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코지마

정준극 2013. 2. 13. 23:27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코지마

20여년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주관

 

1870년대 말의 바이로이트 극장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유언이나 지시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다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누가 맡아서 꾸려 나가야 할지 정말 걱정이다. 적당한 사람이 없다.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을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은 분명했다. 바그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건 걱정이 아니라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코지마는 바그너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슬픔에 외부사람들과 어떠한 연락도 끊은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저 계속 혼자서만 지내고 있었다. 코지마가 그나마 아주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은 자기의 아이들, 그리고 친구이며 어드바이저인 아돌프 폰 그로쓰(Adolf von Gross)뿐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의 페스티벌은 코지마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파르지팔'이 12회 공연되었다. 에밀 스카리아(Emil Scaria)가 주관했다.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를 맡은 베이스였다. 에밀 스카리아는 '파르지팔'에 출연하면서 예술감독의 일을 함께 맡아 수행했다. 1883년의 제3회 페스티벌의 캐스트는 1882년과 거의 같았다. 그리고 헤르만 레비가 계속 지휘를 했다.

 

1883년의 페스티벌이 끝난 후, 코지마는 어떤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장문의 편지 한장을 받았다. '파르지팔'의 공연이 바그너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연출되지 못했다는 점을 줄줄이 지적하고 코지마에게 상황이 이렇게 되어 가는데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으니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힐책하는 내용이었다. 과연! 코지마는 그 편지를 읽고 심기일전하였다. 그건 그렇고 코지마는 지난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그냥 누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페스티벌의 합창지휘자인 율리우스 크니제(Julius Kniese)가 전부터 말해왔던 사항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를 음악감독을 맡도록 하고 전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를 수석 지휘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스트와 폰 뷜로브가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그건 생각으로만 그쳤다. 결국 코지마는 외부 사람들에게 페스티벌의 총책임을 맡긴다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바그너의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코지마는 우선 지적재산을 포함한 바그너가 남긴 일체의 재산을 자기와 아들 지그프리트가 바그너의 유일한 법적 상속인임을 확실히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페스티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막을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시간은 살과 같이 지나서 1885년이 되었다. 드디어 코지마는 1886년의 페스티벌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바이로이트의 총감독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코지마는 1907년까지 22년 동안 바이로이트의 총감독으로서 활동했다. 코지마는 이 기간동안 13회의 페스티벌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 하는 바그너 작품만의 레퍼토리를 정리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공연되는 레퍼토리를 규정한 것이다. 코지마는 고대 로마시대의 3두정치처럼 레비, 리히터, 펠릭스 모틀의 세 사람을 공동 음악감독으로 삼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1894년 레비가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비가 떠난 후에는 리히터와 모틀이 코지마가 총감독으로 있는 동안 함께 일했다. 한스 폰 뷜로브는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코지마의 감독과 관리 아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놀랍게도 흑자운영을 이루었다. 매년 개최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입장료 수입 등으로 바그너의 유가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코지마는 페스티발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창의적으로 제작코자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인인 바그너가 원했고 지시했던 사항들을 충실히 따랐다. 코지마는 '우리가 무얼 새로 창조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벽을 기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코지마가 바그너의 복사품처럼 행동하자 비판들도 따랐다. 발전적인 모습이 없다는 비판이었다. 버나드 쇼같은 사람은 코지마를 '바그너를 회상하는 자들의 우두머리'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버나드 쇼는 '바이로이트 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참을수 없을 만큼 구시대적인 전통을 간직한 모임'이라고 말하고 절반은 현학적이며 절반은 역사정치적인 자세와 제스추어로 물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주인공들의 노래는 어느때는 참을만 하지만 어느때는 지루하다고 말했다. 음악을 대본과 딕션과 주인공의 이미지 표현에 종속시키는 것은 바이로이트 스타일의 특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만, 코지마는 명확한 발성법 원칙을 마치 맹목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같은 스타일로 바꾸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거친 연설조의 스타일이 생겨났다. 나중에 음악학자들은 이같은 스타일을 '바이로이트 짖어대기'(Bayreuth bark)라고 불렀다.

 

코지마의 아버지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는 1886년에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동안 '파르지팔'은 단골메뉴로서 매년 바이로이트의 무대에 올려졌다. 예외가 있었다면 1896년이었다. 그 해에는 '링 사이클'에만 주력하였기 때문이었다. 코지마가 1886년에 페스티발을 주관할 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으로 캐논에 포함하였다. 코지마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는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것을 보러 일부러 왔다. 리스트는 건강이 몹씨 악화되어 있었다. 코지마는 리스트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페스티벌에만 신경을 써야 했다. 리스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을 본 후 쓰러졌다. 그리고 며칠 후인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장례식을 모두 주관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에서 리스트를 추모하기 위한 어떠한 콘서트의 개최도 거절했다.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1888년에, '탄호이저'는 1891년에 바이로이트의 캐넌(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로엔그린'은 1894년에, '방랑하는 화란인'은 1901년에 캐논에 포함되었다.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는 1894년에 사임하였다. 이로써 반유태주의에 대한 신경전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는 1896년의 페스티발에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링 사이클 중에서 한 편을 지휘하였다. 지그프리트는 코지마가 총감독으로 있는 동안에 바이로이트의 고정 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1880년의 바그너와 아들 지그프리트.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지그프리트는 1896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더한 반유태주의였지만 바이로이트를 위해서 그런 편견을 잠시 선반에 얹어 두었다. 유태인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를 페스티발을 위해 상당 기간 활용했던 것도 그런 조치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코지마는 레비의 음악적 재능을 크게 존경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레비를 계속 낮게 보았고 자기의 아이들이 레비를 흉내내고 조롱하는 것을 그냥 두었다. 코지마는 친구에게 '아리안과 셈족(유태인)의 혈통은 아무것도 연결된 것이 없다'고 말하며 기본적으로 자기의 반유태주의적 생각이 변함이 없음을 밝혔다고 한다. 코지마는 그러한 신조아래 구스타브 말러를 바이로이트에 초청하여 지휘를 맡기지는 않았다. 말러는 유태계지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바 있다. 다만, 코지마는 말러에게 예술적인 사항에 대하여 여러가지 자문을 구하기는 했다.

 

코지마는 '파르지팔'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고 컸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하도록 정했다. 코지마는 그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코지마는 '파르지팔'에 대한 바이로이트의 전권을 보호하기 위해 루드비히 왕의 인정을 받았다. 1886년에 루드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바이로이트의 그런 권리가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루드비히의 후임인 오토 왕은 바이로이트만이 '파르지팔'을 공연할수 있다는 관례를 인정할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코지마와 친구이며 자문관인 아돌프 폰 그로쓰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오토의 그런 주장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독일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작가의 사후 30년 동안만 저작권을 보호받을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사후 30년이 되는 1913년에 저작권이 종료된다는 것이다. 바바리아 법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독일의 법에 예속이 되어야 했다. 코지마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미 1901년에 '파르지팔'의 저작권을 50년으로 연장해 놓고자 노력했다. 코지마는 제국의회(Reichstag)의 의원들에게 집요하리만큼 로비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빌헬름 2세 황제로부터 지지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코지마의 이런 노력은 독일의 저작권법을 고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1903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미국과 독일간의 저작권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없음을 이용하여 '파르지팔'을 그해 말에 무대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코지마는 무척 분노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연하겠다는 것을 제재할 수 없었다. 1903년 12월 24일에 뉴욕에서 '파르지팔'이 공연되었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둔 공연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은 '파르지팔'은 연속 11회나 공연하였다. 코지마는 이것이 '성폭행'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코지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메트로폴리탄을 증오하였다.

 

코지마는 잘 아는대로 첫 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바그너와의 사이에서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폰 뷜로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의 이름은 블란디나와 다니엘라이다.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은 이졸데와 에바이며 아들은 지그프리트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코지마의 딸 중에서 셋이 결혼을 했다. 블란디나는 비아지오 그라비나 백작과 결혼했다. 1882년 첫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끝나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바그너도 참석했다. 둘째 딸인 다니엘라는 1886년 7월 3일에 역사학자인 헨리 토드(Henry Thode)와 결혼했다.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이었다. 그리고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자녀인 이졸데는 젊은 지휘자인 프란츠 바이더(Franz Beider)와 1900년 12월 20일에 결혼했다. 막내 딸인 에바에게는 여러 혼처가 있었다. 하지만 에바는 홀몸이 된 어머니 코지마와 함께 지내겠다고 하며 청혼들을 모두 거절했다. 에바는 코지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개인비서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지냈다.

 

1906년의 페스티벌을 주관하고 난 후 고단하여서 쉬고 있던 코지마는 랑겐부르크에 있는 친구인 호엔로에(Hohenlohe) 공자를 방문하고 있던 12월 8일에 일종의 심장마비 증세로 고통을 겪었다. 병명은 Adams-Strokes seizure라고 했다. 그러기를 몇 달을 보냈다. 이듬해인 1907년 5월에 의사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코지마에게 더 이상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일을 맡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페스티벌의 책임은 아들인 지그프리트에게 이관되었다. 지그프리트를 바이로이트의 후임자로 임명하는데에는 가족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졸데의 남편인 지휘자 바이더는 지휘자로서 지그프리트의 탁월한 능력을 감안할 때에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마침 당시에 이졸데와 바이더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바그너의 유일한 손자였다. 이졸데와 바이더는 자기들의 아들이 지그프리트의 뒤를 이어 바그너 왕조를 이어나갈 사람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일단은 지그프리트를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그프리트는 40세가 가까웠는데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코지마와 지그프리트는 이졸데와 바이더의 주장을 일축했다. 만일 지그프리트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가 바이로이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후로 바이더는 바이로이트에서 다시는 지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이더와 코지마의 관계는 아주 나빠져서 나중에는 마치 원수처럼 지냈다.

 

1881년 빌라 반프리트에서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으로부터 블란디네, 지그프리트의 선생인 하인리히 폰 슈타인, 코지마, 리하르트 바그너, 가족 친구인 파울 폰 주코브스키, 아랫줄 왼쪽으로부터 이졸데, 다니엘라, 에바, 지그프리트.

 

 

[은퇴, 쇠약, 죽음]

코지마는 빌라 반프리트의 뒷방에서 지냈다. 손님들도 자주 찾아오는 앞쪽의 거실은 복잡하므로 그곳을 피해서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유품들과 가족들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지냈다. 페스티발의 주관을 책임 맡은 지그프리트는 처음에는 코지마를 찾아와 협의를 하였으나 코지마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코지마의 도움 없이 혼자서 주관해 나갔다. 지그프리트는 코지마와 바그너가 만들어 놓았던 몇가지 제작상의 전통을 바꾸었다. 하지만 바그너가 처음에 지시했던 사항들은 절대로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존속토록 하였다. 예를 들면 '파르지팔'의 무대장치도 비록 낡아졌지만 최초의 무대장치를 그대로 사용했다. 지그프리트가 변경한 것은 바그너의 오리지널 제작 지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다른 식구들도 한결 같이 '주인의 눈길이 머물고 있는 그대로'를 주장하였다.

 

1908년 12월에 막내 딸 에바가 드디어 결혼했다. 에바는 41세였다. 상대방은 영국 출신의 사학자인 휴스턴 스튜어트 챔벌레인이었다. 챔벌레인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원칙에 기본을 둔 독일국수주의에 대하여 광신적이라고 할수 있는 신조를 채택한 인물이었다. 챔벌레인은 코지마와 1888년부터 알고 지냈다. 그러나 바그너와의 관련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그때 그는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실상 챔벌레인은 처음에는 코지마의 큰 딸인 블란디나에게 청혼을 하였다가 안되니까 다음에는 이졸데에게 청혼을 하였고 그것도 실현이 안되지 에바에게 끈질기게 청혼하여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 챔벌레인에 대하여 코지마는 감정적으로 상당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챔벌레인의 신조에 대하여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코지마는 그를 마치 아들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하게 생각하였다. 에바와 결혼한 챔벌레인은 바그너 서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특히 이졸데와 그의 남편인 바이더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도권을 잡고 나아가 바그너의 재산을 자기들이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이를 저지한 인물이 바로 챔벌레인이었다. 1913년에 이졸데는 지그프리트와 함께 바그너 재산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패소였다. 그후 이졸데는 19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코지마와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 않고 지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1915년에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가 드디어 결혼하였다. 지그프리트가 45세 때였다. 신부는 18세의 비니프레드 월렴스(Winifred Williams)였다. 바그너의 친구도 되고 리스트의 친구도 되는 칼 클린드워스(Karl Klindworth)의 수양 딸이었다. 1917년 1월 5일에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드의 첫 아들인 빌란트가 태어나자 코지마는 바그너가 사용했던 피아노 앞에 앉아 그 옛날 바그너가 자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지그프리트 이딜(Siegfried Idyll)을 연주하였다.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드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막을 올리지 못했다. 페스티벌은 1차 대전과 그 이후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혼돈으로 1924년까지 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국수주의적인 사상이 솟구쳐 오르자 페스티벌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일어났다. 바그너의 열렬한 찬미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1923년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바그너의 가족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때 코지마는 사정이 있어서 히틀러를 만나지 못했다. 아무튼 그후로 히틀러는 바이로이트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에바의 남편인 챔벌레인과 지그프리트의 부인인 미니프레드는 열렬 나치당원이 되었다. 1924년에 재개된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공공연한 나치 주요 간부들의 대집회와 마찬가지였다. 당시 86세였던 코지마는 참으로 오랜만에 '파르지팔'의 드레스 리허설에 참석했고 이어 7월 23일의 오프닝 공연에도 1막까지 참관했다. 이때 타이틀 롤인 파르지팔은 테너 로리츠 멜키오르가 맡았었다.

 

코지마는 1927년, 90세의 생일을 치루고 나서 건강이 눈에 보이도록 악화되었다. 바이로이트 시는 코지마의 90세 생일을 기념하여서 시내에 있는 거리 중의 하나를 코지마거리라고 명명했다. 가족들은 그런 사실을 일부러 코지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연히 흥분하면 건강에 더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후에 코지마는 침대에만 누워 있었고 눈은 멀어서 아무것도 볼수 없었으며 기억력도 오락가락해졌다. 코지마는 1930년 4월 1일, 향년 92세로 숨을 거두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47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의 시신은 반프리드에서 장례식을 치룬후 코부르크(Coburg)로 운구되어 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1977년, 코지마가 세상을 떠난지 47년 후에, 코지마의 유분은 코부르크에서 반프리드로 옮겨져 반프리드 정원에 있는 바그너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올리버 힐름스가 쓴 '코지마 바그너..바이로이트의 레이디'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