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 재조명 - 2

정준극 2013. 2. 16. 08:06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 재조명 - 2

 

[돌아온 바그너]

바그너에 대한 독일의 정치적인 제재는 1862년에 해제되었다. 1849년에 드레스덴을 떠나야 했던 바그너는 13년 만에 독일 땅을 다시 밟을수 있었다. 바그너는 프러시아의 비브리히(Biebrich)에 정착했다. 드레스덴에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과 함께 지내고 있던 민나가 그래도 남편이라고 비브리히의 바그너를 찾아왔다. 그러나 민나의 방문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부부로서 마지막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헤어짐을 돌이킬수 없는 사태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민나와 헤어진 후에도 1866년 민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활비를 도와주었다. 바그너는 비브리히에서 마침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을 시작했다. '뉘른베르크'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미 20년 전인 1845년에 생각했었지만 이런저런 상황으로 지연되었었다. 바그너는 1860년에 마틸데 베젠동크와 베니스에 갔을 때에 '뉘른베르크'를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티티안의 작품인 '성모의 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을 보고 '뉘른베르크'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바그너는 비브리히에 있는 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엔나에서 무대에 올리기 위해 수없이 리허설을 하는등 애를 썼으나 결과적으로는 성사하지 못했다. 노래를 부르기가 불가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 때문에 바그너는 다시한번 재정적인 난관을 겪어야 했다.  

 

티티안의 '성모의 승천'

                    

1864년은 바그너에게 있어서 구세주가 나타난 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여 있던 바그너에게 루드비히가 등장한 것이다. 루드비히는 18세의 나이로 바바리아의 왕이 되었다. 루드비히는 일찍부터 바그너 오페라의 열열한 찬미자였다. 루드비히는 왕이 되자 마자 바그너를 뮌헨으로 불렀다. 루드비히는 바그너가 진 빚의 대부분을 갚아주었다. 루드비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링 사이클'을 무대에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바그너는 또한 루드비히의 요청에 의해 '나의 생애'(Mein Leben)이라는 자서전을 쓰기로 약속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때에 자기의 초기 후원자였, 그러다가 나중에는 바그너의 원수가 되었던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가 마이에르베르를 얼마나 싫어했느냐 하면 '오페라의 거장이라는 그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해를 끼쳤다. 그는 더 이상 살지 않아서 오늘을 보지 말아야 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루드비히 왕과 바그너

              

'트리스탄'은 리허설에서 여러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1865년 6월 10일 뮌헨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바그너로서는 15년만에 처음으로 그의 오페라가 초연된 것이었다. '트리스탄'은 원래 5월 15일에 초연 예정이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나머지 빚쟁이들이 법원의 집달리를 동원하여 차압에 들어오는 등 난리를 치는 바람에 초연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이졸데를 맡은 덴마크 출신의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Malvina Schnorr von Carolsfeld: 1825-1904)가 성대에 이상이 생겨서 어쩔수 없이 연기해야 했다.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는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가 맡았다. 한스 폰 뷜로브의 부인인 코지마는 그해 4월에 딸을 낳았다. 이졸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졸데는 한스 폰 뷜로브의 아이가 아니라 바그너의 아이였다.

 

1865년 뮌헨국립극장에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에서 이졸데를 맡은 덴마크 출신의 소프라노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에게 가기 위해 남편을 떠난 여인이었다. 바그너와는 두살 차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친구처럼 알고 지내던 리스트는 결혼한 유부녀로서 두 딸 까지 있는 코지마가 바그너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몹씨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그너와 코지마의 스캔들은 뮌헨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바그너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루드비히의 주요 신하들은 바그너가 지나치게 루드비히에게 별별일까지 모두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서 바그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루드비히는 1865년 12월에 어쩔수 없이 바그너에게 뮌헨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루드비히는 바그너가 루체른 호반에 있는 빌라 트리브센(Villa Tribschen)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바그너는 1867년에 빌라 트리브센에서 '뉘른베르크'를 완성했다. '뉘른베르크'는 이듬해인 1868년 6월 21일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루드비히는 바그너가 링 사이클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두 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보고 싶으니 어서 공연하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어쩔수 없이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가 뮌헨에서 1869년과 1870년에 공연되었다. 바그너는 원래 루드비히의 그같은 요청을 거절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을 모두 완성한 후에 한꺼번에 공연되어야 하며 그것도 별도의 극장에서 축제처럼 공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만 루드비히의 요청 때문에 일단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바그너의 이같은 주장은 1882년에야 실현되어 새로 건축한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링 사이클의 전편이 역사적인 초연을 갖게 되었다.

 

바그너와 결혼하기 전의 코지마

 

민나는 마침내 1866년 1월 25일에 드레스덴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나가 세상을 떠나자 코지마는 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어 이혼을 합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폰 뷜로브는 선뜻 이혼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코지마가 바그너가 아이들을 두 명이나 더 낳자 이제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혼을 합의해 주었다. 코지마가 추가로 낳은 딸은 '뉘른베르크'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에바(Eva)라고 했으며 아들은 링 사이클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지그프리트(Siegfried)라고 했다. 코지마와 폰 뷜로브의 이혼소송은 법적인 절차때문에 지연되어 1870년 7월 18일에나 판결을 받았다. 바그너와 코지마의 결혼식은 약 한달 후인 8월 25일에 거행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날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을 축하하여서 '지그프리트 이딜'(Siegfried Idyll)을 작곡하여 깜짝 연주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바그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코지마와의 결혼으로 생활에 안정을 얻은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완성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논객으로서의 역할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바그너는 1850년에 가명으로 '음악에 있어서 유태주의'라는 팜플렛을 발간한 일이 있다. 그는 서론을 확대하고 결론 부분을 재집필 하는 등 다시 편집하여 1869년에 자기의 이름으로 재발간했다. 이 책자로 인하여 '뉘른베르크'의 비엔나와 만하임 공연 때에 항의를 받기도 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2막의 무대. 영국 로열오페라

                           

[바이로이트: 1871-1876]

바그너는 1871년에 바이로이트로 가서 살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지을 곳이었다. 바이로이트 시의회은 바그너가 새로운 극장을 짓겠다고 하자 그뤼네아우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넓은 부지를 기증하였다. 바그너는 가족들을 데리고 1872년에 바이로이트로 이사왔다. 그 해에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바그너는 1년이면 건설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생각하여 1873년에 첫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개최하며 그 때에 링 사이클의 모두를 공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드비히가 건축비의 지원을 거절했기 때문에 공사는 지연될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도 지연되었다. 건축비의 부족으로 공사는 취소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바이로이트 건축비를 모금하기 위해 '바거느 협회'(Der Richard-Wagner-Verband International: Der RWVI)가 구성되었다. 바그너 자신도 독일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면서 지휘를 하여 모금에 일조하였다. 그래도 총건축비의 3분의 1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루드비히가 1784년에 건축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바이로이트 건축 프로젝트는 바그너 가족들이 거처할 빌라 반프리트(Villa Wahnfried)의 건축도 포함되어 있었다. 봔프리트라는 말은 '망상/광기로부터의 평화/자유'를 뜻한다. 극장은 1875년에 완공되었다. 첫 페스티발은 이듬해인 1876년으로 예정되었다.

 

현재의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를 설계함에 있어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아이디어를 상당히 참고하였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극장의 설계에서 몇가지 개혁을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객석의 층을 없앤 것이다. 그러므로 무대 앞에서부터 뒷편까지 하나의 오디토리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공연 중에는 객석을 어둡게 하고 무대에만 조명을 하도록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극장에서나 객석은 공연 중에도 밝아야 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을 피트를 별도로 마련하되 객석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오디토리움. 층의 구별을 없앴다.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는 마침내 1876년 8월 13일 오픈되었다. '라인의 황금'이 첫 무대를 장식했다. 이어 링 사이클의 전편이 세계 최초로 공연되었다.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완성하기 전에 루드비히에게 주장한 대로 전편을 특별한 극장에서 모두 공연해야 한다는 것이 실현되었다. 링 사이클의 전반부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헤르만 레비가 지휘했으며 후반부인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인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1843-1916)가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링 사이클의 초연에 대한 평판은 엇갈린 것이었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에드바르드 그리그는 링 사이클의 음악을 '천상의 작곡'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의 르 피가로지는 '정신이상자의 꿈'이라고 혹평을 했다. 링 사이클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다는 사람은 한때 바그너와 절친한 사이였던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니체는 그의 에세이에서 바그너의 링 사이클에 대하여 극도로 실망했다고 말하고 이는 독일 국수주의에 영합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로서 바그너라는 이름은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 우뚝 서게 되었다. 페스티발에 참석했던 주요 인사들 중에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1세, 브라질의 돔 페드로 2세, 안톤 브루크너, 카미유 생생, 표트르 차이코브스키 등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헝가리 왕국에 속한 라아브(Raab)에서 태어난 지휘자 한스 리히터.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의 세계 초연을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했다.

             

바그너 자신은 페스티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 대실망이었다. 코지마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그너는 '다시는 절대로 안한다'라고 몇번이나 말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페스티발로 인하여 약 15만 마르크의 적자를 보았다. 바그너는 적자를 메꾸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지휘 요청이 들어오면 두말하지 않고 받아 들이고 지휘료를 받았다. 바그너의 비관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는 오늘날 매년 열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본부로 남아 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미망인인 코지마가 페스티벌을 운영해 왔고 이어 아들인 지그프리트가 맡아했다. 그 후에는 지그프리트의 두 아들이 맡았고 오늘날에는 바그너의 증손녀 두 사람이 맡아하고 있다. 1973년 부터는 리하르트 바그너 재단(Richard-Wagner-Stiftung)이 페스티발을 관장하고 있다. 이 재단의 멤버 중에는 바그너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다.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 바그너

 

[바그너의 말년: 1876-1883]

1876년의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이후,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작곡은 4년이나 걸렸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대부분을 건강 때문에 이탈리아 있는 기간중에 작곡했다. 한편, 바그너는 1876년부터 2년 동안 그의 마지막 애정행각을 벌였다. 상대는 프랑스의 여류 시인 겸 작가인 주디스 고티에(Judith Gautier: 1845-1917)이었다. 바그너는 주디스 고티에를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만났다. 주디스 고티에와의 열애는 2년 동안의 짧은 추억으로 막을 내렸다. 그 즈음에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초연에 대비한 경제적인 문제로 걱정을 했으며 그리고 '파르지팔'이 바이로이트 이외의 다른 극장에서 공연되면 안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그너는 다시한번 루드비히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루드비히는 이번에도 관대하게 바그너의 빚을 상당히 갚아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빚이 남아 있었다. 바그너는 팔수 있는 것은 팔아서 돈을 조달키로 했다. 그가 작곡한 작품 중에서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들을 출판사인 쇼트(Schotts)에 팔아서 그나마 숨을 쉬게 되었다. 그가 쇼트에게 판 작품 중에는 코지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지그프리트 이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그너가 생애의 말년에 잠시나마 정열을 불태웠던 주디스 고티에

 

바그너는 생애의 말년에 상당량의 글을 써서 남겼다. 간혹 정치적인 토픽도 있었으나 대개는 그가 예전에 써놓았던 글의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보고 부인하는 내용이 많았다. 말하자면 바그너는 예전에 비하여 진보적이며 자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수 있다. 대표적인 기고문으로서는 '종교와 예술'(1880), '영웅주의와 기독교'(1881)라는 것이 있다. 바그너는 이런 글들을 대체로 바이로이트 블래터(Bayreuther Blätter)라는 잡지에 게재하였다. 바이로이트 블래터는 바그너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한스 폰 볼초겐(Hans von Wolzogen)이 발간하는 간행물이었다. 이 기간에 바그너는 갑작스럽게 기독교에 대하여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그런 기독교 사상은 '파르지팔'에도 융합되었다. 그의 이같은 관심은 독일 민족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링 사이클도 그의 기독교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유태적인 사상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바그너가 말년에 쓴 '독일인은 누구인가?'(1878)는 바그너의 반유태주의적 선입감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베니스의 팔라쪼 벤드라민 칼레르기. 지금은 바그너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바그너는 1882년 1월에 '파르지팔'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려 7월 26일에 '파르지팔'의 초연이 있었다. 바그너는 이 즈음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 바그너는 심한 협심증으로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월 29일의 '파르지팔' 마지막 공연에서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3막에서 헤르만 레비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아 지휘를 마쳤다. 페스티발이 끝나고 바그너와 가족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베니스로 여행을 떠났다. 바그너는 1883년 1월 13일 베니스의 대운하에 면하여 있는 16세기 팔라쪼인 카 벤드라민 칼레르기(Ca' Vendramin Calergi)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9세였다. 얘기에 의하면 바그너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은 코지마와 심한 부부싸움을 하고나서였다고 한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소프라노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과 섬싱이 있다고 하면서 바그너와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캐리 프링글은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이 공연될 때에 꽃처녀 중의 하나로서 출연했던 소프라노였다고 한다.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근거도 없이 남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바그너의 시신은 베니스에서 검은 천으로 둘러친 곤돌라에 실려 기차역으로 옮겨졌으며 그후 바이로이트로 운구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La lugubre gondola(비통한 곤돌라)라는 피아노곡을 만들었다. 바그너의 시신을 곤돌라로 운반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곡이다. 바그너는 빌라 반프리트의 정원에 안장되었다.

 

빌라 반프리트의 정원에 있는 바그너의 묘지. 반프리트는 전쟁 중에 파손되었으나 2015년에 완전 복구되었다.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숨을 거둔 소파. 현재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빌라인 봔프리트에 보관되어 있다. 바그너 열렬 추종자들, 특히 여성들은 이 소파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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