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베토벤

정준극 2013. 5. 23. 19:05

비엔나와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

 

잘 아는대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독일의 본(Bonn)에서 태어나서 청년시절까지 그곳에서 지냈지만 뜻한바 있어서 비엔나로 와서 활동하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비엔나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상들과 명판과 기념관들이 여럿이나 있다. 비엔나에는 두가지 많은 것이 있는데 하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작곡가라는 말이 있다. 그럴 정도로 비엔나에는 작곡가들이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 베토벤만큼 기념상이 많고 기념 명판이 많으며 기념관이 많은 작곡가는 없다. 하기야 베토벤은 가난해서 그런지 또는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비엔나에서 67개 주소에 거주했었다고 하니 기념관과 기념 명판이 많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비엔나의 아무 곳이나 거닐다 보면 베토벤과 관련이 되는 것과 마주치게 된다고까지 얘기한바 있다. 베토벤가쎄, 베토벤슈트라쎄, 베토벤플라츠, 베토벤하우스....

 

베토벤이 한 때 살았다고 하는 집은 2차 대전중에 폭격으로 파손되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베토벤 호프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9구 알저그룬트에 있다.

                                   

1구 슈베르트 링 뒤편, 콘체르트하우스 건너편에 베토벤플라츠가 있다. 그곳에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베토벤 기념상이 있다. 기념상의 하단에는 그의 아홉개의 교향곡을 상징하는 조각들이 만들어져 있다. 베토벤 기념상은 콘체르트하우스와 가깝게 있지만 악우회 건물과도 멀지 않다. 비엔나에서 두개의 가장 유명한 연주회장의 중간쯤에 있는 셈이다. 실제로 베토벤플라츠의 베토벤 기념상은 비엔나악우회와 무관하지 않다. 비엔나악우회는 1871년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비엔나 최초의 베토벤 기념상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우선 모금을 해야 했다. 위원회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하기야 프란츠 리스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헝가리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가 태어난 라이딩이라는 마을은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리스트는 1845년에 독일의 본에 베토벤 기념상을 세우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이 있다. 비엔나악우회는 프란츠 리스트가 베토벤을 지극히 존경하여서 그런 사업을 주도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엔나에 베토벤의 기념상을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선뜻 나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프란츠 리스트는 그런 요청을 받자 정중히 사양했다. 리스트는 비엔나가 베토벤을 기리는 기념상을 건립한다면 30년 전 본에서 했던 것보다는 더 훌륭한 것을 완성해야 할 것이므로 자기는 그럴말한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비엔나악우회는 그 일은 그대로 미루어놓고 우선 기념상을 제작할 조각가부터 선정키로 했다.  카스파르 클레멘스 춤부슈(Kaspar Clemens Zumbusch: 1830-1915)라는 중견 조각가가 선정되었다. 그러자 프란츠 리스트는 비엔나의 베토벤 기념상의 제작할 사람으로 춤부슈가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꾸어 베토벤기념상을 세우는데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춤부슈는 리스트가 사랑하는 후배 예술가로서 뮌헨에서 잘 알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춤부슈는 비엔나에서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1887), 라데츠기 백작 기마상(1891), 알베르티나의 알브레헤트 대공 기마상(1898-99)을 제작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리하여 춤부슈는 1873년부터 베토벤기념상의 제작에 들어가 7년 후인 1880년에 완성하였다.

 

베토벤플라츠의 베토벤 기념상. 왼편에는 프로메테우스, 오른편에는 니케가 있고 가운데에는 푸티들이 있다.

 

리스트는 1877년에 자선 갈라 콘서트를 개최하여 기금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춤부슈는 안정되게 작업을 추진할수 있었다. 춤부슈는 처음에는 베토벤이 앉아 있는 모습만을 조각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베토벤의 음악을 비유하는 부수적인 조각들도 만들기로 했다. 아무튼 베토벤 기념상은 생각보다도 규모가 컸다. 높이가 거의 7 미터에 이르는 것이었다. 베토벤의 왼편에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을 만들었다. 독수리로부터 매일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다. 오른편에는 승리의 여신인 니케(Nike)의 형상을 만들었다. 니케는 인간에게 불이 아니라 음악을 가져다준 누군가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제공하는 모습이다. 예술사학자인 알레산드라 코미니(Alessandra Comini)는 이같은 두개의 형상이야말로 베토벤의 음악과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삶이란 투쟁과 승리, 고통과 극복을 말한다. 기념상의 하단에는 어린 천사와 같은 푸토들이 베토벤이 완성한 9개의 교향곡을 상징하고 있다. 베토벤 음악의 각기 다른 면모이다. 즉, 영웅적, 전원적, 비애적, 비극적, 목가적, 그리고 고통스러움을 의미한다. 베토벤 기념상의 초기 버전은 베토벤플라츠의 건너편에 있는 콘체르트하우스의 로비에 있다. 그래서 콘체르트하우스의 음악회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하면 '베토벤 옆에서 만나자'라고 약속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콘체르트하우스의 베토벤 기념상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무려 67개 장소를 전전하며 거주했다. 아무리 베토벤 전문학자라고 해도 그 많은 주소를 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중에서 몇 군데만 소개코자 한다. 우선 6구 마리아힐르프의 라임그루버가쎄(Laimgrubergasse) 22번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1822년 가을부터 1823년 여름까지 거의 1년을 살았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부연하자면, 6구 마리아힐르프라는 지역은 베토벤 당시에 비엔나의 중심지가 아닌 교외여서 별로 바람직한 주거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라! 6구에서는 베토벤은 물론, 하이든도 살았고 브람스도 살았으며 오페레타 작곡가로 유명한 칼 밀뢰커도 살았고 프란츠 레하르도 살았다. 그리고 역시 작곡가인 루드비히 안첸그루버도 살았고 비더마이어 무용수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홰니 엘슬러(Fanny Elssler)도 살았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최고의 극작가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도 살았고 페르디난트 폰 자아르(Ferdinand von Saar)도 살았다. 그리고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le)에는 베토벤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도 있다.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의 한쪽 방에사 1804년부터 1806년까지 2년 동안 살았다. 그리고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휘델리오', 그의 교향곡 3번, 5번, 6번이 이 극장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1880년 베토벤플라츠에서의 베토벤 기념상 제막식 그림

 

라임그루버가쎄 22번지 이야기를 하다고 얘기가 곁길로 갔음을 송구하게 생각하며 다시 라임그루버가쎄(Laimgrubergasse)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얘기란 다름아니라 그곳에 '루드비히반'(LudwigVan)이라는 식당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 베토벤은 교향곡 9번, 장엄미사곡의 작업을 했으며 피아노 소나타 C 단조 작품번호 111번도 완성했다. '루드비히반'식당(Lokal)은 비엔나 전통의 바이슬 식당(echten Wiener Beiseln)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오리지날 비엔나 맥주와 와인과 함께 비엔나 음식인 슈니첼, 굴라슈, 타펠슈피츠, 보이셸(Beuschel), 블루첸(Bluzen) 등을 맛볼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이곳 역시 비엔나의 전통적인 식당들과 마찬가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1:30-15:00, 18:00-22:00 까지 영업하며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문을 닫는다. 일요일은 그렇다치고 토요일까지 영업을 안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비엔나 사람들은 그러하니 어찌할수 없다.

 

6구 라임그루버가쎄 22번지의 '루드비히 반' 식당

'루드비히반' 식당 현관 상단의 명판. 베토벤이 이 집에 1822년 10월부터 1823년 5월까지 살았다는 내용.


1구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옆에 란트만 카페가 있고 그 앞에 있는 아돌프 폰 리벤베르크 기념탑의 뒤편 언덕의 파스크발라티 하우스(Pasqualati Haus)는 베토벤의 생애와 작품세계에서 잊을수 없는 곳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요한 안드레아스 폰 리벤베르크(Johann Andreas von Liebenberg: 1627-1683)는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비엔나 시장을 지낸 양반이다. 파스크발라티 하우스는 묄커바슈타이 8번지로 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베토벤은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살다가 나가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오페라 '휘델리오'의 수정작업, 교향곡 4번, 5번, 7번, 8번의 작업을 했다. 현재는 베토벤기념관으로 되어 있어서 베토벤을 존경하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아간다.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의 옆에는 슈베르트의 '세아가씨의 집'(Das Dreimäderlhaus)이 있고 그 옆에는 슈베르트 식당이 있다. 슈베르트 식당에 가서 한가롭게 식사를 즐기면서 슈베르트가 사랑했다는 아가씨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비엔나 방문의 아름다운 부산물일 것이다. 베토벤 기념관은 하일리겐슈타트에도 있다.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 하우스는 베토벤이 청각 장애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테스타멘트)를 쓴 곳이다.

 

슈라이포겔가쎄와 묄커바슈타이에 있는 파스크발라티 하우스

파스크발라티하우스의 기념명판. Beethoven wohnte in diesem Hause wiederholt 1804 bis 1815. Symphonie IV V VII Fidelio Leonoren Ouverture No 3 Klavier Konzert No 4 Violin Konzert Streichquartette Op 59 & 95 und andere Werke. 라고 적혀 있다. 베토벤이 이 집에서 1804년부터 1815년 사이에 자주 기숙했으며 이곳에서 교향곡 4번, 5번, 7번, 휘델리오, 레오노레 서곡 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4중주곡 Op 59와 95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작곡했다는 내용이다.


 

베토벤의 발자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별도의 악성 베토벤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비엔나와 음악 > 위대한 발자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엔나와 리스트  (0) 2013.05.24
비엔나와 슈베르트   (0) 2013.05.24
비엔나와 하이든  (0) 2013.05.23
비엔나와 모차르트  (0) 2013.05.23
비엔나와 비발디  (0) 2013.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