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토, 보니파치오 백작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 - Oberto, the Count of San Boniface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의 첫 오페라
청년 시절의 베르디
보통 '오베르토'라고 부르는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Oberto, Conte di San Bonifacio)라는 긴 제목의 오페라는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의 첫 오페라이다. 1839년 11월 17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그때 베르디는 26세의 약관이었다. 2막의 '오베르토'는 대본을 테미스토클레 솔레라(Temistocle Solera: 1815-1878)가 썼다. 솔레라는 안토니오 피아짜(Antonio Piazza)라는 사람이 이미 써놓은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수정본을 만들었다. 솔레라는 나중에 베르디를 위해 '나부코'와 '아틸라'의 대본을 제공한 뛰어난 대본가이다. 라 스칼라에서의 '오베르토' 공연은 '상당한 성공'이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이었다. '오베르토'에서의 음악은 그후 베르디의 전 생애를 통해서 베르디 스타일이라는 특별한 음악기조를 마련해 준 발판이었다. 라 스칼라의 임프레사리오(흥행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는 청년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두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메렐리는 나중에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이 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페피나)가 젊었을 때의 애인이었다. 베르디는 두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가 의외로 실패로 서 막을 내리게 되자 스스로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작곡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보다도 그때 베르디는 사랑하는 두 어린아이와 부인이 뜻하지 아니하게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허망하게 생각하여 작곡가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자했다. 인생의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로서 말할수 없는 난관을 겪은 것이었다. 그래서 '작곡가가 될 것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생각하다가 아예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산보니파치오백작 오베르토
그럴 때 라 스칼라의 메렐리가 베르디에게 '나부코'의 대본을 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곡을 한번 해보라고 적극 권유하였고 그로써 불후의 걸작인 '나부코'가 탄생하게 된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이다. '오베르토'는 비록 라 스칼라에서 무난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이후로는 다른 작품에 밀려서 자주 공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베르디가 4년 동안 씨름하다가 내놓은 첫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기야 '오텔로'는 '아이다' 이후 16년만에 나온 작품이므로 그것과 비교하면 '오베르토'의 4년은 별것도 아니지만 당시의 베르디로서는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침 2013년은 베르디 탄생 200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앞으로 2113년이나 되어야 탄생 3백주년을 기념하게 될터인데 그때의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므로 2013년의 베르디 탄생 200 주년 기념은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상태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극장에서는 기왕이면 기념으로 베르디의 첫 작품인 '오베르토'를 무대에 올리고자 하고있다. 우선 라 스칼라만해도 2013년 4월-5월에 '오베르토'를 공연한다.
'오베르토'의 오리지널 대본을 쓴 안토니오 피아짜
여기서 잠시 청년 베르디의 고난에 넘친 20대에 대하여 일고코자 한다. 베르디는 음악공부를 위해 1833년, 그가 20세 때에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세토를 떠나 밀라노로 왔다. 그러나 정식으로 음악원을 들어가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저명한 작곡가들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음악공부를 했다. 베르디는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입장에서 공부도 공부지만 음악의 도시 밀라노에서 음악 활동을 직접 함으로서 장래의 경력에 예비코자 했다. 베르디는 스승인 라비냐(Lavigna)의 추천으로 아마추어 합창단인 '소시에타 필아르모니카'(Societa Filarmonica)의 연습지휘자가 되었다. 1834년에는 밀라노의 '천지창조'(하이든) 연주회에서 콘티누오라는 저음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어 1835년에는 그 어려운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를 지휘했다. 그러한 때에 부세토에 있는 안토니오 바레찌(Antonio Barezzi)가 베르디에게 부세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마련했으니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베르디는 22세 때인 1835년에 밀라노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부세토로 내려갔다. 안토니오 바레찌는 베르디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부세토에서 사업을 하는 그는 음악에도 열성이었다.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자기 저택에서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바레찌는 베르디에게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으라고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바레찌는 베르디에게 자기 딸인 마르게리타의 피아노 선생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베르디는 마르게리타 바레찌의 피아노 선생이 되고 자주 만났다. 젊은 베르디는 이윽고 예쁜 마르게리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오베르토와 레오노라
베르디는 1836년, 23세 때에 마르게리타와 부세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는 중에 1836년에는 페르디난드 황제의 생일축하 콘서트를 위해 칸타타를 작곡하여 찬사를 받았다. 사람들은 베르디에게 부세토에서 지내기에는 재능이 아까우니 다시 밀라노로 가서 길을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베르디도 아무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혼 이듬해에 다시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로 간 해에 첫 딸 비르지니아 마리아 루이지아가 태어났다. 그러나 고작 1년이 넘기고서 세상을 떠났다. 1838년에는 아들 이칠리오 로마노가 태어났다. 그런데 또 1년을 겨우 넘기고서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의 슬픔을 한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베르디는 라 스칼라와 계약을 체결할수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수가 없는 것이어서 벌써 그 당시에 베르디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라는 유명한 소프라노의 관심을 끌어서 그의 보이지 않는 후원을 받았다. 라 스칼라에 속하여 있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라 스칼라의 임프레사리오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항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들이 둘이나 있다는 얘기도 퍼졌다. 아무튼 그런 주세피나가 베르디의 재능을 유별나게 생각하여서 남친 겸 내연의 남편인 메렐리이게 베르디를 은근히 추천하였고 그렇게 하여 베르디는 라 스칼라와 3편의 오페라를 만들어서 제공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라 스칼라와의 계약의 첫 산물로서 나온 것이 '오베르토'였다. 여담이지만,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나중에 베르디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베르디보다 4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오베르토의 바리톤 파올로 바탈리아
그런데 실은 베르디가 '오베르토'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라 스칼라와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베르디가 부세토에 돌아 와서 있을 때에 밀라노의 소시에타 필아르모니카의 음악감독인 피에트로 마씨니(Pietro Massini)가 베르디에게 대본 하나를 보내주면서 오페라로 작곡해 보라고 권면한 일이 있다. 안토니오 피아짜의 '오베르토' 대본이었다. 그런데 아마 그때에는 '로체스터'(Rochester)라는 타이틀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베르디는 별로 할 일도 많지 않아서 '오베르토'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어서 고치고 또 고치며 정성을 들였다. 그러는 바람에 자꾸 시간만 지나갔다. 밀라노의 피에트로 마씨니는 베르디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오베르토'의 진전상황에 대한 소식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베르디가 결혼 후에 아내와 함께 밀라노로 왔고 이어 라 스칼라와 오페라 3편의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베르디는 '오베르토'를 라 스칼라에 제출할수 있었다. 피에트로 마씨니로부터 '오베르토'의 대본을 받은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1839년 11월에 라 스칼라에서 '오베르토'가 처음 공연되었다. 그후 '오베르토'는 라 스칼라에서 13회의 추가 공연을 가졌다. 사족이지만 안토니오 피아짜는 밀라노의 저널리스트 겸 서한가였다. 서한가라는 것은 편지를 잘 쓰고 잘 보내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것도 직업이라고 말하는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안토니오 피아짜의 직업은 저널리스트 겸 서한가로 되어 있다. 베르디는 '오베르토'의 작곡을 시작하면서 라 스칼라에서 공연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능하다면 파르마 정도에서 공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르마는 밀라노의 동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파르마는 이탈리아 서쪽의 제노아와 이탈리아 동쪽 라벤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이다. 베르디는 파르마 극장과 연락을 하였다. 그러나 파르마 극장은 이름도 없는 베르디라는 청년이 불쑥 '오베르토'인지 무언지를 내밀면서 공연해 달라고 하자 '원 별 이상한 청년도 다 있네'라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베르디의 첫 부인인 마르게리타. 결혼 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마르게리타는 26세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라 스칼라에서의 '오베르토'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디는 라 스칼라를 위한 두번째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라는 것이었다. 코믹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1839년, 베르디가 '왕궁의 하루'를 작곡하는 중에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염이었다. 베르디는 너무나 비통한 심정이어서 '왕궁의 하루'의 작곡을 포기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 스칼라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완성을 해야 했다. '왕궁의 하루'는 1840년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대실패였다. 베르디는 정말로 작곡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음악선생이나 하면서 지낼 생각이었다. 그러한 때에 라 스칼라의 임프레사리오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베르디에게 '나부코'의 대본을 억지로 주면서 오페라로 만들라고 요청했다. 1842년의 '나부코'는 대성공이었다. 베르디의 이름을 하루 아침에 이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준 성공이었다. '나부코'의 초연에 얽힌 에피스도는 본 블로그의 '나의 오페라 수첩' 중에서 '나부코' 편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수 있다.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후원한 안토니오 바레찌. 나중에 베르디의 장인이 된다.
'오베르토'는 라 스칼라에서 초연 이후 3년 동안 간헐적으로 공연되었다. 베르디는 그 기간을 이용해서 '오베르토'의 여러 부분을 수정하였다. 주로 그때 그때의 성악가들의 음역에 맞추어서 음악을 수정한 것이었다. '오베르토'는 1840년에 토리노에서 공연되었고 1841년에는 제노아와 나폴리, 1842년에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공연되었다. 그 후에는 상당기간의 휴면에 들어갔다. 다른 오페라들아 자꾸 나오는 바람에 굳이 '오베르토'를 재탕할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베르토'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리바이발 되었다. 1913년 파르마에서였다. 그러다가 또 다시 장기 휴가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65년에 영국 초연이 있었다. 하지만 무대 공연이 아니고 콘서트 버전이었다. 런던에서의 첫 공연은 1982년이었다. 미국 초연은 그보다 앞선 1978년 뉴욕의 아마토 극장에서였으나 그것은 아마추어 공연이었다. 프로 공연은 1985년 산디에고 오페라에서였다. 페루치오 프를라네토(Ferruccio Furlanetto)와 수잔느 마르시(Susanne Marsee)가 출연하였다. 뉴욕에서의 정식 초연은 1994년 뉴욕 그랜드 오페라가 '비바 베르디' 시리즈로서 공연한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오페라 노우스(Opera North)가 1994/95년 시즌에 공연하였고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1997년에 데니스 그레이스브가 구니차(Cuniza)로 나오는 콘서트 공연을 가졌다. 2001년에는 사라소타 오페라가 '비바 베르디'의 일환으로 공연하였고 2007년에는 스페인의 빌바오 오페라가 공연하였으며 역시 2007년에는 파르마가 '투토 베르디'(Tutto Verdi) 시리즈로서 '오베르토'를 공연하였다. 라 스칼라의 공연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쿠니차와 레오노라
주요 등장인물은 보니파치오 백작인 오베르토(B), 그의 딸인 레오노라(S), 로마노의 에쩰리노의 여동생인 쿠니차(MS), 쿠니차의 친구이며 시녀인 이멜다(MS), 실린게라 백작인 리카르도(T)이다. 아밖에 귀족들, 귀부인들, 가신과 시종들이 등장한다. 시기는 1228년이며 장소는 북부 이탈리아이다. 막이 오르기 전의 배경을 살펴보면, 산보니파치오 백작인 오베르토와 살린게라 백작인 리카르도가 전투를 벌였고 그 전투에서 오베르토가 패하여 오베르토는 만투아로 피신하였다. 한편, 오베르토의 딸인 레오노라는 살린게라 백작인 리카르도에게 유괴당하였으나 얼마후 리카르도가 로마나의 에쩰리노의 여동생인 쿠니차와 결혼하기 위해 레오노라를 버린다. 로마나의 에쩰리노는 오베르토와 리카르도의 전투에서 리카르도를 지원한 일이 있다. 레오노라는 리카르도의 결혼식이 열리는 바사노(Bassano)로 가서 리카르도에게 맞설 생각이다.
리카르도와 쿠니차. '야, 당신 말야, 사람이 왜 그렇게 치사해?'(쿠니차) - '아니, 뭘 내가 치사하다는거야?'(리카르도)
[1막] 1장. 바사노 부근의 마을이다. 바사노는 오늘날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라고 하는 도시로서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에스테 방향에 있다. 리카르도가 에쩰리노 성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는 합창을 부른다. 리카르도는 쿠니차와 가까이 있을수가 있어서 기쁘다는 노래를 부른다. 리카르도의 아리아가 Son fra voi! Fia sorto e il giorno...Gia parmi udire il fremito(이제 그대들 가운데 있게 되었도다. 내가 갈망하는 그 날이 빨리도 다가왔도가)이다. 리카르도 일행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후 레오노라가 도착하여 리카르도가 자기를 버린데 대하여 복수를 다짐한다. 레오노라는 순수했던 지난 날들을 다시 찾고 싶어한다. 레오노라의 아리아가 Sotto il paterno tetto...Oh potessi nel mio core(나의 아버지의 지붕 아래에서 천사가 나에게 나타났었다)이다. 레오노라는 마을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다.
바사노 델 그라파. 리카르도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는 곳이다. 레오노라가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이다.
2장. 바사노 성 인근이다. 한편, 레오노라의 아버지인 오베르토는 만투아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지만 딸 레오노라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걱정이다. 레오노라와 오베르토는 마침내 마을에서 만난다.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기쁨으로 재회한다. 오베르토는 레오노라로부터 이곳 바사노까지 오게 된 사연을 듣고는 아버지로서 너무노 분개하여 리카르도의 결혼식을 중단시킬 계획을 세운다. 3장은 에쩰리노 성의 어떤 방이다. 모두들 리카르도와 쿠니차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쿠니차는 무언지 모를 불길한 예감으로 리카르도에 대한 사랑을 주저한다. 쿠니차의 아리아가 Questa gioia che il petto m'innonda(내 마음을 압도하는 이 기쁨, 그러니 이상한 두려움도 함께 있도다)이다. 리카르도와 쿠니차가 방에서 나가자 레오노라가 들어온다. 쿠니차의 친구이며 시녀인 이멜다가 레오노라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레오노라는 자기가 오베르토의 딸인 것을 밝히고 오베르토도 이미 성안에 들어와 있다고 얘기한다. 잠시후 오베르토가 나타난다. 이어 쿠니차가 들어오자 레오노라는 쿠니차에게 자기가 어떻게 리카르도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를 설명한다. 쿠니차는 불안했던 예감이 이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레오노라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쿠니차는 오베르토를 옆 방에 숨어 있도록 한다. 그런 후에 리카르도에게 잠시 와 달라고 전한다. 리카르도가 방에 들어오자 쿠니차는 레오노라에게 나오라고 하여 리카르도를 만나도록 한다. 그러면서 쿠니차는 리카르도의 성실치 못함과 배신을 비난한다. 쿠니차로부터 비난을 받은 리카르도는 이것이 모두 레오노라의 계략임을 알아차리고 레오노라를 심하게 비난한다. 옆 방에 숨어 있던 오베르토가 리카르도의 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리카르도에게 결투를 요청한다.
쿠니차와 귀부인들. '아, 어째서 내 마음이 이다지도 두려운가?'라는 쿠니차.
[2막] 1장은 쿠니차의 방이다. 쿠나치와 이멜다가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몰라서 두려움으로 궁금해 하고 있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서 리카르도가 쿠니차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한다. 쿠니차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 쿠니차의 아리아가 Oh, chi torna l'ardente pensiero(오 누가 나의 열병에 걸린듯한 생각을 씻어주리오)이다. 쿠니차는 이멜다에게 리카르도를 만나 레오노라한테 돌아가라고 전하라고 지시한다. 이어 쿠니차의 아리아가 Piu che i vezzi e lo splendore(나의 양심에게 보다 설득력이 있다)이다. 쿠니차는 자기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2장은 성안에 있는 정원의 구석진 곳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레오노라의 곤경한 처지에 대하여 동정한다. 사람들이 떠나자 오베르토가 들어온다. 오베르토는 결투의 상대자인 리카르도를 기다린다. 오베르토가 복수를 다짐하며 부르는 아리아가 L'orror del tradimento(무섭도록 두려운 그의 배신)이다.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서 오베르토에게 쿠니차가 리카르도와 중재하여 결투를 없던 일로 만들었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한다. 하지만 오베르토는 복수의 집념을 버리지 못한다.
현대적 연출의 '오베르토'
잠시후 리카르도가 나타난다. 리카르도는 쿠니차의 간청으로 오베르토와 화해라도 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베르토가 복수를 다짐하자 리카르도로서도 어쩔수 없이 오베르토와 결투를 벌인다. 그때 쿠니차가 레오노라와 함께 나타나서 두 사람의 결투를 중지시킨다. 쿠니차는 리카르도가 자기의 성실치 못했음을 인정하고 레오노라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베르토는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리카르도를 자극하여 마침내 리카르도와 숲에서 다시 만나 결투를 계속하자고 약속한다. 모두들 떠나고 오베르토도 결투를 위해 숲으로 간다. 잠시후 무대 뒤에서는 칼싸움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리카르도가 무대로 나타난다. 리카르도는 그제서야 그가 오베르토를 죽인 사실을 인식한다. 리카르도의 아리아가 Ciel che feci?(하늘이여, 내가 무슨 짓을 했나이까?)이다. 리카르도는 후회의 심정에 넘쳐 있다. 쿠니차가 이멜다와 함께 들어와서 레오노라가 자기 아버지의 시신 위에 쓰러져 있다고 전한다. 곧이어 공작으로부터의 명령서가 도착한다. 리카르도는 모든 재산을 레오노라에게 넘겨주고 유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레오노라는 이제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겠다고 말한다.
복수를 다짐하는 오베르토
[명음반] 오베르토, 레오노라, 쿠니차, 리카르도 - 지휘자, 오케스트라
- 1983년: Rolando Panerai, Ghena Dimitrova, Ruza Baldani, Carlo Bergonzi - Lamberto Gardelli,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Chorus of Bavarian Radio
- 1997년: Samuel Ramey, Maria Guleghina, Violetta Urmana, Stuart Neill - Sir Neville Marriner,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 2007년: Ildar Abdrazakov, Everlyn Herilitzuis, Marianne Cornetti, Carlo Ventre - Yves Abel, Orquestra Sinfonica del Principado de Asturias, Chorus of Opera de Bilbao
[쿠니짜 다 로마노]
오페라 '오베르토'의 진짜 주인공은 오베르토가 아니라 쿠니차이다. 쿠니차는 실존인물이다. 쿠니짜 다 로마노(Cunizza da Romano)가 본명이다. 쿠니짜 다 로마노의 삶은 오페라 '오베르토'에서 쿠니차의 삶만큼 파란이다. 쿠니짜 다 로마노는 1198년쯤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노 공국의 에쩰리노 2세가 아버지이다. 쿠니짜 다 로마노는 소녀 시절에 레노나의 영주인 산 보니파치오의 리카르도와 결혼했다. 그러나 리카르도와의 결혼이 무의미해서 궁정 시인인 소르델로(Sordello)와 애정도피를 하였다. 소르델로는 쿠니짜를 자기 부모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쿠니짜는 나중에 브라간체 백작인 아이메리오라는 사람과 다시 결혼했다. 쿠니짜는 말년을 플로렌스에서 보냈다. 쿠니차는 이곳에 있을 때에 단테와도 친분을 다지면 지냈다. 그래서인지 쿠니짜라는 이름은 단테의 '신곡'에서 Third Sphere 에 나온다. 베르디의 '오베르토'에 나오는 리카르도와 쿠니차의 청혼 내용은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다. 한편, 쿠니짜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소르델로', 에즈라 파운드의 '칸토스'에도 등장한다.
왼쪽이 쿠니짜 다 로마노, 오른쪽은 스로델로 다 고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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