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프란츠 요제프 1세

영욕의 프란츠 요제프 1세 - 2

정준극 2013. 3. 22. 18:40

영욕의 프란츠 요제프 1세 - 2

쇤브룬에서 태어나 쇤브룬에서 세상을 떠나다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난 비엔나 교외의 쇤브룬 궁전

 

프란츠 요제프는 1830년 8월 18일 비엔나 교외의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츠 칼 대공이었고 어머니는 바바리아의 조피 대공녀였다. 아버지 프란츠 칼은 신성로마제국 프란시스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이었다. 프란시스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즉 프란츠 요제프의 삼촌인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마음이 연약하여서 황제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인 프란츠 칼이 당연히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이미 나이도 많고 번거롭다고 생각하여서 극구 사양했다. 그보다도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인 프란츠 칼은 아무래도 황제로서 부족하다는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결국 프란츠 칼의 아들인 젊은 프란츠 요제프(애칭은 프란츨)가 준비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실상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인 바바리아의 조피는 큰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어려서부터 군주로서의 덕목인 헌신, 근면, 책임에 대하여 훈련하고 교육하여 앞날에 대비했었다. 프란츨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프란시스 2세, 즉 Der Gute Kaiser Franz(선한 황제 프란츠)를 우상처럼 존경했다. 선한 황제 프란츠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프란시스 2세)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여 첫번째 황제가 된 사람이다(프란시스 1세). 선한 황제 프란츠는 5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삼촌인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었던 것이고 페르디난트가 세상만사 귀찮다고 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하자 젊은 프란츠 요제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가 되었다. 일설에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너무 무능하고 주변머리가 없어서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어려서부터 제왕의 교육을 받은 프란츠 요제프를 얼른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는 얘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의 할아버지인 프란시스 2세 황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2세이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첫 황제로서는 프란시스(프란츠) 1세이다.

 

프란츠 요제프는 13세 때부터 오스트리아 군대에 복무하기 시작했다. 대령으로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군인으로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군인스타일로 살았다. 그는 황제로서 웅장한 궁전에서 살았지만 궁전에 있는 그의 침실에는 야전침대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고 그의 복장은 언제나 초급장교의 군복이었다. 프란츠 요제프에게는 세명의 남동생과 한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바로 아래 동생은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공으로 1832년에 태어났으며 나중에 멕시코 황제가 되었으나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둘째 동생은 칼 루드비히 대공으로 1833년에 태어났다. 그는 사라예보에서 비운에 세상을 떠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버지였다. 세번째 동생은 루드비히 빅토르로서 1842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여동생은 마리아 안나로서 1835년에 태어났지만 네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1851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 평생을 군복차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1848년 4월에 보헤미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48년은 잘 아는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던 해로서 그로 인하여 재상인 메테르니히 공자가 사임을 하였고 또한 페르디난트 황제도 퇴위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그럴 때에 보헤미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18세 때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프라하로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라데츠키 육군원수와 합류하였다. 프란츠 요제프의 첫 전투는 산타 루치아에서 1848년 5월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장교로서 전쟁에 참가하여 위엄있게 그리고 차분하게 복무를 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 즈음에 비엔나는 혁명으로 소란하였다. 그래서 황실 식구들은 모두 티롤의 인스부르크로 처소를 옮겼다. 이탈리아 전선에 있던 프란츠 요제프도 인스부르크로 왔다. 1848년 6월 중순이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프란츠 요제프는 인스부르크에서 장래에 그의 신부가 될 엘리자베트를 처음 만난 일이 있다. 그때 엘이자베트는 10대의 소녀였으며 서로 별다른 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프란츠 요제프과 사촌간이었다. 즉, 엘리자베트는 프란츠 요제프의 이모의 딸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동화 속의 군주'라고 하는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와도 사촌간이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 팬으로서 유명했다.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로미 슈나이더)에게 청혼하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영화

                    

7월 말에 오스트리아군이 쿠스토차(Custoza)에서 이탈리아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자 황실은 사태가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서 비엔나로 돌아왔다. 프란츠 요제프도 함께 돌아왔다. 그러다가 몇 달 후 정세가 다시 불안해졌다. 황실은 다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모라비아의 올뮈츠(Olmütz)로 갔다. 현재의 체크공화국에 속한 올로무츠(Olomouc)이다. 사회정세가 불안하고 외국과의 전쟁이 끊임이 없는 것은 페르디난트 황제가 무능해서 그렇다는 소리가 나왔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황제는 무능하기 보다는 좀 모자랐다. 보헤미아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알프레드 1세는 젊은 프란츠 요제프를 어서 황제의 자리에 앉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해 12월 2일, 프란츠 요제프의 삼촌인 페르디난트 황제가 폐위를 선언하였고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인 프란츠 칼이 황제가 될 의사가 없다고 사임하는 형식상의 절차를 거친 후 젊은 프란츠 요제프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서 등극하였다. 새로운 황제의 공식 명칭은 '프란츠 요제프'로 결정되었다. 프란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우상으로 생각할 정도로 존경하는 할아버지 프란시스(프란츠) 2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며 요제프는 젊은 황제의 증조할아버지 삼촌이 되는 요제프 2세 황제를 기념하여서 붙인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큰 아들인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황제(가운데)와 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드 2세가 되는 동생. 프란츠 요제프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를 존경하여서 그의 이름에 요제프를 넣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프란츠 요제프는 슈봐르첸버그 공자(Prinz Felix Schwarzenberg: 재직 1848-1852)를 수상 겸 외상으로 임명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러운 행정을 하였다. 1849년의 개정 헌법을 인정한 것은 좋은 예였다.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군주의 역할을 제한하는 헌법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국민들의 요망에 부응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외업무에서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당시 제국에 속하여 있는 헝가리에서는 헝가리인들이 마쟈르 민족의 옛 영광을 찾아야 한다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프란츠 요제프로서는 군사작전을 펼치지 않을수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은 헝가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였다. 그러한 정세를 이용하여서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국면이 발생하였다. 사르디니아의 카를로스 알베르트 왕(재위: 1831-1849)이 1849년 3월에 오스트리아제국에 대하여 도발하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알베르트의 군대는 노바라(Novara)에서 라데츠키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여담이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은 노바라 전투에서 라데츠키 장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노바라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의 카를로스 알베르트의 퇴위를 요구하였고 이어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노바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인 라데츠키 장군. 그의 전공을 기려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했다.

                                           

한편, 헝가리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크게 수세에 몰려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참패를 면하지 못할 정도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로 결심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 1세(재위: 1825-1855)에게 '헝가리의 반란이 유럽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설득하여 파병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1849년 여름에 헝가리로 진주한 제정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헝가리의 혁명을 진압했다. 이렇게하여 일단 유럽의 정세가 안정되자 프란츠 요제프는 왕권강화를 내세운 일련의 조치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조치는 그가 양보했던 헌법상의 사안들을 원위치시키는 것이었다. 황제의 권한을 대폭 강화코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크렘지어에서 회의를 갖고 젊은 황제의 요구는 언어도단이라며 반대했다. 1849년의 수정헌법은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요제프는 내무장관인 알렉산더 바흐(Alexander Bach)의 자문을 받아서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로인하여 오스트리아는 1848-49년의 국가적인 위기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회복할수 있었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는 프러시아가 주도하여 독일연합을 구성코자 하는 기도를 제지하고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연맹을 창설하는데 성공하였다.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만 쏙 빼고 독일연합을 구성하자고 은밀히 계획을 꾸몄으나 슈봐르첸버그 수상이 그 음모를 미리 알고 차단하였고 오스트리아 주도아래 39개 나라가 참여하는 독일연맹을 성사시킨 것이다. 슈봐르첸버그 수상은 안타깝게도 185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비엔나의 슈베르트링에 있는 슈봐르첸버그 기마상은 그 슈봐르첸버그를 기리는 기념상이다. 프란츠 요제프으로서는 새로운 수상으로 슈봐르첸버그만한 인물을 구할수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할수 없이 수상의 업무까지도 함께 맡았다.

 

젊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도와 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인 펠릭스 슈봐르첸버그 수상

 

이런 일도 있었다. 1853년 2월 18일,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대한 암살기도 사건이 일어났다. 현재의 라트하우스(시청) 뒤편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가 있는 곳에서였다. 범인은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야노스 리베니(Janos Libenyi)라는 사람이었다. 그때 황제는 측근 장교인 막시밀리안 칼 라모랄 오도넬(Maximilian Karl Lamoral O'Donnel)과 함께 비엔나시 외곽의 보루들을 시찰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링슈트라쎄가 비엔나 시의 경계였고 현재의 보티프키르헤가 있는 곳은 보루가 있는 곳이었다. 그때 갑자기 괴청년이 황제에게 접근하여 단도로서 황제의 목을 찔렀다. 야노스 리베니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양복을 주문 받아서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황제는 칼라가 높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의 칼라는 단단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괴한의 단도는 황제의 목칼라를 깊이 찌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황제는 목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만일 황제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면 그자리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옆에 있던 오도넬 백작이 급히 달려들어서 괴한을 칼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마침 인근에 있었던 요제프 에테르니히(Joseph Etternich)라는 정육점 주인이 황제의 위기 상황을 보고 달려와서 오도넬 백작을 도와서 괴한을 제압하여 쓰러트렸다. 그렇게 하여 황제는 목숨을 건졌다. 당연히 그 다음의 얘기가 궁금할 것 같으므로 덧붙여 설명코자 한다. 오도넬 백작은 아일랜드의 명문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백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위기에서 구출한 공로로 훈장을 받고 황제가 직접 제국의 백작으로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와 함께 가문의 문장(紋章)에도 합스부르크의 쌍두의 독수리 문장을 사용할수 있도록 했다. 오도넬 백작은 나중에 잘츠부르크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현재의 미라벨 공원에 있는 저택이다. 한편, 정육점 주인인 요제프 에테르니히는 귀족의 지위로 격상되어 요제프 폰 에테르니히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야노스 리베니가 무슨 이유로 황제를 암살하려 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은 사항으로 남아 있다.

 

오도넬 백작이 살았던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공원과 저택

 

프란츠 요제프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형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의 위기를 모면한 것을 감사하여 유럽에 있는 왕실들에게 황제 구조 기념교회를 세우고자 하니 헌금들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하여 모은 돈으로 바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웅장한 교회를 세웠으니 그것이 현재의 보티프키르헤이다. 보티프라는 말은 봉헌이라는 뜻이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자객의 비수에서 구원된 것을 기념하여 Kaiser Franz Josef I Rettungs Jubel Marsch(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구조 축하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왈츠에는 황제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하이든의 현악 4중주(Op 76 No 3) '황제'(Kaiser) 2악장 poco adagio 에 나오는 멜로디를 인용하였다. 나중에 독일 국가(Deutsche National Hymne)에 사용한 멜로디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 구조 축하 행진곡'을 작곡한 것은 황제와 궁정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5년 전인 1848년의 비엔나는 그해 연초에 파리에서부터 불붙은 혁명의 불길 때문에 정세가 극도로 불안하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의자들은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군주제를 지지하였지만 큰 아들인 젊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혁명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자기의 앞길을 방해만 하고 있기 때문에 반발심으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요제프의 암살기도 사건. 황제를 호위하던 오도넬 백작이 칼을 들어 범인을 막고 있고 인근에 있던 정육점 주인인 요제프 에테르니히라는 사람이 범인을 제압하고 있다. 그때 황제는 22세였다.

                              

아무튼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군주제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불이익을 당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궁정 무도회 음악감독(k.k. Hofball-Musikdirektor)에 임명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자리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가 맡았었으나 1849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공석이 되었다. 모두들 당연히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으로 보았으나 황실은 생각처럼 관대하지 않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왕정을 반대하고 공화제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 자리에 임명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서 황제와 황실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키로 했다. 그러던 중에 1853년 2월 18일에 황제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 구조 축하 행진곡'을 작곡해서 발표했다. 그리고 1863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마침내 궁정 무도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00년대 초의 보티프키르헤. 봉헌교회라는 뜻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었으나 구조된 것을 기념하여서 동생 막시밀리안이 주도하여 건축한 교회이다.


다시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가 되자 황실에서는 프란츠 요제프가 어서 결혼해서 후사를 잇도록 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특히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의 채근이 남달랐다. 신부감들이 대두되었다. 모데나의 엘리자베트 공주, 프러시아의 안나 공주, 작소니의 시도니아 공주 등이 후보로 올랐다. 프란츠 요제프는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가 잔소리깨나 퍼부으면서 세력을 잡고 있었다. 조피는 자기의 친정인 바바리아의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으로 관계를 다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조피는 여동생 루도비카의 큰 딸인 헬레네(애칭: 네네)를 프란츠 요제프의 신부감으로 찍어 놓았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헬레네와의 약혼을 발표해야 하는 바드 이슐의 모임에서 뜻밖에도 헬레네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애칭: 씨씨)를 배우자로 선정하였다. 당시 엘리자베트는 16세였다. 황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어쩔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엘리자베트가 17세가 되는 해인 1854년 4월 25일 비엔나의 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비엔나의 호프 부르크 궁전에 속하여 있는 성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제프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1854년 4월 25일.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씨씨)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씨씨는 비엔나의 궁정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다. 황실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특히 시어머니 겸 이모인 조피와의 사이가 그러했다. 프란츠 요제프과 씨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인 조피(시어머니의 이름과 같음)는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인 조피가 데려다가 길렀다. 씨씨에게 맡겨서 기르면 안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딸 조피는 몇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씨씨는 시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밖에도 여러 면에서 씨씨와 시어머니 조피의 관계는 어렵기만 했다. 남편에 대한 불만도 한 몫을 했다. 남편 프란츠 요제프는 가정생활보다도 국사가 먼저였다. 그렇기 때문에 씨씨를 보살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어려운 관계는 씨씨의 평생을 지배했다. 씨씨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1889년 1월에 황태자인 루돌프의 자살이었다. 비엔나 근교인 마이엘링에 있는 황실 사냥숙사에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과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동반자살을 하였다. 루돌프의 자살은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 만들어질 만큼 세기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었다. 한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85년에 비엔나의 인기 여배우인 예쁘장한 카타리나 슈라트(Katharina Schratt)를 만났다. 씨씨는 정처 없이 유럽의 이곳 저곳을 여행 중이었다. 슈라트는 프란츠 요제프의 좋게 말해서 애인, 보통으로 말해서 정부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프란츠 요제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설에는 씨씨도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했다고 한다. 씨씨로서는 자기가 와이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 어쩔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프란츠 요제프는 슈라트를 위해 바드 이슐에 별장을 마련해 주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바드 이슐에 가게 되면 더 편하게 만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드 이슐은 프란츠 요제프가 씨씨에게 처음으로 청혼했던 장소이다. 프란츠 요제프는 슈라트를 위해 비엔나에도 팔레(시내궁전)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그러다가 프란츠 요제프가 세상을 떠나자 팔레도 반납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정부였던 카타리나 슈라트. 연극배우였다.

 

제국의 황비인 씨씨는 습관성 여행자였다. 비엔나의 궁전에 다소곳이 들어 앉아 있지를 못하는 성격이었다. 씨씨는 뛰어난 승마인이었다. 그러니 말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씨씨는 패션에 있어서도 비엔나 사회를 압도했다. 씨씨가 사용하는 악세사리 하나하나가 당장 비엔나 상류층의 인기를 끌었다. 씨씨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왕궁 안의 거실에 기계체조 장비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씨씨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다. 1898년 가을에도 씨씨는 여행 중이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었다. 씨씨는 루체른 호수를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했다. 그때 어떤 괴한이 다가와서 씨씨를 송곳처럼 날카로운 흉기로 찔렀다.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라고 했다. 그리하여 씨씨는 파란만장의 이 세상을 작별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씨씨의 죽음으로 크나 큰 상처를 입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씨씨가 세상을 떠난후 27년을 더 살았지만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씨씨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씨씨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비엔나의 왕궁에 전해지자 딸 발레리가 달려와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 그림. 호프부르크 궁전.

 

황태자 루돌프가 죽자 다음번 황제계승자로서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이 되어야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로 있는 중에 1867년 반도들의 손에 잡혀 총살을 당하였다. 또한 막시밀리안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의 다음 동생인 칼 루드비히가 후보가 되었으나 그도 연로하고 병약하여 여의치 않아서 칼 루드비히의 큰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차기 황제계승자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는 동생의 아들이므로 조카가 된다. 그런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왕족이 아닌 백작부인과 결혼하고자 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왕족의 혈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혼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사랑에는 국경도 지위도 없는 법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족이 아닌 여인과 결혼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서로 싫어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914년 사라예보에서 부인과 함께 암살되었다. 그로 인하여 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전쟁 중인 1916년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프란츠 요제프의 증조카가 되는 칼(Karl)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2년후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뒤를 이어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된 칼.

 

프란츠 요제프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는 네 자녀를 두었다. 첫 딸 조피(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마리아 요제파)는 두 사람의 결혼 이듬해인 1855년에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인 딸 기젤라 루이제 마리(Gisela Louise Marie)는 1856년에 태어나 1873년에 6촌 사촌이 되는 바바리아의 레오폴드 왕자와 결혼하였고 1932년에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가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루돌프 프란시스 샤를르 조셉)로서 1858년에 태어나 31세의 젊은 나이인 1889년 1월 마이엘링에서 애인 마리에 베체라 남작부인과 동반자살하였다. 루돌프는 1881년에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넷째도 딸인 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에로서 1868년에 태어나서 1924년에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발레리는 1890년에 역시 육촌 사촌인 투스카니의 프란츠 살바토르 대공과 결혼하였다.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자녀들. 왼쪽으로부터 씨씨, 발레리, 프란츠 요제프, 루돌프 황태자, 사위인 바바리아의 레오폴드 대공, 기젤라, 아이들은 기젤라의 아이들

                                                                                

러시아의 북극해에 있는 열도인 '프란츠 요제프 랜드'(Franz Josef Land)는 1873년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뉴질랜드의 남섬에 있는 '프란츠 요제프 빙하'(Franz Josef Glacier)도 역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념하여 붙인 명칭이다. 알바니아의 부나(Buna)강 하구에는 삼각주 섬이 조성되어 있다. 프란츠 요제프 아일랜드이다. 흙이 비옥하여 관목이 우거져 있으며 바다새들이 둥지를 튼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를 기념하여서 붙인 지명이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72년에 헝가리의 클루이 나포카(Cluj-Napoca)에 '프란츠 요제프 대학교'(헝가리어: Ferenc Jozsef Tudomanyegetem)을 설립했다. 이 대학교는 클루이가 루마니아에 속하게 되자 헝가리의 체게드(Szeged)로 옮겼다. 현재의 '체게드대학교'이다. 중부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생일인 8월 18일을 축하하고 있다. 중부유럽이라고 하는 것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크로아티아, 체크공화국, 독일 일부, 헝가리, 리히텐슈타인, 폴란드 일부,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위스 일부를 말하며 여기에 과거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이탈리아의 트렌티노 알토, 남티롤, 동부 프리울리, 트리에스테,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베오그라드, 모츠바,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남부 부코비나, 우크라이나의 동부 갈리치아, 카르파니안 루테리아, 북부 부코비나 등을 말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여러 모토를 말했지만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Mit vereinten Kräften'(Viribus Unitis: 연합된 힘으로)로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서의 모토이며 다른 하나는 'Bizalmam az Osi Erenyben'(Virtutis Confido: 선행으로 신뢰를)로서 헝가리왕으로서의 모토였다.

 

뉴질랜드 남섬의 프란츠 요제프 빙하

 

 

ü  ä  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