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 재조명 - 1

정준극 2013. 2. 15. 08:07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 재조명 - 1

 

2013년은 바그너 탄생 200 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그것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필자의 생전에 바그너의 탄생 300 주년은 고사하고 250 주년도 기념하지 못할 입장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회에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을 부족하나마 재조명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바이다. 필자는 예전에 바그너에 대하여 '원 별 이상한 친구도 다 있네'라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을 자주 듣다보니 '야, 이건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도대체 바그너라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음악을 만들었을까라는 호기심 내지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바그너에 관한 자료 및 서적은 찾는대로 읽어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바그너의 음악에 대하여 더욱 난해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게 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본 블로그에서 바그너에 대하여는 독일의 작곡가 편에 이미 간단히 소개하여서 내용이 중복이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코자 하는 바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1850년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우리가 바그너라고 간단히 말하는 사람의 풀 네임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길게 부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보통은 리하르트 바그너라고 부른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서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난 독일의 작곡가이다. 바그너가 태어난 집은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바그너의 묘소는 바이로이트의 빌라 반프리트의 정원에 있다. 바그너는 작곡가이지만 극장감독, 논객 또는 평론가, 지휘자(주로 그의 오페라)라는 호칭도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 특히 후기의 작품을 오페라라고 부르지 않고 '악극'(Music drama)이라고 불렀다. 바그너의 작품, 특히 후기의 작품들은 복잡한 기조(基調: Texture), 풍부한 하모니 및 오케스트레이션, 라이트모티프(Leitmotif)의 정교한 사용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라이트모티프라는 것은 각각의 인물, 장소, 아이디어 또는 줄거리의 핵심을 비유하여 표현한 음악 소절을 말한다. 바그너가 시도한 몇가지 진보적인 음악적 기법, 예를 들면 극도의 반음계주의(chromaticism), 또는 음조 센터(tonal centers)의 급격한 이동 등은 고전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특히 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현대음악의 시작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

                     

바그너는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는 달리 대본을 직접 썼다. 그러므로 작품에서 음악과 스토리가 혼연일체를 이루기가 쉽다. 바그너는 처음에 베버나 마이에르베르와 같은 로맨틱 음악을 기조로하여 작곡을 했다. 그러다가 오페라적인 개념을 이른바 게잠트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로 전환하였다. 총체예술 또는 종합예술작품이라고 번역할수 있는 게잠트쿤스트베르크라는 것은 한가지만의 예술 방식으로는 완성된 예술을 만들어 내기가 어려우므로 여러 장르의 예술을 연합해야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바그너는 시와 시각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 그리고 드라마틱한 것을 종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적으로 음악이 드라마를 보충해 주도록 했다. 바그너의 이같은 아이디어는 링 사이클의 초기 작품들에서 실현되었다. 링 사이클의 첫번째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에서 그같은 아이디어를 실현하였다. 바그너는 자기의 뮤직 드라마를 무대에 올린 별도의 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바이로이트에 새로 극장을 지었다. 유명한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Beyreuth Festspielhaus)이다. 이 극장은 종래의 고전적인 오페라 극장들과는 사뭇 다른 여러 특징으로 설계되었으며 결과, 음향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에서는 '파르지팔'과 '링 사이클'(니벨룽의 반지)이 세계 초연되었으며 1882년 이래 현재까지 해마다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를 통해 바그너의 주요 작품들이 계속 공연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음악과 드라마의 상관관계에 대한 생각이 말년에 변화를 보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전통적인 형태를 다시 도입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바그너의 생애는 글자그대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정치에 관여하여 망명생활을 해야했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여인들과 거칠고 요란한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한동안은 빚에 쪼들려 채권자들로부터 도망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가 표방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아이디어는 20세기를 통해 여러 형태의 예술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비단 작곡뿐만이 아니라 철학, 문학, 시각예술, 극장사업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바그너는 뛰어난 논객이기도 했다. 음악, 드라마, 정치에 대하여 쓴 그의 글은 수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바그너의 글에는 대체로 반유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말하여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운 내용들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어머니 요한나 로지네 바그너

                        

[리하르트 가이어로 지낸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의 유태인 구역에 있는 브륄(Brühl) 거리의 3번지에서 태어났다. '붉고 하얀 사자의 집'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집이었다. 현재 바그너가 태어난 집은 철거되었고 대신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현재 브륄로 평행으로 연결된 거리의 이름은 리하르트 바그너 슈트라쎄이다. 바그너의 아버지인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서기였다. 어머니는 요한나 로지네로서 빵집 딸이었다. 리하르트는 아홉번째 자녀였다. 리하르트의 아버지는 리하르트가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의 어머니는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 도리가 없어서 리하르트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극작가이며 배우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 1778-1821)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그 집에 현재 어디인지는 모른다. 리하르트의 어머니는 리하르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8월에 가이어와 결혼했다고 한다. 다만, 라이프치히의 어느 교회에도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증빙서류가 없어서 과연 결혼식을 올렸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곧이어 리하르트는 어머니를 따라 드레스덴에 있는 가이어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리하르트는 14세가 될 때까지 빌헬름 리하르트 가이어라는 이름으로 학교도 들어가고 교회도 다녔다. 리하르트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이어가 진짜 아버지인둘 알았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 브륄거리 3번지의 바그너 생가. 1885년. 현재는 철거되어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가이어는 배우 겸 극작가였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리하르트의 극장사랑은 아마도 계부인 가이어로부터 물려 받은 것인지 모른다. 리하르트는 가이어가 출연하는 연극에 자주 구경을 갔었다. 어느때는 어린 리하르트가 가이어가 출연하는 연극에서 천사역할을 맡은 일도 있었다. 소년 리하르트는 오페라도 볼 기회가 있었다. 리하르트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를 보고 이 오페라의 고틱 분위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고틱 스타일이란 것은 중세의 괴기하고 음산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말한다. 리하르트는 포센도르프(Possendorf)에 있는 베첼(Wetzel) 목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라틴어 선생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바그너는 피아노를 악보를 보고 제대로 연주할 줄은 몰랐지만 극장에서 오페라의 서곡을 듣고 그대로 연주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계부인 가이어는 바그너가 여덟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가이어의 동생이 학비를 대주어서 드레스덴에 있는 크로이츠(십자가)중등학교에 나닐수 있었다. 소년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바그너가 처음으로 쓴 극본은 로이발트(Leubald)라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인 1826년에 쓴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괴테의 영향을 받은 극본이었다. 이 극본은 WWV 1(Wagner-Werke-Verzeichnes 1)로서 기록에 남아 있다. 바그너는 이 극본에 음악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음악공부를 하는 허락을 받았다. 위대한 작곡가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계부인 루드비히 가이어. 배우 겸 극작가였다.

                      

바그너와 가족들은 1827년, 바그너가 14세 때에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바그너는 이듬해부터 크리스티안 고틀리브 뮐러로부터 화성악 레슨을 받았다. 이듬해인 1828년 1월에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들었고 3월에는 교향곡 9번을 들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였다. 바그너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베토벤은 바그너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주제로 피아노로 편곡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모차르트의 '진혼곡'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그너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들과 그가 처음 시도했던 오케스트라 서곡들은 모두 이 시기에 시도된 것이었다. 바그너는 1829년, 그가 16세 때에 당대의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Wilhelmine Schröder-Devrient)의 연주를 보았다. 바그너는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의 무대에서의 노래를 듣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훗날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은 바그너가 오페라에서 음악과 드라마의 융합을 이루도록 한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독일의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1804-1860). 바그너에게 음악과 드라마의 융합이라는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바그너는 1831년에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했다. 바그너는 작손학생클럽의 멤버가 되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지휘자인 크리스티안 테오도르 봐인리히(Christian Theodor Weinlig: 1780-1842)로부터 작곡 레슨을 받았다. 봐인리히는 바그너의 음악적 재능이 너무나 뛰어난 것을 보고 감동하여 레슨비를 하나도 받지 않았다. 봐인리히는 제자인 바그너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B 플랫 장조를 출판되도록 도와주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스승인 봐인리히에게 헌정하였다. 바그너 작품번호 1번이었다. 봐인리히는 바그너에게 있어서 평생을 잊을수 없는 스승이었다. 바그너는 1년후에 교향곡 C 장조를 완성했다. 베토벤 스타일의 교향곡으로 1832년에 프라하에서 초연되었고 이어 1833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되었다. 작곡에 자신감을 가진 바그너는 첫 오페라의 작곡을 시작했다. '결혼'(Die Hochzeit)라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바그너의 생전에 공연된 일이 없다.

 

바그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음악선생인 크리스티안 테오도르 봐인리히

 

[첫 직장 뷔르츠부르크: 1833-1842]

1833년에 바그너는 뷔르츠부르크 극장의 합창지휘자로 취직이 되었다. 바그너의 형인 알베르트가 주선해 주었다. 바그너가 20세 때였다. 바그너는 그 해에 그의 첫 오페라인 '요정들'(Die Feen)을 완성했다. 베버의 스타일을 참고로 한 작품이었다. '요정들'은 그때 작곡되었지만 정작 공연된 것은 그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1883년 뮌헨에서였다.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나고 바이로이트에 묻힌 직후였다. 바그너는 잠시동안이지만 마그데부르크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을 맡은 일이 있다. 바그너는 이때 셰익스피어의 '법에는 법으로'(또는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에 기본을 둔 '사랑금지'(Das Liebesverbot)를 완성하였다. 이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공연되었으나 첫 공연을 마친후 두번째 공연은 막을 올리지 못했다. 공연을 맡은 오페라단이 너무나 많은 빚을 져서 해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마그데부르크에 온 바그너는 인기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민나'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를 알게 되어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사랑금지'가 재앙으로 끝나게 되자 바그너는 새로운 일꺼리를 찾아야 했다. 마침 민나가 쾨니히스버그로 가서 공연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무조건 민나를 쫓아서 쾨니히스버그로 갔다. 바그너를 측은하게 생각한 민나가 바그너를 쾨니히스버그 극장에서 일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바그너와 민나는 1836년 11월 24일 쾨니히스버그의 트라그하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민나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의 바그너의 여인들 편을 참고하기 바람.) 결혼한 이듬해인 1837년에 민나는 바그너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떠났다. 얼마후 민나는 바그너의 간청에 못이겨 돌아왔다. 이런 일은 향후 결혼생활 수십년 동안 몇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무튼 1837년에 바그너는 라트비아의 리가로 가게 되었다. 당시 리가는 제정러시아에 속해 있었다. 바그너는 리가의 어떤 오페라극장에서 음악감독의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민나의 여동생으로 성악가인 아멜리가 리가의 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1839년에 민나와 바그너는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진 빚 때문에 빚쟁이들의 추격을 받아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빚쟁이들을 피해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갔다가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요행히 국경을 넘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사나운 폭풍으로 인하여 노르웨이 해안에 정박할수 밖에 없었다. 바그너는 이 때의 경험에서 '방랑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änder)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방랑하는 화란인'의 이야기는 원래 하인리히 하이네가 스케치한 것으로  훗날 바그너는 하이네의 스케치를 작곡할 때에 바탕으로 삼았다. 바그너와 민나는 천신만고 끝에 일단 파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1842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이때의 생활은 참으로 빈곤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잡지에 기고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오페라를 편곡하면서 겨우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파리에 머물면서 그의 세번째 오페라인 '리엔치'(Rienzi)와 네번째 오페라인 '방랑하는 화란인'을 완성하였다.

 

[드레스덴과의 인연: 1842-1849]

바그너는 '리엔치'를 1840년에 완성했다. '리엔치'는 자코모 마이에르베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드레스덴 궁정극장에서 공연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842년에 바그너는 드레스덴으로 갔다. 리가-런던-파리에서의 오랜 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바그너는 그때의 감격을 "나는 생전 처음으로 라인 강을 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나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아닌 예술가인 나는 나의 조국인 독일에 영원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라고 적었다. '리엔치'는 그해 10월 20일에 드레스덴 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그후로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6년이나 살았다. 그리고 궁정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방랑하는 화란인'을 1843년 1월 2일에 무대에 올렸고 '탄호이저'를 1845년 10월 19일에 첫 공연하였다. 바그너는 드레스덴 예술가 서클과도 교분을 가지며 지냈다. 특히 작곡가인 페르디난트 힐러, 건축가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 등과 각별하게 지냈다.

 

자코모 마이에르베르

 

바그너 가족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가 좌익 정치운동에 연루되는 바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을 방문한 극단주의적 편집장인 아우구스트 뢰켈(August Röckel)이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등을 만나 함께 지냈다. 바그너는 또한 프랑스의 반유태주의자인 피에르 조셉 프루덩(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과 독일의 철학자이며 인류학자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49년에 드레스덴에서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바그너도 그럭저럭 봉기에 관여하였다.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혁명에 동참했던 바그너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바그너는 파리로 도피했다가 이어 취리히로 가서 정착했다.

 

바그너의 열렬 팬인 오토 베젠동크. 바그너의 취리히 추방생활을 재정지원했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그의 부인이다.

                 

[추방생활: 스위스: 1849-1858]

바그너는 그후 12년 동안 독일에 가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다. 바그너는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게 편지를 보내어 비록 자기는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독일에서 '로엔그린'이 공연될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스트는 1850년 8월에 봐이마르에서 '로엔그린'의 초연을 직접 지휘했다. 취리히에서 지내야 하는 바그너는 '로엔그린'의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그너에게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독일의 음악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바그너에게는 일꺼리도 없었다. 다행하게도 1850년에 바그너의 친구인 칼 리터(Karl Ritter)의 부인인 줄리 리터가 바그너에게 매년 얼마씩 생활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은 줄리 리터가 자기 돈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줄리 리터가 자기 친구인 제시 라소(Jessie Lassot)의 도움을 받아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매년 3천 탈러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지원이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바그너가 제시 라소와 밀회를 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줄리 리터가 두 사람의 불장난같은 애정행각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지원을 취소한 것이다. 바그너는 엄연히 드레스덴에 부인인 민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유부녀와 놀아났으니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었다. 더구나 바그너는 제시 라소와 함께 저 멀리 아시아로 아예 도망갈 계획까지 세웠다가 그만 들통이 나는 바람에 망신만 당하고 주저 앉아야 했다. 한편, 민나는 바그너가 '리엔치' 이후에 쓴 몇 편의 오페라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단히 싫어하였고 남편인 바그너가 그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속병이 걸려 점점 쇠약해 갔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민나 때문에 속이 상해서 지병인 심장병이 도졌다면서 민나를 비난하였다. 두 사람의 병세타령은 대체로 신경전에 의한 것이었다.

 

바그너와 멀리 도망가려던 제시 라소

 

바그너는 작곡도 작곡이지만 글도 자기의 주장을 분명히 하며 잘 썼다. 하기야 독일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에 바그너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바그너는 취리히에 와서 별로 바쁘지도 않기 때문에 에세이를 자주 썼다. 그리고 그 에세이들을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펴냈다. 바그너는 1849년에 펴낸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에서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서의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법 등이 연합할 때 완성된 예술을 보여줄수 있다고 주장했다. 1850년에 펴낸 '음악에서의 유태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는 바그너가 처음으로 반유태주의 견해를 표명한 저술집이다. 그는 유태인들이 독일 정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유태인들은 천박하고 피상적이며 인위적인 음악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유태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작곡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훼방한다고 말했다.

 

1851년에 펴낸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에서는 그가 링 사이클의 오페라를 창조할 때에 사용했던 드라마의 미학적인 면을 설명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을 떠나기 직전에 나중에 '니벨룽의 반지'로 완성되는 4편의 오페라 사이클의 시나리오를 초안한바 있다. 그런데 그는 1848년에 전 4편의 시나리오를 초안한 것이 아니라 '지그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라는 제목의 오페라 한 편을 위한 시나리오를 초안했었다. 취리히에 온 그는 '지그프리트의 죽음'에 대한 시나리오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지그프리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젊은 지그프리트'(Der junge Siegfried)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오페라를 구상했고 이에 대한 시나리오도 추가했다. 그러다가 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발퀴레'와 '라인의 황금'에 대한 이야기도 추가할 필요가 있어서 결국은 1852년에 전 4편에 대한 대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웅대한 규모의 링 사이클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바그너가 1851년에 펴낸 자서전적 에세이집인 '나의 친구와의 통신'(Eine Mittheilung an meine Freunde: A Communication to My Friends)에서였다. 그는 이 에세이집에서 음악과 드라마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바그너는 이른바 오페라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페라가 아닌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하여 새로운 기념비적인 타이틀을 개발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저 드라마라고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바그너는 '라인의 황금' 음악을 1853년 11월부터 1854년 9월까지 작곡했다. 이어 1854년 6월부터 1856년 3월까지는 '발퀴레'의 음악을 작곡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세번째 작품의 작곡을 1856년 9월부터 시작했다. 바그너는 세번째 작품을 그저 '지그프리트'라고 정했다. 그러다가 1857년 6월에 '지그프리트'의 작곡을 잠시 중단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아서왕 전설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인 '트리스탄과 이설트'(Tristan and Iseult)에 기본을 둔 것이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작곡함에 있어서 두가지 소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하나의 소스는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이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를 1854년에 시인친구인 게오르그 헤르베그로부터 소개받아 알게 되었다. 훗날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의 만남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바그너 자신이 처했던 여러가지 환경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조건에 대하여 대단히 염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그너는 평생동안 쇼펜하우어에 집착하고 신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신조 중의 하나는 음악이 모든 예술에서 가장 지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음악이 세상의 에센스 즉, 맹목과 충동적인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같은 신조는 바그너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음악은 드라마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심취한 바그너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을 보다 주도적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링 사이클의 후기 작품에서 그러했다. 쇼펜하우어적인 신조의 내용은 바그너의 후기 대본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바그너의 후기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영감을 준 두번째의 사람은 시인작가인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8-1902)였다. 비단무역상인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이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1852년 취리히에서 처음 만났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베젠동크는 이듬해인 1853년 5월부터 바그너 식솔들이 취리히에서 지내는데 필요한 생활비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1857년에는 그의 넓은 저택의 한 쪽에 있는 별채를 바그너에게 주어서 필요한대로 마음대로 사용토록 했다. 작곡에 전념하려면 외떨어진 곳에 조용한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별채는 나중에 아실(Asyl)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은신처' 또는 '휴양소'라는 뜻에서 그런 명칭을 붙였다. 이 기간 중에 바그너는 마틸데 베전동크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열정을 품게 된다. 그래서 링 사이클의 작곡을 잠시 선반에 얹어 두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전념한다. 마틸데 베젠동크 때문에 작곡이 미루어진 링 사이클은 그후 12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을 구상하는 중에 마틸데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가곡을 작곡한다. 베젠동크 리더(Wesendonck Lieder)이다. 피아노 반주에 의한 다섯 곡의 노래이다. 바그너는 그중에서 두 곡에 대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위한 연습곡'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만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젠동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많은 영향을 준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중에도 이곳저곳의 요청을 받아 지휘를 했다. 1855년에는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초청으로 런던에 가서 몇 차례 지휘를 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지휘를 한 일도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탄호이저' 서곡을 엔조이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연주회 후에 바그너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일기에서 바그너에 대하여 '키는 작고 조용한 사람이다. 안경을 썼고 앞 이마가 아주 잘 튀어나왔고 매부리코에다가 주걱턱이다'라고 적었다.

 

[베니스와 파리: 1858-1862]

바그너와 마틸데의 쉽지 않은 애정행각은 1858년에 민나가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낸 편지를 가로채는 바람에 분명하게 발각되어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바그너는 민나와 한바탕 크게 싸운 후에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갔다.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팔라쪼 주스티니안(Palazzo Giustinian)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 지냈다. 그리고 문제의 마틸데는 독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틸데의 남편인 오토는 바그너에 대하여 관대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바그너에 대한 생활비 지원을 계속했다. 바그너는 민나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베젠동크 부부와 이상한 관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로도 계속 서신연락을 하며 친분있게 지냈다. 아무튼 그로 인하여 바그너는 민나가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얼마후 바그너는 민나에게 이혼을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나는 바그너로부터의 경제지원이 끊어질 것이 두려웠는지 이혼만은 곤란하다면서 버티었다.

 

'탄호이저'의 파리 공연을 주선한 파리주재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녀.

 

1859년 11월에 바그너는 파리로 다시 돌아갔다. '탄호이저' 수정본의 제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탄호이저' 수정본의 파리 공연이 가능했던 것은 파리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의 부인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녀(Princess Pauline von Metternich: 1836-1921)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1861년 파리에서의 '탄호이저' 공연은 대실패였다. 파리 오페라계의 무법자라고 불리는 자키 클럽(Jockey Club)의 훼방 때문이었다. 자키 클럽의 멤버들은 '탄호이저'에서 발레가 1막에 나오는 것을 두고 반대를 하며 난리를 쳤다. 파리에서는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전통적으로 발레를 2막과 3막 사이에 넣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반대이유였으며 실은 나폴레옹 3세의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반대하는 정치적인 배경이 깔려 있는 훼방이었다. 파리에서 '탄호이저'는 3회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바그너는 파리를 떠나 취리히로 돌아왔다. 바그너는 파리에 있는 동안 민나와 화해를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민나에게 파리로 오라고 해서 함께 지냈다. 하지만 재결합은 성공하지 못했다. 바그너가 취리히로 돌아갈 때에 민나는 드레스덴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