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enr)
베토벤이나 베르디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작곡가가 되었을까? 이들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대답은 '모른다'이다. 그런데 바그너에게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은 작곡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페라이고 무대이므로 오페라 작곡가가 되지 않을수가 없었을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기록상으로 18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작품들과 성악작품(주로 가곡)들도 남겼다. 오페라의 수량으로만 본다면 아들 지그프리트는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더 많은 오페라를 작곡한 셈이다. 그렇게 여러 편의 오페라들을 작곡했는데도 오늘날 알려진 것은 미안하지만 거의 없다. '바그너의 아들인 지그프리트라는 사람이 오페라도 작곡했다네'라고 말한다면 '그래, 그런 사람도 있었나?'라는 물음만 있을 것이다.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오페라가 각광을 받지 못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작품이 신통치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커다란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작품들을 남겼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바그너 탐구의 일환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은 '링 사이클'에 등장하는 지그프리트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지그프리트 바그너에게는 누이가 두 사람있었다. 큰 누이의 이름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가져온 이졸데(Isolde)이며 작은 누이의 이름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가져온 에바(Eva)이다. 그러고보면 바그너가 자기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애지중지 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지그프리트 바그너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1869년 6월 6일에 태어났다. 바그너가 무려 56세 때에 아들을 본 것이다.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와 어머니인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 스위스에서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지그프리트는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되기 전에 태어난 것이다.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풀 네임은 헬페리히 지그프리트 리하르트 바그너(Helferich Siegfried Richard Wagner)이다. 식구들은 그를 휘디(Fid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지그프리트가 태어난 곳은 스위스 루체른 호반에 있는 트리브센(Tribschen)이라는 별장이었다. 지그프리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므로 지그프리트는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무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지그프리트는 피는 못 속인다는 말과 같이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많았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얘야, 휘디, 너도 아버지처럼 작곡가가 되어야지!'라고 종용했는지는 몰라도 지그프리트는 어려서부터 작곡에 뜻을 두고 오선지를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첫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13세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그프리트는 20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아버지 바그너의 제자로서 바이로이트에서 일을 거들던 엥겔버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로부터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훔퍼딩크는 나중에 '헨젤과 그레텔' '임금님의 아이들'과 같은 뛰어난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그프리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건축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베를린과 칼스루에에 가서 건축공부를 했다. 어머니 코지마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지그프리트는 23세가 되던 해인 1892년에 독일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인 클레멘트 하리스(Clement Harris: 1871-1897)와 함께 아시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클레멘트 하리스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독일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 참전했다가 1897년에 전사했다. 지그프리트는 그를 추모하여서 1922년에 교향시 '행운'(Glück)을 작곡했다. 그건 그렇고, 친구 하리스와 함께 아시아를 여행하던 지그프리트는 건축을 포기하고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아마 하리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것 같지만, 지그프리트는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양성연애자(bisexual)였다. 그래서 40이 넘도록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인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의 감정을 처음 충동적으로 가지게 된 대상자는 친구인 하리스였다고 한다.
지그프리트는 아시아 여행 중에 선상에서 그의 첫 공식적인 작품을 스케치했다. 교향시인 '동경'(Sehnsucht)였다. 프리드리히 쉴러가 쓴 동명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아서였다. 지그프리트는 교향시 '동경'을 1895년 6월 6일 자기의 생일 직전에 완성하였다. 그 때 바그너는 콘서트를 지휘하기 위해 런던에 있었으며 아들 지그프리트의 교향시가 완성되자 즉시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그프리트가 지휘자로서 데뷔한 것은 1894년 바이로이트에서 보조지휘자로였다. 이어 1896년에는 부지휘자가 되어 펠릭스 모틀(Felix Mottl),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등과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지휘를 했다. 펠릭스 모틀이나 한스 리히터는 20년 전에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오페라들의 초연을 지휘했던 사람들인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때에는 바그너의 아들과 함께 지휘를 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깊었을 것이지만 속절없이 세월만 흘러 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그프리트는 1908년, 그가 38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코지마의 뒤를 이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예술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지그프리트는 양성연애자였다.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인 코지마는 지그프리트에게 어서 결혼해서 바그너 왕조의 상속자를 생산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럴때마다 지그프리트는 이핑게 저핑게를 대며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코지마도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자리는 소문이 상당히 퍼졌다. 다행한 것은 지그프리트가 완전히 동성연애가자 아니라는 것이었다. 1913년쯤해서 지그프리트는 이른바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사건(Harden-Eulenburg Affair: 1907-1909)으로 덩달아서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사건(또는 간단히 오일렌부르크 사건)이란 것은 저널리스트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카이저 빌헬름 2세 내각에 있는 사람들이 동성연애에 빠져 있는 것을 고발한 사건이다. 그 중에는 빌헬름 2세의 친구인 오엘렌부르크-헤르테펠트의 공자 필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 동성연애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바그너 가문에 큰 망신을 주는 것이 아닐수 없었다. 지그프리트는 자기도 이성을 사랑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지그프리트는 더 이상 결혼을 회피할수 없었다. 코지마는 영국 출신 비니프레트 클린드워스(Winifred Klindworth)를 지그프리트의 신부감으로 작정했다. 비니프레트는 당시 17세였고 지그프리트는 45세였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무튼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트는 현저한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9월 22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트는 열심히 노력하여서 네 자녀를 두었다.
1. 빌란트(Wieland: 1917-1966)
2. 프리들린데(Friedlinde: 1918-1991)
3. 볼프강(Wolfgang: 1919-2010)
4. 베레나(Verena: 1920-)
이렇게 하여 일단은 바그너 왕조의 계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코지마를 비롯한 식구들은 지그프리트가 비니프레트와 결혼함으로서 지그프리트의 동성애 모험이 종지부를 찍게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지그프리트는 비니프레트와 부부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남자들과 동성연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인 코지마와 아내인 비니프레트는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지그프리트의 전기작가인 페터 파흘(Peter Pachl)이란 사람은 지그프리트가 1901년에 어떤 여자와 관계를 맺어 사생아 아들을 하나 갖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그같은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논란의 대상으로만 대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작가들인 프레데릭 슈포츠(Frederick Spotts)와 브리기테 하만(Brigitte Hamann)등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서 거들었다. 아무튼 지그프리트는 이성이건 동성이건 연애에 있어서는 피는 못 속이는지 아버지 못지않게 대단했다.
빌라 반프리트에서 지그프리트 바그너와 부인 비니프레트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1930년 8월4일에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다. 어머니 코지마가 세상을 떠나고 난후 4개월만의 일이었다. 지그프리트의 두 아들, 빌란트와 볼프강은 아직도 10대의 청소년이었으므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주도권은 지그프리트의 부인인 빈프레트가 맡았다. 다음은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오페라 리스트이다.
● Der Bärenhäuter(게으름뱅이). 3막. 1898. 뮌헨 궁정오페라 ● Herzog Wildfang(사냥잡이 대공). 3막. 1900. 뮌헨 궁정오페라 ● Der Kobold(도깨비). 3막. 1903. 함부르크 슈타트테아터 ● Bruder Lustig(유쾌한 형제). 3막. 1904. 함부르크 슈타트테아터 ● Sternengebot(별에 대한 기원). 서막과 3막. 1906. 함부르크 슈타트테아터 ● Banadietrich. 3막. 1909. 칼스루에 궁정극장 ● Schwarzschwanenreich(흑조의 나라). 3막. 1910. 칼스루에 궁정극장 ● Sonnenflammen(태양의 화염). 3막. 1912. 다름슈타트 궁정극장 ● Der Heidenkönig(이교도의 왕). 서막과 3막. 1913. 쾰른 시립극장 ● Der Friedensengel(자유의 천사). 3막. 1914. 칼스루에 바디셰스 란데스테아터 ● An allem ist Hütchen Schuld!. 3막. 1915. 슈투트가르트 궁정극장 ● Das Liebesopfer(사랑의 제물: 대본만 작성). 4막. 1917 ● Der Schmied von Marienburg(마리엔부르크의 대장장이). 3막. 1920. 로슈토크 시립극장 ● Rainulf und Adelasia(라이눌프와 아델라지아). 3막. 1922. 로슈토크(전주곡만 연주) ● Die heilige Linde(성스러운 보리수). 3막. 1927. 코일렌(전주곡만 연주) ● Wahnopfer. 3막. 1928 ● Das Flüchlein, das Jeder mitbekam. 3막. 1929. 키엘(한스 페터 모르가 완성)
[오케스트라 작품]
- March for Gottfried der Spielmann (c. 1882)
- Orchestration of Ekloge from Liszt's Années de Pèlerinage (1890)
- Sehnsucht, symphonic poem after Schiller (1892–5)
- Concertino for flute and small orchestra (1913)
- Violin Concerto (1915)
- Und wenn die Welt voll Teufel wär, scherzo for orchestra (1922)
- Glück, symphonic poem (1922–23) [클레멘트 하리스를 추모하여서 헌정]
- Symphony in C major (1925, rev. 1927). (첫 버전은 오페라 '자유의 천사'의 전주곡으로 사용
[성악 작품]
- 1890 Abend auf dem Meere, for soprano and piano – 대본은 헨리 토우드
- 1890 Frühlingsglaube, for soprano and piano – 대본은 루드비히 울란트
- 1890 Abend am Meer – 대본은 알프레드 마이쓰너
- 1897 Schäfer und Schäferin
- 1913 Das Märchen vom dicken fetten Pfannekuchen, for solo voice and orchestra
- 1918 Wahnfried-Idyll
- 1919 Nacht am Narocz, for tenor and piano
- 1922 Ein Hochzeitslied für unseren Erich und seine liebe "Dusi"
- 1927 Dryadenlied
- 1927 Weihnacht
- Frühlingsblick – 대본은 니콜라우스 레나우
- Frühlingstod – 대본은 니콜라우스 레나우
아버지의 아들. 늦으막해서 본 아들이기 때문에 무척 애지중지했다. 생기기도 비슷하게 생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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