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프란츠 요제프 1세

루돌프의 딸 엘리자베트

정준극 2015. 1. 3. 18:23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마리(Elisabeth Marie) 공주

루돌프 황태자의 유일한 딸

합스부르크의 모든 권리 포기

 

 

결혼 전의 엘리자베트 마리

 

비엔나 제14구 펜칭에는 엘리자베트 페츠네크 가쎄(Elisabeth-Petznek-Gasse)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베트 페츠네크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엘리자베트 페츠네크는 세기말(fin de siècle)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루돌프 황태자의 유일한 딸이며 프란츠 요셉 황제와 아름다운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유일한 친손녀로서 보통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마리’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 무릇 비엔나와 합스부르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란츠 요셉 황제, 엘리자베트(씨씨) 황비,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루돌프 황태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무려 68년이나 통치한  대군주이다. 엘리자베트 왕비(씨씨)는 바바리아 출신으로 합스부르크의 황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비운의 삶을 살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연민의 정으로서 사모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루돌프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로서 장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를 계승할 황태자였지만 31세 때에 어린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여 세기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이다. 

 

에르치(엘리자베트 마리)의 부모인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대제국의 황위를 이어 받을 루돌프 황태자는 황실의 주선에 의해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다. 그리고 딸 엘리자베트 마리가 태어났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어릴 때에 에르치(Ersz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에르치는 엘리자베트의 헝가리식 애칭이다. 에르치는 1883년 비엔나 근교의 슐로스 락센부르크(Schloss Laxenburg)에서 태어났다. 락센부르크 성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엘리자베트 황비에게 결혼기념으로 선물한 대저택이다. 이곳에서 루돌프 황태자도 태어났다. 기다리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에르치는 모든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제국의 앞날에 검은 구름이 드려질 비통한 사건은 에르치가 다섯 살 때에 일어났다. 아버지 루돌프가 마리아 베체라라고 하는 어떤 지체 낮은 귀족집안의 아가씨와 동반자살을 한 것이다. 루돌프 황태자는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너무나 장기집권하고 있으며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비는 합스부르크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고 마누라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는 날이면 날마다 시부모에 대한 불평만 털어 놓고 있으며 더구나 사회적으로는 1848년에는 왕권을 타도하고 공화제를 원하는 혁명까지 일어나 뒤숭숭하였고 또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벗어나서 독립하려고 기회만 있으면 저항을 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만사가 험난한 시기였다. 그럴 때에 루돌프 황태자는 프라터 유원지에서 아직 10대에 불과한 마리아라는 아름다운 소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제국의 황태자라는 신분을 포기하고 마리아와 동반자살하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마이엘링’(Mayerling) 등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이름은 할머니인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그림은 헝가리 왕비로 대관식을 가진 후의 엘리자베트  

 

프란츠 요셉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자 제국의 황위는 당연히 순서에 입각해서 프란츠 요셉의 남동생 중에서 이어 받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프란츠 요셉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를 지내다가 일찍이 1867년에 멕시코 반군들에게 총살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막시밀리안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의 부인인 벨기에의 샬로테는 벨기에에 있었는데 막시밀리안이 총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결국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황위계승권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셋째 동생인 칼 루드비히(Karl Ludwig)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칼 루드비히는 이미 연로하였고 더구나 황제의 자리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칼 루드비히는 '형님 황제께서 아직도 정정하시어 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계실수 있다. 만일 얼마후에 돌아가시어서 황제의 자리가 나에게 돌아온다고해도 그때에 나는 나이가 이미 8순에 가까우니 그런 노인네가 무슨 황제를 하겠단 말인가?'라며 극구 사양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어쩔수 없이 둘째 동생 칼 루드비히의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다음 황제 계승자로서 임명하였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기가 설마 황제 계승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도 황족이 아니라 귀족과 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대제국의 황위 계승자로 지정되면서 몇가지 제약을 빋게 되었다. 첫째는 아무리 황위 계승자라고 해도 황태자(크론 프린츠)라는 명칭은 사용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그의 자녀들은 절대로 그 다음 황제가 될수 없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정통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제약이 붙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러던 어느날 페르디난트 대공은 부인과 함께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시찰하는 중에 어떤 세르비아 국수주의자가 쏜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였다.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서 세계대전의 무대까지 굴러가게 되었고 1차 대전의 결과로 유구한 역사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 올시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할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 1910년의 모습. 엘리자베트 마리는 결혼하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루돌프 황태자가 갑자기 자살하여 요단강을 건너가자 부인인 스테파니 공주(황태자비)와 딸 에르치 공주는 당장에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에르치의 할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는 손녀 에르치와 며느리인 스테파니에게 앞으로 허락 없이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못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가뜩이나 루돌프의 자살로 황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며느리와 손녀 딸이 비엔나의 황실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서 제멋대로 산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고 믿어서였다. 그러나 원래부터 남편 루돌프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비엔나를 빠져 나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헝가리의 귀족인 엘레머 로니아이(Elemer Lonyay) 백작이라는 사람과 재혼하였다. 물론 어린 에르치는 비엔나에 남겨 두었다. 사실 에르치와 어머니 스테파니 사이는 좋지 않았다. 에르치는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에르치는 비엔나 황실에 대하여도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엄격하기만 하고 가식으로 가득찬 궁정이 싫었던 것이다. 에르치는 그런것 때문에 할머니인 씨씨가 견디지 못하고 힘들게 지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루돌프의 부인이었던 스테파니는 재혼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왕실의 가족 명단에서 자연스럽게 삭제되었다. 어린 에르치 공주는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에르치는 어머니인 스테파니가 재혼한 이후 한번도 만난 일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와 관계를 끊고 지냈다.

 

에르치의 어머니 스테파니가 재혼한 헝가리의 엘레머 로니아이

 

어린 에르치에 대하여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상당히 마음을 써주었지만 할머니인 씨씨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기야 할머니 씨씨는 비엔나의 황궁에 머무는 일이 별로 없었고 그저 기회만 있으면 여행이나 다녔으므로 손자, 손녀들과 가깝게 지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없는 에르치이지만 할머니 씨씨의 사랑마저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데 사실상 씨씨는 에르치를 무척이나 생각하였다. 씨씨는 1898년 스위스에서 암살을 당하기 전에 유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자기 소유의 보석은 모두 팔아서 자선단체와 종교단체에 기부하도록 했지만 그밖의 다른 모든 개인 재산은 에르치에게만 물려주는 것으로 해 놓았다. 씨씨로서 에르치를 다른 손주들보다 더 생각했던 것은 우선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유일한 손녀이며 더구나 가장 사랑했던 아들 루돌프의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이었다. 씨씨는 며느리였던 스테파니가 헝가리 귀족과 스캔들에 휩싸여 있다는 소문을 듣자 '아니, 남편 루돌프를 그렇게 질투하더니 자기는 호박씨나 까고 있지 않는가?'라면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들 루돌프가 저렇게 된 것은 다 스테파니가 못되어서 그렇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자꾸 이상해 지자 스테파니는 기왕에 루돌프와는 정략결혼을 했던 것이므로 차제에 자유를 얻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비엔나를 빠져 나가서 평소부터 마음을 주고 받았던 헝가리의 로니아이 백작과 1900년에 결혼한 것이다. 스테파니는 재혼에 앞서서 황태자비 또는 공주라는 타이틀을 모두 포기한다고 밝혔다. 로니아이 백작이라는 사람은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래도 한때 며느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벨기에 왕의 딸이기 때문에 스테파니가 재혼한다고 하자 좋을대로 하라고 허락하였고 또한 지참금에 쓰라고 돈을 넉넉히 주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인지 아무튼 로니아이 백작은 얼마 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에르치는 어머니 스테파니의 재빠른 재혼과 주위 사람들의 비난성 발언에 영향을 받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 갔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아버지인 루돌프 황태자.1889년 자살하기 직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마리’의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은 할머니인 엘리자베트 황비(씨씨)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버지 루돌프 황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사실상 제국의 황위계승권 영순위였다. 물론 제국에는 여자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명문 법조항이 없지만 후계자가 여자 하나라면 얘기가 달라질수 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리아 테레지아도 사실상 대제국의 여제로서 군림하였다. 샤를르 6세 황제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계승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돌프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트 마리가 제국의 군주가 되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엘리자베트 마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 마리가 왕족이 아닌 평민과 결혼하였으며 스스로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제 엘리자베트 마리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생활은 어떠했는지를 잠시 소개코자 한다. 엘리자베트 마리가 성숙한 여인이 되자 합스부르크 황실은 그를 유럽의 어느 순수 왕족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전통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엘리자베트 마리의 운명, 나아가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운명도 달라졌고 따라서 세계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마리는 황실에서 주선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엉뚱하게 짝 사랑하던 10년 연상의 오토(Otto Weriand von Windisch-Graetz: 1873-1952)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오토는 황족이 아니었으며 그저 크게 내세울것이 없는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1900년의 어느날 궁정무도회에서 빈디슈-그래츠의 오토 공자(Prinz Otto zu Windisch-Graetz)를 만나 당장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엘리자베트 마리가 17세였고 오토가 27세였다. 엘리자베트 마리(에르치)는 황위 계승 서열에 있어서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결혼과 함께 이를 과감히 포기하였다. 

 

빈디슈-그래츠 백작인 오토 공자와 결혼한 후의 엘리자베트 마리

 

처음에 프란츠 요셉 황제는 엘리자베트 마리가 오토 백작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무조건 반대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사실상 손녀 엘리자베트 마리를 프러시아 황실에게 시집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럽 정세를 보면 프란츠 요셉 황제의 생각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서 상당히 수긍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이자베트 마리는 죽어도 오토와 결혼하겠다고 끈질기게 우겼다. 마침내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의 소원인들 못 들어주겠느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엉뚱한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오토 백작이 이미 어떤 여인과 약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9살의 귀족이 그때까지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 안되는 사실이어서 오토가 약혼하고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토 백작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당장 약혼을 없던 것으로 하고 손녀인 엘리자베트 마리와 결혼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요구하였다. 대제국의 황제가 그렇게 말하는데 일개 하찮은 귀족으로서 '아니올시다'라고 말할 재간이 없었다. 오토 백작은 곧바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후 오토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배려로 대공(Fürst)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 백작과의 결혼은 말하자면 귀천상혼이었다. 귀천상혼은 영어로 Morganatic marriage 라고 하지만 Left-handed marriage 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서로 신분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결혼을 한다면 일반적인 경우와는 반대로 신랑이 왼손으로 신부의 오른손을 잡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트 마리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친손녀인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 백작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한두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무슨 경우던지 엘리자베트 마리가 황위계승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남편이 되는 오토라는 사람도 절대로 황위계승권이 어떠니 하면서 함부로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비록 오토의 빈디슈 그래츠 가문이 합스부르크 황실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라한 것이지만 그것을 문제로 삼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초라한 가문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언감생심 욕심을 부려서 나중에 엘리자베트 마리를 부추키고 압박하여서 황위계승권을 주장할 소지는 완전히 없다고 할수는 없으므로 은근히 걱정을 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물론 그같은 조건들을 두 말 없이 받아 들였다.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런 엘리자베트 마리가 측은하게 보이기도 해서 결혼지참금을 넉넉하게 주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유일한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유부남이면서도 스캔들로 인하여 동반자살까지 하여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는데 여기에 손녀까지 결혼문제로 스캔들에 휩싸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어쩔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는 후문이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는 1902년 1월 호프부르크의 궁정교회(Burgkapell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오토(빈디슈 그래츠의 오토)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셋은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망내인 딸은 체코의 플로슈코비츠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큰아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란츠라고 지었으며(1904-1981), 둘째 아들은 남편 쪽의 이름을 따서 에른스트 베리안드(Ernst Weriand)라고 지었고(1905-1952), 셋째 아들은 아버지인 루돌프 황태자의 이름을 따서 루돌프라고 지었으며(1907-1939), 딸 스테파니 엘레오노레는 어머니인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1909-2005). 엘리자베트 마리의 공식적인 풀 네임은 '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트 스테파니 기젤라 폰 외스터라이히'(Elisabeth Marie Henriette Stéphanie Gisella von Osterreich)이다.

 

 

딸 스테파니와 함께있는 엘리자베트 마리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의 결혼이 실현되기 전에 벨기에 왕실에서는 엘리자베트 마리를 벨기에 왕세자인 알베르와 결혼시키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대두된 일이 있었다. 알베르 왕자는 벨기에의 왕위계승자였다. 그러자 알베르 왕자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가 극력 반대하였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어머니인 스테파니 공주는 레오폴드 2세의 딸로서 알베르 왕자의 누이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왕실간의 정책결혼이라고 해도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더구나 스테파니가 헝가리의 로니아이 백작과 귀천상혼을 치루어서 세간의 구설수에 오른 마당에 엘리자베트 마리를 벨기에의 차기 왕비로 맞이한다면 또 다른 스캔들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조심되기도 했다. 레오폴드 2세가 엘리자베트 마리와 알베르 왕자의 결혼을 크게 반대하였지만 알베르 왕자의 누이인 앙리에트도 죽어라고 반대하였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배경이 불안정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에서였다. 아무튼 사실상 엘리자베트 마리는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데 엘리자베트 마리의 외가인 벨기에 왕실에서 이러쿵 저러쿵 논란이 많았었다. 떡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 셈이었다.

 

첫 남편인 오토 공자와 함께 결혼기념.1902년

 

그런데 엘리자베트 마리 와 오토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비록 결혼 후에 네 자녀를 갖게 되었지만 남편 오토라는 백성은 돈 조반니의 사촌쯤 되는 사람이어서 이곳저곳에 애인들을 두며 엔조이 하는 것이 취미였다.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엘리자베트 마리는 질투심으로 거의 신경질적이 되어 공연히 주위 사람들만 들들 볶았다. 그러던 중 어느 해에 남편의 애인으로서 꽤 유명한 어떤 여배우가 프라하에서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까지 가서 그 여자에게 권총을 쏘아 중상을 입힌 사건까지 있었다. 그 여배우는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프란츠 요셉 황제는 대단히 화를 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에게서 아들 루돌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엘리자베트 마리의 큰 아들이 모처럼 세례를 받는 행사에도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스캔들은 심심하던 판에 비엔나 궁정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다. 스캔들의 소스는 오토뿐만이 아니라 엘리자베트 마리로부터도 생산되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도 남들이 보면 그냥 쉬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다른 남자와 열애에 빠진 경우가 있었다. 상대는 1차 대전 중에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장이던 에곤 레르흐(Egon Lerch)였다. 그런 중에도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이들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주로 신경을 쓴 일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간수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겨울에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아드리아해에 있는 이스트리아(Istrien)섬에 가서 지냈다. 1913년 엘리자베트 마리는 이곳에서 프러시아 출신의 에곤 레르흐라는 잠수함 장교를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연인이었던 에곤 레르흐 독일 해군 장교. U보트 함장으로 1차 대전에 참전 중 전사했다.

 

그러다가 2년후인 1915년 8월에 에곤 레르흐가 독일 U보트에 승선하여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에곤 레르흐의 죽음은 엘리자베트 마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슬픔이었다. 한때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남편인 오토와 재결합하려는 생각도 했지만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 일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남편 오토가 성실치 못하다는 점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남편이 헝가리 귀족으로서 합스부르크 왕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편 오토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자기들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심하면 불평을 털어 놓았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1차 대전 중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프란츠 요셉 황제의 손자가 되는 카를이 카를 1세로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로 보면 조카가 되는 사람이었다.

  

결혼후 엘리자베트 마리 초상화

 

1916년, 할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서거하자 얼마후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 1차 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 부터였다. 얼마후인 1921년 엘이자베트 마리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이를 계기로 레오폴드 페츠네크(Leopold Petznek)를 만났다. 레오폴드 페츠네크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헝가리 국경 지대에 있는 브루크 안 데어 라이타(Bruck an der Leitha) 출신으로 어떤 공인회계 단체의 책임자였다. 그후 페츠네크는 교사를 하다가 사회민주당원이 되었으며 1차 대전 후에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 의회(Landtag) 의장까지 지냈다. 페츠네크는 평범한 가정 출신이지만 대단히 교양이 높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결혼해서 아들 하나까지 둔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부인은 정신질환을 앓게 되어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마우어 올링에 있는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었으며 그렇게 10여년을 지내다가 19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그런 페츠네크를 사랑하였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오토와의 이혼을 원했지만 법원은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해서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그렇다면 법적으로 별거의 상태에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 들여져서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 부부는 1924년부터 법적으로 정식 별거에 들어갔다.

 

결혼할 당시의 엘리자베트 마리

 

별거 중인 두 사람에게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자녀 소유권 투쟁이 벌어졌다. 당초에 법원은 별거를 승인하면서 엘리자베트 마리에게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데리고 살도록 했고 오토에게는 셋째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을 우습게 생각한 엘리자베트 마리는 네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있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토가 법원의 판결대로 아들 둘을 데리러 오려고 하자 집에 무장한 사민당 당원들을 배치하여 오토가 아이들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했다. 오토가 그러면 되느냐고 항의하자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이들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합스부르크에 대하여 일종의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는 때에 합스부르크의 유일한 후손인 엘리자베트 마리가 남편 때문에 자살을 한다면 그건 큰일이기 때문에 오토는 어쩔수 없이 손을 놓고 있어야 했다. 결국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이들 넷을 모두 데리고 살았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을 꽤나 위하고 좋아서 죽겠다고 했지만 아이들이 장성하고 독립심을 보이자 관계가 나빠졌다. 그래서 아들이고 무어고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사민당을 통한 정치활동에 더 열성을 보였다. 그 한 예로서 셋째 아들인 루돌프를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고 대신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서 공장에 보내서 노동을 하도록 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니, 합스부르크의 후손이 공장에서 노동을 하도록 하다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25년 엘리자베트 마리는 합스부르크의 혈통이라는 것도 모두 내 팽개치고 사회민주당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그를 '디 로테 에르츠헤르초긴'(die rote Erzherzogin)이라고 불렀다. '붉은 공주' 또는 '붉은 대공녀'라는 뜻이다. 당시 사민당은 기사당과는 달리 붉은 색의 공산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딸 스테파니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첫 남편과 결혼한 것이 어머니 엘리자베트 마리가 그 남자를 싫어했기 때문에 반감이 생겨서 그렇게 했다고 밝힌바 있다. 콩가루 집안이었다.

 

   

말년의 엘리자베트 마리. 오른쪽은 루돌프 황태자의 젊은 시절. 아버지 루돌프는 딸 에르치가 이렇게 성장한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1929년에 엘리자베트 마리는 비엔나의 휘텔도르프에 빌라를 한 채 사서 이사했다. 그는 이 집에서 페츠네크와 20여년을 살았다. 그는 페츠네크의 사민당 활동을 크게 지원했다. 사민당에서 엘리자베트 마리는 상당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페츠네크와 함께 집회나 시위에 참석하면 사람들은 페츠네크도 함께 높이 평가했다.

1934년에 아직도 법적으로는 남편인 오토가 큰 아들과 합세하여 엘리자베트 마리를 법적으로 보호관찰 해 달라는 소송을 낸 일이 있다. 법적으로 두 사람 공동명의의 재산 중에서 상당 부분을 엘리자베트 마리가 혼자서 처분해서 횡령했으며 또한 사민당에 잘 보이기 위해서 기부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냥 계속 놓아 두었다가는 재산이고 무어고 다 사라질 것 같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 달라는 소송이었다. 나중에 오토는 소송을 취하하여 없던 일로 되기는 했지만 이미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돌이킬수 없는 것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이혼은 금지사항이었다. 이혼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1938년 이후였다. 합병되고나서부터는 독일의 법을 적용받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로마 가톨릭 국가가 아니라 개신교(주로 루터교) 국가였으므로 이혼이 가능했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의 이혼은 1938년 이후 가능했지만 실제로 이혼이 성립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였다.

 

레오폴드 페츠네크. 엘리자베트 마리의 두번째 남편

 

1933년 말에 오스트리아 공화국 당국은 페츠네크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페츠네크는 1934년 7월까지 감옥에서 지냈다. 1944년에는 나치가 그를 체포하여 이번에는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는 다하우에서 1945년 미군이 진격하여 해방되기까지 지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오스트리아연방감사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종전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새로운 합스부르크법이라는 법을 만들어서 모든 합스부르크 황실의 사람들에 대한 제한사항을 새롭게 규정했다. 이 법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황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오스트리아에서 살 수 없으며 어떠한 재산도 오스트리아에서 소유할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제한은 엘리자베트 마리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 마리는 이미 첫번째 결혼을 할 때에 합스부르크 황실 멤버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가 가지고 있던 공식적인 호칭, 즉 오토의 경우에는 빈디슈-그래츠 공자(휘르스틴)라는 호칭과 엘리자베트 마리의 경우 대공비(Erzherzogin: Archduchess)라는 호칭은 1919년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되면서부터 모두 없던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 마리는 오스트리아에 남아서 살수 있었으며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을수 있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1948년에 공식적으로 오토와 이혼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엘리자베트 마리는 레오폴드 페츠네크와 비엔나 등기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서 신고를 하였다.

 

14구 펜칭의 엘리자베트 페츠네크 가쎄 도로 표지판. 그 아래의 안내판에는 '황실가문의 일원. 여권운동가로서 활동'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소련의 적군(레드 아미)이 비엔나를 해방했을 때 엘리자베트 마리의 휘텔도르프 빌라는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집안에 있던 물건들은 소련군이 모두 약탈해 갔다. 휘텔도르프가 프랑스의 관할 구역이 되자 이번에는 그 빌라가 프랑스군 장군의 숙소가 되었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페츠네크는 정부에서 지정해 주는 일반 공동의 작은 아파트(보눙)에서 지내야 했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레오폴드 페츠네크 부부는 1955년 오스트리아가 독립국가가 되고 나서야 원래의 집에 들어가서 살수 있었다. 그때 쯤해서 두 사람은 모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페츠네크는 1956년 7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통풍(痛風) 때문에 휠체어에 의지해서 독일 세퍼드 한 마리와 함께 살았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1963년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임종에 즈음해서 그를 보살펴 주던 사람들에게 아들들이 만나러 와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엘리자베트 마리와 오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셋 중에서 하나는 세상을 떠났고 둘은 생존해 있었다. 엘리자베트 마리의 임종을 잠시나마 지켜볼수 있었던 사람은 딸 슈테파니 뿐이었다. 그것도 하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나 볼수 있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경찰을 불러서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소유물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정부의 문교성이 자기의 소유물을 모두 가져가도록 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약 500 항목에 이르는 유물을 남겼다. 그중에는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사용하던 가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이들을 모두 오스트리아 정부에 헌납했다. 전 남편 오토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귀중 서적이나 미술품들은 엘리자베트 마리의 소유가 아니므로 모두 경매에 붙여졌는데 대부분 현재 비엔나의 박물관들이 소장하고 있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죽을 때까지 반려가 되었던 세퍼드 개를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야 그것만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엘리자베트 마리는 죽은 후에 휘텔도르프 공동묘지의 무연고 묘소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14구 펜칭의 엘리자베트-페츠네크-가쎄는 엘리자베트 마리를 기념해서 이후에 지어진 거리 이름이다. 1995년 이래로 그 빌라는 소카 가카이(창가학회)라는 일본 불교종파의 소유가 되었다. 웬 창가학회?

 

노년의 엘리자베트 마리 페츠네크와 휘텔도르프 공동묘지 무연고자 묘소에 있는 그의 묘. 그 옆은 남편이었던 레오폴드 페츠네크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