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와 비엔나

정준극 2013. 3. 7. 17:05

바그너와 비엔나

 

바그너라는 이름이 나오면 드레스덴, 뮌헨, 파리, 스위스, 바이로이트, 라이프치히 등이 주로 거론되지만 비엔나는 거의 언급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비엔나는 바그너의 생애와 그의 작품의 운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었다. 바그너는 작곡가로서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기간에 비엔나에 자주 머물면서 작곡을 하고 공연을 준비했다. 사실상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새로운 목표를 위해 활동한 곳이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등이 비엔나를 근거지로 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고 리스트, 쇼팽, 바그너, 아놀드 쇤버그, 알반 베르크, 구스타브 말러, 휴고 볼프, 안톤 ㅂ루크너 등이 비엔나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다. 비엔나와 바그너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비엔나에서 바그너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은 바그너 탐구의 중요한 파트이다. 바그너는 1850년대로부터 187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엔나를 자주 찾아왔었다. 어떤 때는 해를 넘겨 장기체류하기도 했다. 2013년 5월 22일은 바그너 탄생 200 주년을 맞는 날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의 링 슈트라쎄 일대

                     

[탈리아 극장 -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오페라로서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작품이다. 1857년에 탈리아극장(Thalia Theater)에서 공연되었다. 탈리아극장은 1856년에 오픈하여 1870년까지 운영되다가 문을 닫은 곳으로 오늘날 16구 오타크링의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다. 대신에 탈리아극장이 있었던 거리를 탈리아슈트라쎄라고 붙여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탈리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이다. 그래서 사실 탈리아라는 이름의 극장은 여러 곳에 있다. 함부르크에도 있고 부다페스트에도 있다. 비엔나에도 19구 되블링의 하일리겐슈태터 슈트라쎄 131-135번지에 있었다. '탄호이저'의 비엔나 공연은 약간의 비판도 있었으나 대성공이었다. '탄호이저'의 성공은 바그너에게 비엔나의 문을 열어준 계기였다.

  

'탄호이저'의 비엔나 초연이 있었던 탈리아극장. 오늘날 비엔나 16구 오타크링에 있었다.

 

'로엔그린'은 1858년부터 비엔나의 궁정오페라(현재의 슈타츠오퍼)에서 공연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궁정오페라에서 공연되는 '로엔그린'을 그의 세번째 비엔나 방문인 1861년에 가서야 관람할수 있었다. 바그너는 궁정오페라에서의 리허설을 보고 감동하여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61년의 궁정오페라 공연에서 바그너는 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매 막이 끝날 때마다 스테이지에 불려나와 인사를 해야 했다. 바그너는 비엔나야 말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장소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바그너는 1859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1883년까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엔나 무대에 올리는 것은 지나치게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로엔그린'의 비엔나 초연이 있었던 비엔나 호프오퍼(현재의 슈타츠오퍼).

 

[빌라 바그너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재정문제]

바그너는 1863년 초에 당시 비엔나의 교외인 펜칭에 있는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의 하디크가쎄(Hadikgasse) 72번지의 저택이다. 훌륭한 저택이므로 임대료가 비쌌다. 게다가 바그너는 화려한 가구들을 좋아했다. 바그너의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때 바그너는 새로운 오페라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였다. 바그너는 이 오페라에 대한 자료를 비엔나의 궁정도서관(현재의 국립도서관)으로부터 찾아서 참고로 하였다. 그러한 때에 바그너는 빚 때문에 체포당할 처지에 있어서 낙심중에 지냈다. 그때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루드비히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사촌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의 재정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당분간 펜칭에 머물면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전념할수 있었다. 오늘날 그 저택은 '빌라 바그너'라고 불리고 있으며 당시에 바그너가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저택의 벽면에는 바그너가 이곳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을 진행하였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비엔나 14구 펜칭의 하디크가쎄에 있는 빌라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작곡한 곳이다.

하디크가쎄 72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바그너가 1864-64년에 이곳에 체류하면서 '마이스터징거'를 작곡했다고 써있다.

 

[임페리알 호텔]

바그너는 1872, 1875, 1876년에 비엔나를 각각 방문하였다. 바그너는 1875년에 가족과 함께 캐른트너 링 16번지의 임페리알 호텔에 묵었다. 임페리알 호텔은 이를 기념하여 현관문 오른쪽 벽면에 기념명판을 부착하였다. 바그너는 임페리알 호텔에서 방을 일곱개나 사용했다. 마치 군주와 같은 처신이었다. 바그너는 그의 슈트 살롱에 그랜드 피아노를 가져다 놓았다. 바그너는 임페리알 호텔에 머물면서 '로엔그린'과 '탄호이저'의 비엔나 공연을 준비했다. 바그너는 블랙 커피를 마셔가면서 밤새도록 피아노를 치며 이들 오페라의 음악을 편곡하거나 수정하였다. 호텔 투숙객들은 처음에는 '아니,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한 밤중까지 피아노를 치며 난리인가?'라고 불평을 털어 놓았지만 나중에 그 사람이 다름아닌 바그너라는 것을 알고 바그너의 한밤중 피아노 소리에 익숙해져서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위대한 바그너의 피아노 연주를(비록 연습이지만) 들을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당시에 바그너는 비엔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비난도 받았다. 직설적으로 조소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그너의 몸짓을 흉내내면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그너는 비엔나에 머물면서 바이로이트 축제의 준비까지 진행하였으므로 대단히 분주하였다.

 

임페리알 호텔 벽면의 바그너 기념명판. 뭐라고 써있는고 하니 Richard Wagenr war am Ausgangs des Jahres 1875 mit seiner Familie fast zwei Monate lang zur Vorbereitung der Auffuhrung seiner Opern Tannhauser und Lohengrin Gast dieses Hotels. Der Wiener Schubertbund zum 50 Todestage des Meisters 1933. 이를 대충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875년 후반에 리하르트 바그너가 가족과 함께 본 호텔에서 두달이 넘게 머물면서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의 공연을 준비했다. 1933년 마이스터(바그너를 말함)의 서거 50주년을 기하여 비엔나 슈베르크연맹이 설치함'.

바그너가 묵었던 임페리알 호텔의 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