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더 알기

파스티치오가 뭐길래?

정준극 2013. 4. 1. 00:00

파스티치오가 뭐길래?

Pasticcio 또는 Pastiche

 

'아이반호' 그림. 오페라 '아이반호'는 파스티치오이다.

                       

음악에 있어서 파스티치오(Pasticcio) 또는 파스티셰(Pastiche)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일부를 가져와서 가지의 작품에 사용하여 만든 오페라 또는 음악작품을 말한다. 다른 작곡가들과는 함께 작업을 할수도 있고 하지 않았을수도 있다. 이미 작고한 작곡가들이거나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작곡가들이라면 함께 작업을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원래 작곡가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들의 음악을 임의로 그대로 사용하거나 모방하여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복잡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므로 간단히 말하면 음악의 '짝퉁'을 말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음악을 가져와서 혼합하기 때문에 뒤범벅(영어로 핫지 팟지: Hodge-podge)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식으로 보면 비빔밥이다. 그런데 뒤범벅이든 짝퉁이든 그런 단어에는 조잡하거나 유치하다는 의미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파스티치오 또는 파스티셰는 일반적으로 누구나 감탄하는 훌륭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한 파스티슈는 진작부터 예술형태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1069년에 존 파울러(John Fowler)라는 작가가 펴낸 The French Lieutenant's Woman(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요소들을 가져와 엮어서 펴낸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옛날 사람들의 작품에서 내용들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허락까지는 받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파슈티슈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를 파스티셔(pasticheur)라고 부른다. 파스티슈는 패러디(Parody)와는 다르다. 패러디란 풍자적인 모방을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노래와 가사를 모창으로 하여 풍자적으로 다르게 고쳐서 부르면 그것은 패러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패러디에서는 모방을 조소적으로 사용하지만 파스티슈에서의 모방은 오히려 원래 작품을 찬양하는 의미가 강하다. 파스티슈는 표절(플래지아리슴: plagiarism)과도 차이가 있다. 표절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서 일정 부분을 정당한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다가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속여서 사용하는 것이지만 파스티슈는 대체로 정당하게 허락을 받고 사용한다.

 

'보석함'(Jewel box)이라는 말은 화려한 오페라극장의 내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진은 파리 갸르니에 극장

                       

파스티치오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일까? 일찍이 16세기부터 사용하던 단어라고 한다. 고기와 파스타를 함께 넣은 파이를 파스티치오(pastitsio)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pasticcio 라는 단어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13세기의 라틴어에서 파스티치움(pasticium)이란 단어는 파이 또는 파스타를 말하는 것이었다.  파스티셰는 그리스-로마 스타일의 음식인 파스티치오의 프랑스어 버전이다. 프랑스에서는 여러 내용물을 넣어 만든 파이를 파스티셰라고 부른다. 그래서 영국에도 파스티셰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파이를 의미하게 되었다. 영어의 Hotchpotch(고기와 야채등을 넣은 잡탕찜)라는 단어도 Hodgepodge와 같은 의미이다.  파스티치오라는 말은 음악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문학작품에 사용하던 용어였다. 그것이 주로 음악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헨델의 '무치오 스케볼라'(Muzio Scevola)의 경우, 1막은 필리포 아마데이(Filippo Amadei 또는 Filippo Mattei)가, 2막은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Giovanni Battista Bononcini)가, 3막은 헨델이 작곡한 파스티치오이다. 글룩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파스티치오 오페라를 남겼다.

 

'보석함'(보석상자: The Jewel Box)이라는 오페라 부파가 있다. 파스티치오(Pasticcio) 오페라로서 2막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에 담겨 있는 음악, 모차르트가 콘서트 아리아로 작곡한 음악, 모차르트가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에 넣기 위해 작곡한 음악들에서 발췌하여 하나의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오페라 '보석함'의 작곡자는 모차르트이다. '보석함'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모두 아리아와 앙상블이 마치 보석처럼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도 명색이 하나의 오페라이므로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노래의 가사들을 스토리에 맞게 고쳐야 할 필요가 생겼다. 영국의 대본가 겸 음악평론가인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 1947-)가 줄거리를 위해 가사들을 정리했다. 이와 함께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폴 그리피스는 모차르트가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에 넣기 위해 작곡한 음악들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바로크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위해 아리아 또는 앙상블을 여러 곡이나 만들었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프란체스코 비안키(Francesco Bianchi), 파스쿠알레 안포씨(Pasquale Anfossi), 니콜라이 피치니(Niccolai Piccini) 등의 오페라에 들어가는 아리아들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오페라는 오늘날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으므로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리아나 앙상블들도 함께 묻혀 있게 되었다. 이 점을 영국의 폴 그리피스가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폴 그리피스가 편집하고 정리한 오페라 '보석함'은 1991년 2월 19일 영국 노팅엄(Nottingham)의 왕립극장에서 '오페라 노우스'(Opera North)에 의해 초연되었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1991년은 모차르트 서거 2백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이후 '오페라 노우스'의 영역인 영국 북부지역에서 '보석함'이 자주 공연되었다. 미국에서는 1993년 밀워키에서 '스카이라이트 오페라 극장'이, 1994년 버지니아주 비엔나의 여름음악축제에서 '월프 트랩 오페라'가, 1996년에는 '시카고 오페라 극장'과 '뉴저지 주립 오페라단'이 공연하였으며 다시 영국에서는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뱀튼 클래시컬 오페라'(Bampton Classical Opera)가 공연하였다.

 

오페라의 귀재 로시니는 평생에 약 4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와는 별도로 로시니의 오페라 중에서 발췌한 곡으로만 만든 파스티치오가 두 편이 있다. 비록 다른 사람이 편집한 것이지만 이들도 로시니의 작품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하나는 3막의 '아이반호'(Ivanhoé)이며 다른 하나는 역시 3막의 '로베르 브루스'(Robert Bruce)이다. '아이반호'는 잘 아는대로 스코틀랜드의 문호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소설이다. 이를 바탕으로 에밀 드샹(Émile Deschamps: 1791-1871)과 가브리엘 귀스타브 드 와일리(Gabriel Gustave de Wailly: 1804-1878)가 프랑스어 대본을 만들었고 이를 악보출판가인 안토니오 파치니(Antonio Pacini)가 로시니의 '세미라미드'(Semiramide), '라 체네렌톨라'(La Cenerentola: 신데렐라), '라 가짜 라드라'(La gazza ladra: 도둑까치), '탄크레디'(Tancredi), '젤미라'(Zelmira)에서 이 음악 저 음악을 가져와서 짜집기하여 '아이반호'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로 만들었다. 안토니오 파치니가 '아이반호'를 만든 목적은 로시니의 오페라를 파리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오페라 '아이반호'는 1826년 9월 15일 파리의 오데온극장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 덕분인지 로시니의 명성도 한층 높아졌고 이후 로시니의 오페라들은 파리에서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로시니의 '로베르 브루스' 음반 커버

 

'로베르 브루스'는 1846년에 스위스 출신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작곡가 루이 니더마이어(Louis Niedermeyer: 1802-1861)가 로시니의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 '젤미라'(Zelmira), '비안카와 팔리에로'(Bianca e Falliero),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Torvaldo e Dorliska), '아르미다'(Armida)에서 음악을 가져와 자기가 작곡한 음악과 함께 짬뽕으로 만든 오페라로서 1846년 12월 30일 파리의 왕립음악원극장(Théâtre de l'Académie Impériale de Musique: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로시니는 1843년에 신병 치료차 파리에 와서 머무른 일이 있다. 이때 파리 오페라극장의 감독인 레옹 피예(Leon Pillet)라는 사람이 로시니를 찾아와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로시니는 바쁘다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간청하자 로시니는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를 조금 수정해서 프랑스어 대본으로 만들어 공연하면 될것이 아니냐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얼마후 로시니는 다시 볼로냐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레옹 피예가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볼로냐로 로시니를 만나러 왔다. 이번에는 아예 대본가인 귀스타브 바에즈(Gustave Vaëz)와 작곡가인 루이 니더마이어를 대동하고 왔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호수의 여인'의 프랑스어 버전이라고 할수 있는 '로베르트 브루스'였다. 물론 '로베르 브루스'에는 '호수의 여인'의 음악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로시니의 다른 오페라의 음악도 적당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루이 니더마이어는 주로 레시타티브 파트의 음악을 만들었을 뿐이다. 로시니는 자기의 음악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지만 '로베르 브루스'의 파리 초연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로베르 브루스'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오페라가 아닌 일반 음악작품에서도 파스티치오가 있다. 대표적인 예는 모차르트 초기의 피아노 협주곡들일 것이다. K 27, 29, 40, 41의 네 곡이 파스티치오에 해당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당시 다른 작곡가들의 키보드 소나타 악장에서 일부 또는 전부를 가져와서 여기에 오케스트라 파트를 만들어 넣어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했다. 파스티치오 미사곡은 한때 유행했었다. 미사곡은 대체로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누스 데이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장엄미사'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파스티치오 미사곡의 연주에 있어서는 연주자가 A라는 작곡가로부터는 키리에를, B라는 작곡가로부터는 글로리아를 가져와서 하나의 완전한 미사곡으로 만들어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