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하이든

정준극 2013. 5. 23. 17:14

비엔나와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f Haydn: 1732-1809)은 비엔나로부터 동남쪽, 헝가리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로라루(Rohrau)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고 작곡가로서 생애의 대부분은 비엔나 남쪽 아이젠슈타트에서 지냈지만 비엔나와의 인연은 어느 누구보다도 많다. 하이든은 로라우에서 다섯살 때까지 지내다가 인근 하인부르크에 가서 학교에 다녔고 8세 때에 슈테판성당의 음악감독 겸 작곡가인 게오르그 로이터 2세(Georg Reutter Jr: 1708-1772)에게 발탁되어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 겸 궁정소년합창단의 멤버기 되었다. 하이든은 슈테판성당 소년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노래레슨을 물론 피아노와 바이올린 레슨도 받을수 있었다.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일 때에는 슈테판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성당 소년성가대원들의 기숙사격인 카펠하우스(Kappelhaus)에서 다른 소년들과 함께 지냈다. 카펠하우스는 지금 철거되어 자취를 찾아 볼수 없지만 대성당에서 캐른트너슈트라쎄로 들어가는 곳, 지금의 광장에 있었던 건물이다.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다른 소년성가대원들과 함께 카펠하우스에서 무려 9년을 지냈다.


프란츠 알트의 '슈테판스플라츠'. 대성당 옆, 그림에서 피아커가 지나가는 지점 부근에 카펠하우스가 있었다.


하이든은 변성이 되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자 성당기숙사 격인 카펠하우스에서 나와야 했다. 그때가 하이든이 18세인 1750년이었다. 그러한 때에 참으로 우연하게도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궁정 시인이며 오페라 대본가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가 청년 하이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서 오페라 작곡가이면 성악 교사인 니콜라 안토니오 포르포라(Nicola Antonio Porpora: 1686-1768)에게 하이든을 소개해 주고 잘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든은 포르포라를 돕는 일을 하면서 포르포라가 묵고 있는 미하엘러하우스에 기거할수 있게 되었다. 미하엘러하우스는 미하엘러키르헤(미하일교회)에 속한 집으로 콜마르크트(Kohlmarkt) 11번지에 있는 집이다. 미하엘러키르헤 바로 뒷편에 있는 집이다. 하이든은 미하엘러하우스에서 5년 동안 포르포르의 조수로서 지냈다. 미하엘러하우스는 원래 마굿간이었다. 하이든은 그 건물의 다락방에서 지냈다. 늦가을부터 여름까지는 춥고 습한 방이었다. 겨울에는 지붕이 새어서 눈이라도 내리면 눈발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그래도 하이든은 그나마도 고맙게 생각했다.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록 벌레들이 쏘아서 훼손된 피아노지만 피아노 앞에 앉으면 제왕이 부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이든은 이탈리아 출신의 포르포라로부터 작곡의 기본과 이탈리아어를 배울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포르포라는 하이든에게 비엔나의 여러 중요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메타스타시오도 이 집에서 살았다. 메타스타시오는 하이든에게 당대의 작곡가이며 성악가인 마리안나 마르티네스(Marianna Martinez: 1744-1812)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메타스타시오는 1782년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 1구의 미노리텐키르헤에는 메타스타시오의 임종 장면을 그린 부조가 있다. 한쪽에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마치 병자성사를 하듯 나열해 있는데 오른쪽에는 살리에리와 함게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서 있는 부조이다. 메타스타시오는 미노리텐키르헤에 안장되어 있지 않다. 미하엘러키르헤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메타스타시오가 미하엘러키르헤에 속한 미하엘러하우스에서 거주했기 때문인듯 싶다.  

 

콜마르크트 11번지의 미하엘러하우스. 이 집의 다락방에서 소년 하이든이 몇년을 어렵게 지냈다. 미하엘러키르헤에 속한 집이다. 원래는 마굿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마당에는 옛날 로마시대의 돌 조각들이 널려 있어서 그것만 보는 것도 보람이 있다.

 

미하엘러키르헤에는 하이든이 17세 때인 1749년에 이 교회의 오르간을 연주했다는 기념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에 미하엘러키르헤의 오르간은 비엔나에서 가장 큰 바로크 오르간이었다. 그 즈음에 하이든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악레슨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오르간을 연주해서 생활비의 일부를 벌었다. 하이든은 레오폴드슈타트의 자비형제단 교회에서 8시 미사의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10시에는 하우그비츠 백작가의 채플에서 연주했고 11시에는 슈테판성당의 미사에서 노래를 불렀다. 아무튼 하이든은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슈테판성당은 하이든의 어린시절에만 연관이 된 것이 아니라 청년시절에도 연관이 되었다. 하이든은 1760년 11월 26일, 그러니까 하이든이 28세 때에 슈테판성당에거 안나 마리아 알로이지아 켈러(Anna Maria Aloysia Keller)라는 여인과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몇몇 식구들만 모인가운데 결혼하였다. 안나 마리아는 비엔나에서 가발 만드는 사람의 큰 딸이었다. 그런데 하이든은 실은 몇년전부터 둘째 딸인 테레제를 사랑했었다. 그래서 테레제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결혼을 승락해 달라고 말했지만 테레제의 아버지는 큰 딸 안나 마리아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둘째 딸부터 결혼시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거절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테레제의 아버지는 하이든에게 그러지 말고 큰 딸 안나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만일 큰 딸과 결혼하지 않으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까지 했다. 그러는 중에 테레제는 인생살이가 괴롭고 고달펐던지 뜻한바 있어서 1756년에 비엔나의 성니콜라스 수녀원에 들어가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하이든은 테레제 아버지의 계속적인 설득과 협박에 이기지 못해서 결국 테레제가 수녀원으로 들어간지 5년 후인 1760년에 테레제의 언니인 안나 마리아와 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슈테판성당은 훗날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차르트도 원래는 콘스탄체의 큰 언니인 알로이지아와 결혼코자 했으나 이번에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동생인 콘스탄체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그런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 하이든이 슈테판성당의 어느 카펠레(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이든의 부인 안나 마리아에 대하여는 본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설명했으므로 본란에서는 생략코자 한다. 다만, 하이든의 결혼생활은 불행한 것이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내세우고자 한다. 하이든은 자기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얘기한 일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다른 매력있는 여자들을 만나면 무관심 할수가 없었던 같다'고 말한 것이다. 안나 마리아는 제대로의 교육을 받지 못한 여자였다. 뛰어난 재능의 하이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리고 안나 마리아는 낭비벽이 많은 여자였다. 그래서 어느때 하이든은 안나 마리아에 대하여 '지옥처럼 소름끼치는 괴물'(Hellish beast)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이든이 안나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린 슈테판성당의 회랑


슈테판성당의 뒷편으로 가면 돔가쎄(Domgasse)로 들어갈수 있는 좁은 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거쳐 나가면 몇걸음 가지 않아서 '모차르트 하우스 비엔나'(Mozart House Vienna)를 만난다. 돔가쎄 5번지이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4년9월 29일부터 1787년 4월 24일까지 거의 3년 동안을 지냈다. 모차르트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이집에서 보냈던것이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를 작곡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집은 '피가로 하우스'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대대적인 수리와 복구를 하고 '모차르트 하우스 비엔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1785년에 아들 모차르트가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두고 산다고 하니까 어떻게 사는지 처음으로 한번 찾아왔다. 그래서 이 집에서 거의 두달 동안이나 지내다가 아들 모차르트의 하는 짓거리도 그렇거니와 며느리 콘스탄체도 도무지 못마땅해서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잘츠부르크에서 와서 이 집에서 잠시 지내고 있다고 하니까 레오폴드를 만나보기 위해 찾아 왔었다. 레오폴드는 하이든보다 나이가 13년이나 위였다. 하이든은 레오폴드에게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숨김이 없이 공정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거니와 선생님의 아드님은 정말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를 알고 그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나로서 큰 영광입니다. 모차르트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작곡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즈음에 하이든은 현악4중주곡 Op 33인 '러시안'을 완성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에 감동을 받아서 여섯 편의 현악4중주곡을 만들어서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비록 나이는 차이가 있지만 가까운 친구로서 서로를 존경하고 경외하면서, 그리고 서로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으면서 지냈다.


슈테판성당 뒷편에 있는 모차르트 하우스 비엔나.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완성한 집이다. 이곳에서 하이든은 레오폴드 모차르트를 만났다.


하이든 시대의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와 현재의 노이어 마르크트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다. 하이든 시대의 노이어 마르크트에는 멜그루베(Mehlgrube)라는 멋진 건물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거나 무도회와 같은 사교 모임을 갖는 장소이다. 현재는 호텔 암바사도르(Hotel Ambassador)이다. 주소는 캐른트너슈트라쎄 5번지이다. 당장 별다른 수입이 없어서 생활이 곤란했던 하이든은 친구 음악가들과 함께 멜그루베에서 파티가 있으면 앙상블을 구성해서 연주를 하고 어느정도의 사례를 받았다. 하이든이 이곳에서 이른바 알바를 할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하이든을 아는 귀족들이 주선해서였다.   


노이어 마르크트의 한쪽에 있는 위풍당당한 호텔 암바사도르. 하이든이 알바를 하던 장소였다.


하이든은 청년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멜그루베에서 연주를 하여 노이어 마르크트와 인연을 가졌지만 명성과 영광을 얻고 난 후에도 노이어 마르크트와 인연이 있었다. 하이든은 1792년부터 1797년까지 5년 동안 노이어 마르크트의 한쪽, 정확히 말해서 2번지 건물에 거주했었다. 호프외브스틀러리셰스 하우스()라는 아주 훌륭한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894년에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새로 들어선 건물에 하이든이 살았었다는 내용의 기념명판이 붙어 있을 뿐이다. 현재 노이어 마르크트 2번지의 아랫층은 레스토랑 페르디난트(Restuarant Ferdinandt)이다. 비너 슈니첼이나 굴라슈 등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을 서브하는 식당이다. 하이든은 이 저택에서 프란츠 황제를 위한 '황제 찬가'(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를 작곡했다. 프란츠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시스 2세 황제를 말하며 그는 나중에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프란시스 1세가 된 사람이다. 하이든의 '황제찬가'는 1797년 2월 12일 미하엘러플라츠 한 쪽에 있는 궁정극장(Burgtheater)에서 초연되었다. 프란츠 2세 신성로마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회였다. 궁정극장은 1888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모습을 볼수 없지만 후속으로 생긴 건물이 라트하우스 건너편에 있는 부르크테아터이다.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토르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아름다운 쇠창살이 있고 그 위에 극장 마스크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호프부르크와 연계하여 부르크테아터가 있었다는 것을 회상케 해주는 것이다.


노이어 마르크트 2번지, 현재는 레스토랑 페르디난트. 하이든은 이집에서 5년 동안 살았으며 '황제 찬가'를 작곡했다. 황제 찬가의 멜로디는 오늘날 독일 국가의 멜로디로 사용되고 있다.


기왕에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 주변의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하자면 광장의 한쪽 면에 있었던 팔레 슈봐르첸버그(Palais Schwarzenberg)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장을 압도하듯이 서있던 팔레 슈봐르첸버그에서는 1798년 4월 30일 하이든의 저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초연되었다.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초연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의 오라토리오 편에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팔레 슈봐르첸버그는 비엔나에 있는 슈봐르첸버그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겨울 궁전이었다. 처음 세워진 것은 1705년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마르티넬리가 완성했고 그후에는 피셔 폰 에얼라흐가 새롭게 단장하였다. 그러나 팔레 슈봐르첸버그는 비엔나의 도시계획에 의해 1894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현재의 건물이 들어섰다. 노이어 마르크트 8번지이며 캐른트너슈트라쎄 26번지이기도 하다.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 돈너 분수가 설치 되지 않을 때였다. 겨울에는 비엔나 시민들이 스케이팅을 타거나 썰매를 타며 즐거워했던 곳이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팔레 슈봐르첸버그로서 1798년에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 장소이다.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봉사하였기 때문에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근처에 처소를 정하고 오랜기간을 살았다. 그가 살던 아이젠슈타트의 집은 현재 하이든기념관이며 그 앞 길은 하이든을 기려서 하이든가쎄(Haydngass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하이든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연주회를 갖던 홀은 하이든잘(Haydnsaal)이다.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에 있으면서 비엔나에도 간혹 왕래하였다. 비엔나에서는 캐른트너슈트라쎄 41번지의 에스터하지 시내궁전(Palais Esterhazy)에서 지냈다. 발너슈트라쎄(Wallnerstrasse) 4번지이기도 하다. 하이든은 이곳에서 교향곡 6, 7, 8번을 처음 연주했다. '아침' '낮' '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교향곡이다. 하이든이 어떻게 해서 에스터하지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한가지 추측을 한다면 하이든이 청년시절에 미하엘러키르헤의 뒷편에 있는 미하엘러하우스에서 지낼 때에 그 집의 아랫층에 마리아 옥타비아(Maria Octavia: 1683-1762) 왕녀가 살았었기 때문에 인사를 트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마리아 옥타비아는 파울 안톤 공자와 니콜라우스 요제프 공자의 어머니였다. 하이든은 1761년부터 이들 두 공자의 저택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했었다. 니콜라우스 요제프 공자는 하이든에게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지급했고 또한 거처도 별도로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하이든은 오늘날의 자일러슈테테(Seilerstatte) 19번지 겸 휘히테가쎄(Fichtegasse) 2번지인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명이 바써쿤스트바슈타이()였다. 이집에서 하이든은 궁정관리인 요한 네포무크 함버거라는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여러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알고 지낼수 있었다. 비엔나에 온 젊은 베토벤이 하이든으로부터 레슨을 받기 위해 몇번 찾아왔던 곳도 이 집이었다. 이 집은 철거되어서 현재 모습을 볼수 없지만 자일러슈태테에 있는 음악의 집(Haus der Musik)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음악의 집은 자일러슈태테 30번지이다. 음악의 집의 3층에는 하이든을 기억할수 있는 문서들과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 옛날 하이든이 근처에서 살았었다는 친근감을 갖게 해준다. 그런데 니콜라우스 요제프 공자는 음악에 이해가 많았지만 파울 안톤 공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니콜라우스 요제프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파울 안톤 공자는 하이든의 오케스트라를 해체하였다. 그러다가 파울 안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니콜라우스 공자는 에스터하지 오케스트라를 부활시키고 하이든을 음악감독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공자의 배려로 지내면서 두번이나 영국을 다녀올수 있었으며 또한 굼펜도르프 구역에 집도 장만할수 있었다. 하이든과 에스터하지 가문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니콜라스 공자의 주치의인 페터 레오폴드 겐칭거가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인 마리안네 카이저(Marianne Kayser)와 결혼했는데 마리안네 카이저와 하이든은 같은 음악인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하이든은 간혹 쇼텐호프에 있는 마리안네의 살롱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마리안네의 집의 뒷문으로 나가면 에스터하지 켈러(포도주 창고)의 입구이다. 그래서 하이든은 마리안네의 살롱에 갈 일이 있으면 염치불구하고 에스터하지 켈러에 내려가서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봘너슈트라쎄 4번지의 팔레 에스터하지

                          

하이든이 1797년에 구입한 굼펜도르프(현재의 마리아힐르프)의 집은 오늘날 하이든가쎄 19번지로서 하이든 당시에는 클라이네 슈타인가쎄(Kleine Steingasse) 78번지였다. 이 집은 원래 직조장인인 이그나즈 봐이스그람의 집이었다. 하이든이 이 집을 택한 것은 주변이 조용하고 평화스럽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이든은 원래 단층이었던 이 집을 이층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런던여행을 갔다가 온 후인 1797년 여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집에는 하이든이 오기 전에 그의 조카인 에르네스티네 로더와 요리사인 안나 크렘니처, 비서 겸 카피스트인 요한 플로란 아이슬러가 먼저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요한 플로란 아이슬러는 유명한 댄서인 패니 아이슬러(Fanny Eissler)의 아버지이다. 하이든의 부인 안나 마리아는 이 집에 들어와서 살지 않았다. 하이든은 성품이 무던해성린지 부인 안나 마리아를 위해서 바덴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안나 마리아는 바덴의 집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바덴학교의 교사인 안톤 슈톨이 안나 마리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하이든은 바덴의 안나 마리아를 생전에 단 한번도 찾아간 일이 없다. 안나 마리아가 바덴에 있을 때에 하이든은 바덴을 한번 방문한 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1800년 3월 22일 그의 유언장을 공개해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집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이후 기념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하이든기념관의 전시가 빈약하다는 의견들이어서 마침 2009년 하이든 서거 2백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으로 개선하였다. 현재 하이든기념관에는 하이든의 데드 마스크, 그가 사용하던 키보드 악기,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악보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기념관의 방 하나는 브람스를 기념하는 전시실로 할당되었다. 브람스도 나중에 이 집에서 잠시 살았었기 때문이다.

 

하이든가쎄의 하이든기념관. 브람스기념관도 겸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비엔나의 박물관 편을 참고하시기 바람.

                            

하이든은 부인인 안나 마리아보다 9년이나 더 살았다. 하이든은 현재의 하이든가쎄 19번지에서 1809년 5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점거하고 있던 때였다. 나폴레옹은 하이든을 크게 존경하였다. 그래서 하이든의 집에 의장대를 보내어 경비토록 했다. 하이든의 장례식이 거행되자 행렬에는 프랑스군 장교들이 다수 동행하였다. 하이든의 시신은 굼펜도르프 교회에 도착해서 교회건물을 세번이나 돈 후에 장례미사에 들어갔다. 하이든의 시신은 굼펜도르프에서 가장 가까운 훈트슈투름(Hundsturm)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훈트슈투름 공동묘지는 1873년에 문을 닫았다. 훈트슈투름 공동묘지가 있던 장소는 지금의 하이든파르크이다. 하이든의 유해는 1820년에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졌고 하이든파르크에 남아 있는 것은 벽돌담에 붙어서 서 있는 조그만 묘비 하나 뿐이다. 하이든은 굼펜도르프에 살면서  브뤼켄가쎄(Bruckengasse) 5번지에 있는 굼펜도르퍼키르헤(성이기디우스키르헤)에 간혹 출석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사람들은 나중에 그 교회를 하이든교회라고 불렀지만 실은 마리아힐르프에 있는 교회를 하이든교회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굼펜도르퍼키르헤에는 1932년 3월 30일, 하이든의 탄생일을 하루 앞두고서 비엔나의 슈베르트연맹이 이 교회에서 하이든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는 기념명판을 제작하여 설치했다. 봉헌식에는 당시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인 빌헬름 미클라스(Wilhelm Miklas)가 참석하였다. 명판에는 In dieser Kirche der Leichnam des unsterblichen (Joseph Haydn) am 1. Juni 1809 eingesegnet wurde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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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의 시신은 비엔나 12구 마이들링에 있는 현재의 하이든파르크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아이젠슈타트의 프란치스코교회로 이장되었다. 처음 묘지가 있었던 곳에 아직도 기념비석이 남아 있다.


마리아힐르퍼슈트라쎄와 바르나비텐가쎄(Barnabitengasse)가 만나는 큰길거리에 마리아힐르프 교회가 있다. 주소는 바르나비텐가쎄 14번지이다. 교회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는 요제프 나터(Josef Natter)가 제작하여 1887년에 제막식을 가진 하이든의 기념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리아힐르퍼키르헤를 하이든교회라고도 부른다. 이 곳에 서 있는 하이든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으로 사실적이다. 하이든이 마리아힐르프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쇼핑에 여념이 없는 뭇 사람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음악회 좀 가시오, 음악회요'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이든 기념상에는 언제나 보아도 비둘기가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사람들은 신앙심이 유난히 돈독했던 하이든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말했다. 마리아힐르퍼키르헤의 길거너 곧바로 난 길은 키르헨가쎄(Kirchengasse)이다. 마리아힐르퍼키르헤를 기려서 붙인 지명이다. 마리아힐르퍼키르헤(하이든교회)에서 조금 더 가면 에스터하지가쎄(Esterhazygasse)가 나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에스터하지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2차 대전을 기억케 하는 거대한 대공포탑(Flaktürme)가 있다. 전쟁이 끝난후 이 대공포대는 수족관으로 전환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지만 대공포대가 세워지기 전에는 그 자리에 에스터하지 가문의 여름 궁전이 있었다. 그래서 거리 이름이 에스터하지가쎄인 것이며 공원의 이름도 에스터하지 파르크가 된 것이다. 에스터하지 가문에 봉사하고 있던 하이든은 이곳에 자주 와서 에스터하지 식구들과 손님들을 위해 연주를 하였다.  


하이든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굼펜도르프의 성이기디우스교회


하이든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보이고 만인으로부터 만수를 치하받은 것은 76세 생일을 마지한 1808년이었다. 하이든은 3월 27일(하이든의 생일은 3월 31일) 비엔나 1구의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 있는 구비엔나대학교 연주회장(현재는 오스트리아 학술원 강당)에서 열린 76세 생일 축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공연에 참석하였다. 만장한 청중들은 하이든의 세단처럼 생긴 의자에 실려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어 노대가의 생일을 축하하고 만수를 기원하였다. 이날 하이든은 조금 어지러운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천지창조'의 지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맡았다. 이날 청중 중에는 젊은 베토벤도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 이날 베토벤은 몇년 후인 1813년에 자기의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Sieg in der Schlacht bey Vittoria)가 바로 이 연주회장에서 초연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웰링턴의 승리'의 초연은 베토벤이 직접 지휘했지만 청각에 문제가 있어서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이 손벽을 치는 모습을 보고 자기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1808년 3월 27일 구비엔나대학교 연주회장에서 열린 하이든 76회 생일 축하 '천지창조' 연주회를 마친 후의 모습. 발타자르 비간트(Balthasar Wigand)가 그린 수채화이다. 비간트도 이날 이 연주회에 참석했었다.(앞면 가운데 검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이든이다.)

1808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천지창조'연주회가 열렸던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의 구비엔나대학교 건물. 현재는 오스트리아학술원 건물이다. 오른쪽의 건물은 예수회교회이다.


비엔나에서 하이든의 모습을 볼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1구 호에 마르크트(Hohe Markt) 10-11번지에 있는 앙커시계(Ankeruhr)이다. 열두시 전에 가서 기다렸다가 시계가 종을 치는 것을 듣고 시계에 모습을 보이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하이든의 모습도 보는 것이다. 앙커 시계는 화가인 프란츠 폰 마츄(Franzn von Matsch)가 설계했고 앙커보험회사가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앙커시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열두시에는 약 15분간 오르간 음악과 함께 오스트리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중요한 인물들의 형상이 퍼레이드를 벌이듯 돌아가면서 등장한다. 시계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은 1)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2세기의 로마 황제 겸 철학자로 비엔나에서 지냈음) 2) 살레만뉴 대제 3) 영광왕 레오폴드와 그의 후궁 테오도라 4) 포겔봐이데의 발터 5)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황제와 안나 왕비 6) 대건축가 한스 푹스바움 7) 최후의 기사인 막시밀리안 1 8) 비엔나 시장 리벤베르크(17세기 초) 9) 슈타렘베르크의 뤼디거 10) 오이겐 공자 11)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 프란시스1 12) 교향곡의 아버지 요세프 하이든이다. 시계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음악이 나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다. 하이든은 소년 시절에 슈테판성당 소년성가대원 겸 궁정소년합창단원으로 있으면서 호프부르크와 쇤브룬 궁전에 자주 가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시스 1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성년이 된 하이든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가 되는 프란시스 황제를 위해 '황제 찬가'를 작곡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1세의 뒤를 이어 12시에 표시하는 형상은 하이든이다. 하이든이 등장할 때에는 '황제 찬가'가 나왔다. 그러다가 1차 대전 후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황제 찬가' 대신에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13번재 곡인 '저 하늘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로 대체하였다. 그러다보니 '천지창조'의 음악이 조금 길어서 전체 음악이 서로 균형이 잡히지 않는 문제가 생겼지만 그래도 사용하고 있다.


앙커우르에서 하이든의 모습. '천지창조'에서 '저 하늘이 주의 영광을 말하고'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미술사박물관(국립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사이에 있는 넓은 광장은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다. 그 광장의 한 가운데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이 장엄하게 서 있다. 기념상의 사면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에 국가를 위해 많은 공적을 쌓은 여러 사람들의 기념상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쪽 면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연관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모습을 조각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여제의 개인 주치의인 게르하르트 반 스비텐(Gerhard van Swieten)이 있고 그 뒤로는 글룩과 하이든이 있으며 이들의 앞에는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도 볼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은 거장 카스파르 춤부슈(Kaspar Zumbusch)의 작품이다. 1888년에 제막된 기념상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한 면에 있는 동시대 과학예술인들의 모습. 가운데가 게라르트 반 스비텐(Gerard van Swieten: 1700-1772)이며 뒤에는 맨 오른쪽에 하이든, 그 옆이 글룩, 그 앞의 어린이가 모차르트이다.  반 스비텐은 더치 출신의 의사로 비엔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개인주치의였다. 그는 여제의 협조로 비엔나에서 의학교육을 사회적으로 보건증진 및 위생향상 개혁을 추진하였다.

마리아힐르퍼슈트라쎄의 하이든 기념상


하이든은 처음에 현재의 하이든파르크에 안장되었다. 12구 마이들링에 있는 공원이다. 그의 두개골이 도난 당했다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되돌아 왔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 것이다. 하이든의 유해는 현재 아이젠슈타트의 프란치스카너키르헤(Franziskanerkirche), 또는 갈보리언덕교회(Bergkirche)라고 불리는 교회의 지하 영묘에 안치되어 있다. 프란치스카너키르헤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매년 성금요일에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십자가상의 칠언'을 연주하고 있다. 다만, 1945년의 성금요일에는 전쟁으로 연주하지 않았다.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키르헤(언덕교회). 또는 갈보리언덕교회라고 부른다. 이곳 지하에 하이든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하이든 대리석관


※ 비엔나에서 하이든 기념명판이 있는 곳은 네곳이다. 콜마르크트 11번지, 노이어 마르크트 2번지, 하이든가쎄 19번지, 6구의 쿠르트 핀트 플라츠에 있는 이기디우스키르헤이다. 자세한 것은 본 블로그의 하이든 편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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