성적인 관심이 같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열정적인 관계에 들어갔다. 2년 후인 1835년, 마리와 리스트는 피라를 떠나 스위스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파리에서 자기들에 대한 온갖 스캔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사람은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마리는 그해 12월에 딸을 낳았다. 블란디네(Blandine: 블랑댕)이었다. 코지마의 언니이다.

 

코지마의 어머니 마리 다구 백작부인

 

리스트는 유럽의 여러 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가졌다.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2년이 넘게 그렇게 다녔다. 마리가 언제나 함께 다녔다. 1837년 말 쯤해서 마리는 임신말기였다. 리스트와의 두번째 아이였다. 그때 두 사람은 이탈리아 북부 롬마르디아의 코모(Como)에 있었다. 마리는 코모의 호수가에 있는 벨라지오(Bellagio) 호텔에서 12월 24일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름을 프란체스카 게타나 코지마(Francesca Gaetana Cosima)라고 붙였다. 코지마라는 생소한 이름은 의사와 약사들의 수호성인인 성코스마스(St Cosmas)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로부터 이 아이는 코지마라고 불렸다. 리스트와 마리는 연주여행을 계속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린 블란디네와 코지마는 유모에게 맡겨서 길렀다. 당시에는 웬만한 집에서는 아기들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리스트와 마리의 세번째 아이인 다니엘은 1839년 5월 9일 베니스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1839년에 리스트는 계속 연주여행을 다니는 중에 마리는 두 딸을 데리고 파리로 돌아갔다. 마리가 파리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리스트와 애정도피하였다가 몇년 만에 두 딸을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으니 오죽이나 말들이 많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마리가 그런 눈총을 받으면서도 파리에 온 것은 아이들을 사생아가 아니라 적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친정 어머니인 마담 드 플리비니는 아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마리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수 없는 여인이 되었다. 사생아인 두 딸이 증거였다. 그런 소식을 들은 리스트는 아이들을 마리로부터 떼어내어 기르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파리에 살고 있는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에게 맡겼다. 아들 다니엘은 베니스에 두고 유모가 기르도록 했다. 이렇게하여 리스트와 마리는 서로 독립적인 생활을 계속할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리스트와 마리의 관계는 점점 식어갔다.

 

코지마의 할머니, 리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

 

1841년쯤해서는 리스트와 마리가 만나는 일이 별로 없게 되었다. 아마 그때쯤해서는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상대를 찾아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1845년 경에는 서로 아예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얘기할 일이 있으면 제3자를 통해서 얘기를 전할 정도였다. 리스트는 파리에 있는 딸들이 마리와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마리는 리스트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열매들을 훔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리스트는 딸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마리는 그런 리스트와 '마치 암사자처럼' 싸우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얼마후에 그런 투쟁을 포기했다. 아마도 사회적인 체면이 어머니로서의 의무보다는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마리는 딸들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1850년까지 5년 동안 한번도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

 

바그너와 코지마와 리스트. 또 한 사람은 폰 뷜로브인듯.

 

[미운 오리새끼]

두 자매 중에서 언니인 블란디네가 더 이뻤다. 코지마는 코가 유별나게 길었고 입이 넓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지마를 '미운 오리새끼'라고 불렀다. 리스트는 자기 아이들에게 살뜰하지는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리스트는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딸은 마담 베르나르(Madame Bernard)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특수기숙학교에 갔다. 아들 다니엘도 역시 리체 보나파르트라는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소녀시절의 코지마

 

리스트는 36세 때인 1847년에 러시아 공자의 부인인 카롤리네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Cary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을 만났다. 카롤리네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별거하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리스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리스트와 카롤리네의 관계는 리스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카롤리네는 리스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카롤리네는 리스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었다. 두 딸을 양육하는 일까지도 카롤리네의 책임이 되었다. 1850년 경에 리스트는 두 딸들이 엄마인 마리를 가끔씩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스트는 카롤리네의 조언을 받아 두 딸들이 마리와 만나지 못하도록 기숙학교에서 데려나와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지내도록 했다. 가정교사는 카롤리네의 가정교사였던 당시 72세의 마담 파테르시 데 포솜브로니였다. 리스트의 지시는 분명했다. 가정교사가 두 딸들의 모든 생활을 관리하고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가정교사는 두 딸들이 무슨 일을 하면 되고 무슨 일을 하면 안되는지를 일일히 결정했다. 리스트는 말년인 1881년에 외손녀 다니엘라를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 모음곡'을 작곡했다. 모두 12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음곡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세곡은 리스트와 카롤리네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열번째 곡인 '옛적에'(Ehemals)는 리스트가 카롤리네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쓴 것이며 열한번째 곡인 '운가리슈'(Ungarisch)는 헝가리 출신인 리스트 자신을 표현한 것이고 열두번째 곡인 '폴니슈'(Polnisch)는 폴란드 출신의 카롤리네를 표현한 곡이다.

 

젊은 시절의 카롤리네

 

블라디네와 코지마 자매는 4년 동안 그렇게 마담 파테르시의 우산 아래에서 지냈다. 어쨋든 코지마는 마담 파테르시로부터 귀부인으로서의 예의범절을 깍득하게 배웠다. 1853년 10월에 리스트가 마담 파테르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두 딸을 만나러 왔다. 1945년 이래 8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때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찾아왔다. 이때 코지마는 16세의 소녀였고 바그너는 40세의 중년이었다. 나중에 카롤리네가 낳은 딸인 마리는 그 때의 코지마에 대하여 '키가 크고 삐쩍 말랐으며 각이 진 얼굴은 그의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었다. 정말 볼품 없는 소녀였다. 다만 한가지 멋있던 것은 코지마의 길고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었다'고 말했다. 무도 식사를 함께 마친 후에 바그너는 나중에 '신들의 황혼'이라는 제목의 오페라가 된 작품의 마지막 막의 대본을 낭송했다. 코지마가 바그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 이 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일기에 '두 소녀는 매우 수줍어 했다'라고만 썼다.

 

[한스 폰 뷜로브와의 결혼]

리스트는 딸 들이 점점 성장하자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딸들을 베를린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파리에 있던 마리가 극구 반대했음은 물론이었다. 두 딸들은 베를린에서 프란치스카 폰 뷜로브 부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프란치스카 폰 뷜로브 부인은 리스트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인 한스 폰 뷜로브의 어머니이다. 아들 한스는 두 딸들의 음악교육을 맡았고 한스의 어머니인 프란치스카 폰 뷜로브 부인은 두 딸들의 일반적인 생활관습에 대한 교육을 맡았다. 한스 폰 뷜르보는 원래 법률을 공부했으나 1850년 8월에 리스트가 봐이마르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법률공부를 집어 치우고 평생을 음악가로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한스는 피아노를 공부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리스트에게 배웠다. 리스트는 한스의 재능을 보고 언젠가는 위대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트의 두 딸의 음악교육을 맡은 한스는 그 중에서도 코지마의 피아노에 대한 재능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인 리스트의 스탬프를 찍은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났다. 한스와 코지마는 어느덧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한스와 코지마는 1857년 8월 18일 베를린의 성헤드비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 중에 취리히 인근에 살고 있는 바그너를 찾아가기도 했다. 리스트도 함께 갔었다. 코지마는 그 다음해에도 스위스의 바그너를 찾아갔었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충격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집을 떠나면서 바그너의 발 아래에 몸을 던지고 바그너의 손을 부여 잡고 눈물을 흘리고 키스를 퍼부었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뜻밖의 행동에 몹시 당황하였다. 코지마의 사랑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코지마의 첫 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

 

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코지마로서는 베를린에서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코지마는 베를린이 시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모임이 있더라도 외톨이 처럼 지내기가 일수였다. 코지마는 처음에 남편 폰 뷜로브의 경력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코지마는 남편에게 작곡도 해 보라고 권면하였다. 어느날 코지마는 폰 뷜로브에게 대본을 하나 주며 오페라로 작곡해 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코지마가 직접 쓴 대본으로 아서왕의 궁정 마법사인 멀린(Merlin)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온 것은 없었다. 폰 뷜로브는 지휘자로서 너무 스케줄이 많았다. 그럴수록 코지마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코지마는 프랑스어 잡지인 Revue germanique의 번역자 겸 기고가로서 시간을 보냈다. 1859년 12월에 코지마의 남동생인 다니엘이 20세의 오랜 병 치레 끝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코지마는 1860년 10월 12일에 첫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코지마는 남동생인 다니엘을 추모하여서 딸의 이름을 다니엘라(Daniela)라고 지었다. 1862년에 코지마는 또 하나의 비통한 경험을 해야 했다. 유일한 언니인 블란디네(블랑댕)이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플란디네는 1857년에 파리의 변호사인 에밀 올리비에라는 사람과 결혼했었다. 코지마와 블란디네는 어릴 때부터 자매 이상으로 함께 자랐기 때문에 블란디네의 갑작스런 죽음은 코지마로서 큰 충격이었다. 블란디네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63년에 코지마는 두번째 딸을 낳았다. 언니 블란디네를 생각하여서 딸의 이름을 블란디나(Blandina)라고 지었다.


코지마의 아이들. 윗줄 왼쪽으로부터 이졸데, 그 옆이 블란디나, 아랫줄 왼쪽이 에바, 가운데가 지그프리트, 그 옆에 나이 든 소녀가 다니엘라이다. 잘 아는 대로 다니엘라와 블란디나는 코지마가 한스 폰 뷜로브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고, 나중에 코지마가 바그너와 살면서 낳은 아이들이 이졸데와 에바, 그리고 유일한 아들은 지그프리트이다. 이졸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가져온 이름이며 에바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그리고 지그프리트는 '니벨룽의 반지'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바그너와 폰 뷜로브는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폰 뷜로프가 리스트의 뛰어난 제자이기도 했지만 바그너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인정하여 여러 일을 맡겼던 터였다. 폰 뷜로브는 1858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보컬 스코어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186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스코어를 필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폰 뷜로브는 1862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비브리히(Biebrich)에 있는 바그너의 거처를 방문하여 함께 지냈다. 나중에 바그너는 당시 코지마와 작별을 하면서 '발퀴레'에서 '보탄의 작별'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1862년 10월, 블란디네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바그너와 폰 뷜로브는 라이프치히의 콘서트에서 나누어 지휘를 하게 되었다. 코지마도 리허설을 참관하고 있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그때 코지마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면서 코지마에 대하여 더 할수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당시에 바그너의 감정적인 생활을 혼란상태였다. 바그너는 첫 부인인 민나 플라너와 아직도 법적인 부부로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여러 여인과 혼외정사에 관여되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바그너는 자기가 무슨 카사노바 사촌쯤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여성편력이 대단했다.[참고로 말하면 첫 부인인 민나 플라너는 1866년에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1863년 11월에 바그너는 베를린을 방문하였다. 당연히 코지마를 만났다. 폰 뷜로브는 어떤 콘서트의 리허설 때문에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택시를 타고 오래오래 드라이브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비로소 털어 놓았다. 바그너는 나중에 '우리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으면서 우리가 서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고 썼다.

 

코지마 폰 뷜로브. 코는 참 크다. 그래서 코지마인가?

                        

[바그너와의 결혼]

1864년에 들어서서 바그너는 새로운 후원자로 인하여 그동안의 구차했던 생활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 국왕이었다. 루드비히는 바그너의 빚을 모두 갚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생활비도 지급하였다. 루드비히는 바그너에게 슈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수가에 별장을 주었고 뮌헨에는 커다란 저택을 주었다. 바그너의 요청에 의해 폰 뷜로브는 루드비히의 궁정피아니스트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폰 뷜로브와 코지마는 뮌헨으로 이사왔다. 바그너의 저택 근처에 집을 구하여 지내게 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개인비서처럼 일하기 시작했다. 폰 뷜로브가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슈타른베르크 호수가의 별장에 가서 1주일도 좋고 열흘도 좋다고 하면서 마냥 함께 지냈다. 어떤 날 폰 뷜로브가 바그너의 집을 찾아갔더니 코지마가 바그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폰 뷜로브는 코지마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지 않았으며 바그너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폰 뷜로브는 사람이 착한 것인지 바보인지 모르지만, 또는 바그너를 너무 존경해서 그런지 아무튼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코지마가 뮌헨으로 와서 바그너와 밀회를 시작한지도 아홉 달이 지났다. 1865년 4월 10일, 코지마는 딸을 낳았다. 이졸데라는 이름을 붙였다. 폰 뷜로브는 그 아기가 분명히 자기의 딸이 아니며 바그너의 딸인 것을 알면서도 이졸데를 자기의 딸로서 받아 들이고 코지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법한 아이로서 출생신고를 하였다. 바그너는 4월 24일 이졸데의 세례식에 버젓이 참석하였다. 그해 6월 10일에 폰 뷜로브는 뮌헨의 궁정오페라(Hofoper)에서 공연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하였다. 이게 무슨 아이들의 장난인지 아닌지는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딸 에바와 함께. 1867년. 빌라 트리브센에서

                 

바그너는 루드비히 2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바바리아의 궁정에서는 바그너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다. 특히 루드비히가 버릇처럼 그의 장관들에게 바그너의 정치적 아이디어를 빗대어 말하자 장관들은 '바그너, 칫! 자기가 무언데...라면서 은근히 싫어들 했다. 그러한 때에 바그너는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제 딴에는 어린 루드비히에게 자문을 한답시고 '내각을 축소하고 수상도 폐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각료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바그너, 자기가 무언데..'가 '바그너, 저런 못된 놈이 있나'로 되었다. 루드비히는 어쩔수 없이 바그너에게 바바리아를 떠나 있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바그너에 대한 재정지원은 중단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몇 달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1866년 3월에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코지마가 뒤따라서 제네바로 왔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루체른으로 함께 가서 호수가에 커다란 저택을 구해서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빌라 트리브센(Villa Triebschen)이다. 임대료는 루드비히가 준 돈으로 냈다. 바그너는 빌라 트리브센에 대한 임대계약을 맺자마자 폰 뷜로브와 그의 아이들을 여름에 루체른의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초청했다. 사람 좋은 폰 뷜로브는 이졸데를 포함한 아이들과 함께 바그너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돌아갔다. 하지만 그후 폰 뷜로브가 바젤에 일이 있어서 떠나자 코지마는 즉시 루체른의 빌라 트리브센으로 달려왔다.

 

루체른 호반의 빌라 트리브센. 현재 바그너 기념관이다.

                           

이때 쯤해서 폰 뷜로브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모른채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자기 아내와 바그너와의 관계를 묵과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폰 뷜로브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1865년 1월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진전될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코지마와의 관계가 스캔들로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루드비히을 속여서 1866년 6월에 성명서를 내도록 했다. 궁정지휘자인 폰 뷜로브는 신성한 결혼생활을 유지되도록 더욱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라는 먼 미래에 나올 영화의 제목과 같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67년 2월, 코지마는 빌라 트리브센에서 두번째 딸을 낳았다. 에바였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폰 뷜로브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였다. 뮌헨의 궁정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폰 뷜로브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초연을 준비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폰 뷜로브가 지휘한 '뉘른베르크...'의 초연은 1868년 6월 21일에 있었으며 대성공이었다.

 

1868년 10월에 코지마는 폰 뷜로브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연히 폰 뷜로브는 동의하지 않았다. 사람 착한 폰 뷜로브는 집안 식구들에게 코지마가 바그너와 함께 있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운 것을 베르사이유에 살고 있는 이복언니의 집에 가서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듬해인 1869년 6월에 코지마는 바그너와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세번째 아이를 출산했다. 아들이었다.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후 코지마는 폰 뷜로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마지막으로 이해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폰 뷜로브도 어찌할수 없어서 코지마의 이혼요청을 받아 들일수 밖에 없었다. 이혼이 법적으로 성립된 것은1870년 7월 18일이었다. 이렇듯 지연된 것은 베를린 법원에서의 수속에 시간이 걸려서였다. 폰 뷜로브는 코지마와의 이혼이 성립되자 의도적으로 바그너와 코지마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다. 폰 뷜로브는 그후로 다시는 바그너와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코지마를 다시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만난 것은 이혼한 후로부터 11년이 지난 때였다. 그건 그렇고, 바그너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 루첸른의 어떤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코지마는 일기에서 그날의 일을 'R 이라는 이름을 간직하는 것이 보람된 일이 되기를'라고 적었다. R은 Richard를 뜻하는 것이었다. 코지마의 아버지인 리스트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 신문을 보고서 처음 알았다.

 

결혼 후의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와 코지마가 결혼식을 올린 그 해는 두 사람에게 너무나 감격스러운 시기였다. 코지마의 생일은 12월 24일이지만 통상 12월 25일에 생일축하를 해왔다. 1870년의 12월 24일을 위해 바그너는 특별한 곡을 작곡했다. 오늘날 Siegfried Idyll(지그프리트 전원곡)이라고 알려진 곡이다. 바그너는 아침 일찍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빌라 트리브센의 계단와 홀에 배치하고 코지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생일축하 음악을 연주토록 했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코지마는 오프닝의 멜로디를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연주가 끝나자 바그너는 코지마의 손에 그가 새로 작곡한 이 Symphonic Birthday Greeting 의 스코어를 쥐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