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 2
바이로이트를 위한 여생
바이로이트극장
바그너는 코지마와 결혼까지 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비추지 않았으며 더구나 루드비히왕에게 부탁해서 코지마의 남편인 폰 뷜로브의 가정생활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식의 성명서를 내도록 했다. 나중에 바그너와 코지마의 결혼 소식을 들은 루드비히는 내심 배신당했다는 생각으로 여간 섭섭해 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그너와 루드비히와의 사이는 대단히 손상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두 사람의 관계를 차갑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링 사이클의 공연에 대한 의견차이였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 중에서 우선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를 완성하였다. 루드비히는 완성된 두 편의 작품이라도 공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링 사이클이 모두 완성되면 그가 선택하는 장소에서 한꺼번에 공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바그너의 의견보다는 루드비히의 주장이 더 효력이 있었다. 결국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1869년 9월 22일과 이듬해인 1870년 6월 26일에 프란츠 뷜너(Franz Wüllner)의 지휘로 뮌헨국립극장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바그너로서는 굴욕적이었다. 바그너는 이 참에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기 자신의 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예술적 콘트롤을 받을 극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가 초연된 뮌헨국립극장
어디다 세우느냐가 우선 문제였다. 코지마가 바이로이트를 제시했다. 백과사전을 보고 바이로이트라는 지명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바그너는 1835년에 바이로이트를 잠깐 방문했던 일이 있었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가 지역적으로 독일의 중심부분에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바이로이트는 라이프치히와 뮌헨의 중간 지점에 있다. 실제로 지도를 펴놓고 보면 베를린-라이프치히-바이로이트-뮌헨이 거의 일직선 상에 놓여 있는 것을 알수 있다. 바그너는 또한 바이로이트의 조용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꼈다. 바이로이트는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지 않는 도시였다. 바그너는 코지마와 함께 1871년 4월에 현장조사를 위해 바이로이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즉시 그곳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와함께 바이로이트가 장래 두 사람의 영원한 고향이 될 것으로 계획했다. 말하자면 죽어서 묻힐 장소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서 2년 후인 1873년에 오페라 축제를 열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때 링 사이클 전편을 공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로이트시는 바이로이트 오페라축제를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바이로이트의 발전과 명예를 위해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당국이 보유하고 있는 땅을 극장부지로 기꺼이 제공하였다. 바이로이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그뤼네아우(푸른언덕)이라는 땅이었다.
푸른 언덕 위의 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
루드비히는 새로운 극장 건설을 위한 재정지원을 거절했다. 착공이 늦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와 함께 1873년으로 발표되었던 개관도 어쩔수 없이 지연되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예정일인 1873년 3월까지는 총건설비의 3분의 1정도 밖에 모금되지 않았다. 건설계획을 포기할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그너는 루드비히에게 다시 간청을 하였다. 루드비히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던지 자금을 대주었다. 전체 건설 계획에는 바그너가 가족들과 함께 살 저택인 빌라 발프리트(Villa Wanfried)의 건설도 포함되어 있다. 빌라 반프리트는 1874년 초에 완성되어 그해 4월 18일에 코지마와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극장은 1875년에 완공되었다. 페스티발은 아무래도 준비과정이 있어서 1876년으로 미루어졌다. 바그너는 극장건설에 따른 그 동안의 노고를 코지마에게 다음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돌 하나하나는 나와 당신의 피로서 붉게 물들어 있다.'
빌라 반프리트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건설 기간 중에 아버지인 리스트에게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개종하겠다고 고백하였다. 그때 리스트는 이미 로마 가톨릭의 어떤 작은 수도회에 속한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코지마가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것은 바그너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유지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코지마는 1872년 10월 31일 개신교로의 전례를 받았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이같은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일기에 '세상의 어떤 권세가 이보다 더 위대할수 있는가? 과연 종교라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썼다. 1876년 3월에 바그너와 코지마는 베를린에 있었다. 이들은 파리에서 마리 다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지마의 생모였다. 코지마는 파리에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딸 다니엘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마리 다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다만,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여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오디토리움
[첫 페스티발]
1876년 여름이 다가왔다. 바이로이트에서는 예정대로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개관을 위한 준비와 링 사이클의 역사적인 초연이 준비되고 있었다. 최종 드레스 리허설은 8월 6일과 9일 사이에 진행되었다. 루드비히는 변장을 하고 암행으로 바이로이트에 와서 드레스 리허설을 보고 갔다. 드디어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1876년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되었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의 전편이 공연되었다. 루드비히는 마지막 날의 공연에 공식적으로 참석했다. 독일의 빌헬름 1세 황제, 브라질의 돔 페드로 1세, 그리고 유럽 왕실의 왕자들과 대공들도 여러명 참석했다. 그리고 물론 코지마의 아버지이며 바그너의 장인인 프란츠 리스트도 참석했다. 음악가로서는 안톤 브루크너, 피터 차이코브스키, 카미유 생생 등이 자리를 빛내 주었다. 그때 쯤해서 바그너는 또 다른 여인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이며 역사소설가인 주디스 고티에(Judith Gautier: 1845-1917)가 대상자였다. 코지마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코지마는 페스티발 준비 때문에 다른 일에 정신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바그너와 주디스 고티에의 로맨스는 몇달 가다가 주디스 고티에가 소설가인 피에르 로티와 결혼하는 바람에 유야무야가 되었다.
바그너가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시기에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던 프랑스의 시인인 주디스 고티에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비공식적으로는 8월 13일에 시작하여 8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8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링 사이클 전편이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뿐이다. 페스티벌 기간 중에 링 사이클은 세번이나 전편이 공연되었다. 한스 리히터(Hans Richter)가 바톤을 잡았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세간의 평은 상반된 것이었다. 노르웨이의 작곡가인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는 '천상의 작품'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링 사이클의 음악을 '정신나간 사람의 꿈'이라고 불렀다. 바그너 자신을 어땠을까? 바그너는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가 단 하나의 박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면서 불만을 털어 놓았다. 이어 알버트 니만과 프란츠 베츠는 '극장의 기생출일 뿐'이라면서 비난했다. 몇 달 후에 적은 코지마의 기록에 의하면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초연 이후 '네버 어게인, 네버 어게인'을 외쳤다고 한다.
'라인의 황금'의 무대
[파르지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끝나고 손님들도 모두 돌아가자 바그너와 코지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베니스로 떠났다. 바그너 식구들은 베니스에서 12월까지 머물렀다. 페스티벌은 그나마 무사히 끝났지만 빚은 산더미처럼 남았다. 게다가 바그너는 페스티벌의 공연이 예술적으로 대단히 불만족스러워서 다시는 페스티발이고 뭐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바그너는 전체 바이로이트 프로젝트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때 마침 런던에서 콘서트 시리즈를 지휘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아이들을 바이로이트에 남겨 둔채 런던으로 갔다. 두 사람은 거의 두달 동안 런던에 있으면서 그래도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더구나 코지마는 소설가인 조지 엘리오트, 시인인 로버트 브라우닝, 화가인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 등을 만나 정말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드 번 존스는 코지마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하며 여러번 스케치 하였으나 완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1877년 5월에 윈저성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영광을 가지기도 했다.
영국 순회연주회는 별로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바그너로 하여금 작곡을 계속해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것이었다. 바이로이트에 돌아온 바그너는 그로부터 그의 필생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Parsifal)의 작곡에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르지팔'은 그로부터 5년 후에나 완성되었다. '파르지팔'에서 코지마의 영향을 대단히 컸다. 하나부터 열까지 바그너의 파르지팔 작곡을 보살펴주고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중에 바그너는 '만일 코지마가 함께 없었다면 파르지팔의 작곡을 더 계속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런 와중에 페스티벌의 채권자들은 바그너에게 어서 빚을 갚으로가 계속 압박하였다. 코지마는 하는수 없이 루드비히에게 개인적으로 간청을 하여 다행하게도 루드비히로부터 급한 불은 끌수 있는 자금을 지원 받았다. 1878년 12월 25일, 코지마의 생일 축하 때에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전주곡을 완성하고 오케스트라를 고용하여 빌라 반프리트에서 연주토록 했다. 코지마의 감격을 이루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1880년 말에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1882년에 열겠다고 공식발표했다. 첫 페스티벌 때의 빚을 어느정도 갚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코지마의 요청에 의해 두번째 페스티벌을 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바그너는 제2회 페스티벌에서는 그의 신작들만 발표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파르지팔'은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를 설득하여 '파르지팔'을 반드시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되어야 한다는 승낙을 받았다. 반면에 루드비히는 뮌헨 궁정음악감독(카펠마이스터)인 헤르만 레비(Hermann Levi: 1839-1900)가 '파르지팔'의 지휘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헤르만 레비가 유태교라는 것을 이유로 루드비히의 주장을 거절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크리스챤 오페라이므로 유태인이 지휘할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882년 7월 26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의 전편 초연은 헤르만 레비가 지휘를 했다. 헤르만 레비는 유태교 랍비의 아들로서 독일의 기씽에서 태어났다.
'파르지팔'의 한 장면
코지마와 바그너는 열렬한 반유태주의자였다. 코지마는 아마도 소녀시절부터 아버지인 리스트로부터, 아버지의 두번째 연인인 카롤리네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카롤리네가 주선해준 가정교사인 마담 파테르시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첫 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로부터 '반유태주의가 무엇보다 우선되는 계율'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코지마의 반유태주의는 바그너를 알기 전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바그너가 코지마에게 반유태주의 사상을 더욱 심어주었다고 본다. 코지마의 5천 페이지에 달하는 일기를 보면 평균적으로 4페이지마다 한번씩 유태인을 경멸하거나 조소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코지마가 얼마나 반유태주의자였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물론 남편인 바그너의 반유태주의 사상은 천하가 알아주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반유태주의는 기본적으로 그의 혁명적인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바그너는 프랑스의 정치인이며 철학자인 피에르 조셉 프루덩(Pierre-Joseph Proudhun: 1809-196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루덩은 유태인을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런 유태인을 저 멀리 아시아로 보내던지 또는 전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큰 유태인을 증오하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프루덩의 영향을 받은 바그너는 유태인을 '소유와 독점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간주했다. 코지마에게는 바그너에게서와 같은 기본이 없었다. 바그너는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견해를 수정할 능력을 갖고 있지만 코지마의 반유태인 성향은 어찌보면 본능적인 것이었다. 루드비히가 헤르만 레비를 '파르지팔' 초연의 지휘자로 강력 천거하자 바그너는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였다가도 현실을 생각하여 루드비히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코지마는 두고두고 레비의 등장을 못마땅해 했다.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한 헤르만 레비. 그는 유태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랍비였다.
'파르지팔'은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무려 16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7월 22일 첫 공연을 가진 이래 8월 29일에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바그너 자신이 지휘했다. 나중에 코지마는 바그너의 지휘로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의 소리가 그렇게 달라 질수 없었다고 코멘트했다. 아무튼 바그너와 코지마는 제2회 페스티발의 결과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했다. 더구나 수입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비판적인 소리를 한 사람도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니체는 한때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였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거친 비판자가 되었다. 니체는 '파르지팔'을 혐오스러운 작품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코지마가 바그너를 그렇게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비독일인인 코지마는 더 이상 독일 문화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얘기할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 코지마가 헝가리 계통인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바그너와 함께 런던을 방문했을 때의 코지마
[베니스와 미망인]
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막을 내리자 바그너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베니스로 갔다. 이번에는 일행들이 많았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고 하인들도 갔다. 손님들도 자주 올것이므로 팔라쪼 벤드라민 칼레르기(Palazzo Vendramin Calergi)에 있는 넓은 아파트를 빌렸다.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코지마의 걱정은 바그너의 건강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심장경련이 자주 일어났다. 코지마가 11월 16일에 쓴 일기를 보면 '오늘은 경련이 없었다'고 적었다. 경련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인 2월에 코지마가 쓴 글을 보면 바그너는 푸케(Fouque)의 소설인 운디네(Undine)를 읽었으며 그 다음에는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라인 처녀들의 탄식을 피아노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그너의 건강이 어느정도 호전되었는가 싶었지만 뜻하지 아니하게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에 대한 문제가 터졌다. 캐리 프링글은 '파르지팔'에 출연했던 예쁘장하게 생긴 영국의 소프라노로서 바그너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말이 코지마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2월 13일 아침에 바그너와 코지마는 캐리 프링글 문제로 대단한 말다툼을 했다. 점심 때 쯤해서 바그너는 결정적인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 알려진바에 의하면 바그너와 캐리 프링글 사이에 섬싱이 있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며 또한 그 일로 인하여 베니스에서 바그너와 코지마가 대판 싸워서 결국 그날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는 말이라고 한다.
베니스의 팔라쪼 벤드라민 칼레르기 아파트. 이 건물의 방에서 1883년 2월 13일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카지노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시신 옆에 앉아 24시간을 보냈다.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쉬지도 않았다. 이튿날과 그 이튿날의 이틀에 걸쳐서 바그너의 시신에 대한 방무처리 작업이 진행되었다. 코지마는 그 과정도 거의 빠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까보아 걱정했지만 코지마는 개의치 않았다. 코지마는 딸 들에게 가위를 가져와서 자기의 머리칼을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코지마는 자기의 머리칼을 작은 쿠션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서 바그너의 가슴에 얹어 놓았다. 2월 16일에 바이로이트로의 운구가 시작되었다. 이틀 후인 2월 18일에 바그너의 시신은 반프리트에 도착했다. 간단한 종교의식을 치룬후 바그너의 시신은 반프리트의 뜰에 묻혔다. 코지마는 하관 할 때에 집 안에 있고 나와 보지를 않았다. 코지마는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모두 돌아가자 그때서야 나와서 바그너의 묘지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중에 아들 지그프리트(피디)가 가서 겨우 모셔왔다. 그후로 코지마는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면 쪽지에 적어서 보내고 쪽지에 대답을 받았다. 그러기를 몇 달이나 했다. 바그너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코지마는 수많은 조전을 받았다. 그 중에는 한스 폰 뷜로브의 것도 있었다. '수녀님,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Soeur il faut vivre)라고 적은 것이었다. 폰 뷜로브가 코지마를 수녀라고 짐짓 지칭한 것은 리스트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반열에 들어간 것과 연관하여 말한 것이라고 본다.
빌라 반프리트(현재는 바그너 기념관)와 바그너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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