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탄호이저와 봐르트부르크 노래경연대회

정준극 2013. 3. 19. 09:27

탄호이저와 봐르트부르크 노래경연대회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탄호이저' 피날레. 바이로이트. 현대적 연출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대체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사실에 입각한 것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몇 작품들은 역사적 사실을 일부 반영하기도 했다. '로엔그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그리고 '탄호이저'가 그러하다. '로엔그린'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브라반트 공국과 실존인물인 하인리히(헨리)왕 등이 등장한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는 한스 작스와 같은 실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탄호이저'에는 봐르트부르크, 비너스버그, 음유시인 탄호이저 등의 이름이 사실적으로 등장한다. 오페라 '탄호이저'의 정식 타이틀은 '탄호이저와 봐르트부르크 노래경연대회'(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이다. 영어로는 Tannhäuser and the Song-Contest at the Wartburg Castle이라고 한다. 이제 '탄호이저'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보자. '탄호이저'는 1845년, 바그너가 32세 때에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다. 이어 그로부터 16년 후인 1861년에는 내용을 수정하고 확대한 버전이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마련되었다. 대본도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것은 파리 버전이다.

 

플라치도 도밍고가 탄호이저를 맡아 취입한 DDG 음반의 커버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대본을 완성함에 있어서 유럽에 내려오는 두 가지 전설을 하나의 이야기로 융합하였다. 하나는 음유시인이며 기사인 탄호이저의 이야기이다. 중세에서 음유시인(민스트렐)이라고 하면 대체로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탄호이저라는 독일어 이름은 글자그대로 번역하면 '전나무 집에서 온 사람'(Man from the fir-tree home)이다. 탄호이저는 어떤 산속의 동굴에 있는 왕국으로 내려와서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총애를 받는다. 탄호이저가 비너스와 함께 관능적인 사랑의 세월으로 보낸 곳이 오페라에 나오는 비너스버그(Venusberg)이다. 바그너는 비너스버그를 투링기아 지방의 아이제나하(Eisenach) 인근에 있는 회르젤버그(Hörselberg)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비너스는 독일 전래동화에 나오는 프라우 홀다(Frau Holda)로 비유하기도했다. 비너스의 동굴(Venusgrotte)에서 몇년 동안 환락의 생활을 지내던 탄호이저는 문득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서 비너스버그를 떠나 참회를 하기 위해 교황 우르반 4세(Urban IV: 1195-1264)를 찾아간다. 교황은 탄호이저의 참회를 받기를 거부하고 만일 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에서 새 잎들이 돋아 난다면 그때 용서를 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절망에 빠진 탄호이저는 다시 비너스에게로 간다. 그런데 사흘 후에 놀랍게도 교황의 지팡이에서 새 잎이 돋아나왔다. 교황은 탄호이저를 찾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바그너가 첫번째로 참고로 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회르젤버그. 산정에 있는 건물이 비너스의 궁전였다는 얘기가 있다.

 

두번째로 바그너가 참고로 한 이야기는 전설적인 음유시인인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Heinrich von Ofterdingen)이 중세 독일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음유시인 헤르만 폰 튀링겐(Hermann von Thüringen)과 란트그라프(Landgraf)의 성에서 운명을 걸고 벌인 노래경연대회에 대한 것이다. 폰 오프터딩겐의 노래경연대회는 마법을 사용하는 헝가리의 클린쇼르(Clinschor: Klingsor와 비슷한 이름)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다. 란트그라프라는 단어는 지상의 백작이라는 뜻이므로 속세를 의미한다. 아무튼 이 노래경연대회의 과정에서 나중에 성녀로 인정을 받은 '헝가리의 엘리자베트'가 태어난다. 엘리자베트는 나중에 튀링기아의 란트그라프 헤르만 1세의 아들과 결혼한다. 헤르만 1세의 아들은 나중에 복자 루드비히라고 불린 훌륭한 인물이다. 바그너는 오프터딩겐에 대한 전설을 상당히 재편성하여 역사적 인물인 탄호이저를 신화적 존재인 오프터딩겐로 비유하였으며 시기도 헤르만 1세가 튀링기아를 통치하던 1250년 경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헤르만 1세의 며느리가 된 엘리자베트를 헤르만 1세의 조카로 설정하였으며 바로 그 엘리자베트를 탄호이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 설정했다. '탄호이저'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듯 두 가지의 독일 전래 전설을 융합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그너는 실존 작가들이 작품으로부터도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유명한 민요인 Des Knaben Wunderhorn(어린아이의 이상한 뿔피리: 나중에 구스타프 말러가 가곡으로 만들었음), 하인리히 하이네의 Der Tannhäuser: Eine Legende(탄호이저의 전설), E.T.A. 호프만의 Der Kampf der Sänger(노래경연대회: Die Serapions-Brüder에 포함된 시), 그리고 아마도 칼 마리아 폰 베버의 Der Freischütz(마탄의 사수)로부터도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실제로 바그너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인지 '마탄의 사수'와 '탄호이저'는 구조 면에서 같은 형태가 많이 있다. 그리고 베버도 한때 비너스버그에 대한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했었다.

 

탄호이저와 비너스. 작품제작연도 불명.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독일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새로운 버전의 공연은 대실패였다. 파리에서의 실패는 예술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 및 개인적 이유가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창호이저'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을 가지기 2년 전인 1859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연합군을 솔페리노전투에서 크게 패배시킨 후였다. 그래서 프랑스로서는 독일인에 대하여 우쭐하는 심정이 있었다. 그러한 차에 바그너의 오페라가 파리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전쟁에서 지니까 이번에는 오페라를 가지고 반격하러 왔네'라면서 비아냥거렸다. '탄호이저'를 빗댄 말이었다. 당시에 파리의 오페라계에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을 조키 클럽이라고 불렀다. 주로 상류층 귀족들로 구성된 클럽이었다. 그런데 파리에서의 '탄호이저'는 나폴레옹 3세와 오스트리아 대사의 부인인 마담 폰 메테르니히가 바그너를 후원하여서  초연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 조키 클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프랑스의 적대국인 것을 염두에 두고 은근히 '탄호이저'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던 것이다. 또 한가지 구체적인 실패의 요인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파리의 오페라는 중간 부분에 발레를 넣는 것이었다. 조키 클럽(Jocky Club)의 멤버들은 저녁 늦게, 발레가 공연될 쯤해서 오페라 극장을 찾아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바그너는 그런 관례를 넌센스라고 일축하고 발레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가 그래도 발레를 맛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1막의 비너스버그 장면에 발레를 넣었다. 그러므로 조키 클럽의 멤바들은 늦게 나타났기 때문에 발레를 볼수 없었다. 조키 클럽이 '탄호이저'를 규탄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너스버그에서의 관능적인 무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탄호이저' 공연은 겨우 세번으로 막을 내렸다. 바그너로서는 조키 클럽 멤버들과 클레이크(훼방꾼)들이 호각을 불고 야유를 퍼붓는 바람에 더 이상 공연을 계속할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탄호이저'는 3회의 공연을 마치고 바그너의 요청에 의해 무대에서 철수되었다. 그런데 바그너를 더 속상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탄호이저'를 위해 만들었던 세트와 의상들을 바로 그 다음에 공연되는 마이에르베르의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에서 그대로 사용키로 한 것이다. 바그너의 유태인에 대한 혐오감은 유명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라면서 그의 작품들을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를 위해 거룩한 '탄호이저'의 세트와 의상들을 사용한다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탄호이저'는 비록 파리에서 대참사로 막을 내렸지만 파리 버전은 여러 나라에서 점차 뜨거운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탄호이저'는 무대 공연으로서 뿐만 아니라 콘서트로서도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해리슨 포드, 룻거 하우거 등이 출연하는 1993년도 할리우드 영화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의 탄호이저 게이트는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최근 '탄호이저' 무대. 비너스 역에 소프라노 니나 스템메(Nina Stemme)

 

오페라 '탄호이저'의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 비너스버그는 어디인가? 독일 아이제나하 인근의 회르젤버그인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봐르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은 봐르트부르크 성에 있는 예술의 전당을 말한다고 한다. 탄호이저의 이름은 하인리히라고 되어 있지만 그 이름은 다만 출연자 리스트에만 등장할 뿐이다.

- 시대적 오류? 오리지널 전설에는 탄호이저가 교황 우르반 4세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르반 4세는 프랑스 트로에 출신으로 구두장이의 아들이었다. 우르반 4세는 1261년부터 3년간 교황으로 있었다. 오페라에서는 헤르만 영주는 121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살아 있을 때에 탄호이저가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약 40여년이란 세월의 차이가 있다.

- 하인리히라는 이름은 인물은 바그너의 영웅 중에서 그다지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는 인물이며 엘리자베트나 볼프람보다 덜 소중한 존재이다.

- '탄호이저'에서는 베이스나 바리톤이 좋은 사람의 역할을 맡는다. 다른 오페라 같으면 악마, 악한을 베이스나 바리톤이 맡지만 '탄호이저'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인리히 자신은 테너이다.

- 반면에 오페라에서 가장 사악한 여인인 비너스는 가장 낮은 음성인 콘트랄토가 맡는다.

- 로마에 대한 모티프 등 몇가지 모티프는 팡파레의 형식으로 연주된다. 축제의 행진을 소개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바이로이트에서는 어떤 모티프를 각 막의 시작을 알리는 목적으로 페스트슈필하우스의 발코니에서 팡파레로서 울리고 있다.

- 팜 파탈(Femme fatale)는 당연히 비너스이다.

- 탄호이저는 타이틀이기도 한데 오페라에서는 단 한번도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경우가 없다. 오프터딩겐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 교황의 지팡이에서 새로운 잎들이 돋아나는 장면에서는 무대 뒤에서 잎이 달린 지팡이를 준비하고 있다가 얼른 바꿔치는 방법을 택하였다. 어떤 공연에서는 지팡이에서 장미꽃이 만발하여 피는 것으로 연출하였다.

- 오페라의 시기는 12-13세기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출연자들의 복장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주로 14세기 초반의 만네스 코덱스(Mannes Codex)에 의한 의상을 사용하고 있다. 오리지널 탄호이저는 튜톤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

- 역사적인 인물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는가? 탄호이저는 대략 1205년에 태어나서 1270년 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정설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하인리히라고 한 것은 석연치 않다. 아마도 리우트폴트(Liutpolt)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들이다. 리우트폴트 탄호이저는 13세기 중엽의 민네징거(음유시인)로서 그의 노래와 시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튜링기아의 영주(Landgrave)인 헤르만(약 1160-1217), 중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 약 1175-1230), 중세의 서술시인인 발터 폰 데어 보겔봐이데(Walter von der Vogenweide: 약 1175-1230), 중세 독일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인 하인리히 데어 슈라이버(Heinrich der Schreiber: dir 1180-1230), 그리고 라인마르 폰 츠베터(Reinmar von Zweter: 약 1200-1250)들은 모두 실존인물들이다.

 

라모 비나이가 타이틀 롤을 부른 '탄호이저'의 음반 커버

 

- 라이트모티프는 '탄호이저'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들에서처럼 중점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탄호이저'에서는 타이틀 롤 보다는 비너스와 로마를 특정 짓는 라이트모티프가 사용되었다.

- 턴호이저의 친구로서 마치 소녀처럼 순진한 성격의 사람은 테너가 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관능적인 하인리히는 테너가 맡도록 했지만 보다 순진한 볼프람은 바리톤으로 설정했다.

- '탄호이저'에서는 다른 비극적인 오페라와는 달리 어느 누구도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를 역사적인 인물인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1207-1231)라고 간주한다면 그가 성녀로 시성되기 전에 고통을 당한 일이 있지만 그것을 오페라에서의 고통이라고 내세우기는 어렵다. 역사에서는 엘리자베트가 헤르만 1세의 아들로서 '복자 루이스'(Blessed Ludwig: 루드비히)와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비너스버그에서의 오프닝 발레는 사연이 있는 장면이다. 바그너가 '탄호이저'를 수정하여 1861년 파리에서 초연을 가질 때에 파리의 오페라극장 측은 바그너에게 밤 늦게 오는 사람들을 위해 발레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른바 왕당파인 조키 클럽의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늦은 저녁을 즐기고 난 후에 천천히 오페라를 보러 온다. 이들의 좌석은 박스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입장에 걱정이 없다. 이들이 극장에 도착하고나면 오페라는 대개 2막이 끝나고 3막이 시작되려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때 발레를 공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파리의 탄호이저' 항목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극장측이 바그너에게 발레를 추가해 달라고 하자 바그너는 '넌센스'라고 소리치며 거절했다. 그러다가 발레가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1막의 비너스버그 장면에 야한 발레를 넣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된 조키 클럽 멤버들이 난리를 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우정의 힘(The Power of Friendship)은 볼프람으로 하여금 하인리히를 구하려고 노력하도록 한다.

-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은 엘리자베트로 하여금 하인리히를 구하고자 노력하도록 한다. 하인리히는 엘리자베트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자 한다.

- 오페라에서 말하는 프린세스 클래식(Princess Classic)은 엘리자베트를 말한다.

- 독일 제3제국과의 연계? 1972년 괴츠 프리드리히가 바이로이트에서 제작한 '탄호이저'에서는 헤르만 영주과 귀족들을 나치 친위대의 복장을 입혀서 출연토록 했다. 무슨 의미였을까?

- 번역에 또 번역. '탄호이저'의 대본은 다른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바그너가 썼다. 드레스덴 초연을 위해서는 독일어로 썼다. 그러다가 1861년 파리 초연을 위해서는 독일어 대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했다. 게다가 바그너는 파리 초연을 위해 대본의 상당부분을 고치거나 새로 썼다. 파리 버전이 표준 버전처럼 되자 프랑스어로 된 대본을 다시 독일어로 번역해야 했다.

- 바그너가 처음에 탄호이저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 때에는 제목을 Der Venusberg(비너스버그)라고 붙였다. 그러나 이 말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어로는 La Monte de Venus라고 번역해야 했다. 그런데 이 말은 Mont de Venus라는 표현과 발음이 같았다. '비너스의 마운드'라는 뜻이다. 마운드는 야구장에서 투수의 마운드처럼 평지에 흙을 조금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도 있다. 비너스의 유방을 '몽 드 비너스'라고 부를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표현은 곤란했다. 결국 '탄호이저'로 결정했다.

 

1845년 드레스덴 초연에서의 스케치. 탄호이저와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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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실제로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은 어떤 내용일까? 중세 독일의 뛰어난 음유시인(Minnesänger)이며 시인인 탄호이저는 교황 우르반 4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교황은 1264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탄호이저는 1265년 이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로부터 2백여년이 지난 후에 교황 우르반 4세는 탄호이저 전설의 중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탄호이저에 대한 발라드에서 우르반 4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30년이었으며 그에 대한 발라드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1450년부터이다. 전설에 따르면 기사이며 시인인(중세에는 음유시인들이 거의 모두 기사였음) 탄호이저는 비너스버그에 있는 비너스의 동굴에서 비너스와 함께 1년여를 지낸다. 그러다가 환락의 생활을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서 비너스버그를 떠나 로마로 간다. 교황 우르반 4세에게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이다. 교황은 탄호이저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해준다. 실망한 탄호이저가 다시 비너스버그로 떠난지 사흘 후에 놀랍게도 교황의 지팡이에서 꽃이 피어난다. 교황은 즉시 탄호이저를 불러오라고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미 비너스버그로 떠난 후였으며 그후 아무도 탄호이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공연히 교황 우르반 4세가 등장하는 바람에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듯 비쳤지만 그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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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버그에서의 탄호이저와 친구들인 하인리히, 볼프람 ...

 

탄호이저가 비너스와 함께 지냈다고 하는 비너스버그(Venusberg)는 어디에 있는 어떤 곳인가? 비너스버그는 독일 튀링기아 지방의 아이제나하와 고타(Gotha)의 사이에 있는 산악지대의 지점으로 회르젤버그(Hörselberg)라고도 부른다. 비너스버그의 산속에 있는 동굴에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비너스버그에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한 파멸을 의미한다. 한번 들어갔으면 절대로 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곳에서 1년 이상을 지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로마 교황 우르반 4세에게 참회를 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나 용서함을 받지 못하자 다시 비너스버그로 돌아온다. 이 내용이 16세기에 나온 Lied von dem Danheuser(단호이저의 노래)에 표현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바그너가 1845년에 3막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완성했다. 오페라에서는 1막 비너스궁전에서 관능적이고 애욕적인 파티가 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인리히 하니네의 간결한 시인 Tannhäuser: Eine Legende(탄호이저의 전설)에는 탄호이저가 비너스버그에서 무려 7년을 보낸 것으로 그려져 있다. 알제르농 샤를르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은 Laus Veneris라는 시에서 탄호이저를 1인칭으로 다루었다.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는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을 주제로하여 소설을 썼다. 안소니 파월(Anthony Powell)은 Venusberg 라는 소설을 썼다. 공상과학 영화인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에 나오는 탄호이저 게이트는 기사가 상상속의 에로적인 모험의 장소로 들어갈수 있는 길목을 말한다. 독일의 본(Bonn)에는 비너스버그라는 장소가 있다. 봐르트부르크(Wartburg)라고 하니까 TV에서 말하는 The Alleged Car의 이름인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독일 튜링기아 지방의 아이제나하 인근에 있는 회르젤버그의 어떤 동굴의 입구. 사람들은 이 동굴을 비너스동굴(베누스그로테)라고 부르며 '탄호이저'에 나오는 비너스버그가 이 동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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