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마지막 애인 캐리 프링글

정준극 2013. 8. 22. 18:50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

바그너의 마지막 러브 어페어

  

배우 겸 성악가인 캐리 프링글

 

'연애를 잘 해야 작곡도 잘 한다'는 말은 아마 바그너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바그너는 70평생을 통해서 여러 여인들과 좋게 말해서 연애를 하였고 나쁘게 말해서는 불륜을 저질렀다. 이같은 애정행각은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바그너와 같은 저명인사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바그너의 여성편력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습관성 행동이었다. 그런 그를 연애박사라는 칭호와 함께 존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일반 사람들은 '별로 생기지도 않은 마당에 바람은 많이도 피었군!'이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정식으로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여배우 민나 플라너였고 두번째 부인은 프란츠 리스트의 딸로서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였다. 바그너는 코지마가 한스 폰 뷜로브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어느덧 두 딸을 두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바그너가 얼마나 코지마를 열열히 사랑하였기에 남의 부인과 동거생활을 해서 자녀까지 두었을까라는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코지마와 식도 올리지 않고 사는 중에도 다른 여자와 한눈을 팔거나 또는 세상이 다 아는 연애를 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튼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바그너는 70세에 가까운 노령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이라는 20대 중반의 아가씨를 좋아해서 곁눈을 팔았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된 사람들로부터 '거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노인네가 주책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바그너의 마지막 연애의 대상인 캐리 프링글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프라노였다. 캐리 프링글은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재원이었다. 캐리 프링글은 1882년 7월, 바그너의 '파르치팔'이 바이로이트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꽃 처녀들'(Flower maiden) 중의 한 사람으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어 무대에 섰던 여자였다. 그때 바그너는 69세였고 캐리 프링글은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스믈 너댓살 정도였을 것이다. 바그너는 캐리 프링글을 보자마자 그 가녀린 아름다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어 상당한 감탄과 함께 연애의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파르치팔'의 리허설 기간 중에는 물론 정작 공연에서도 캐리 프링글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그저 남이 듣던 말던 칭찬하는 말만 했다. 사람들은 그런 바그너를 보고 '노인네가 망녕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하지만 정력 하나만은 알아주어야 해'라는 식으로 말했다.

 

1882년 파르치발 초연에 출연했던 꽃처녀(플라워메이든)들. 캐리 프링글은 맨 오른쪽이다.

 

바그너가 캐리 프링글이라는 젊고 예쁜 소프라노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천부적인 연애선수인 코지마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지마도 남의 아내로 있으면서 바그너와 동거하며 지냈고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까지 두명이나 낳은 입장이었으므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식으로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수도 없었다. '파르치발'의 초연을 마친 바그너는 건강이 상당히 나빠 있었다. 날씨가 좋은 베니스에 가서 요양하는 것이 필요 했다. 코지마가 베니스행을 적극 주장했다. 바그너는 7월에 '파르치발'의 초연이  끝나자 잠시 밀린 일 좀 정리한 후 9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베니스로 떠났다. 바그너가 베니스로 떠나기 전에 한 일 중의 하나는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파르치발'을 공연하든지 또는 다른 작품을 공연할 때에는 제발 캐리 프링글을 초청해서 주역으로 삼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렇게 되면 베니스에서 요양하면서도 캐리 프링글과 자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일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코지마는 단단히 화가 나서 바그너와 대판 말다툼을 벌였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렇지 않아도 병약해진 바그너는 '아니 무슨 여편네가 이리도 난리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결국 이듬해인 1883년 2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그때 70세였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인하여 아무튼 캐리 프링글이라는 여인은 바그너 생애의 마지막에서 바그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으로 음악사에 기록되고 있다.  

 

영국의 조나단 하베이(Jonathan Harvey)라는 작곡가가 '바그너의 꿈'(Wagner Dream)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있다. 200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초연된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바그너가 작곡을 추진했다가 일부 스케치만 해놓고 밀어 놓았던 '승리자'(Die Sieger)를 참고로 하여 만든 작품이다. 바그너는 '승리자'를 구상하면서 불교적인 테마를 도입코자 했다. 조나단 하베이는 그런 불교적인 테마에 바그너의 생애를 짜집기 형식으로 구성했다. 아무튼 이 오페라에는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난 이야기도 나온다. 그리고 코지마와 캐리 프링글도 등장한다. 다만, 두 사람 모두 노래는 부르지 않고 대사만을 말하는 역할이다. 이렇듯 캐리 프링글은 바그너의 생애를 다룬 오페라에도 등장할 정도로 기억되는 여자였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바그너의 여성편력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별것을 다 정리해 놓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그너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필요한 사항일지 모르기 때문에 소개한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다닐 때인 18세 때에 레아 다비드(Leah David)라는 아가씨를 죽어라고 사랑한 일이 있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유태계 여인인듯 싶다. 하지만 그 아가씨가 바그너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바람에 헛물만 켜고 물러난 일이 있다. 바그너는 그때 레아 다비드와 함께 있지 못하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대단한 각오였지만 그건 생각뿐이었고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무튼 레아 다비드로부터 채임을 당하자 반유태정사가 싹튼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레아 다비드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 있는 후부터 바그너의 연애역사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레아 다비드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난리를 피더니 1년이 지나자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제니 라이만이라고 하는 귀족 가문의 아가씨를 죽어라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사랑도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바그너는 겨우 19세였다. 이렇게 하여 바그너는 연애에 대한 경력을 차츰차츰 쌓아가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21세 때에 여배우 민나 플라너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열중했다. 그래서 무려 3년 동안 민나 플라너를 쫓아 다니며 결혼하자고 졸라댔다. 민나는 바그너의 극성이 귀찮기도 하고 성가시기도해서 마침내 바그너가 23세 때에 그와 결혼했다. 민나 플라너는 바그너보다 4년 연상이었다.

 

바그너는 민나 플라너를 죽자사자 쫓아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명한 소프라노인 빌헬미나 슈뢰더 드브리앙을 사모하여 밤을 지새며 번민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빌헬미나 슈뢰더 드브리앙을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생각하고 사모하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성사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바그너가 25세 때에는 부인인 민나가 어떤 군인과 좋아하다가 드디어 야반도주한 일이 발생했다. 민나와 군인과의 좋게 말해서 연애, 나쁘게 말해서 불륜은 그 군인이 민나의 돈만 챙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수중에 돈이 떨어진 민나는 어쩔수 없이 바그너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바그너는 그런 민나를 너그럽게 받아 들였다. 그렇게해서 민나와 바그너는 한동안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36세때에 공화제를 요구하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하는 바람에 당국의 수배인물이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할 입장이 되었다. 바그너는 선배 겸 친구인 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체포직전에 스위스로 도망갈수 있었다. 그때에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로서 이미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코지마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민나도 없고 코지마도 없는 스위스로 온 바그너로서는 그야말로 노 마크 찬스를 얻은 셈이었다. 바그너는 스위스에서 제시 라슨이라는 여인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영국 출신의 제시 라슨은 보르도에서 포도주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지내고 있던 여인이었다. 어찌하다가 바그너와 알고 지내게 되어 급기야는 애인으로 잠시 지냈다.

 

바그너가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생각했던 빌헬미나 슈뢰더 드브리앙. 당대의 최고 소프라노였다.

 

바그너는 그후 취리히에서 살고 있는 베젠동크 부부와 알고 지내게 되었다. 남편인 오토 베젠동크는 비단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다. 부인인 마틸데 베젠동크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문학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말하자면 여류 시인이었다. 두 사람은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의 후의로 그들의 저택에 있는 별채에서 머물면서 작곡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예쁘고 나긋나긋하며 상냥하고 예술에 대한 조예가 남다르게 뛰어난 마틸데 베젠동크를 사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로 인하여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가곡'이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바그너의 최대 걸작인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조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당시 바그너의 정식 부인이었던 민나의 간섭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후 바그너는 49세 때에 마틸데 마이어라는 여인과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프레데리케 마이아라는 여인과 밀회를 거듭하며 인생의 존재의미를 강조하였다.

 

민나는 바그너와 별거하며 혼자 지내다가 바그너가 53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민나는 바그너보다 4년 연상이므로 향년 57세였다. 바그너는 그 전부터 코지마와 좋아지내다가 민나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예 코지마를 집으로 들어와서 살게 했다. 코지마는 그동안 바그너와 지내면서 낳은 두 딸을 데리고 바그너의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하지만 코지마는 아직 법적으로는 지휘자인 한스 폰 빌로브의 부인이었다. 코지마와 한스 폰 빌로브의 이혼이 성립된 것은 바그너가 57세 때였다. 그리하여 바그너와 코지마는 정식으로 결혼하고 부부가 되었다. 바그너는 그 후에도 예쁜 여자만 눈에 보이면 마치 '웬만해선'의 노주현 처럼 목소리를 깔고 점잖게 행동하며 관심을 끌어서 친하게 지낸 일이 한두번 있었다. 그렇지만 코지마의 은근한 압박으로 내놓고 바람을 피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69세라는 노년에 20대 중반의 캐리 프링글을 만나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바그너의 간단한 여성편력이었다.

 

바그너는 공식적으로 첫번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가 세상을 떠나자 코지만 빌로브와 재혼을 했다. 그러나 재혼하기 까지의 사연이 정상적이지 못했다. 세간의 핀잔을 받기에 충분한 사연이었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바그너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보다 4년 연상인  민나 플라너라는 여배우를 어찌어찌하다가 만났고 민나가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결혼하자고 집요하게 졸라대는 바람에 결국 민나는 귀찮기도 하고 또한 무슨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 같아서 바그너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30년 동안 부부로서 지냈다. 그런데도 자녀는 없었다. 비록 30년 동안 법적인 부부였지만 마지막 10년은 사정상 거의 별거해서 살았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겉으로는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라는 여인과의 연애관계 때문에 깨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아서 불화가 계속되었고 결국 결별은 당연한 순서였다. 민나는 바그너와 결별한지 8년 후에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 보건대 바그너는 민니와 결혼한지 14년이 지난 1850년에 민나와 아주 헤어질 생각을 하고 여러 궁리를 했다. 그때 바그너는 21세밖에 되지 않은 제시 라소(Jessie Lassot)라는 여자와 불륜의 연애를 했다. 바그너는 37세였다. 영국출신의 제시 라소는 파리에서 보르도 와인 사업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우연히 바그너를 만나 사랑의 불꽃을 태웠다. 바그너와 제시는 저 멀리 극동으로까지 가서 세상과 작별하고 둘이서만 살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가 극동은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그리스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민나가 이 계획을 눈치채고 제시의 친정 어머니를 만나 '사람이 이러면 되느냐?'고 설득해서 바그너와 제시의 도피계획을 중단시켰다. 이로 인하여 바그너는 결국 민나에게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 일단 민나에게 돌아간 바그너는 어쩐 일인지 민나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서 두 사람은 마치 결혼 전에 정열을 불태웠던 것처럼 지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바그너와 민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은 것은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뜨거운 관계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너무 간단히 설명한 것 같으므로 미안한 심정이 들어서 바그너와 민나, 베젠동크, 코지마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코자 한다.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 여배우였으므로 예쁘장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당국의 현상수배를 받게 되자 스위스로 야간도주하였다. 바그너는 마침 취리히에 살고 있는 베젠동크 부부의 도움을 받아 지내게 되었다. 마틸데와 오토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그리고 베젠동크는 비단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1857년에 취리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는 중에 자기를 열렬히 숭배하는 마틸데 베젠동크와 열애의 관계에 들어갔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아주 미인이었고 더구나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바그너는 1857년부터 예쁘고 지성적인 베젠동크 부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미치도록 사랑하게 되었다. 마틸데 베젠동크도 바그너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바그너를 사랑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그너의 애절한 사랑의 호소를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면서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민나의 주장대로 남편이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그너에게 접근하였고 바그너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통상적인 친구, 또는 청년 작곡가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의 부인이라는 것을 뛰어 넘어 애틋하고 애절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그리고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진실로 사랑하였다면 그것은 바그너는 물론이고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에게 있어서 평생 처음인 완성되고 숭고한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과 좀 수상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증거가 없어서 가만이 있었다. 민나도 한 인물하는 예쁜 편이었지만 머리가 비어있다시피 한 여인이었고 사치만 일삼는 한심한 여자였으므로 베젠동크 부인과는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는 중에 민나는 1858년 4월에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의 내용은 누가보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수 있는 것이었다. 민나는 두 사람이 간통을 했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바그너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민나가 편지의 내용을 과대해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중에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추가로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편지에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을 '바람둥이 여자'(hussy), 또는 '순결하지 않은 여자'(filthy woman)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었다. 민나는 이로 미루어보아 베젠동크 부인이 바그너를 유혹하였고 바그너는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고 추측했다.

 

베젠동크 부인.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영감을 받았다는 여인이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독일 출신의 여류 시인 겸 작가이다. 단순한 바그너와는 친구 사이가 아니라 그의 정부(미스트레스)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다섯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것을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이라고 부른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작품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던져준 여인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젠동크와의 관계가 영감을 주어 완성한 오페라라고 한다. 한편, 바그너의 사생활과 관련하여서는 첫번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과 바그너가 이혼하게된 원인을 제공해 준 여인이었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예쁘게도 생겼지만 대단히 지성적이며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조예가 깊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마틸데 베젠동크의 결혼전 이름은 아그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가 사랑하여서 태어났다. 마리 다구는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작가로서 리스트와 한동안 동거생활을 하였다. 코지마는 처음에 한스 폰 빌로브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와 결혼하였으나 나중에 바그너와 눈이 맞아 먼저 스위스로 도망간 바그너를 나중에 쫓아 갔고 결국 바그너와 결혼하여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코지마가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된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음악사에 길이 남을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였다. 바그너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창설한 것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 특히 '파르지팔'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을 증진하는 일에 여생을 헌신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바그너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된 지그프리트 바그너이다. 아무튼 코지마의 생애도 바그너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코지마는 1837년 12월 24일 북부 이탈리아의 코모 롬바르디아에서 태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코지마의 아버지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의 여류작가로서 귀족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었다. 코지마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 그리고 가정교사와 함께 지냈다. 코지마는 20세가 되는 1857년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 1830-1894)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대체적으로 이들의 결혼생활을 사랑이 없는 것이었다. 코지마는 한스 폰 뷜로브와 결혼한지 6년 후에 바그너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바그너는 코지마보다 24세나 연상이었다. 결국 코지마는 바그너와 1870년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주관하였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레퍼토리를 바그너의 10개 오페라로 구성된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eyreuth Canon)으로 확대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오로지 코지마 바그너의 헌신적인 기여때문이었다.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

                             

바그너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흐, 그리고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베토벤에 이어 가장 위대하고 특별한 작곡가였다. 오페라와 관련해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서 존경받고 있는 베르디에 버금갈 정도로 오페라의 역사에서 일대 변혁을 일으킨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아무리 고전음악에 대하여 문외한이라고 해도 '여자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노래인데 정작 '여자의 마음'을 누가 작곡했느냐고 물으면 '베르디이던가?'라고 확실치 않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음악에 대하여 문외한이 사람이라고 해도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하는 '딴 따다단...'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이다. 바그너는 그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점잖지 않게 여성편력이 대단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유치하고 치사한 연애도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설마 바그너 선생이 그럴리가 있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