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슈베르트

정준극 2013. 5. 24. 15:26

비엔나와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18세기와 19세기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작곡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비엔나에서 태어나고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물론, 요한 슈트라우스도 있지만 슈베르트와는 차원이 다른 작곡가이므로 예외로 한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비엔나 토박이라는 사실보다도 수많은 작곡가 중에서 젊은 나이에 가장 일찍 세상을 떠난 작곡가라는 것으로 더욱 기억되고 있다. 겨우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슈베르트가 10년만이라도 더 살았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주옥과 같은 음악이 더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모두들 슈베르트의 요절을 애석해하였다. 그래서인지 비엔나에는 슈베르트를 기념하는 기념관, 기념상, 거리이름, 명판 등이 많이 있다. 기념관은 그가 태어난 누쓰도르퍼슈트라쎄의 집과 그가 세상을 떠난 케텐브뤼켄가쎄 집에 마련되어 있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누쓰도르퍼 슈트라쎄 54번지. 프란츠 슈베르트는 이집 2층(우리 식으로는 1층) 부엌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가 교구학교를 운영하던 곳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은 누쓰도르퍼 슈트라쎄(Nussdorferstrasse) 54번지이다. 쇼텐토르에서 37번이나 38번 전차를 타고 두세 정류장을 지나면 나오는 길가의 집이다. 당시에는 힘멜포르트그룬트(Himmelpfortgrund)에 속하는 곳이었다. 현재는 9구 알저그룬트에 속한 곳이다. 슈베르튼 이 집 2층에 있는 작은 부엌에서 1797년 한 겨울인 1월 31일에 태어났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전체 14남매 중에서 12번째였다.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형제자매들 중에서 5명만이 생존하였다. 당시에 이 집은 '붉은 가재 집'(Zum roten Krebs)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오래전부터 슈베르트 기념관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슈베르트의 안경등 일상용품들과 그가 애용하던 피아노, 악보 등을 볼수 있다. 이 집의 안뜰에서는 한여름 밤이나 늦은 가을 저녁에 음악회도 열린다. 지나다니는 전차와 자동차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녹음이 우거진 그럴듯한 야외연주회장이다. 집은 상당히 크지만 슈베르트의 가족이 지낸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 집에서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교구교회의 협조를 받아서 조그마한 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모라비아(현재의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뜻한바 있어서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와서 집을 사고 힘멜포르트그룬트 교구가 지원하는 학교를 운영하였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비에츠)는 실레지아에서 자물쇠공을 하던 사람의 딸로서 역시 비엔나에 와서 살고 있었다. 실레지아는 현재의 폴란드에 속하여 있는 지역이다.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만나 리히텐탈(Liechtental)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체코 출신이며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이므로 슈베르트도 동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슈베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슈베르트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렸고 슈베르트가 세례를 받았으며 청년시절에 10여년간 오르간 연주자고 봉사했던 리히텐탈교회의 회랑과 중당제단. 아름다운 교회이다.

                 

리히텐탈교회는 슈베르트가 태어났던 집과 그 후에 살았던 '슈베르트 가라게'(Schubert Garage)에서 겨우 한두 블럭만 걸어가면 나오는 교회이다. 슈베르트는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청년시절에 이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로서 10여년을 봉사했다. 슈베르트의 미사곡 중에서 두 편이 이 교회에서 초연되었던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슈베르트 가라게는 현재 자동차 정비공장이 있는 집으로서 슈베르트의 식구들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7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현재의 주소는 조일렌가쎄(Säulengasse) 3번지이다. 조일렌가쎄는 배링거 슈트라쎄와 누쓰도르퍼슈트라쎄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개인학교를 좀 더 확장하고자 이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당시에는 개인이 교구교회의 협조를 얻어서 학교를 운영할수 있었다. 어린 슈베르트는 4살 때에 이 집으로 이사왔지만 얼마후 궁정교회합창단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나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라는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몇 년 후에 돌아왔다. 궁정교회합창단은 현재의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이다. 슈타트콘빅트는 현재 1구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Dr-Ignaz-Seipel-Platz)의 프란치스카너키르헤 옆에 있다. 조일렌가쎄의 집으로 돌아온 슈베르트는 아버지를 도와 보조교사로서 일했다. 슈베르트는 이 집에서 여러 가곡들을 작곡했으며 특히 '마왕'(Erlkonig)를 완성하였다. 이 집은 슈베르트가 그렇게 오래 산 집이지만 기념관은 아니다. 다만, 슈베르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지 않을수 없어서 현관 상단에 슈베르트와 식구들이 이 집에서 살았다는 내용의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조일렌가쎄 3번지의 슈베르트 가라게. 현관 위에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슈베르트는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아카데미 김나지움에 다녔다. 아카데미 김나지움(Akademisches Gymnasium)은 1구 베토벤플라츠(Beethovenplatz)에 있다. 이 학교는 슈베르트 이외에도 유명인사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풍자시인인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1859-1919), 극작가이며 시인인 리하르트 베르 호프만(Richard Beer-Hofmann: 1866-1945), '장미의 기사' 대본으로 유명한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 소설가인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기업가이며 디자이너인 아르투르 크루프(Arthur Krupp: 1856-1938), 그리고 위대한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슈베르트가 이 학교를 다녔다는 기념명판이 학교 건물 외부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슈베르트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5년 동안 다녔던 아카데미 김나지움 

아카데미 김나지움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슈베르트 기념명판


슈베르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친들은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슈베르트에게는 세명의 여친들이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한 집에 살았다고 한다. 현재 1구 슈라이포겔가쎄(Schreyvogelgasse)에 있는 '세 아가씨의 집'(Das Dreimäderlhaus)에서 살았다고 한다. 슈베르트와 세 아가씨의 집에 얽힌 스토리를 징슈필로 만든 것이 있다. 헝가리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한 하인리히 베르테(Heinrich Berté: 1850-1924)가 1916년에 3막의 징슈필인 '세 아가씨의 집'(Das Dreimäderlhaus)을 만들어 라이문트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그런 저런 유래가 있는 집이므로 한번 시간이 있으면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집안으로는 들어가기 어렵다. 들어가 보았자 별것도 없다. 슈라이포겔가쎄의 '세 아가씨의 집' 옆에는 '슈베르트 레스토랑'이 있어서 슈베르트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슈라이포겔가쎄 4번지이다. 비엔나와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을 서브한다.

 

'세 아가씨의 집'. 그 아래로 내려가면 '슈베르트 레스토랑'이 있다.

 

슈베르트는 20대 말에 건강이 악화되었다. 도심의 공기가 나빠서 건강이 더 나빠졌다는 주장도 있었다. 의사는 슈베르트에게 교외에 나가서 지내며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가 마침 4구 케텐브뤼켄가쎄(Kettenbrückengasse) 6A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슈베르트는 그저 며칠동안 요양이나 하려고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가서 지냈다. 그러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그대로 눌러 있다가 1828년 11월 19일에 숨을 거두었다. 의사는 병명을 장티푸스열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의사는 매독 3기의 증세가 악화되어서였다고 말했다. 슈베르트는 죽음을 인식하고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곡이 있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 14번 C 샤프 단조였다. 친구들이 그 곡을 연주해 주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은 비교적 새로 지은 집이었지만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춥고 곰팡내가 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 슈베르트에게 더 나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집은 슈베르트 기념관이 되어 있다. 슈베르트 생애의 마직막과 관련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슈베르트가 쓴 대단히 감동적인 편지들도 전시되어 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에 부착되어 있는 기념명판. 음악의 시인(톤디히터)인 프란츠 슈베르트가 1828년 11월 19일 이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 나슈마르크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케텐브뤼켄가쎄이다.

 

슈베르트의 시신은 배링공동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묘지 바로 옆에 매장되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지극히 존경했던 슈베르트로서는 죽어서라도 베토벤으로부터 가깝게 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1888년에 비엔나 남쪽에 대규모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가 마련되고 명예구역이 설정되자 당국은 베토벤의 묘지와 함께 슈베르트의 묘지를 그곳으로 이전하고 묘비도 새롭게 만들었다. 오늘날 슈베르트의 묘지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브람스의 묘지 사이에 있으며 베토벤의 묘지를 바라보고 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시신이 처음에 매장되었던 배링공동묘지는 1925년에 '슈베르트 공원'(Schubert Park)가 되었다. 공동묘지를 공원으로 만들었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처음 묘비는 그대로 두어 기념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처음 묘지가 있었던 배링공동묘지(현재의 슈베르트 공원)의 기념비. 이곳에 1828년 이래 프란츠 슈베르트의 묘지가 있었으나 1888년 9월 22일에 꺼내어 다음날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는 내용이다.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음악가 묘역에 있는 슈베르트 묘지. 베토벤의 묘지 옆이다.


슈베르트의 기념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황금상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슈베르트 기념상은 1868-72년에 오스트리아의 조각가인 칼 쿤드만(Karl Kundmann: 1883-1919)이 제작하였다. 칼 쿤드만은 의사당 앞의 팔라스 아테네 분수, 폭스가르텐의 그릴파르처 기념상 등 수많은 기념상을 제작한 사람이다. 하단에 있는 여신들의 부조가 더 아름답다. 자세한 내용은 볼 블로그의 비엔나의 기념상 - 음악가 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슈타트파르크의 슈베르트 기념상. 칼 쿤드만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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