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프란츠 요제프 1세

비운의 루돌프 황태자

정준극 2015. 1. 3. 18:20

마이엘링의 비극 루돌프 (Rudolf) 황태자

벨기에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 마리아 베체라와 동반자살

유일한 혈육 엘리자베트 공주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 과연 그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하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대제국과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에 대한 말 못할 불만 때문에 죽음을 택하였던 것일까?  세계는 아직도 루돌프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 궁금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루돌프는 누구인가? 19세기 말에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의 황태자(크론프린츠)가 된 사람이다. 루돌프는 역사상 오스트리아 제국을 가장 오래 통치한 프란츠 요셉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무려 68년 동안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그러한 루돌프가 명목상으로는 마리아 베체라(Maria Vetsera)라고 하는 18세의 꽃다운 아가씨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혹시 음모는 없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궁금증을 뒤로 한채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죽음은 오랜 연륜의 위대한 대제국을 사양길에 접어들게 만든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세계의 역사를 전례에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루돌프의 죽음은 세계1차 대전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루돌프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제 비록 단편적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본다.


 

 마이엘링 비극의 주인공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루돌프 황태자는 1858년 8월 21일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성(Schloss Laxenbur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츠 요셉 황제였고 어머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비라는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였다. 우선 씨씨의 유일한 아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루돌프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씨씨에 대한 뮤지컬, 영화, 연극, 오페라이 있다.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있고 영화로도 많이 나와 있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황실 가정교사인 페르디난트 폰 호흐슈테터(Ferdinand von Hochstetter)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폰 호흐슈테터는 나중에 제국자연사박물관(현재의 자연사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인물이다. 루돌프는 어릴 때부터 광물 표본 수집에 열중했다.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후 그가 수집했던 광물 표본들은 비엔나농과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루돌프의 가족 (왼쪽부터 루돌프, 아버지 프란츠 요셉, 어머니 엘리자베트, 여동생 마리-발레리, 여동생 기젤라)


루돌프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와는 달리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돌프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로서 자연스럽지 못했으며 오히려 긴장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족으로서의 따듯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까지 연결지어 말했다. 루돌프는 1881년 5월 10일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왕의 딸 스테파니(Stephanie)공주와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루돌프가 22세 때였다. 비엔나의 아우구스틴 교회(Augustinerkirche)는 제국적 행사인 루돌프와 스테파니의 결혼식으로 화려함의 장관을 이루었다. 그렇게 결혼한 루돌프는 처음에 아내 스테파니를 순수하게 사랑했던것 같았다. 그러나 루돌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왕비(씨씨)는 며느리 스테파니를 ‘꼴 보기 싫은 멍청이’라고 말하며 못마땅해 했다. 고부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스테파니는 스테파니대로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에게 험담을 퍼부었다. 며느리 스테파니와 시어머니 엘리자베트(씨씨)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아마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스테파니가 아들을 가로 채 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며느리 스테파니도 시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감싸고 있어서 남편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혼 2년후인 1883년 9월 2일 루돌프와 스테파니 사이에서 딸 엘리자베트 마리(Elisabeth Marie)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때쯤해서 루돌프와 스테파니는 별거에 들어갔다. 루돌프는 결혼생활에서 만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루돌프는 가정생활의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술과 여자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루돌프와 밸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1887년 루돌프는 마이엘링에 있는 건물을 사서 사냥 숙사로 만들었다. 이 건물은 인근의 하일리겐크로이츠(성십자)수도원이 1550년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이엘링은 비엔나에서 남서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 속해 있다. 루돌프는 마이엘링의 사냥숙소에 자주 찾아와서 사냥을 하거나 산책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광물표본들을 수집하는 일을 했다. 이듬해인 1888년 가을, 30세의 루돌프는 17세의 매력적인 아가씨 마리아 베체라를 비엔나의 유원지인 프라터에서 우연히 만났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호프부르크 궁전에 속해 있는 스페인승마학교에서 처음 만난것으로 되어 있다. 수녀원학교에서 공부한 마리아는 승마에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리아를 '초원의 천자'(Turf angel)라고 불렀다. 마리아가 루돌프를 처음 만났을 때는 17세 생일을 지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은, 어떻게 보면 아직도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아름답기가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반면, 루돌프는 30세였고 부인과 딸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외교부서에서 일하던 알빈 베체라 남작의 네 자여중 하나였다. 마리아의 어머니 헬레네 발티찌는 그리스 은행가문의 여식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리아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마리아는 1871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마리 알렉산드리네 프라이인 폰 베체라(Marie Alexandrine Freiin von Vetsera)였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루돌프를 좋아하였다. 루돌프도 마리아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그저 한때의 데이트 상대로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냥 모임에서 한번 만났다고 해도 관계가 계속되려면 누군가는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주어야 한다. 루돌프와 마리아의 그런 역할을 마리 라리슈 백작부인이 맡아해 주었다. 마리 라리슈는 엘리자베트 황비(씨씨)의 큰 오빠의 딸이었다. 그렇지만 사생아였다. 하지만 묀니히 백작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이 되었고 씨씨와의 관계 때문에 비엔나 궁정에서 한가닥 하는 여인이 되었다. 마리 라리슈는 부유한 헬레네 베체라 남작부인과 친한 사이여서 큰 딸인 마리아와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러다가 루돌프 황태자가 마리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엮어 주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마담 뚜였다.


관련 이미지

마리 라리슈 백작부인


루돌프는 돈 후안이나 카사노바의 사촌 쯤 되는 듯 대단한 여성편력이 있었다. 소년 시절에는 자연과학에 관심이 깊어서 광물 표본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렸는데 청년이 되자 이성에 눈을 돌려서 세상이 알아주는 호색한이 되었던 것이다. 하기야 루돌프는 생기기도 잘 생긴 편이고 돈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고 게다가 만인이 사랑하는 씨씨의 외아들이며 제국의 황태자라는 어마어마한 신분이었으므로 온 나라 여자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루돌프의 품에 안기었다. 루돌프는 천성이 그런지 아무튼 결혼 후에도 혼외정사에 심취하여 부인인 스테파니 공주의 심사를 몹씨 거슬리게 만들었다. 스테파니의 심사를 더욱 거슬리게 만든 것은 루돌프가 여자를 한낱 섹스의 파트너로만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테파니의 비망록에 의하면 '루돌프는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던 루돌프가 마리아라는 17세의 처녀를 만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순수한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음으로서 사랑을 완성코자 했던 것이다. 루돌프가 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대표적으로 관계를 가졌던 여자들은 대체로 누구였는지 소개코자 한다. 루돌프의 정부열전이다. 


안나 피크(Anna Pick)는 비엔나의 여배우였다. 루돌프가 결혼하기 전에 상당기간 동안 애인이었다. 애인이라기 보다는 정부였다. 루돌프가 20세가 되자 황실에서는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황위 계승자이면 후사를 든든히 해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루돌프는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군주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그래서 신부 후보자는 사실상 한정되어 있었다. 루돌프는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키로 결심했다. 그때 스테파니는 15세였다. 루돌프는 1880년 3월에 스테파니와 약혼하기 위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벨기에로 갔다. 루돌프가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그런데 루돌프는 정말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약혼식을 하러 가면서 정부인 안나 피크도 데려갔던 것이다. 당시에 비엔나에서 브뤼셀까지 가려면 열흘이나 걸렸기 때문에 그나마도 떨어져 있기가 싫어서 데리고 갔던 모양이었다. 스테파니의 어머니인 마리 앙리에트 왕비가 그런 사실을 어찌어찌해서 알게 되었다. 브뤼셀의 궁정에서는 루돌프의 호색적인 행태가 공공연한 스캔들이 되었고 왕비는 속이 상해서 약혼을 파기하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신랑이 막강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였기 때문에 그대로 수긍했다는 얘기다. 아무튼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딸 스테파니에게 비엔나로 시집가서는 남편 루돌프를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했음이 틀림없다.


또 다른 애인은 애니 프랑크푸르터(Annie Frankfurter)라는 여인이었다. 유태인 사업가인 에밀 쿠란다라는 사람과 결혼한 유부녀여서 마담 쿠란다 또는 애니 쿠란다라고 불리던 여인이었다. 애니 쿠란다는 루돌프의 놀자판 클럽에 속한 여인이었다. 루돌프에게는 거의 열명에 이르는 아주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이 루돌프와 하는 일이란 놀고 마시고 먹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여자들도 두세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애니 쿠란다였다. 루돌프의 친구들 중에는 반유태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유태인을 멸시하거나 증오하는 얘기를 하면 루돌프는 '난 유태인 여자와 관계를 했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애니 쿠란다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얘기였다. 비엔나의 비밀경찰은 루돌프의 뒤를 미행하면서 수시로 보고서를 썼는데 그 보고서에 애니 쿠란다의 이름도 자주 등장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보통 이상인 것을 알수 있다. 루돌프는 미혼여성들 뿐만 아니라 결혼한 여성들과도 폭넚은 교제를 했다. 말이 고상해서 교제이지 실은 술이나 같이 마시고 잠자리나 같이 하는 유부녀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유부녀 중에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헬레네 베체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아 베체라의 어머니이다. 그리스 출신의 헬레네 베체라는 1877년에 잠시나마 루돌프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는 비엔나 궁정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하니 도대체 루돌프는 어찌된 사람인지 그렇게 헬레나와 한때나마 가깝게 지내다가 나중에는 헬레나의 딸인 마리아와 죽자사자 했으니 다른 말을 필요없고 그저 대단한 루돌프라는 말만 할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정부는 요한나 부스카(Johanna Buska)라는 여인이었다.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의 여배우였다. 금발의 미인이었다. 루돌프의 첫사랑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루돌프와 요한나의 관계는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황비도 알고 있어서 묵인했다고 한다. 당시에 여배우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루돌프는 요한나의 연극을 보고 '부스카의 음성, 부스카의 연기는 행복과 기쁨의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는 것과 같았다. 무스카는 시로서 둘러싸여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무튼 두 사람의 관계는 보통 이상이었다. 그러한 루돌프가 어린 마리아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황태자 루돌프에게 개인적으로 연민의 정을 느껴 루돌프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헌신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루돌프는 결국 마리아의 그런 한없는, 그리고 거의 맹목적인 사랑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마이엘링 사냥숙사에서 동반자살하였다. 눈이 펑펑 내린 1월의 어느날 밤이었다.

 

루돌프의 애인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당시 17세.


공식보고에 따르면 두 사람의 죽음은 아버지 프란츠 요셉이 아들 루돌프에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한 결과였다고 한다. 시나리오대로라면 루돌프가 먼저 마리아의 머리를 권총으로 쏘고 그후에 자기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고 한다.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죄악을 저지를 사람은 죽어서 가톨릭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죄인의 시신은 카푸친 교회 지하실에 있는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할수 없다. 루돌프가 죽은후 황실은 루돌프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래야만 환자로 간주되어 자살을 합리화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루돌프는 마리아를 죽인 살인자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중죄를 선고받아야 했다. 그러나 정신병자로 몰았기 때문에 마치 자살한 노모씨 처럼 면죄부를 받을수 있었다. 한편, 마리아의 시신은 한밤중에 마이엘링에서 몰래 빼내어 인근 하일리겐크로이츠의 성십자 수도원 묘지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그후 프란츠 요셉 황제는 마이엘링의 사냥 숙소를 갈멜파 수녀들을 위한 고행 수녀원 겸 교회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이 교회에서는 수녀들이 루돌프의 영혼을 위해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들어서면 한쪽 방에 조그만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루돌프를 기념하는 물건과 사진, 신문기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루돌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왕비(씨씨)


[자살인가 타살인가?]

사람들은 줄곧 루돌프 황태자의 사망에 대한 당시 황실의 보고서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비가 된 지타(Zita)는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인 1989년, 루돌프의 죽음은 프란츠 요셉 황제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당시 프랑스는 지나치게 친독일적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퇴위시키고 친프랑스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루돌프 황태자를 제국의 황제로 옹위코자 음모를 꾸몄으며 이런 사실을 파악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정적이라고 할수 있는 루돌프 황태자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왕비인 지타에 의하면 루돌프는 프랑스의 그런 제안을 대단히 분노하여 거절하고 오히려 이를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타는 이같은 주장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다른 소문에 의하면 이것도 역시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이 아들 루돌프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결국 제거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합스부르크에 대한 항거를 꾸미고 있을 때 헝가리 독립운동가들이 루돌프에게 자기들을 도와준다면 나중에 독립이 되었을 때 왕으로 옹위하겠다고 제안하였고 루돌프도 답답한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그러한 제안에 사실상 동조했다고 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아들 루돌프를 정적으로 간주하여 은밀히 제거했다는 것이다.

 

루돌프의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


한편, 1992년 12월, 하일리겐크로이츠에 있는 마리아의 묘소가 파헤쳐지고 유해가 도난당한 일이 있었다. 경찰이 즉각 개입하여 수사를 벌인 결과 다행히 유해는 찾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유해가 진짜 마리아의 것인지를 판별해야했다. 경찰은 비엔나의학연구소에 검사를 의뢰했다. 비엔나의학연구소는 유전자 검사등 정밀검사를 마친후 마리아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두개골을 살펴보니 총상을 입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주장에 따르면 루돌프가 권총으로 먼저 마리아의 머리를 쏘았다고 되어 있다. 하기야 목격자가 없으니 그것도 신빙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소리가 났다고 하니까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마리아의 두개골에는 총알구멍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 마리아는 머리에 여러번의 타격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당시 루돌프의 사망 보고서에도 루돌프의 시신에 심한 몸싸움을 벌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놀랍게도 당시 보고서에는 루돌프가 여섯발의 총알을 맞은 것으로 되어 있다. 자살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에 여섯 발의 총알을 쏠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 총알들은 루돌프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황실보고서에는 루돌프가 자기 자신을 총으로 쏘기 전에 먼저 마리아를 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밖에 다른 어떤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결론은? 루돌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은폐되었다고 밖에 볼수 없다. 당시의 증인이 없고 다른 보고서가 없으므로 단정적으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경우을 생각할수 있다.

 

 루돌프와 함께 세상을 하직한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첫째는 루돌프와 마리아가 심한 몸싸움을 벌였고 루돌프가 마리아를 때려 숨지게 한후 자기 자신을 총으로 쏘았다는 가정이다. 다시 말하여 루돌프가 동반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돌프가 자기에게 여섯 발이나 되는 많은 총알을 죽어가면서 쏘았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섯발의 총알을 쏜 총이 루돌프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며 과연 증거물 1호인 권총은 어디 있느냐는 궁금증이 남는다. 두 번째 경우는 제3자들이 나타나 먼저 마리아의 머리를 타격하여 숨지게 한후 루돌프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가정이다. 이같은 가정은 훗날 지타(Zita)왕비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재3자 개입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지타는 1914년부터 1916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쇤브룬에서 지내면서 황제의 말동무로서 노황제를 보살펴 준 여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타는 당시 황실의 여러 사람들과 많은 접촉을 하며 지냈다. 그러므로 황제를 비롯하여 황실 사람들이 지타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었을 것이며 루돌프의 죽음에 대한 얘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므로 지타의 제3자 개입설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가정이다.


루돌프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루돌프의 어머니 씨씨. 서있는 사람은 루돌프의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 꿇어 앉은 사람은 루돌프의 부인 스테파니 황태자비. 어린아이는 루돌프의 딸 엘리자베트


독실한 로마 가톨릭인 프란츠 요셉 황제로서 황위 계승자인 아들이 자살했고 더구나 그 아들이 순진한 마리아를 살해하였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여러명 배출한 가문이 아닌가? 그런 가문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더구나 가톨릭의 금기사항인 자살까지 했다는 것은 천하로부터 비난을 받기에 마땅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정신적 불균형의 상태에서(mental unbalance) 마리아를 죽였고 이어 자살했다고 설명했다. 즉, 미친 상태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황실측으로서 보면 만일 어떤 제3자가 마이엘링 사냥숙사에 몰래 침입하여 두 사람을 모두 죽였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발표할 경우,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할 것이 분명하므로 황실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로 두 사람을 살해한 제3자가 만의 하나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밝힐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사람들이 납득할수 있는 설명은 무엇인가? 황태자가 정신이상이어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몰아가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그럴듯한 해명일 수밖에 없었다.

 

자살한 직후 찍은 루돌프 사진. 머리에 총상을 입어 붕대로 감싸 놓았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기톨릭 신자로서 자살한 사람은 가톨릭 의식에 따른 장례를 치루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루돌프의 장례식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로마교황과 몇차례 서신을 교환한 후 가톨릭 의식으로 황실의 예법에 따라 치루어졌다. 분명히 무언가 말할수 없는 내막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추측해 볼때 프란츠 요셉 황제 자신이 살해를 지시하지 않았겠느냐는 가정을 할수 있다. 루돌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복하려고 계획했었다는 설이 있었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루돌프가 헝가리 독립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헝가리를 분리하고 헝가리의 왕에 오른다는 주장이 있었다. 영화 마이엘링(悲愁)를 보면 분명히 그런 줄거리였다. 이같은 음모를 프란츠 요셉 황제측에서 사전에 파악하고 황태자를 죽여 없애는 대책을 세웠다는 얘기다. 아무튼 이상의 여러 가정들은 다만 가정일 뿐이며 현재로서 궁금증을 풀어 줄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로마 교황청 문서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교황간의 서신내용일 것이다.



영화에서 루돌프와 마리아

 

루돌프가 죽은후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거리가 멀어졌다. 왕비는 궁전을 떠나 줄곧 외국으로 돌아다니며 지냈다. 특히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많이 지냈다. 그리스와 스위스에서도 지냈다. 사냥으로 시간을 메꾸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당시 유명한 승마인인 조지 베이 미들턴(George Bay Middleton)과의 일종의 로맨스는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로맨스라고 했지만 실은 미들턴의 일방적인 흠모(欽慕)였다고 한다. 루돌프 사후(死後),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관은 프란츠 요셉 황제의 둘째 동생인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에게 돌아가는 순서였다. 프란츠 요셉의 첫째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로 있다가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총살되었으므로 다음 순서로서 둘째 동생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를 루드비히는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후 황제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이 말은 그의 장남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에게 황제 계승권을 이양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1914년 사라예보에서 피살되는 바람에 황제 계승권은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왜 페르디난트의 아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조카인 카를에게 돌아갔느냐하면 페르디난트는 왕족이 아닌 평민(실은 귀족)과 결혼했으므로 다음 황위 계승자로 지명될 때에 자기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는 일은 없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피살됨으로서 1차 세계대전이 촉발 되었다는 것은 설명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만일 루돌프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루돌프가 제국의 황제로서 즉위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돌프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군국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과 동맹관계를 강조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1차 대전이란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비엔나 카푸친교회 지하의 카이저그루프트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루돌프 황태자(오른쪽), 프란츠 요셉 황제(가운데), 엘리자베트 왕비(왼쪽)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