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35. 조르즈 비제의 '진주잡이'(Les pêcheurs de perles)

정준극 2013. 7. 8. 08:44

진주잡이(Les pêcheurs de perles) - The Pearl Fishers

조르즈 비제(George Bizet)의 3막 오페라

2013년은 '진주잡이' 공연 150주년을 맞는 해

 

조르즈 비제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성 듀엣을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 비제(George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진주잡이'에 나오는 테너-바리톤 듀엣인 '성스러운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를 내세울 것이다. 일명 '진주잡이의 듀엣'(The Fishermen's Duel)이라는 곡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나이가 우정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 중에서 돈 카를로와 로드리고의 듀엣인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E lui...Dio, che nell'alma)의 내용과 비슷하다. 역시 두 사람이 우정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남자들에게는 이성간의 사랑보다는 친구간의 우정이 더 소중한 모양이다. 비제의 '진주잡이'는 1863년 9월 30일 파리의 테아트르 리리크(Théâtre Lyrique: 현재의 테아트르 드 라 비유: Théâtre de la ville)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므로 2013년은 '진주잡이' 150주년을 기록하는 뜻 깊은 해이다. 그래서인지 세계 각지에서는 '진주잡이'에 대한 조명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잡이'를 대탐구한다. 솔직히 말해서 일반적으로 오페라라고 하면 '라 보엠' 등등을 생각하게 되지만 '진주잡이'라고 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구나 비제라고 하면 당장 '카르멘'을 연상하지만 '진주잡이'도 있다고 하면 '아니, 그런 것도 있느냐"면서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진주잡이'는 10년 후에 '카르멘'을 탄생하게 만든 바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페라이다. 비제는 생전에 7-8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진주잡이'는 '카르멘'에 이어 비제를 대표하는 오페라이다.

 

'신성한 사원에서'를 부르는 추르가와 나디르. 오페라의 남성 듀엣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진주잡이'의 프랑스어 대본은 외진 코르몽(Eugéne Cormon)과 미셀 캬레(Michel Carré)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외진 코르몽(본명은 피에르 에티안느 피스트르)은 다른 사람과 협동하여 대본이나 연극의 극본을 쓰는 것을 즐겨했다. 그는 생전에 약 135편의 대본과 극본을 썼다. 가장 성공적인 것은 에메 메야르(Aimé Maillart: 1817-1871)의 Les dragons de Villars(빌라르의 용기병: 또는 은자의 작은 종)의 대본이다. 한편, 미셀 캬레는 원래 화가지망생이었다가 대본가가 된 사람이다. 마셀 캬레는 쥘르 바르비에와 함께 구노의 '파우스트'의 대본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Les contes fantastique d'Hoffmann(호프만의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대본도 썼다. 나중에 자크 오펜바흐가 그의 '호프만의 이야기'의 바탕으로 사용한 대본이다. 외진 코르몽과 미셀 캬레는 '진주잡이'의 대본을 쓰기 전에 에메 메야르를 위해 비슷한 내용의 대본을 완성한 일이 있다. Les pêcheurs de Catane(카타니아의 어부들: 카타니아는 시실리의 어촌)이라는 것이다. 에메 메야르의 이 오페라는 1860년에 처음 공연되었다. '진주잡이'보다 3년전이었다. 외진 코르몽과 미셀 캬레가 비제를 위해 '진주잡이'의 대본을 쓸 때에 '카타니아의 어부들'의 대본을 많이 참고로 하였다. 두 사람은 원래 '진주잡이'의 무대를 멕시코로 삼으려고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세일론(현재의 스리랑카)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비제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덕을 보게 되었다.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는 레일라와 나디르

 

'진주잡이'가 초연되었을 때 비제는 겨우 25세의 청년이었다. 아직 파리의 오페라계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던 신출때였다. '진주잡이'를 작곡하게 된 것은 비제가 파리음악원에서 프디 드 롬(Prix de Rome) 상을 받은 결과이다. '진주잡이'는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초연 이후 18회의 공연을 가지고 막을 내렸다. 초연에 대한 반응은 별로 호의적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비판적인 평론가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곡가들은 '진주잡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예를 들어 베를리오즈는 '진주잡이'가 훌륭한 작품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진주잡이'는 비제의 생전에 다시 리바이벌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비제가 세상을 떠난지 11년 후인 1886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했다. 사족이지만, 1886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정식으로 설립된 해이다. 그리하여 20세기 중반에 가서는 세계 오페라극장들의 표준 레퍼터리가 될 정도로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1863년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분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86년의 수정본 스코어이기 때문에 오늘날 공연되고 있는 '진주잡이'는 오리지널에 비하여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음악가들이 비제의 의향을 감안하여 오리지널 버전을 구성하였다.

 

'진주잡이'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비제의 첫 오페라는 '닥터 미라클'(Le docteur Miracle)이라는 것이다. 1856년, 비제가 파리 음악원의 학생이던 18세 때에 만든 것이다. 이 오페라를 자크 오펜바흐가 주관하는 작곡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입상을 하였다. 오펜바흐의 작곡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 금메달과 상금 이외에 테아트르 데 부프 파리지앙에서 입상작품이 공연되는 특전이 있다. 이듬해인 1857년, 비제는 파리음악원에서 최우수 학생에게 주는 프리 드 롬(Prix de Rome)상을 받았다. 비제는 프리 드 롬 상의 특전으로 3년 동안 이탈리아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오페라 공부를 더 할수 있었다. 비제는 이탈리아에 가서 '돈 프로코피오'(Don Procopio)라는 도니체티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비제는 교향곡 C 장조도 이탈리아에서 완성했다. 그리고 1858년에는 '테 데움'(Te Deum: 감사찬송)도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비제는 호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관현악곡보다는 오페라에 더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제는 1860년에 파리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몇 편의 오페라를 구상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의 구상은 실현되하지 못했다.

 

작곡경연대회를 주관하여 파리음악원의 학생이던 비제의 재능을 인정한 오펜바흐 

                                                                           

파리에 돌아온 비제는 무명의 젊은 작곡가가 활동하기에는 여러가지 제약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파리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인 파리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의 고루한 사고방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파리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극장이어서 시설이나 스태프에 있어서 다른 어느 극장보다도 훌륭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화려하고 장엄하며 수많은 귀족부호들이 참석하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자기의 작품이 공연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파리 오페라극장은 무슨 고집이 그렇게 있는지 하여튼 외국작곡가들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을 하나의 관례로 삼고 있었다. 당시에는 로시니의 오페라가 단연 독보적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마이에르베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 작곡한 오페라들도 간혹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망하다고 해도 비제와 같은 프랑스의 신진 작곡가들이 파리 오페라에 진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샤를르 구노의 작품도 파리 오페라극장에는 입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구노의 '파우스트'(1859), '미레이유'(Mireille: 1864), '로미오와 줄리엣'(1867), 그리고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1863) 등이 파리 오페라극장도 아니고 오페라 코미크도 아닌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초연을 가졌다. 비제의 오페라로서는 '진주잡이'(1863), '퍼스의 어여쁜 아가씨'(La jolie fille de Perth: 1867)가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초연을 가졌다.

 

'진주잡이'가 초연된 테아트르 리리크 극장

 

그러면 오페라 코미크는 어떠한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생각도 안하는 극장이었다. 물론 파리 오페라극장에 비해서 외국 오페라보다는 프랑스 오페라가 상당히 많은 비중으로 공연되고 있기는 했지만 스타일이나 성격은 1830년대 이후로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변화를 싫어하는데 있어서는 파리 오페라극장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오페라 코미크에서는 한가지 관찮은 조건이 있었다. 파리 음악원에서 프리 드 롬 상을 받은 신예 작곡가에게 작품을 의뢰해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그러나 단막이어야했다. 이같은 조건에 따라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프리 드 롬 상을 받은 비제에게도 단막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비제는 그것도 앞날을 위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단막의 '에미르의 구즐라'(La guzla de l'Emir)의 작곡을 시작했다. 대본은 쥘르 바르비에와 미셀 캬레가 썼다. 비제는 이미 1862년 초에 작곡을 완성했고 이어 그해 4월부터는 오페라 코미크에서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는데 테아트르 리리크의 매니저인 레옹 카르바요(Léon Carvalho)가 24세의 청년 비제를 찾아왔다. 레옹 카르바요는 1856-1860년까지 4년동안, 그리고 1862-1868년까지 두번이나 테아트르 리리크의 매니저를 맡았던 사람이다. 레옹 카르바요는 전직 예술장관이던 발레브스키(Walewski) 백작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것이 있다. 매년 새로운 프랑스의 작곡가를 발굴해서 3막의 오페라를 작곡케하여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공연토록 한다는 부탁이다. 이를 위해 발레브스키 백작은 레옹 카르바요에게 매년 10만 프랑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비제의 재능을 높이 인정하여 비제에게 '진주잡이'의 작곡을 의뢰한 테아트르 리릭크의 매니저인 레옹 카르바요

 

레옹 카르바요는 비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레옹 카르바요는 비제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레옹 카르바요는 비제에게 외진 코르몽과 미셀 캬레가 쓴 '진주잡이'의 대본을 주고 3막의 오페라로 만들어 줄것을 요청했다. 비제로서는 그런 유력자들의 후원을 받는 것은 작곡가로서의 장래가 걸린 문제이므로 즉시 수락했다. '진주잡이'는 실론을 무대로 한 이국적인 내용이었다. 비제는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당시에는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기 때문에 동양의 이국적인 오페라를 만들면 좋은 반응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레브스키 백작이 내건 조건 중에 신예작곡가의 작품이되 그의 작품이 과거에 한번도 공식적으로 공연된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발레브스키 백작이 위촉한 오페라가 그 작곡가의 데뷔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현재 리허설이 진행 중인 '에미르의 구즐라'가 예정대로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된다면 발레브스키 백작의 위촉으로 작곡할 '진주잡이'는 조건에 맞지 않게 된다. 그래서 비제는 어쩔수 없이 오페라 코미크 극장과 협의하여 '에미르의 구즐라'의 공연계획을 취소하였다. 그후 '에미르의 구즐라'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연된 일이 없다. (에미르는 아랍의 족장, 또는 토후를 말하며 구즐라는 루트와 같은 아랍의 악기이다.)

 

초연의 밤은 1863년 9월 중순으로 잡았다. 비제는 로마에서 지내던 때와는 달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곡에 집중하였다. 지금까지는 단막만 작곡했었는데 3막을 작곡하자니 범위를 넓게 잡아야 했다. 비제는 오페라의 중간중간에 과거에 작곡해 놓았던 음악들을 인용키로 했다. 비제는 그 전해에 독일의 바덴바덴에서의 공연을 목적으로 '이반 4세'(Ivan IV)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 중인 것이 있었다. 나중의 얘기지만 바데바덴에서의 공연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무튼 비제는 '이반 4세'에서 세곡을 가져와서 '진주잡이'에 사용했다. 서곡과 추르가의 아리아인 Une fille inconnue의 일부, 그리고 3막에서 트리오인 O lumiére sainte 이다. 합창인 Brahma divin Brahma 는 이탈리아에서 작곡했으나 환영을 받지 못해 접어 두었던 Te Deum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다른 합창인 Ah chante, chante encore는 그자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 스타일로 작곡한 Don Procopio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공연이 취소된 La guzla de l'émir(에미르의 구즐라)에서도 몇 개의 멜로디를 가져왔다. 비제는 '진주잡이'를 작곡하는 중에 대본을 수시로 변경하였다. 심지어는 스코어가 모두 완성되어 리허설을 가지는 중에도 음악과 대본이 수정된 일이 있다. 예를 들면 합창인 L'ombre descend는 비제의 요청에 의해 마지막 순간에 추가된 것이다.

 

브라만 신전에 있는 레일라

 

초연은 9월 1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일라 역을 맡은 소프라노 레온탱 드 매슨(Léontine de Maesen)이 갑자기 아픈 바람에 며칠 연기되어 결국 9월 30일에 초연의 막을 올렸다. 첫날 밤 공연에서 관중들은 '진주잡이'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서 젊은 비제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람에 비제는 무대 앞에 나와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어떤 신문은 비제가 겸손하지 못하고 무대 앞에 나와서 인사까지 했다면서 은근히 비난을 하였다. 그때 비제는 잘 아는대로 25세였다. 작가인 루이 가예(Louis Gallet)는 '아직 청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비제가 마치 소년처럼 무척 수줍어 했지만 음악만은 완성된 것이었다'면서 비제를 두둔하였다. 루이 가예는 나중에 비제를 위해 몇 편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하였다. 구노를 비롯한 몇 명의 프랑스 작곡가들은 '진주잡이'를 보고 비제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베를리오즈는 그가 발간하는 Journal des Débats에 '진주잡이의 스코어는 비제에게 큰 영광을 안겨준 것이었다.'라고 썼다. 극작가인 루도비크 알레비는 비제를 수준 높은 작곡가라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젊은 작곡가인 에밀 팔라딜은 '비제는 프랑스의 기정 작곡가들인 오버 또는 토마 보다도 훨씬 뛰어났다'고 선언했다.

 

제사를 위해 등장하는 레일라

 

테아트르 리리크에서의 '진주잡이'는 9월 30일에 첫 공연을 가진 이래 18회의 공연을 기록한 후 11월 23일에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진주잡이'는 '피가로의 결혼'(모차르트)과 교대로 공연되었기 때문에 그만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극장측은 '진주잡이'로 인해서 어느정도의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만족해 했다. 비제 자신으로서는 자기의 이름을 널리 알릴수 있어서 만족했다. '진주잡이'를 후원한 발레브스키 백작은 대만족이었다. 발레브스키 백작은 당장 비제에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이반 4세'를 어서 완성하여 무대에 올리자고 재촉하였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반 4세'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46년이었다. '진주잡이'는 파리의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18회의 공연을 기록한 후에 극장측의 사정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비제가 세상을 떠난지 11년 후인 1886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였다. 1886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신학문의 요람인 배재학당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해이다. '진주잡이'는 밀라노에서의 공연 이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표준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런데 대본은 이탈리아어로 된 것을 자주 사용했다. '진주잡이'가 유럽의 여러 곳에서 공연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카르멘'의 후광인 듯 싶다. '카르멘'은 초연에는 실패했지만 그 후로는 대단한 인기를 끌고 공연되었다. '진주잡이'가 자주 공연되다 보니 몇가지 수정본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이에르베르는 피날레를 대단히 장엄하고 극적으로 장식하도록 수정하였다. 이것을 농담으로 '그랑 마이에르베르 홀로코스트'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뛰어난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벤자민 고다르(Benjamin Godard: 1849-1895)는 피날레 부분을 트리오로 마무리되도록 수정했다. 이처럼 수정된 스코어들이 거의 한 세기동안 세계의 극장들에서 사용되었다. 비제의 오리지널이 천대를 받았던 시기였다.

 

영국 초연은 1887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영국은 '진주잡이'라는 타이틀 대신에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레일라'라는 타이틀을 사용했다. 런던 초연에서 나디르 역할은 테너 폴 레리(Paul Lhérie)가 맡았다. 1875년 '카르멘'의 세계 초연에서 돈 호세를 맡았던 테너였다. 언론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The Times 지는 '이국적인 세팅인데도 음악은 그렇지 못했다. 브라마신에 대한 찬양의 합창은 마치 루터교 성가와 같다'라고 꼬집었다. The Observer 지는 '진정한 영감이 부족한 작품'이라며 혹평했다. 하지만 1889년에 코벤트 가든에서 '진주잡이'를 다시 공연했을 때에는 황태자를 비롯하여 여러 왕족들이 참석하여 박수를 보내주었다. '진주잡이'가 파리에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1889년 4월이었다. 테아트르 드 라 게트(Théâtre de la Gaité)에서였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로 공연되었다. 출연진은 뛰어났지만 이번에도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소프라노 엠마 칼베(Emma Calvé), 테너 장 알렉산드르 탈라차크(Jean-Alexandre Talazac), 그리고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전향한 폴 레리가 추르가역을 맡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은 1863년에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보여주었던 평론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는 평론을 하였다. 그러던중 1893년에 레옹 카르바요가 오리지널 '진주잡이'를 조금조금씩 다시 손을 보아 이번에는 오페라 코미크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만든 카르바요의 수정본이 오늘날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스코어이다.

 

미국에서는 1893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선을 보였고 이어 1896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 1막만을 공연하였는데 이 때에는 마스네의 2막 오페라인 La Navarraise 를 단막으로 만들어 동시에 공연하였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전 3막의 풀 공연은 1916년 11월이었다. 당대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노련한 소프라노 엠마 칼베, 그리고 위대한 바리톤 주세페 데 루카(Giuseppe de Luca)가 출연한 것이었다. Evening Sun 지는 '1막의 듀엣은 두 남성의 음성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오디토리엄에 완전히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후 카루소가 부른 Je crois entendre encore는 마치 천사의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뛰어났다'고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카루소의 노래에 대하여 '혼(horn)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The Sun 지는 프리다 헴펠의 노래에 대하여 '찬란하게 빛나는 고음을 들려 주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세페 데 루카에 대하여는 '어떤 노래든지 대단히 섬세하게 마무리하는 거장이다'라고 말했다. 고승 누라바드(Nourabad)는 베이스 레옹 로티에(Léon Lothier)가 맡았다. 신문들은 그에 대하여 '비제가 원한 완벽한 베이스'라며 찬사를 보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진주잡이'는 유럽 여러나라에서 자주 공연되는 작품으로서 인기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브라티슬라바의 슬로박국립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비엔나에서는 1994년에 '진주잡이'를 처음 보게되었다. 폭스오퍼에서 존 라크웰(John Rockwell)의 정말로 새로운 연출로서 공연되었다. 20세기에는 미국에서 특히 사랑을 받았다. 1916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처음 선을 보인 이래 점차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1980년도 뉴욕시티오페라의 공연이었다. 1863년도 오리지널 스코어에 충실한 공연이었다. 산디에고오페라의 2004년도 공연은 '진주잡이'를 한 계단 승화시킨 것이었다. 산디에고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미국내 다른 오페라단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벌이듯 '진주잡이'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의 배경이 된 스리랑카에서는 2008년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콜롬보에서 대규모 무대가 마련되었다. 합창단과 무용수는 주로 현지인을 활용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진주잡이'는 세계의 여러 극장에서 다시 관심을 받는 것이 작품이 되었다. 메트로폴리탄은 전쟁 중인 1916년의 공연을 당분간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콘서트가 있으면 '진주잡이'에 나오는 추르가와 나디르의 유명한 듀엣, 그리고 레일라의 아리아인 Comme autrefois를 프로그램에 자주 올렸다. '진주잡이'가 본격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1930년대 이후였다. 뉘른베르크에서의 공연과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의 공연은 '진주잡이'를 재조명하는 도화선이었다. 그런데 표준 스토리와 스코어에서 벗어나는 내용의 공연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독일의 어떤 버전은 여주인공인 레일라가 마치 카르멘처럼 피날레에서 죽는 것으로 변경한 것이다. 1932년의 오페라 코미크 공연은 보다 오리지널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1938년, 비제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은 테아트르 코미크에서의 초연 스코어를 대체적으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2차 대전후의 공연은 영국이 선도하였다. 1954년에 새들러스 웰스 오페라단이 코벤트 가든의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영어 대본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새들러스 웰스의 제작은 그후 다른 공연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에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ENO)가 새로운 각도에서 공연을 하여 관심을 끌었다. '진주잡이의 듀엣'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때로부터였다. '프랑스 오페라에서 가장 훌륭한 멜로디'라는 평을 받았다.

 

'진주잡이'는 짧은 서곡으로 시작된다. 레일라를 상징하는 테마음악이나 마찬가지이다. 막이 오르면 마을 사람들의 합창과 춤이 어우려진다. 마을 사람들의 춤은 그야말로 '엑사이팅'한 것이다. 나디르의 첫 아리아인 Des savanes et des forêts는 현악기의 트레몰로를 바탕으로 첼로와 바순의 반주가 특이한 노래이다. 마이에르베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플륫과 하프가 유명한 '진주잡이의 듀엣'의 메인 테마를 소개한다. 음악사학자인 에르베 라콩브(Herbé Lacombe)가 '모든 오페라 중에서 가장 시적인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낸 곡이다. '진주잡이의 듀엣'(Au fond du temple saint)이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나디르의 아리아 Je crois entendre encore는 바르카롤레(뱃노래) 리듬으로 쓴 것이다. 이 노래를 카루소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불렀을 때 '천상의 음성, 천사의 노래'라는 소리를 들었다. 2막에서는 누라바드가 레일라에게 여사제로서의 정절을 지키라고 다짐한 후 떠나자 혼자 남은 레일라가 부르는 카바티나 Comme autrefois 가 순수하고 애절하다. 두개의 프렌치 혼과 첼로의 연주가 가슴을 저미는 것 같다. 이 노래는 마치 '카르멘'에서 미카엘라의 아리아인 Je dis que rien ne m'epouvante 를 생각케 하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나디르의 아리아 De mon amie는 허공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에 손으로 잡을수 없는 아름다운 곡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아리아의 도입부는 비제가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에서 작곡한 교향곡 C 장조의 오보에 테마를 연상케 한다. 2막의 마지막에서 마을 사람들이 나디르와 레일아의 죽음을 요구할 때의 긴박감은 비제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테크닉에 있어서 탁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3막에서 두 사람의 듀엣인 Je frémis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에서 확실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군중들의 격렬한 합창은 멘델스존의 스케르쪼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음악사학자 라콩브는 '진주잡이'를 프랑스 오페라 리리크의 범주에 포함하였다. 특히 비제가 아리오소를 사용한 것, 드라마틱한 레시타티브를 사용한 것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진주잡이'의 음악을 '아름답고 감정의 표현이 풍부하며 색채가 짙고 불과 같은 열정이 넘쳐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오펜바흐 또는 오버의 가볍고 화려한 음악에 길들여 있었다. 그래서 비제의 음악에 대하여는 무겁다고 하며 점수를 낮게 주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레일라와 추르가

 

[시놉시스]

1막. 어느 외딴 해안이다. 배경에는 폐허가 된 힌두 사원이 보인다. 진주잡이들이 깊은 바다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Sur la greve en feu). 진주잡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합세하여 악령을 쫓아내는 의식적인 춤을 춘다. 이어서 이들은 리더로서 추르가(Zurga: Bar)를 선출한다. 갑자기 나디르(Nadir: T)가 등장한다. 추르가는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던 친구인 나디르를 만나게 되어 크게 기뻐한다. 진주잡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퇴장하고 나자 무대에는 추르가와 나디르만 남는다. 두 사람은 그 옛날 캔디(Kandy)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는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의 산악지대에 있는 고도로서 지금은 부처님의 치아를 보관하고 있는 성스러운 사찰이 있는 도시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어떤 젊은 여사제 때문에 금이 갈뻔했다. 두 사람이 모두 그 여사제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사제의 얼굴은 분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우정을 위해서 더 이상 그 여사제를 마음에 두지 않기로 맹세한다. 그것이 사나이로서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두 사나이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나이는 서로의 우정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죽는 날 까지 변치 말자고 약속한다. 이 때 두사람이 부르는 듀엣이 '신성한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 오 퐁 뒤 탕플 생)이다.

 

잠시후 해안에 배 한척이 미끄러지듯 도착한다. 배에는 베일을 두른 여사제가 타고 있다. 레일라이다. 진주잡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처녀 여사제가 신에게 기도 드리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브라만 사원의 고승이 레일라는 이 마을로 초청한 것이다. 추르가와 나디르는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사제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레일라는 그 옛날 캔디에서 나디르와 추르가가 모두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추르가가 레일라에게 이 마을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중에 레일라는 나디르를 알아본다. 그러나 레일라는 그 자리에서 아는체를 하지 않는다. 이어 고승 누라바드(Nourabad: B)가 레일라는 산위의 사원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추르가와 어부들은 바다로 떠나고 그 자리에는 나디르만 남아 있다. 잠이 든 나디르는 그 옛날에 캔디에서 추르가와 함께 여사제를 사랑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자기가 그 약속을 깨트리고 추르가 몰래 여사제와 사랑을 나누었던 일을 꿈 속에서 회상한다. 사원에 혼자 있는 레일라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노래를 부른다. 잠들어 있었던 나디르는 레일라의 노래 소리를 듣고 문득 오랫동안 오매불망 그리워했던 그 여사제의 음성인 것을 알아차린다. 나디르의 아리아가 Je crois entendre encore(그대 음성을 다시 한번: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이다. 나디르는 노래 소리를 따라 사원으로 올라간다. 마침 레일라는 잠시 베일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있다. 나디르가 보니 틀림없는 레일라였다. 나디르와 레일라가 감격적으로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진주잡이들은 여사제 레일라에게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간청하지만 레일라는 나디르에게 오직 나디르만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레일라의 아리아가 O Dieu Brahma(오 브라마 신이시여)이다.

 

추르가와 나디르의 만남. 산호세오페라.

                  

2막. 나디르와 헤어진 레일라는 혼자 있게 되자 공연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레일라는 마침 들어온 누라바드에게 자기의 그러한 심정을 얘기한다. 누라바드는 용감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신을 위해 봉사하기로 서약한 여사제이므로 신을 위해 죽음이라도 감당해야 할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레일라는 어릴 때에 용감한 행동을 했었다는 것을 회상한다. 레일라는 어릴 때에 어떤 청년이 적의 추격을 받아 피난처를 구하러 오자 그를 숨겨두고 적들이 나타나서 그를 내놓을라고 위협하였으나 결코 알려주지 않은 일을 얘기한다. 레일라의 아리아가 J'etais encore enfant 이다. 레일라가 목숨을 구해준 그 청년을 감사의 뜻으로 레일라에게 목걸이를 주며 언제라도 목에 걸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레일라는 마치 신에게 서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그 청년과의 약속을 지켜왔다. 누라바드가 자리를 뜨자 레일라는 그 옛날 나디르를 비밀리에 만나 사랑을 속삭이던 일을 생각한다. 레일라의 아리아가 Comme autrefois dans la nuit sombre 이다. 나디르가 다시 나타난다. 레일라는 누라바드에게 들키면 큰일이라고 하며 나디르에게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나디르는 레일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사랑을 선언하고 열정적인 듀엣을 부른다. Leila! Leila!...Dieu puissant, le voila!이다. 나디르는 다음날 밤에 다시 오겠다며 마지못해 떠난다. 그러나 진주잡이들이 사원에서 나오는 나디르를 발견하고 붙잡아서 다시 사원으로 끌고 온다. 진주잡이들은 그들의 리더인 추르가에게 나디르가 성스러운 여사제인 레일라와 사랑을 하였으니 처형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추르가는 친구인 나디르가 잡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추르가는 진주잡이들에게 나디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누라바드가 여사제의 베일을 벗긴다. 추르가는 여사제가 다름아닌 그가 한때 사랑했던 레일라인 것을 알고 놀란다. 추르가는 질투와 분노로서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한다. 갑자기 광폭한 폭풍이 불어 닥친다. 진주잡이들은 브라마 신이 노여워했기 때문이라며 브라마 신을 찬양하는 합창을 부른다. Brahma! divin Brahma!이다.

 

레일라의 등장

                       

3막. 해안에 있는 추르가의 장막이다. 어느덧 폭풍은 잔잔해 졌다. 추르가의 분노도 누그러졌다. 추르가는 나디르에 대하여 지나치게 화를 내고 질투한 것을 후회한다. 추르가의 아리아가 L'orage est calmé이다. 레일라가 추르가의 앞에 끌려온다. 레일라는 추르가에게 나디르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추르가는 레일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레일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다시 불붙는다. 추르가는 나디르에 대한 질투심이 더욱 커진다. 추르가는 레일라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나디르에 대한 자비는 거절한다. 추르가의 아리아가 Je suis jaloux 이다. 누라바드와 몇명의 진주잡이들이 들어와서 화형을 치룰 장작더미가 준비되었다고 보고한다. 진주잡이들이 레일라를 데려간다. 추르가는 레일라가 어떤 진주잡이에게 자기의 목걸이를 주며 그것을 자기의 어머니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본다. 추르가가 쫓아가서 진주잡이로부터 레일라의 목걸이를 빼앗듯 가져간다. 그것은 추르가가 그옛날 적들에게 추격을 당할 때 자기를 구해준 어떤 소녀에게 준 것이었다.

 

사원의 밖에서는 군중들이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새벽이 오면 나디르와 레일라를 화형에 처하기 때문이다. 군중들의 합창이 Des que le soleil 이다. 나디르와 레일라는 이제 죽음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두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나마 영혼이 맺어질 것을 노래한다. 그때 마을 쪽의 하늘이 붉게 물든다. 추르가가 뛰어 들어오며 마을에서 큰 불이 났다고 소리친다. 사람들이 불을 끄러 급히 떠난다. 그 틈을 타서 추르가가 나디르와 레일라를 풀어준다. 추르가는 레일라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자기가 그때 목숨을 구해받은 그 사람이라고 밝힌다. 추르가는 레일라를 사랑했던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된다. 추르가는 두 사람에게 어서 멀리 도망가라고 말한다. 나디르와 레일라는 그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랑의 삶을 노래하르며 떠난다. 추르가는 마을에서 진주잡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1886년 버전에 따르면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추르가가 나디르와 레일라를 풀어주는 것을 누라바드가 몰래 지켜본다. 마을에 불을 끄러 갔던 진주잡이들이 돌아오자 누라바드는 진주잡이들에게 추르가의 범행을 얘기한다. 성난 진주잡이들이 추르가를 칼로 찔러 죽인다. 저 멀리서는 나디르와 레일라의 사랑의 듀엣의 마지막 소절이 들린다. 또 다른 버전에 의하면 추르가가 다른 죽음을 마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화형장의 장작더미에 놓여진다.)

 

마을에 불을 지른 추르가가 사람들이 불을 끄는 사이에 나디르와 레일라를 풀어준다.

 

[명음반] 레일라, 나디르, 추르가, 누라바드 - 지휘자, 오케스트라

 

- 1950년: Rita Streich, John Loehe, Dietrich Fiischer-Dieskau, Wilhelm Lang - Arthur Rother, RIAS Symphonie-Orchester und Kammerchor, Berlin

- 1961년: Janine Micheau, Nicolai Gedda, Ernest Blanc, Jacques Mars - Pierre Dervaux, Orchestra and Chorus of L'Opera-Comique

- 1977년: Ileana Cotrubas, Alain Vanzo, Guillermo Sarabia, Roger Soyer - Georges Pretre, Paris Opera Orchestra and Chorus

- 1989년: Barbara Hendricks, John aler, Gino Quilico, Jean-Philippe Courtis - Michel Plasson, Orchestra and Chorus of Capitole de Toulouse

- 2008년: Rebecca Evans, Barry Banks, Simon Keenlyside, Alastair Miles - Brad Cohen,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Geoffrey Mitchell Singers

 

 

 

[뮤지컬 넘버스]

(1막)

- Sur la greve en feu(합창)

- Amis, interrompez vos danses et vos jeux!(추르가, 합창)

- Mais qui vient la...Des savanes et des forets(추르가, 나디르, 합창)

- Demeure parmi nous, Nadir(추르가, 나디르, 합창)

- C'est toi, toi qu'enfin je revois!(추르가, 나디르)

- Au fond du temple saint(추르가, 나디르)

- Amitié sainte(추르가, 나디르)

- Que vois-je...Une fille inconnue(추르가, 나디르)

- C'est elle, c'est elle...Sois la bienvenue(합창)

- Seule au milieu de nous(추르가, 레일라, 나디르, 합창)

- Qu'as-tu donc? Ta main firssonne et tremble(추르가, 레일라, 누라바드, 합창)

- A cette vois...Je crois entendre encore(나디르)

- Le ciel est bleu!(합창, 누라바드, 나디르)

- O Dieu Brahma!(레일라, 나디르, 합창)

(2막)

- La lala la, la lala la...L'ombre descend des cieux(합창, 누라바드, 레일라)

- Les barques ont gagné la greve...J'étais encore enfant(누라바드, 레일라, 합창)

- Me voila seule dans la muit...Comme autrefois(레일라)

- De mon amie, fleur endormie(나디르, 레일라)

- Leila! Leila!...Dieu puissant, le voila!(나디르, 레일라)

- Ton coeur n'a pas compris le mien(나디르, 레일라)

- Ah! revenez a la raison!(레일라, 나디르, 누라바드, 합창)

- Dans cet asile sacré, dans ces lieux redoutables(누라바드, 레일라, 나디르, 합창)

- Arretez! arretez!(추르가, 누라바드, 레일라, 나디르, 합창)

- Brahma! divin Brahma!(합창)

(3막)

- L'orage est calmé...O Nadir, tendre ami de mon jeune age(추르가)

- Qu'ai je vu? O ciel, quel trouble...Je frémis(추르가, 레일라)

- Quoi! Innoceent? Lui, Nadir?(추르가, 레일라)

- Je suis jaloux(추르가, 레일라)

- Entends au loin ce bruit de fete?(누라바드, 레일라, 추르가)

- Des que le soleil(합창)

- Hélas! Qu'ont-ils fait de Leila?(나디르, 누라바드, 합창)

- Ah, Leila!...O lumiere sainte(나디르, 레일라, 누라바드, 합창)

- Le jour enfin perce la nue!(누라바드, 추르가, 나디르, 레일라, 합창)

- Plus de crainte...Reves d'amour, adieu!(레일라, 나디르, 추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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