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누구?
교황 알렉산더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 1480-1519)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더 6세(1431-1503)이다. 61세 때인 1492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1503년까지 11년 동안 교황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루크레치아의 어머니는 바노짜 데이 카타네이(Vannozza dei Cattanei: 1442-1518)라는 여인이다. 알렉산더 4세가 교황이 되기 전,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으로 있을 때부터 동거한, 말하자면 정부였다.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은 교황이 되기 전에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루크레치아는 일곱번째이다. 루크레치아의 오빠 중에는 유명한 정치가, 추기경 들이 여럿 있었다. 조반니 보르지아(1474-1497),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1476-1507), 조프레 보르지아(Gioffre Borgia) 등이다. 루크레치아의 가족들은 훗날 마키아벨리 정치의 전형이 되었으며 르네상스 교황청의 특징인 섹스 및 부패의 축소판이라는 오명을 썼다. 루크레치아의 아버지(로드리고 보르지아)와 그의 오빠들은 루크레치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권세있는 사람들과 여러번에 걸쳐 정략결혼을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 인하여 루크레치아는 페사로의 영주인 조반니 스포르차, 비스첼리 공작인 아라곤의 알폰소, 페라라의 공작 돈 알폰소 데스테(알폰소 1세)와 결혼하였다.
루크레치아의 생부인 알렉산더 6세 교황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1480년에 로마 부근 수비아코(Subiaco)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루크레치아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용모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매력적인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그런 루크레치아를 클레오파트라에 비교하였다. 하기야 클레오파트라도 애정행각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했을 인물이었으므로 루크레치아와 적절한 비교가 될수 있을 것이다. 루크레치아가 어떻게 생긴 여인이기에 클레오파트라가 무색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는가? 기록에 의하면 루크레치아는 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무릎까지 내려 왔다고 한다. 눈은 헤이즐 색이지만 다른 색으로도 보인다고 한다. 가슴은 풍만하고 봉긋하게 솟아났다고 되어 있다. 루크레치아의 걸음걸이는 우아하여서 마치 바람을 타고 걷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입은 비교적 넓은 편이며 치아는 찬란할 정도로 하얗고, 목은 길고 아름다우며 가슴은 찬사를 받아야 마땅할 만큼 균형이 이루져 있다고 되어 있다. 영국 빅토리아국립미술관에 있는 도소 도시(Dosso Dossi)의 작품인 '어떤 젊은이의 초상화'(Portrait of a Youth)는 최근 조사 결과 루크레치아를 그린 것이라고 판명되었다. 아마 루크레치아를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공식 초상화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베네토(Veneto)가 그린 초상화도 있지만 아직까지 학자들은 그것이 루크레치아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소 도시가 그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초상화. 빅토리아국립미술관 소장
[첫번째 결혼] 루크레치아는 11세 때인 1491년 발렌시아 왕국의 발 다요라(Val D'Ayora) 영주와 결혼계약을 맺었다. 신랑 될 사람의 원래 이름은 돈 케루비노 호안 데 첸텔레스였다. 그러나 결혼계약은 2개월 후에 무효가 되었다. 루크레치아를 프로치다 백작인 돈 가스파레 아베르사(Don Gaspare Aversa)와 결혼시키겠다는 새로운 계약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루크레치아의 생부인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되자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영향력있는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싶었고 그리하여 과거의 결혼계약을 무시하고 새롭게 스포르차 가문의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토록 주선했다. 조반니 스포르차는 페사로의 영주였다. 조반니 스포르차는 스포르차 가문의 코스탄초 1세의 사생아였다. 그러므로 서자이기 때문에 스포르차 가문에서 계승서열 2위였다. 아무튼 루크레치아는 조반니 스포르차와 1493년 6월에 로마에서 결혼식을 화려하게 올렸다. 루크레치아가 13세 때였다.
얼마후 보르지아 가문은 스포르차 가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교황청에서 볼때 조반니 스포르차의 존재는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이 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교황에게 더 이익이 되는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새로운 동맹을 필요로 했다. 교황은 스포르차 가문을 밀어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수 있었다. 예를 들어 조반니 스포르차를 교황의 권세로 처형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보류했다. 그리하여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가 루크레치아에게 '야, 네 남편 말이야, 이제 필요없으니 어디로 꺼지라고 그래'라고 전했고 루크레치아는 남편 조반니 스포르차에게 '나 말야, 자기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러니 목숨이 아깝거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야'라고 전했다. 그리고 조반니 스포르차는 즉시 로마로부터 도망갔다. 루크레치아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조반니 스포르차의 삼촌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을 불러서 조반니를 설득하여 루크레치아와 정식으로 이혼을 하도록 종용했다. 조반니는 비록 로마를 떠났지만 그 소식을 듣고서 '이혼이라니, 누구 맘대로'라면서 거절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루크레치아가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했고 나아가 오빠하고도 근친상간을 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화가 치민 교황은 딸 루크레치아의 결혼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루크레치아와 조반니 스포르차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신혼부부가 부부로서의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르지아 측은 조반니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돈을 내놓으라고 통보했다. 교황은 만일 협조를 하지 않으면 스포르차 가문을 보호해주지 못하겠다고 경고했다. 교황이 보호해주지 못하고 파문을 하면 그것은 치욕스런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조반니는 어쩔수 없이 자기가 임포텐스(성기능 장애)라고 고백하고 증인들 앞에서 결혼무효 서류에 서명하였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페로토와의 정사와 조반니] 루크레치아는 비록 10대 중반의 여인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성인과 다름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결혼무효가 확정될 때까지의 기간 중에 어떤 남자와 정사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증거가 없으니 추측뿐이었다. 상대방은 교황의 시종장인 페드로 칼데론(Pedro Calderon)으로 보통 페로토(Perotto)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질질 끌던 결혼무효 수속이 마침내 마무리 될 즈음에는 임신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와 페로토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고 지내며 더구나 루크레치아가 임신까지 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그러지 않아도 보르지아 가문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은 '아니, 조반니와 결혼이 완성되지 않아서 이혼한다는 여자가 어떻게 임신을 할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일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교황은 루크레치아에게 이혼이 완전하게 성립될 때까지 (그리고 임신도 했으니) 잠시 수녀원에 가서 지내라고 제안했다. 루크레치아는 산 시스토 수녀원에 가서 1497년 12월에 이혼이 성립될 때까지 은인자중하며 지냈다. 그런데 이듬해인 1498년 2월에 페로토(페드로 칼데론)와 보르지아 집안의 판타실레아라는 하녀의 시신들이 티베르 강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소문은 두 사람이 서로 통정하다가 그 사실이 밝혀져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는 얘기들이었다. 이어 3월에는 루크레치아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 소문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부인했다. 하지만 보르지아 가문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만은 확실했다.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보르지아 저택에서 어떤 아이를 유모가 데리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조반니라고 했다. 한편, 루크레치아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 해의 전 해에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하였다. 이와 함께 루크레치아가 데리고 온 아이는 로마누스 왕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라곤의 알폰소의 아들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일 조반니 스포르차의 아이라고 한다면 그건 더 복잡한 일이며 만일 교황청의 시종장인 페로토의 아이라고 한다면 페로토가 이미 하녀와 통정하다가 죽은 사람인데 그것도 곤란하고 또한 만일 아라곤의 알폰소 왕의 진짜 아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참으로 곤란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1501년에 조반니 보르지아라고 하는 이 아이와 관련하여 두 개의 교황 칙령이 발표되었다. 교황이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까지 칙령으로 발표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교황으로서는 어쨋든 목전의 불을 끄고 보아야 했다. 하나는 조반니 보르지아가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 보르지아가 결혼 전에 어떤 여인과 관계를 가져 태어난 아이라고 밝힌 것이다. 루크레치아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 오빠의 아이라는 주장이었다. 두번째 칙령은 무슨 내용이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아이가 교황 알렉산더 4세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의 이름은 두 개의 교황 칙령에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들만 등장하고 어머니는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것이다. 조반니 보르지아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이후로도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에 실은 두번째 칙령은 몇 년 동안이나 비밀로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조반니 보르지아는 순전히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의 아들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예를 들면 1502년에 조반니는 카메리노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카메리노는 체사레 보르지아가 얼마 전에 자기 영토로 정복한 지역이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보르지아 가문의 장남이므로 사생아인 조반니는 자연히 보르지아 가문의 종손으로 인정을 받았다.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조반니는 그때부터 페라라에 있는 루크레치아의 저택에 가서 지냈다. 조반니는 페라라에서 루크레치아의 이복 동생으로 인정을 받으며 지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조반니는 루크레치아의 아들인데 그런 아들을 동생이라고 하면서 지내야 했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 보르지아
[두번째 결혼] 루크레치아는 조반니 스포르차와의 이혼이 정식으로 마무리되자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하였다.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지오프레 보르지아의 부인인 아라곤의 산차의 이복 오빠였다. 당시 알폰소는 나폴리 왕이었다. 결혼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1498년에 결혼하였는데 2년 후인 1500년에 알폰소가 그만 살해되는 바람에 자연적으로 부부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가 알폰소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체사레는 나폴리와 적대관계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고 그러자니 나폴리의 알폰소를 제거해야 했다는 것이다. 비록 루크레치아와 알폰소의 결혼생활이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아라곤의 로드리고이다. 로드리고는 1512년, 12살 때에 섭정을 지내던 루크레치아의 뒤를 이어 나포리의 왕이 되었다. 루크레치아는 두번째 남편인 알폰소가 죽은 후에 곧이어 페라라의 알폰소와 결혼하였다. 그러면서 아들 로드리고를 위한답시고 12년 동안 나폴리의 섭정을 지냈다.
[세번째 결혼] 두번째 남편인 알폰소가 죽자 루크레치아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세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이번에는 상대방이 페레라의 공작인 알폰소 데스테 1세(Alfondo I d'Este)였다. 결혼식은 1502년 페라라에서 거행되었다. 루크레치아는 페라라의 알폰소와 결혼하여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으로서 상당히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루크레치아에 대한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소문들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세상을 떠나자 보르지아 가문은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레치아는 고귀한 르네상스 공작부인으로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과연 루크레치아와 페라라의 알폰소는 서로에게 충실한 부부였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해부터 두 사람은 각자 열심히 불륜의 정사를 가지며 지냈다. 루크레치나는 시동생이 되는 프란체스코와 오랫동안 뜨거운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프란체스코는 명문 곤자가 가문의 사람으로 만투아 후작이었다. 프란체스코의 부인, 즉 루크레치아의 남편의 여동생인 이사벨라(Isabella d'Este)는 정숙하고 지성이 있는 여인이었다. 이사벨라는 남편 프란체스코가 형수인 루크레치아와 뜨거운 관계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허이구'라고 일단 한숨부터 쉬고 '아, 이것도 나의 운명이로다'라며 하고 입을 다물고 지냈다. 그런 이사벨라에 대하여 루크레치아는 천연덕 스럽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상냥하게 대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했으니 이사벨라의 속이 터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루크레치아와 시동생인 프란체스코의 관계는 육체적인, 또는 열정적인 것을 떠나서 감성적이고 정신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이 정신적인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느낄수 있다.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프란체스코가 어디서인지 성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로부터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루크레치아는 프란체스코와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번에는 시인인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와 뜨거운 정사를 가졌다. 이어 1510년부터는 프랑스의 장교인 슈발리에 바야르(Chevalier Bayard)와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바야르는 당시 페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대의 사령관이었다. 페라라와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두 사람이 어느정도의 관계에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수 없다. 다만, 바야르는 루크레치아를 매우 사모하고 존경하여서 루크레치아를 '여인들 중의 진주로소이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루크레치아가 그런 찬사를 받고 가만히 있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1519년 6월 24일에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덟번째 아이를 낳은후 열흘 만에 산후중독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크레치아는 7-8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므로 결혼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길지 않는 기간동안 임신, 유산, 출산 등을 반복하며 지냈다고 볼수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페라라의 코르푸스 도미니(Corpus Domini)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1816년에 낭만주의 시인인 유명한 바이런이 밀라노에 갔다가 암브로시아 도서실에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르네상스 시인인 피에트로 벰보가 주고 받은 서한들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 레터'라는 것이 바이런의 주장이었다. 바이런은 전시되어 있는 루크레치아의 머리칼 한 줌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바이런은 '사람이 상상할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머리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머리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루크레치아의 후손 중에는 여러 명의 저명인사들이 있고 나아가 유럽의 왕실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루크레치아는 손녀인 안나 데스테 등을 통하여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벨기에의 알베르 2세, 룩셈부르크 대공인 앙리, 그리고 파리 백작과도 연결이 된다고 한다. 나아가서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브라질, 파르마, 작소니, 두개의 시실리 등이 왕국으로서 계속 존재한다면 루크레치아의 후손들이 왕위 계승을 주장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고 루크레치아와 보르지아 가문은 수년동안 별로 좋지 않는 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것은 루크레치아를 비롯한 보르지아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으며 더구나 향락적인 파티를 할 때에는 섹스도 곁들여서 근친상간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보르지아 가문은 독약을 사용하는 전통이 있어서 정적이나 연적들을 독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문들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악의에 넘친 소문들은 대부분 보르지아 가문과 적대 관계에 있는 가문에서 흘려 보낸 것이라는 얘기다. 하기야 베니스만 보더라도 캬퓰레티 가문과 몬테키 가문이 서로 원수가 되어 지낸 것을 보면(희곡이지만) 보르지아 가문과 다른 가문과의 관계를 엿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그럴듯한 소문도 있다. 예를 들면 루크레치아가 항상 속이 빈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 안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필요하면 다른 사람의 술잔에 얼마든지 독을 몰래 탈수가 있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바티칸의 공식적인 회의에서 아버지 알렉산더 6세를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 장면을 20세기의 화가인 프랑크 카우퍼(Frank Cowper)가 그렸으며 그 그림은 현재 런던의 테이트 브리텐 미술관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승이 루크레치아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장면도 그림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화가가 상상하여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 대한 스토리는 화가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시, 단편, 오페라, 영화의 좋은 소재로서 인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빅토르 위고의 1833년도 무대 희곡인 Lucréce Borgia(루크레스 보르지아)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탈리아의 펠리체 로마니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고 그 대본으로 도니체티가 1834년에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1834년 12월 26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는 도니체티의 것이 현재까지는 단연 유일하지만 소설 등으로는 여러 편이 나와 있다. 독일의 극작가이며 소설가인 클링거(Friedrich Maximilian Klinger: 1752-1831)는 Fausts Leben, Thaten und Hollenfahrt 라는 소설에서 파우스트와 루크레치아가 정사를 펼치는 장면을 포함하였다. 1947년에 미국의 사무엘 셀라바거(Samuel Shellabarger: 1888-1954)가 내놓은 '여우들의 왕자'(Prince of Foxed)는 체사레 보르지아를 섬기는 장교인 안드레아 오르시니가 로마냐(Romagna)를 정복하는 전쟁 중에 일어났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 소설을 나중에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오손 웰스와 타이론 파워가 주역을 맡았다. 영국의 여류작가인 진 플레이디(Jean Plaidy: 1906-1993)는 Light on Lucrezia 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루크레치아와 그의 아버지, 오빠들에게 얽힌 이야기이다.
오페라에서 루크레치아 역의 소프라노 손드라 라드바노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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