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성배에 대한 열광

정준극 2013. 4. 8. 08:25

성배에 대한 열광(Holy Grail Crazy)

1903년 메트로폴리탄 초연 이후의 파르치팔 이야기

 

1882년 7월 26일 '파르지팔'의 바이로이트 초연 무대 스케치. 3막의 피날레 장면

 

바그너의 '파르지팔' 만큼 세계적인 논란에 휩싸인 오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논란은 메트로폴리탄의 첫 '파르지팔' 공연에 얽힌 것이었다. 그 내막을 알아보자. '파르지팔'(Parsifal)은 1882년 7월 26일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바그너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초연되고나서 약 반년 후인 1883년 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인 코지마와 주변 사람들에게 다른것은 몰라도 '파르지팔'만은 바이로이트 극장에서만 공연하도록 당부했다. 바이로이트 극장이 거룩한 성배이야기를 다룬 '파르지팔'을 공연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며 만일 다른 곳에서 무대에 올린다면 원래 바그너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제작될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망인인 코지마는 바그너의 당부를 충실히 지켰다. 다른 곳에서 공연하겠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도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되는 해인 1903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이 바이로이트의 사전허락이 없이 '파르지팔'을 공연했다. 당시에는 예술작품에 대한 저작권법이 온전하지 못했고 더구나 나라에 따라 적용내용이 달랐다. 코지마는 메트로폴리탄가 신성한 '파르지팔'을 공연한다는 계획을 파악하고서 발끈했다. 절대 안된다고 통보를 했다. 메트로폴리탄은 미국의 저작권법을 내세우면서 공연할수 있다고 나섰다. 미국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작가의 사후 20년 이내에만 저작권을 행사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작가의 사후 30년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아무튼 법적으로는 메트로폴리탄의 공연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극도로 속이 상한 코지마는 달리 법적으로 제재할수는 없으므로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했던 음악가들의 바이로이트 출연을 보이콧했다. 특히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에 출연했던 사람들로서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하였으면 원수처럼 여겨서 다시는 바이로이트의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 아무튼 '파르지팔'을 두고 별별 일이 다 있었다. 그래서 2013년 바그너 탄생 200 주년을 맞이하여 메트로폴리탄에서의 '파르지팔' 미국초연에 대한 이야기와 그 후의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정리해 보았다. '파르지팔'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사실 이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은 코지마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 그리고 영향력있는 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르지팔'을 무대에 올렸다. 바그너가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다 잘 아는 내용이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의 정결하고 순화된 분위기, 특별히 설계된 오케스트라 피트, 그로 인하여 창조되는 독특한 음향 등으로 바이로이트가 '파르지팔'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최적의 장소라고 주장했었다. 그렇지만 바그너는 약간의 여유도 남겼다. 바이로이트 극장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면 세계의 어느 극장에서 공연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재정적으로 기여하는 경우여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오페라 공연료를 많이 준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기야 거의 평생을 빚에 쪼들리면서 살다가 이제 겨우 정착한 바그너로서 돈을 좀 더 벌어서 가족들에게 남겨주고 또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가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돈도 돈이지만 우선 '파르지팔'이 제대로 공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삼강조하였다. 바그너의 생전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바그너가 직접 잔소리를 부어대며 공연을 감독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파르지팔'의 공연 책임은 코지마에게 넘어갔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신조를 영원히 굳게 지키기로 다짐했다. 세월이 흘러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지도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한다는 서약은 분명하게 준수되었다. 물론 콘서트 형식으로는 이곳저곳에서 연주되었다. 전체가 아닌 단편적인 부분의 공연도 있었다. 예를 들면 1막만 공연한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 공연은 없었다. 그러다가 1903년에 메트로폴리탄이 '파르지팔' 전편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메트로폴리탄은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보다 더 훌륭하게 공연할수 있다고 자부했다. 바그너의 의도대로 '파르지팔'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무대에 올릴수 있다고 다짐했다.

 

돌이켜보건대 1800년대 말, 뉴욕과 바이로이트는 대단히 먼 거리였다. 지금처럼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1882년에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초연한다는 소식이 뉴욕에 전해지자 뉴욕의 바그너 애호가들은 비록 바이로이트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바이로이트의 '파르지팔'에 대하여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뉴욕의 신문들은 그런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뉴욕의 신문들은 '파르지팔'의 스토리, 음악적 특성, 그리고 장황할 정도로 긴 '파르지팔' 분석을 거의 연일 게재하였다. '아니, 파르지팔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신문에서 이렇게 난리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다. 비록 1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절인데 지금 보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와 같다. 1882년 7월 26일, 드디오 '파르지팔'이 바이로이트에서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괴팍하고 까다롭기 이를데 없는 바그너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을 했다. 바그너의 대승리였다. 사람들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파르지팔'의 성공을 본 바그너는 이제 '링 사이클'을 무대에 올려도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 사이클'은 1876년의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처음 선을 보였으나 실패였다. 특히나 경제적으로 실패였다. 바그너에게 경제적 재앙을 가져다 준 '링 사이클'이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 이후로 몇년 동안 빚을 갚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바그너는 새로운 작품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위해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악가들을 캐스팅했다. '링 사이클'에서 브륀힐데를 맡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아말리에 마테르나(Amalie Materna)에게 쿤드리를 맡기기로했다. '신들의 황혼'에서 하겐(Hagen)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했던 베이스 에밀 스카리아(Emil Scaria)는 구르네만츠를 맡도록 했다. 그리고 신예로서 훗날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대스타가 된 테너 헤르만 빈켈만(Hermann Winkelmann)이 타이틀 롤을 맡도록 했다.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의 초연에는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때와 마찬가지로 헌신적인 바그너 팬들이 운집하는 문화행사였다. 비평가들도 왔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온 사람들도 있다. 어떤 평론가는 '차이나와 캘리포니아로부터' 사람들이 왔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파르지팔'을 보러 왔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도 여러 명이 사절단 형식으로 왔다. 그중에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의 한 사림인 레오폴드 담로슈(Leopold Damrosch)의 아들로서 무대감각이 뛰어난 젊은 지휘자 겸 작곡가인 월터 담로슈(Walter Damrosch: 1862-1950)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그너는 당시 20세 불과한 담로슈를 만나서 '파르지팔'의 1막 피날레의 악보를 주면서 뉴욕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금명간 뉴욕에서도 공연될 것이라고 짐작하여 미리 포석을 놓은 것이다.

 

'파르지팔'의 뉴욕 전파에 기여가 컸던 월터 담로슈

 

레오폴드 담로슈는 그해 11월 4일에 그의 아들이 바이로이트에서 직접 가지고 온 악보를 가지고 '파르지팔'의 1막을 뉴욕 음악아카데미에서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날 같은 시간에 미국의 또 다른 마에스트로인 테오도어 토마스(Theodore Thomas)가 '파르지팔'의 3막을 브루클린에서 공연했다. 뉴욕의 신문사들은 비록 전체가 아니지만 바그너의 신작 '파르지팔'을 뉴욕의 두 장소에서 각각 공연하게 되자 두 행사를 모두 취재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이날의 공연은 어느 편이 더 감동적이었고 더 성공을 거두었느냐 하는 것을 떠나서 바그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대폭 올려 놓은 것이었다. 며칠후 담로슈는 다시 1막만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을 갖게 되었다. 수백명의 바그너 팬들이 소문을 듣고 드레스 리허설을 보러 왔다. 그만큼 열광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제 공연은 실망만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합창단원들은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암포르타스를 맡은 솔로이스트는 늦게 도착한데다가 그의 독백 장면은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듣기에 힘들었다. 오히려 지휘자가 성배의 왕인 암포르타스의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이끌어나가느라고 나름대로 진땀을 빼야 했다. 반면, 테오도어 토마스 쪽의 3막 공연이 운이 좋았다. 브루클린의 관중들은 비록 3막에 한정된 것이지만 토마스의 지휘로 공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건 그렇고 어찌하여 1막과 3막만을 공연했는가 하면 바그너의 주장대로 '파르지팔' 전체를 바이로이트 이외의 장소에서 공연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뉴욕의 바그너 팬들은 전체 '파르지팔'의 공연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지만 않아도 좋게 되었다. 뉴욕 음악아카데미와 브루클린에서 1막과 3막의 공연이 있은지 사흘 후인 1883년 2월 13일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바그너 서거 소식을 들은 담로슈는 재빨리 다음 연주회의 레퍼토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파르지팔'에서의 '성금요일의 음악'(Good Friday Spell)에 이어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장송곡을 추가하였다. 그래서 다음 연주회는 바그너를 추모하는 행사가 되도록 했다. 한편, 토마스는 뉴욕합창연맹과 함께 '파르지팔' 2막에 나오는 '꽃처녀들의 장면'을 레퍼토리에 넣어 바그너를 추모하였다. 그후 뉴욕 신문들은 다른 사건들 때문에 '파르지팔'에 대한 기사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파르지팔'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갔다. 다른 사건들이란 당시 뉴욕에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브로드웨이와 39번가 사이의 코너에 건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뉴욕 음악아카데미와의 별로 신통치도 않은 전쟁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1884년에 '파르지팔'은 메트로폴리탄의 개관기념 시즌이 끝나자 다시한번 논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토마스는 메트로폴리탄을 빌려서 바그너 콘서트 시리즈를 구상하였다.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의 역사적인 초연이 있을 때 출연했던 세 사람의 주역, 즉 테너 헤르만 빈켈만(파르지팔), 베이스 에밀 스카리아(구르네만츠), 아밀리에 마테르나(쿤드리)의 세 사람을 초청한 것이다. 사실 이 세사람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의 다른 장소에서의 공연을 금지한다고 했지만 공연을 금지했던 것이지 출연자까지 출연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생각없이 토마스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을 승락했던 것이다. 토마스와 세명의 금고털이와 같은 성악가들은 서반구에서는 '파르지팔'을 연주회 형식이나마 처음으로 완주하였다. 세명 중에서 아말리 마테르나는 미국 팬들에게 낯설지 않은 사람이었다. 1882년에 역시 토마스가 주관한 '5월 페스티발' 연주여행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테르네는 기자 회견에서 바이로이트 공연을 위해 상당히 어려운 역할을 연습 중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바 있다. 1884년, 바이로이트 트리오가 뉴욕에 도착하고난 이틀 후에 이들의 콘서트는 매진되었다. 토마스는 첫번째 콘서트의 입장권이 매진되자 기분이 좋아져서 두번째 콘서트를 준비하지 않을수 없었다. 바이로이트 트리오는 미국에 도착하여 이러한 환영을 받게 되어 매우 감동했다.

 

쿤드리(아말리 마테르나)와 파르지팔(헤르만 빈켈만). 바그너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성악가들이다.

 

뉴역의 바그너 애호가들은 마침내 바그너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성악가들의 음성을 직접 들을수 있게 되었다. 콘서트에서는 '링 사이클'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노래들을 들을수 있었다. 가장 흡족했던 것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파르지팔'의 노래를 바이로이트 트리오의 음성으로 들었다는 것이었다. 뉴욕의 바그너 애호가들은 바그너 음악의 진면목을 감상할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했다. 그로부터 몇 달후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메트로폴리탄)의 이사회는 제작비만 많이 드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부담을 버리고 독일 오페라로 방향을 바꾸었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중심에 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의 바그너 오페라는 레오폴드 담로슈가 지휘를 맡았다. 토마스는 미숙한 메트로폴리탄이 어떻게 바그너를 맡을수 있을까라며 실망을 표명했다. 그런데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담로슈의 바그너 오페라는 상당히 행운이 깃든출발을 했다. 1885년 1월 30일 '발퀴레'의 미국 초연에 아말리에 마테르나(1844-1918)가 출연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장크트 게오르겐에서 태어난 아말리에 마테르나는 잘 아는대로 1882년 바이로이트에서의 '파르지팔' 초연에서 쿤두리를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이다. 아말리에 마테르네의 출연으로 미국의 오페라계는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는 셈이 되었다. 과연! 이탈리아 오페라에 식상하고 있던 뉴욕의 오페라 팬들은 보다 이상적이고 보다 진실된 음악언어로 만들어진 독일 오페라에 대하여 열광하였다. 레오폴드 담로슈는 얼마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이후에 메트로폴리탄의 무대에 올려지는 바그너의 작품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담로슈의 공로로 메트로폴리탄은 신세계에서 바그너의 작품들을 이상적으로 해석하는 명소가 되었다.

 

1882년 바이로이트에서의 '파르지팔' 초연에서 쿤드리를 맡았던 소프라노 아말리에 마테르나

 

레오폴드 담로슈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아들인 월터는 뉴욕에 있는 바그너의 역량과 열광을 한 자리에 모으고 싶어했다. 월터는 특히 '파르지팔'을 어떤 형태로든 뉴욕의 바그너 애호가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메트로폴리탄을 예약하고그가 운영하고 있는 오라토리오협회로 하여금 '파르지팔'의 대표적인 곡들을 발표토록 했다. 월터에게 있어서나, 메트로폴리탄에게 있어서나 '파르지팔'은 마지막 숨겨  놓은 카드였다. '파르지팔' 합창발표회는 대환영을 받았다. 다만, 세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때문에 지루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메트로폴리탄은 '파르지팔'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이 의외로 호의적이자 매니저들은 다음 시즌에 아예 '파르지팔'의 전막을 무대에 올릴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메트로폴리탄의 대표적인 디바인 릴리 레만(Lilli Lehmann)이 그러면 안된다고 하면서 나섰다. 릴레 레만은 바그너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서 '파르지팔'을 공연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만일 메트로폴리탄이 그런저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파르지팔'을 공연한다면 바이로이트에 피해를 주게 될 것이며 또한 메트로폴리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 출신 성악가들의 입장만 아주 거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월터가 '파르지팔'을 합창형태로 콘서트를 가진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메트로폴리탄의 새로운 수석 지휘자로 임명된 안톤 자이들(Anton Seidl)의 분노케 만든 것이었다. 안톤 자이들을 메트로폴리탄에 초빙한 것은 월터 담로슈였다. 그런데 안톤 자이들이 정작 메트로폴리탄에 와서 보니 자기의 무언지 모르겠음을 느꼈다. 중요한 결정은 모두 월터 담로슈가 맡아했다. 음악적인 문제까지도 월터의 얘기로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월터가 '파르지팔'을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자 안토 자이들은 '아니, 나하고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그럴수가 있느냐?'면서 발끈해 했다. 메트로폴리탄의 '파르지팔'은 월터와 안톤 자이들의 관계를 아주 소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안톤 자이들은 메트로폴리탄이 '파르지팔'을 공연한다는 것은 바그너 선생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상 자이들로서는 '파르지팔'을 자기가 주도하여 뉴욕에 소개되어야 모양새가 좋은데 그렇지 못하게 되어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르지팔'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과거 몇 년 동안 뉴욕에서는 간헐적이나마 '파르지팔'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 운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인 안톤 자이들(1850-1898). 뉴욕에 와서 많은 활동을 했다.

 

안톤 자이들은 메트로폴리탄에 소속 되어 있으면서도 1890년에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에서 '파르지팔'을 콘서트 형식으로 전막을 연주한 일이 있다. 아마 월터의 처사에 대하여 용심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자이들이 지휘하는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의 무대는 수많은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무대배경도 마치 오페라에서처럼 3막의 성배의 전당 그림으로 채워졌다. 메트로폴리탄 배경담당 화가들이 그린 것이었다. 비록 콘서트 형식의 연주회였지만 출연진은 스타급이었다. 릴리 레만이 쿤드리를 불렀다. 릴리 레만의 쿤드리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이로이트의 오리지날 '파르지팔'에서 암포르타스를 불렀던 테오도르 라이히만(Theodor Reichmann)도 출연했다. 합창단은 시간이 촉박해서 단원들을 모으지 못하는 바람에 없는 것으로 했다. 안톤 자이들은 '파르지팔'의 전막을 콘서트로 연주하면서 1막과 3막의 합창 부분은 삭제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이들의 성배의 전당에서는 성배의 기사들을 찾아볼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평론가들은 자이들의 업적을 치하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1886년 3월에 월터 담로슈가 주관하여 가진 오라토리오협회의 '파르지팔' 발표회에 비하여 우수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자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노에 휩싸였다. 하여튼 그러한 일이 있었다.

 

1903년에 메트로폴리탄의 신임 매니저로 부임한 하인리히 콘리드(Heinrich Conried)는 느닷없이, 또는 오랜 생각 끝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첫 시즌에 '파르지팔'의 전막을 정식으로 공연하겠다고 발표했다. 메트로폴리탄은 루비콘강을 이미 건너갔다. 그런 소식이 전해지자 사방에서 반응이 왔다. 상상외의 논란이 벌어졌다. 코지마는 메트로폴리탄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다. 뉴욕의 바그너 협회들은 뉴욕시장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공연을 중지토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코지마는 메트로폴리탄의 처사를 고인이 된 바그너와 자기에게 보내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법적으로는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 코지마가 굳이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인리히 콘리드의 '성배 폭행사건'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바이로이트에서  무대에 설수 없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만이 '파르지팔'을 절대적으로 우수하게 공연할수 있다는 주장도 얼마가지 않아서 유야무야가 되었다.왜냐하면 메트로폴리탄의 공연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바이로이트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메트로폴리탄에서 지휘했던 알프레드 헤르츠(Alfred Hertz)를 비롯하여 알로이스 부르그슈탈러(Alois Burgstaller), 밀카 테르니나(Milka Ternina), 안톤 반 로이(Anton van Rooy), 로버트 블라스(Robert Blass)등은 바이로이트가 혹시 바이로이트에 출연할수 없겠느냐고 타진해오자 두말 하지 않고 바이로이트에 갔다. 물론 '파르지팔'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탄의 '파르지팔'은 1903-04년 시즌에 12회의 공연을 가졌다. 매 공연 때마다 관중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찼다. 박스의 좌석 값은 1인당 10달러였다. 오케스트라 좌석이 5달러 였던 것과 비교하면 배나 비싼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고 몰려왔다. 메트로폴리탄의 매니저인 하인리히 콘라드는 다음번 시즌에도 무려 8회나 더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드디어 주요 도시 순회공연에 나섰다. 보스턴으로부터 시작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 중간에 있는 소도시들로서 오페라를 보기가 어려웠던 도시들도 방문하여 '파르지팔'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내시빌이나 버밍햄이었다. 그러나 소도시에서는 콘라드의 '파르지팔'을 더 이상 볼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라이발 흥행가인 헨리 새비지(Henry Savage)라는 사람이 콘리드의 성공을 보고 배가 아파서인지 하여튼 메트로폴리탄 잉글리쉬 그랜드 오페라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오페라단은 '파르지팔'을 영어로 공연했다. 그래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콘리트의 오리지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비하여 인기를 끌었다. 콘리드의 메트로폴리탄은 스타로서 대적하였다. 콘리드는 당대의 올리브 프렘스타드(Olive Fremstad)와 릴리안 노르디카(Lillian Nordica)와 같은 뛰어난 성악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헨리 새비지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정상급 출연진이었다. 하지만 헨리 새비지의 무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헨리 새비지의 무대가 더 환상적으로 제작된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헨리 새비지는 관중들이 바이로이트의 느낌을 가질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피트를 바이로이트처럼 만들었고 인터미션 시간에는 트럼펫을 불어서 마치 바이로이트의 객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쿤드리의 올리브 프렘스타드. 메트로폴리탄. 1913. 스웨덴계의 미국 소프라노.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시간이 지나자 '파르지팔'에 대한 열기도 식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르지팔'에 대한 노도광풍의 기간 중에 메트로폴리탄은 3개 시즌에 43회의 공연을 기록하였고 헨리 새비지의 순회공연은 무려 2백회나 기록하였다. '파르지팔'에 대한 열기가 식게 된것은 올리브 프렘스타드의 무대은퇴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 올리브 프렘스타드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지막으로 쿤드리를 공연하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은퇴를 애석해 했다. 그로부터 '파르지팔'은 다른 작품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잊혀지지는 않았다. 매년 추수감사절과 고난주간의 성금요일에는 '파르지팔'을 공연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은 대표적인 일이다. 코지마는 콘리드의 제작에 참여하여 메트로폴리탄에서 한번이라도 '파르지팔'을 불렀으면 약속대로 그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오페라 제작은 비즈니스였다. 코지마의 고집스런 아이디얼리즘도 비즈니스 앞에서는 순화되지 않을수 없었다. 메트로폴리탄의 첫 파르지팔인 알로이스 부르그슈탈러는 1908-1909년 시즈에 바이로이트의 초청을 받아 '파르지팔'을 공연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테너 알로이스 부르그슈탈러. 파르지팔, 지그프리트 등으로 메트로폴리탄의 보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