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파리의 '탄호이저'

정준극 2013. 3. 8. 13:23

파리의 '탄호이저'(Tannhäuser) 에피소드

나폴레옹 2세의 지시로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 하지만 실패의 연속

 

'탄호이저' 무대. 파리 오페라극장

 

바그너는 46세가 되던 해인 1859년에 파리에 왔다. 그전에도 파리에 왔었지만 이번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파리 공연을 주선하기 위해서 왔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도 무대에 올리기에 대단히 이상적인 오페라였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다섯명이면 충분했다. 세트는 세개의 간단한 것만 있으면 되었다. 합창단은 거의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크지 않아서 부담이 적다. 그런 '트리스탄'인데 파리 공연은 실패였다. 며칠 후에는 '트리스탄'에서 발췌한 오케스트라곡과 합창곡만으로 콘서트를 가졌는데 그것도 실패였다.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공연에 사람들이 많이 올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객석은 텅텅이었다. 물론 '트리스탄'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작았다. 바그너는 또 다시 파멸했다. '트리스탄'으로 돈을 벌어서 당장 급한 불이라도 끌 생각이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빚만 더 늘었다. '탄호이저'는 1845년에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으나 바그너는 1861년의 파리 초연을 위해 오리지널 스코어와 대본의 상당부분을 수정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탄호이저'는 파리 버전이다.

 

바그너의 후원자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의 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참으로 뜻밖에도 나폴레옹 3세가 파리 오페라극장(L'opéra)에 지시하여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히 충격적인 뉴스였다. 그 소식을 들은 바그너는 뛸듯이 기뻐했다. 너무 기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파리의 오페라극장이라고 하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오페라극장 중의 하나이다. 그런 오페라극장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하되 바그너 마음대로 제작해도 좋다는 권한을 받았다. 바그너는 파리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트리스탄'의 실패를 맛본 바그너는 '트리스탄'보다는 '탄호이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한 때에 나폴레옹 2세가 '탄호이저'를 공연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바그너로서는 천만뜻밖의 행운이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영광의 여신이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오늘은 이 극장에서 '트리스탄'이 뜨거운 박수를 받고 내일은 저 극장에서 '마이스터징거'가 환호 속에 막을 내리며 또 며칠 후에는 다른 극장에서 '링 사이클'이 놀라운 감동을 던져 주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다. 바그너는 평소부터 친분이 두터운 프란츠 리스트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1등 공연을 파리에서 할수 있게 되었다'면서 자랑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다.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지시한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가 '탄호이저'를 공연토록 하라고 지시한 이면에는 파리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의 부인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Pauline von Metternich)의 입김이 컸었다. 유명한 메테르니히 재상의 딸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드 메테르니히)는 대사의 부인으로서 파리 사교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그런 그가 바그너를 돕기 위해 나폴레옹 3세에게 청탁을 하여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토록 주선한 것이다. 여기에다가 파리에 있는 바그너 팬들이 입김도 작용하였다. 어쨋거나 바그너는 출연자들을 선정하고 무대 설계를 검토하며 오케스트라 준비를 지켜보았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는 이미 규모가 커서 걱정이었는데 바그너가 여기에 관악기와 타악기들을 추가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극장측과 조금 마찰이 있었지만 그 문제도 원만히 해결되었다. 독일어 대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바그너의 기본 아이디어를 최대로 살리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이에 대하여 바그너도 만족하였다. 그런데 바그너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바그너의 힘든 즐거움은 즐거움 자체로서 전부이며 현실적으로는 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어서 바그너의 즐거운 상상을 여지없이 깨트렸다. 바그너는 오페라 제작의 전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극장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그랑 포이어(대회랑)의 화려한 모습

 

파리의 오페라극장은 어떤 공연이든지 중간의 적당한 시간에 발레를 공연해야 한다는 관례를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도 발레가 있어야 했다. 극장 측은 봐르트부르크 노래의 전당에서 열리는 노래 경연(Sängerkrieg auf Wartburg: 봐르트부르크성은 아이제나하 인근 산속에 있는 중세의 고성이다) 장면에 발레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오페라 중간의 발레는 예술적인 면모보다는 사교적인 면모가 강한 것이었다. 파리의 상류층에서 오페라에 박스 좌석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조키 클럽(Jocky Club)의 사람들은 관례적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밤 10시 쯤에서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는 극장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왔소!'라고 기침을 하였다. 그때 쯤이 대체로 오페라의 중간 부분에 해당한다. 조키 클럽의 사람들은 오페라의 내용이야 어떻든 발레를 보러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발레리나들의 다리를 보는 것이 그들의 속된 즐거움이었다. 프랑스의 오페라에서 발레를 공연하는 것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대단하여서 만일 발레가 신통치 않으면 그 오페라 전체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경향이었고 발레가 그럴듯하면 별로 신통치 않은 오페라라고 해도 훌륭하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므로 극장측으로서는 조키 클럽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중요했고 그들의 심사를 건들이지 말아야 했다.

 

'탄호이저'의 무대가 된 독일 아이제나하(Eisenach) 인근의 봐르트부르크성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중간 부분에 발레를 넣어야 한다는 파리 오페라극장 측의 요구를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의 중간에 발레를 넣는 것이 예술적으로도 그렇고 사교적으로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바그너는 아마 속으로 '미친 놈들, 정말 프랑스 놈들은 어찌 할 수 없어. 오페라가 무언지도 모르고 발레가 있어야 한다고 저러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피라극장의 알퐁스 로이어(Alphonse Royer) 감독은 중간 발레가 없다면 어떤 오페라든지 성공할수 없다고 주장하며 바그너의 거절에 '안돼, 안돼'를 연발하였다. 극작가이기도 한 알폰스 로이어는 베르디를 위해 '예루살렘'의 대본을 완성한바 있는 인물이다. 아무튼 오페라극장의 감독이 죽어라고 중간 발레의 존립을 결사주장하자 속이 상한 바그너는 파울리에 폰 메테르니히 공녀에게 하소연을 했고 공여는 다시 나폴레옹 3세에게 발레 문제가 여차여차 하다고 말했다. 결과, 위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갈이 내려왔다. '바그너 마음대로 하도록!'이라는 지시사항이었다. 위라는 것은 물론 나폴레옹 2세를 말한다.

 

시인이며 대본가인 알폰스 로이어. 파리 오페라극장의 감독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바그너는 오페라극장 측과 담판을 짓는 과정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발레가 있어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탄호이저가 사랑에 빠져 지내고 있을 때의 비너스버그 장면이 시작될 때에 육감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발레를 넣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비너스버그의 장면이라고 하면 오페라의 시작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키 클럽의 말썽 많은 멤버들이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친후 디저트로 케이크를 먹던지 말던지 아무튼 늦으막하게 극장에 들어서면 그때에는 이미 비너스버그 장면에서의 발레가 끝난 후이므로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발레는 볼수 없다는 대단히 흥미있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후 바그너는 거의 여섯 달 동안 특별히 비너스버그의 장면을 위해 리허설에 리허설을 거듭하였다. 바그너는 비너스버그의 장면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가장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바그너로서는 그의 생각대로 공연준비기 착착 진행되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꼭 한가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휘자였다.

 

'탄호이저' 중 비너스버그에서의 관능적인 파티 장면

                         

바그너는 처음에 '탄호이저'의 지휘는 그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피에르 디츄(Pierre Dietsch)라는 사람이 맡게 되었다. 바그너는 피에르 디츄가 능력도 없고 경력도 없기 때문에 적격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바그너주의(바그너리즘)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그너도 어쩔수 없이 극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또 다시 메테르니히 공녀에게 지휘자 문제로 아쉬운 소리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그너는 극장 측의 관례를 따라야 했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관례는 무슨 관례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작곡자가 자기 작품을 직접 지휘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작곡자가 비록 마이에르베르 아니라 마이에르베르의 할아버지라고 해도 그 관례를 깨트릴수는 없었다.

 

나치의 제3제국이 발간한 '탄호이저' 기념 우표

                     

이런 저런 점들을 고려해 볼때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탄호이저' 공연은 대재앙이 예견되었다. 지휘자 디츄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골치꺼리는 자기들이 극장의 주인인척 하는 클레이크(Claque)였다. 간단히 말해서 박수부대이다. 클레이크들은 주최측으로부터 돈푼이나 받으면 박수를 쳐서 그 오페라가 훌륭하다고 난리를 치지만 돈을 받지 못하면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퍼부으며 오페라의 공연을 철저하게 대재앙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바그너는 클레이크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을 거절했다. 클레이크들은 바그너를 증오했다. 저널리스트들도 바그너를 싫어했다. 오페라의 작곡가들은 자기 작품의 공연이 있기 전에 각 신문사들을 순방하며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는데 바그너는 그런 예의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조키 클럽 멤버들이 바그너를 극도로 싫어했다. 바그너의 콧대가 높다는 것이 싫어하는 이유였다. 이들은 바그너가 2막이 마지막에 발레를 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막에서 발레리나를 볼수 없다는 것은 조키 클럽 멤버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실망을 넘어서서 '그래? 어디 두고보자!'라고 마음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1861년 3월 13일의 '탄호이저' 공연은 클레이크로 인하여 대실패였다.

 

2011년도 바이로이트 무대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에 참석했던 인사들 중에도 바그너의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베를리오즈였다. 베를리오즈는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유명한 시인 겸 극작가이며 예술평론가인 테오빌 고티에(Theophile Gautier)를 만났다. 고티에도 15세 딸인 주디스와 함께 '탄호이저'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베를리오즈가 고티에게 바그너에 대하여 있는 험담 없는 험담을 얘기하자 고티에도 베를리오즈의 말을 적극 수긍하며 비난에 동참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디스는 아버지 고티에가 누군지 모르지만 비난하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은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며 그의 작품은 대단히 뛰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얼마나 예지있는 코멘트인지 모르겠다. 주디스의 말대로 극장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바그너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클레이크들이 야유를 퍼붓자 왕실 좌석으로부터 조용히 하라는 시그날이 왔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휴게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바그너리즘의 장점들을 설명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 덕분인지 프랑스의 여러 작곡가들이 바그너리즘에 동조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메테르니히 공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막이 진행되는 도중에 조키 클럽 멤버들이 가능한한 소음을 내면서 극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이 내는 소음을 신호로하여 아래층에 있던 클레이크들이 모두들 합심하여 '바그너 반대' '탄호이저 반대'의 시위를 하였다. 마지막 막에 이르러서는 훼방꾼들이 야유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는 하나도 들을수 없을 정도였다. 보들레르는 마지막 막에서 들은 소리가 탄호이저의 로마 내레이션 뿐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바그너 반대파 사람들 중에는 직접 소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극장 안에서 공연 도중에 일단 소란이 일어나자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들은 '탄호이저'를 증오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한 애국심의 일환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프랑스의 어떤 장군은 메테르니히 공녀에게 '마담, 솔페리노(Solferino)를 지금 갚으시다니 너무 잔인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솔페리노는 1839년 6월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이탈리아의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군을 물리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프랑스 장군은 '독일군을 패배시켰더니 음악을 가지고 반격해 왔군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바이로이트에서의 현대적 연출에 의한 탄호이저

                         

파리 사람들은 '탄호이저'의 첫 날 공연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탄호이저'가 예술적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대적인 사보타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샤를르 구노는 '파리에서 탄호이저가 그런 대접을 받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파리의 상당수 바그너 지지자들이 첫날의 실패에 대하여 오히려 크게 동정하는 기운이 감돌자 조키 클럽은 '이래서는 바그너를 완전히 무너트리지 못한다.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번째 날의 공연에는 조키 클럽 멤버들 스스로가 체면불구하고 호르라기와 기타 소리나는 물건들을 준비해가지고 가서 난리를 치기로 결정했다. 두번째 날의 공연도 대재앙이었다. '탄호이저'의 유일한 희망은 세번째 날인 일요일 밤의 공연이었다. 왜냐하면 일요일 밤에는 조키 클럽이 다른 행사가 있어서 공연이 끝날 때쯤 나타나거나 또는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조키 클럽에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런던의 조키 클럽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이다. 런던의 조키 클럽은 영국내 14개 경마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단한 조직이다. 파리의 조키 클럽은 파리에 있는 오페라극장들을 자기들 손아귀에서 관장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탄호이저'의 피날레 장면

                                                              

첫날에 이어 둘째 날에도 관객들이 소동을 벌이자 극장감독인 로이어는 바그너에게 2막과 3막 사이에 발레를 넣어서 조키 클럽의 입을 잠잠케 해 달라고 다시한번 간청했다. 바그너는 간단히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표현했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런 다음에는 당신이 좋아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하세요'라고 말했다. 점잖게 말해서 그런 표현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바그너는 이제 조키 클럽이든, 클레이크든 그런 부류들과 싸울 기운조차 없었다. 바그너는 셋째 날의 공연에는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다. 셋째 날의 공연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휘파람과 야유가 빗발친 것이었다. 사람들이 바그너에게 셋째 날의 공연도 엉망이었다고 말하자 바그너는 오히려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을 했던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떨렸다. 다음날 아침, 바그너는 극장감독인 로이어에게 편지를 보내어 '탄호이저'를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매니저들이 대단히 당황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탄호이저 초연의 스케치. 비너스버그에서의 비너스와 탄호이저

                            

그런데 티켓 판매는 예상외로 좋았다. 첫째날에도 많이 팔렸지만 둘째 날에는 거의 매진이었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인것 같았다. 만일 계속 공연했더라면, 예를 들어 60회의 공연을 기록했다면, 바그너는 2만5천 프랑의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면 웬만한 빚은 다 갚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극장 측과 다른 작품의 공연에 대하여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할수 있었을 것이다. 바그너로부터 '탄호이저'의 철수를 통보받은 극장 측은 계약서의 내용을 보여주며 바그너의 요청을 묵살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설득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서 '탄호이저'를 계속해야 한다고 당국에 청원서를 넣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장 측은 바그너의 요청을 존중키로 했다. 그리하여 '탄호이저'는 그 다음날부터 무대에서 사라졌다. 엄청난 제작비가 들었지만 그것도 사라졌다. '탄호이저'를 위해 만든 의상이나 소도구등은 다른 작품에 사용하기 위해 분배되었다. 과연 무엇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 분명히 작품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탄호이저'가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 특히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정치·사회 조직)에 대한 문화적 공격이어서 조키 클럽과 같은 상류층의 반발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공연을 취소한 이유는 간단하다. 무디고 활기없는 오케스트라, 형편없는 지휘자, 도무지 제멋대로인 성악가들, 그리고 돈만 처들였고 에스프리가 없는 미련한 무대장식에 신물이 나서였다. 바그너 자신이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탄호이저' 공연을 싫어한 것이었다.

 

파리 오페라극장(L'Oper). 갸르니에가 설계했기 때문에 갸르니에극장이라고도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오페러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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