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호이저의 무대
봐르트부르크와 비너스버그
봐르트부르크성의 위용. 인근의 어느 곳에 비너스버그가 있으며 그곳의 동굴에서 탄호이저가 비너스와 함께 7년동안 지냈다고 한다.
'탄호이저'라고 하면 우선 봐르트부르크성과 비너스버그 동굴이 생각난다. 봐르트부르크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성이다. 독일 중부 투링기아 주의 아이제나하(Eisenach) 인근에 있는 중세로부터의 고성이다. 마치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고성과 같다. 이제 '탄호이저'의 무대로도 사용되었던 봐르트부르크성에 대하여 점검해 보자. 봐르트부르크성은 해발 410m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봐르트부르크성에서는 주변의 울창한 숲과 아이제나하가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유네스코는 1999년에 봐르트부르크성을 세계유산(월드 헤리티지) 리스트에 추가하였다. 중부 유럽에서 중세 봉건시대를 볼수 있는가장 기념비적인 장소라는 이유에서였다. 아이제나하는 독일에서도 가장 신비스런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봘푸르기스나하트(Walpurgisnacht)장면이 이 곳 인근의 하르츠 숲에서 벌어진다고 알려져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또 한가지는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가 1521년부터 1년동안 봐르트부르크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가 마르틴 루터를 파문하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안전을 걱정한 작소니 선제후인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 1463-1525) 왕의 요청에 의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융커 외르크(Junker Jörg: 기사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라틴어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루터가 처음이 아니지만 그가 번역한 것이 가장 쉽고도 정확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실제로 봐르트부르크성에는 아직도 소박한 ‘루터의 방’이 있어서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사연은 아무래도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1845)때문일 것이다. '파르지팔'에서 음유시인들의 노래경연대회가 열린 장소가 바로 봐르트부르크성의 대접견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그너의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탄호이저’의 노래경연을 머리 속에 그리며 이곳을 마치 성지처럼 생각하여 찾아오고 있다.
봐르트부르크성의 위용
'탄호이저'와 관련하여 봐르트부르크성의 인근 어느 곳에는 비너스버그(Venusberg)도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비너스버그에 있는 동굴에서는 비너스를 비롯한 아름다운 여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이곳을 지나는 기독교 기사들을 유혹하여 붙잡아 두고 환락의 세월을 보내게 하여 결국 십자군전쟁과 성배를 찾아야 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망각한채 죄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봐르트부르크와 비너스버그는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모두 연관된 장소이다. 음유시인인 탄호이저는 봐르트부르크에서의 노래경연대회에서 실패하고 절망한 중에 비너스버그에 가서 비너스의 품안에서 7년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독교적 도덕 이야기인 존 키츠의 La Belle Dame sans Merci(무정한 아름다운 여인: 초자연적인 요부를 사랑하다 멸망해버린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것) 또는 고전적인 신화인 Odysseus and Calypso(오딧세이와 칼립소)를 연상토록 해주는 것이다.
'탄호이저'의 한 장면. 비너스버그에서의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장면
봐르트부르크성은 1440년까지 투링기아 영주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1207년부터는 노래경연대회(쟁거크리그: Sängerkrieg)의 장소로서 사용되었다. 당시 노래경연대회는 웬만한 궁정에서의 전통이며 문화였다. 쟁거크리그는 당대의 음유시인(민스트렐)들이 참가하는 경연대회로서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볼프람 폰 아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 알브레헤트 폰 할버슈타트(Albrecht von Halberstadt) 등이 참석한 것이었다. 봐르트부르크성에서의 노래경연대회는 나중에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시작(詩作)경연대회를 겸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것은 다 아는 내용이다. 봐르트부르크는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헝가리의 엘리자베트는 네 살 때에 봐르트부르크로 보내졌다. 훗날 투링기아의 루드비히 4세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트는 1211년부터 1228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수많은 덕행을 쌓아 많은 칭송을 받았다. 엘리자베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봐르트부르크에서 3년을 더 살다가 마르부르크(Marburg)로 가서 살았다. 엘리자베트는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엘리자베트를 성녀로서 시성했다.
봐르트부르크성내에 있는 루터의 방. 루터는 이 방에서 라틴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유명한 재세례주의자(Anabaptist)인 프리츠 에르베(Fritz Erbe)는 1540년으로부터 1548년까지 봐르트부르크 성의 지하감옥에 갇혀 지냈다. 헤르다의 농부인 그는 재세례주의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갇혀 지냈다. 프리츠 에르베가 죽자 그의 시신은 봐르트부르크 성내의 성엘리자베트 교회 부근에 매장되었다. 1925년에는 지하감옥의 어떤 방에서 프리츠 에르베가 손으로 긁어서 쓴 글이 발견되었다.
봐르트부르크성은 일찍이 1608년에 투링기아의 영주인 샤유엔부르크(Schauenburg) 백작인 루이(Louis the Springer: 1042-1123)가 설립했다. 봐르트부르크성은 프라이부르크(Freyburg)에 있는 노이엔버그(Neuenberg)성과 함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고 있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는 봐르트부르크성을 모델로 삼아 노이슈봔슈타인성을 건축했다. 봐르테부르크라는 이름은 샤유엔부르크 백작이 이곳에 와서 산정을 바라보면 그 경치에 감동하여 Warte, Berg...du sollst mir eine Burg tragen!(기다려라 산이여, 나를 위해 성을 품을 것이다)라고 말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봐르테(Warte)라는 단어는 망루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봐르트부르크성의 페스트잘. 중세에 음유시인들의 노래경연대회(쟁거크리그)가 열리던 곳이다.
봐르트부르크 페스티발은 전통이 있어서 유명하다. 첫 페스티발은 1817년 10월 18일 개최되었다. 약 450명의 학생들과 새로 출범한 독일 형제단(Burschenschatten)의 멤버들이 봐르트부르크성으로 와서 4년전에 독일이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였다. 페스티발 참가자들은 보수주의를 비난하고 독일통일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비록 부재중이지만 담당 성직자의 허락을 받아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하여 보수주의적인 여러 서적들을 불에 태움으로서 승전의 기쁨을 표현하고 독일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물론, 당시 불에 태운 서적들은 가짜 책들이었고 진짜는 보관했다. 봐르트부르크에서는 1848년의 혁명기간 중에 이와 흡사한 모임들이 있었다. 그 모임들은 독일통일 운동의 씨앗으로 간주되고 있다.
1817년 학생들이 봐르트부르크 페스티발을 위해 열을 지어 올라가고 있다. 이를 슈투덴텐추그(Stedentenzug)라고 부른다. 학생열차라는 의미이다.
지나간 수세기 동안 봐르트부르크성은 독일 역사에 있어서 중요성에 비추어, 그리고 기독교의 발전과 관련하여 수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봐르트부르크성은 투링기아 영주의 권세를 보여주는 곳으로 실제로 영주의 거처였다. 봐르트부르크 성은 지난 세월동안 여러번에 걸쳐 수리와 복구를 거듭하였다. 1952년부터 66년까지는 당시 동독 정부가 주도하여 봐르트부르크성의 모습을 16세기 당시와 거의 같도록 만들었다. 특히 루터의 방은 원래의 마루와 파넬로 막은 벽 그대로로 복원하였다. 전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역은 로마네스크 팔라스이다. 란트그라펜하우스(Landgrafenhaus)라고도 불리는 이 장소는 대접견실이다. 란트그라펜하우스에는 예배처 이외에도 쟁거잘(Sängersaal)이 있다. ‘음유시인들의 홀’이다. 바그너의 ‘탄호이저’ 2막의 세팅이 바로 이장소이다. 페스트잘(Festsaal: 페스티발 홀)도 있다. 유명한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쟁거잘에는 음유시인들의 경연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가 있고 페스트잘에는 ‘기독교의 승리’라는 타이틀의 프레스코가 있다.
봐르트부르크성의 본채에는 두 개의 탑이 있다. 남탑은 중세로부터 보존되어온 유일한 탑이다. 일찍이 1318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남탑에 지하감옥(던전)이 있다. 또 하나의 탑은 버그프리트(Bergfried)라고 불리는 것이다. 1859년에 완성된 탑이다. 이 탑의 꼭대기에 4미터 높이의 라틴 십자가가 랜드마크로서 설치되어 있다. 버그프리트는 중세 독일의 건물에서 가장 높은 탑을 말한다. 미국에는 봐르트부르크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루터교인들이 설립한 마을이다. 아이오와 주에는 봐르트부르크대학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봐르트부르크성에 피신하여 지냈던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대학이 있는 위치가 마치 투링기아의 숲지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뉴욕주의 마운트 버논에는 봐르트부르크 양로원(The Wartburg Adult Care Community)이 있다. 원래 있던 장소가 루터가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오페라 '탄호이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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