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 - 2
반응과 영향
쿤드리와 파르지팔
[파르지팔에 대한 반응]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1880년대, 1890년대에는 '파르지팔'을 보려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가야 했다.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그 후손들은 바그너의 그같은 지시사항을 그야말로 잘 지켜나갔다. '파르지팔'이 처음 공연된 것은 1882년 7월이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기 반년 전이었다. 바그너는 1883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파르지팔'이 공연된다고 하자 세계 각국에서 내노라하는 인사들이 바이로이트로 왔다. 국왕들과 명망있는 귀족들이 왔고 저명한 작곡가들과 평론가들도 왔다. '파르지팔'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달랐다. 유명한 평론가인 에두아르드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제3막이 가장 뛰어났다. 감동적이었다. 전반적으로 음악은 다른 작품에 비하여 풍부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바그너가 보여준 드라마틱한 창의력은 정말로 놀랍다.'라고 말했다. 지휘자인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는 '꽃 처녀들의 의상은 볼품 없었지만 노래만은 비교할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마지막 막의 막이 내리고 우리가 극장 밖으로 나와 걸어가고 있을 때 괴테가 말한 말이 생각났다. '그대는 그곳에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수 있다'라는 말이었다. 1882년의 '파르지팔' 공연은 대단한 예술적 이벤트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파르지팔'의 피날레 장면.
휴고 볼프(Hugo Wolf)는 1882년 '파르지팔'이 초연되었을 때 학생이었다. 볼프는 '파르지팔'을 두번이나 보았다. 하지만 입장표를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했다. 볼프는 자기의 노트에 '파르지팔'을 보고한 후의 감상문을 다음과 같이 쓰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뛰어난 영감으로 작곡한 작품이다. 웅대하고 숭고한 창조물이다'. 그는 1883년에도 '파르지팔'을 관람하고는 '세상의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도 1883년 공연을 보았다. 말러는 '지금의 심정을 감히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문을 나섰을 때 아직도 마법에 걸려 있는듯했다. 나의 나머지 생애 동안 지금의 감동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고 싶다'고 말했다. 막스 레거(Max Reger)는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고작 15살이었다. 나는 두 주간동안 울었다. 그리고 음악가가 되기고 결심했다"고 간단히 말했다. 알반 베르크(Alban Berg)는 1909년에 '파르지팔'을 보고 "엄청나다.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말했다.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는 1894년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서 "'파르지팔'만큼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작품은 이 세상에 없다.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움직여준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클로드 드비시(Claude Debussy)는 1903년에 "주인공들이나 줄거리는 우수꽝스럽고 바보스럽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매혹적이며 찬란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드비시는 나중에 '플레아와 멜라상드'에서 이미 작곡해 놓은 한 장면을 삭제하였다. 이유는 그 장면에서 클링조르의 망령, 다시 말하여 바그너의 망령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치의 선정상인 요셉 괴벨스(Joseph Göbbels)는 '파르지팔'에 열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파르지팔'을 처음 보고나서 '대단한 경험이었다. 완전히 압도 당했다'라고 말했다. 괴벨스는 '파르지팔'의 선전을 위해서도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신랄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은 비엔나를 방문 중인 1891년에 바이로이트를 찾아와서 '파르지팔'을 보았다. 그러면서 '멜로디도 없고 리듬도 없는 것 같다. 도대체 곡조라고 할수 있는 보컬 파트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무슨 오페라가 이런가?'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파르지팔'에는 구르네만츠라는 은둔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한 시간 내내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게 무슨 오페라인가?'라고 털어 놓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1894년에 '파르지팔'을 보고 '순전히 음악적인 관점에서 주연급 출연자들을 보면 한마디로 대실망이다. 형편 없이 지겨운 사람들이다. 베이스는 늑대처럼 울부짖었고 테너는 그저 고함이나 질렀다. 바리톤은 음이 떨어져서 계속 플랫으로 불렀다. 그리고 소프라노는 단어를 소리치지 않고 비명을 질렀을 뿐이었다.'라고 평했다.
독일 제3제국이 발행한 '파르지팔' 기념우표. 뒤에 십자가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디자인했다.
[비평과 영향]
'파르지팔'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었다. 파르지팔'에서 기독교를 상징하는 성배와 성창을 보여주었고 구속자 또는 구세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마치 이 오페라의 공연을 기독교의 성례를 거행하는 것으로 간주할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바이로이트에서만 30년이란 기간동안 그런 성례를 거행한 것은 좋던 싫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파르지팔'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한 일이 없다. 대신, 구세주라는 표현은 했다. 바그너는 그의 에세이인 '종교와 예술'에서 '종교가 인위적이 된다면 예술은 그것을 구원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한 때 바그너의 챔피언이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파르지팔'을 계기로 바그너와 담을 쌓게 되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 대하여'(On the Genealogy of Morality)라는 에세이에서 '파르지팔'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니체는 "파르지팔은 불신과 원한에 대한 복수의 작품이다. '파르지팔'은 삶의 추측에 독을 넣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작품이다. 나쁜 작품이다. '파르지팔'에서 순결을 설교하는 것은 반자연에 대한 선동이다. 나는 '파르지팔'이 기본적인 윤리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음악만은 더 할수 없이 뛰어나다고 찬사를 보냈다.
네덜랜드 오페라의 무대. 클링조르의 마법의 정원에 있는 파르지팔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논란]
혹자는 '파르지팔'이 인종주의적이며 반유태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은 '파르지팔'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가 아리안주의를 옹호하는 아서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의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파르지팔은 순수혈통을 지닌, 즉 아리안 영웅으로 그려졌으며 그가 마법사인 클링조를 극복하는 것으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클링조르는 유태인으로 비유되어 있다. 특히 클링조르가 유사기독교인으로서 성배의 기사들을 반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바그너가 직접 쓴 대본에는 그런 직접적인 표현들이 없다. 바그너가 그동안 쓴 어느 글에도 그런 표현은 없다. 바그너의 사상과 생애에 대하여 자세하게 적어 놓은 코지마의 일기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바그너는 고비노를 1876년에 아주 잠시동안만 만난 일이 있다. 고비노의 에세이인 '인류의 불공정에 대하여'를 읽은 것은 1880년이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오리지널 대본을 1877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파르지팔'을 처음으로 구상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857년이었다. 그렇다면 고비노로부터 영향을 받아 '파르지팔'의 대본을 만들었고 반유태인적이며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인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파르지팔'에 반유태주의적인 내용이 있다는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바그너와 동시대에 살았던 평론가인 한스 폰 볼초겐(Hans von Wolzogen) 또는 에르네스트 노이만(Ernest Neumann)은 '파르지팔'을 자세히 분석하고 나서 내용 중에 반유태주의적인 것을 찾아볼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울 린다우(Paul Lindau)와 막스 노르드베크(Max Nordbeck)와 같은 다른 평론가들은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나서 내용에 바그너의 반유태주의적인 감상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지팔'에 반유태주의적인 내용이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간혹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항이다. 여러 평론가들이나 학자들이 그런 내용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바그너가 과거에 쓴 글들, 또는 편지에서 반유태주의적 사항에 부합하는 것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있다.
2012년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의 공연. 성창을 유별나게 크게 부각하였다.
'파르지팔' 초연의 지휘는 헤르만 레비가 맡았다. 뮌헨궁정극장(뮌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였다. 루드비히왕이 '파르지팔'의 공연을 크게 지원했기 때문에 초연의 오케스트라 멤버들도 상당수가 뮌헨궁정극장에서 데려왔다. 지휘자도 그래서 헤르만 레비가 맡게 되었다. 바그너는 헤르만 레비가 유태인이므로 유태인이 기독교적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헤르만 레비의 아버지는 실제로 유태교 랍비였다. 그렇지만 루드비히가 레비를 지휘자로 추천한만큼 바그너로서도 너무 지나치게 반대만 하는 것은 곤란했다. 바그너는 우선 레비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제안했다. 당연히 레비가 거절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파르지팔'을 유태인이 지휘하면 안된다는 불평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설명하고 그 모든 불평을 감수하고 레비를 지휘자로 수락한다고 말했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루드비히는 만족하여서 바그너에게 '모든 인류는 한 형제이다'라고 대답했다. 바그너는 다시 루드비히에게 유태민족은 순수한 인간성과 모든 고귀한 것에 대한 타고난 원수들이라고 적어 보냈다. '파르지팔'은 독일 제3제국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수락할수 없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나치가 '파르지팔'을 사실상 공연금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베를린의 도이치오퍼에서 23회의 공연이 있었던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파르지팔'은 2차 대전 중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공연되지 않았다.
성배의 기사들. 현대적 연출.
[쇼펜하우어와 파르지팔]
바그너는 1854년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바그너의 음악과 예술활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브라이언 매기(Bryan Magee)와 같은 작가는 '파르지팔'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뒷받침 해주는 바그너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파르지팔이 암포르타스를 치료하고 쿤드리를 죄악에서 구원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긍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긍휼히 여긴다는 것, 동정을 갖는 다는 것은 인간 도덕의 최고형태로 보았다. 파르지팔은 섹스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기를 유혹하는 여자(꽃 처녀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다. 쇼펜하우어는 인간들이 일상생활에서 상존하여 있는 유혹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의지(Will)의 부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내세웠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섹스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보다 강력한 의지의 부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이같은 영향은 동경(Sehnen)에 초점을 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파르지팔'과 관련하여 동정(Mitleid)을 강조한 것은 '트리스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3막에서 파르지팔을 등장시킬 생각도 했지만 나중에 포기했다.
['파르지팔'의 라이트모티프]
라이트모티프(Leitmotif)는 어떤 특정한 인물, 장소 또는 아이디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음악적 주제를 말한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에서 라이트모티프를 가장 자주 사용한 작곡가이다. '파르지팔'에서도 자유스럽게 사용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작곡함에 있어서 스코어에 특별히 이 라이트모티프는 이 경우에 또는 이 인물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파르지팔'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다만,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가 자기의 일기에서 '파르지팔'에서 라이트모티프는 어떤 경우에 사용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은 있지만 그렇다고 분명하게 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그너를 연구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한스 폰 볼초겐으 1882년 펴낸 그의 저서 '파르지팔 가이드'에서 이 라이트모티프는 이 인물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라이트모티프만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만들어 놓았다. 바그너는 그런 표현을 보고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그런 넌센스를 그가 만들어 놓았다고 믿을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막이 오르기 전의 전주곡에는 두개의 중요한 라이트모티프가 나온다. 성만찬에 대한 것과 성배에 대한 주제이다. 이 두 라이트모티프는 파르지팔의 모티프와 함께 오페라 '파르지팔'의 전편에 자주 반복되어 등장한다. 다른 인물들의 라이트모티프도 있다. 클링조르, 암포르타스, 그리고 '음성'이다. 음성은 '바보의 모티프'라고 하는 토르모티프(Tormotif)를 부른다. 바그너는 '드레스덴 아멘'을 성배를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바그너는 이 모티프를 어린 시절에 드레스덴에서 지낼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드레스엔에서 1842-29년에 교회성가대 지휘자로 있었다. 드레스덴 아멘은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인 '사랑금지'에 등장하며 후에는 '탄호이저'의 3막에도나온다.
클링조르의 정원에서. 파르지팔과 쿤드리. 메트로폴리탄 무대.
['파르지팔'의 주요 곡목]
바그너의 다른 주요 오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르지팔'도 막과 막이 끊어지지 않고 음악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와 함께 특별히 내세울만한 아리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오페라에 나오는 오케스트라 음악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콘서트에서 사용할수 있도록 별도로 편곡했다. 예를 들면 1막의 전주곡은 콘서트에서 단독으로 연주되거나 또는 3막 1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성금요일' 장면의 음악과 함께 연주되고 있다. 쿤드리가 2막에서 부르는 긴 솔로인 Ich sah das Kind(소년을 보았네)는 간혹 콘서트에서 단독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마찬가지로 1막에서 암포르타스의 '탄식'(Wehvolles Erbe)도 연주회 레퍼토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1막과 3막의 성배의 장면에서 기사들을 불러 모으는 종소리가 나온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될 때에 이 장면의 종소리를 위해 특별한 종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종을 '파르지팔 종'이라고 불렀다. 피아노 프레임에 네개의 현을 매달아 교회 종소리를 대신 내도록 만든 것이다. '파르지팔'의 초기 공연에서는 이 신조악기를 탐탐(공)과 같이 사용했다. 그러다가 튜바를 함께 사용했고 탐탐도 피치를 달리하여 네가지 소리가 나도록 했다. 그리고 탐탐 하나를 더 배치하여 드럼 스틱으로 치도록 했다. 오늘날에는 '파르지팔 종'의 소리를 긴 파이프처럼 생긴 악기로 내든지 또는 신테사이저로 필요한 대로 음량을 조절해서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이로이트에서 사용했던 '파르지팔 종'은 나중에 나치가 녹여서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네덜랜드 오페라 무대
['파르지팔'의 레코딩]
'파르지팔'은 특별히 바이로이트 무대를 위해 작곡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레코딩 중에서도 기록에 남을 만한 중요한 것은 모두 바이로이트에서의 실황을 녹음한 것이다. LP가 나오기 이전에는 바이로이트에서의 공연 중에서 발췌한 것을 칼 무크(Karl Muck)가 지휘한 것이 있다. LP 이전의 오페라 디스크로는 가장 훌륭다는 평을 받았다. 이 디스크에는 바그너가 직접 설계하여 만든 '파르지팔 종'의 소리가 유일하게 녹음되어 있다. 이 종은 나중에 나치가 녹여서 없앴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오리지널 종소리가 들어 있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다. 전후에는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가 바이로이트의 '파르지팔'과 가장 인연이 깊다. 1951년 바이로이트가 재개관하였을 때에도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파르지팔'을 지휘했다. 칼 무크와 한스 크나퍼츠부슈의 레코딩은 모노로 되어 있다.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1962년에 지휘한 '파르지팔' 실황은 필립스가 스테레오 녹음하였다. 통상적으로 이것을 '파르지팔'의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스튜디오 레코딩으로는 게오르그 솔티, 허버트 폰 카라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한 것이 뛰어나다. 카라얀과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카라얀 지휘의 음반은 1981년에 '올해의 레코드'로 선정되어 그라마폰상을 받았다.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이 도이체 그라마폰으로 취입한 것도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아츠 아카이브스(Arts Archives)로 발매되어 있다.
[영화 '파르지팔']
현재 DVD로 볼수 있는 '파르지팔'은 대부분이 바이로이트의 공연을 녹화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이 있다. 1998년에 토니 파머(Tony Palmer)가 감독한 다큐멘타리 형식의 '파르지팔 - 성배를 찾아서'(Parsifal - The Search for the Grail)이다. 마리인스키 극장, 시에나의 라벨로 극장, 바이로이트 극장에서의 공연실황을 포함한 영화이다. 플라치도 도밍고(파르지팔), 비올레타 우르마나(쿤드리), 마티 살미넨(구르네만츠), 니콜라이 푸틸린(암포르타스) 등이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는 도밍고, 볼프강 바그너, 로베르트 구트만(Robert Gutman),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과의 인터뷰도 들어 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상영시간이 116분인 '파르지팔' 전편으로서 도밍고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상영시간이 88분으로 여러 파트를 삭제한 것이다. 독일 당국은 '파르지팔'에 정치적이며 부적절하며 불현한 내용들이 있어서 삭제할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플라치도 도밍고가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파르지팔 - 성배를 찾아서'의 커버
[대표적인 음반]
- 출연자의 이름은 파르지팔, 쿤드리, 구르네만츠, 암포르타스, 클링조르의 순서임. 다음은 지휘자와 공연된 오페라 극장, 또는 오케스트라의 명칭이다. 라벨은 소개하지 않았다. -
- 1949년: Gunther Treptow, Anny Konetzni, Ludwig Weber, Paul Schoffler, Adolf Vogel - Rudolf Moralt, Wiener Symphoniker
- 1950년(이탈리아어): Alfrico Baldelli, Maria Callas, Boris Christoff, Rolando Panerai, Giuseppe Modesti - Vittorio Gui, Orchestra Sinfonica e Coro di Roma della RAI
- 1951년: Wolfgang Windgasse, Martha Mödl, Ludwig Weber, George London, Hermann Uhde - Hans Knappertsbusch, Bayreuth Festival Orchestra
- 1954년: Wolfgang Windgassen, Martha Mödl, Josef Greindl, Hans Hotter, Gustav Meidlinger - Hans Knappertsbusch, Bayreuth Festival Orchestra und Chor
- 1961년: Fritz Uhl, Christa Ludwig, Hans Hotter, Eberhard Waechter, Walter Berry - Herbert von Karajan, Wiener Staatsoper Orchestra und Chor
- 1970년: James King, Gwyneth Jones, Franz Crass, Thomas Stewart, Donald McIntyre - Pierre Boulez, Bayreuth Festival Orchestra und Chor
- 1972년: Rene Kollo, Christa Ludwig, Gottlob Frick, Dietrich Fischer-Dieskau, Zoltan Lelemen - Herbert Kegel, Leipzig Radio Symphony Orchestra and Chorus
- 1979/1980년: Peter Hofmann, Dunja Vejzovic, Kurt Moll, Jose van Dam, Siegmund Ninsgern - Herbert von Karajan,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and Berlin Deutsche Oper Chorus
- 1980년: James King, Yvonne Minton, Kurt Moll, Bernd Weikl, Franz Mazura - Rafael Kubelik,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 1985년: Warren Ellsworth, Waltraud Meier, Phillip Joll, Donald McIUntyre, Nicholas Folwell - Reginald Goodall, Welsh National Opera Chorus and Orchestra
- 1987년: Peter Hofmann, Waltraud Meier, Hans Sotin, Simon Esttes, Franz Mazura - James Levine, Beyreuth Festspielhaus Orchestra und Chor
- 1990년: Siegfried Jerusalem, Waltraud Meier, Matthias Holle, Jose van Dam, Gunter von Kannen - Daniel Barenboim, Berlin Philarmonic Orchestra and Chorus
- 1992년: Placido Domingo, Jessye Norman, Kurt Moll, James Morris, Ekkehard Wlaschiha - James Levine, Metropolitan Opera Orchestra and Chorus
- 2005년: Placido Domingo, Waltraud Meier, Franz-Josef Selig, Falk Struckmann, Wolfgang Bankl - Christian Thielemann, Wiener Staatsoper Orchester und Chor
- 2005년: Richard Decker, Doris Soffel, Wolfgang Schöne, Matthias Hölle, Mikolaj Zalasinski - Gabor Otvös, Teatro La Fenice Orchestra and Chorus
- 2009년: Gary Lehman, Violeta Urmana, Renee Pape, Evgeny Nikiton, Nikolaj Putlin - Valergy Gergierv, Orchestra and Chorus of the Mariinsky Theater
1998년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공연실황을 DVD로 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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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괴테의 '파우스트, 비극 첫번째 파트' (0) | 2012.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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