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브루크너

정준극 2013. 5. 24. 21:51

비엔나와 브루크너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브루크너 기념상

 

교향곡으로 유명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오베레 외스터라이히주의 린츠에서 가까운 안스펠덴(Ansfelden)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베레 외스터라히이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Stift Sankt Florian)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하다가 1868년에 비엔나로 이주하였다. 비엔나음악원의 음악이론 교수로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브루크너는 비엔나음악원에서 몇년을 지내다가 1875년부터는 비엔나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가 비엔나대학교에 음악이론과를 설치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항이다. 비엔나에서는 여러 곳에서 살았지만 1868년 처음으로 비엔나에 와서 살았던 집은 1구 투흐라우벤 12번지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지내다가 그후에 잠시동안 슈타츠오퍼 건너편에 있었던 '하인리히스호프'(Heinrichshof)에서 지낸 일도 있다. 하인리히스호프는 맥주장사로 돈을 번 하인리히 드라셰의 엄청난 규모의 개인저택이었다. 하인리히스호프는 1945년 전쟁 때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1955년에 오페른링호프(Operanringhof)라는 이름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그후 1876년까지 9구 배링거 슈트라쎄(Währinger Strasse) 41번지에 살았다.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여동생 안나와 함께 지냈으나 안나가 1870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후에는 가정부를 데리고 혼자 살았다.

 

쇼텐링 5/헤쓰가쎄 7번지에 있는 브루크너 명판. In diesem Haus volllendete Anton Bruckner in der Zeit von 1877 bis 1895 die bedeutendsten seiner Werke. Die Wiener Schubertbund seinem Ehrenmitgliede. 4 IX 1924 라고 적혀 있다. 내용은 브루크너가 이 집에서 1877년부터 1795년까지 살명서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헤쓰가쎄 7번지, 쇼텐링 5번지 모퉁이 집.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브루크너 명판이 있다.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1구 쇼텐링(Schottenring) 5번지이다. 쇼텐링 5번지는 헤쓰가쎄(Hessgasse) 7번지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1877년부터 1895년까지 16년 동안 살았다.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 인근이다. 안톤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 곳은 3구 란트슈트라쎄의 오베레스 벨데데레에 있는 관리인 숙사에서였다. 1895년에 이사를 와서 지내다가 1896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다. 3구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 27번지이다. 비엔나에서 브루크너를 기념하는 명판은 그가 대부분의 작곡활동을 했던 쇼텐링/헤쓰가쎄 7번지, 그가 세상을 떠난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 27번지, 그가 오르간 연주를 했던 4구의 칼스키르헤와 8구의 피아리스텐키르헤, 그리고 비엔나대학교에 있다. 그리고 슈타트파르크에는 기념상이 있다. 8구 요제프스슈타트의 요독 핑크 플라츠(Jodok-Fink Platz)에 있는 피아리스텐키르헤(Piaristenkirche: Maira Treu Kirche)에서는 브루크너가 오르간 연주에 대한 일종의 심사를 받은 일이 있다. 그때 심사위원장으로서 나중에 궁정음악감독이 된 요한 헤르베크(Johann Herbeck)는 '심사를 받을 사람은 그가 아니라 우리다'(Er hätte uns prüfen sollen)이라고 말했다. 그 내용이 피아리스텐키르헤의 벽면에 붙어 있는 명판에 적혀 있다.

 

피아리스텐키르헤의 브루크너 기념 명판

                                                       

브루크너의 시신은 린츠로 옮겨져 그가 오르간 연주를 했던 장크트 플로리안 교회의 그 오르간 아래쪽에 있는 영묘실에 안치되었다. 브루크너는 당시 가장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 1869년에는 프랑스에서 1871년에는 영국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여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영국에서는 새로 설치된 로열 알버트 홀의 헨리 윌리스(Henry Willis) 오르간으로 여섯번이나 리사이틀을 가졌고 크리스탈궁전에서 다섯번이나 더 연주했다. 브루크너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오르간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오르간 즉흥곡은 그의 교향곡에 아이디어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비엔나음악원에 있을 때에 오르간을 가르쳤다. 제자 중에는 한스 로트(Hans Rott)와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 등이 있다. 구스타브 말러는 브루크너에게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브루크너가 음악원의 교수로 있을 때에 음악원을 다녔다. 말러는 브루크너를 그의 '선구자'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비엔나대학교의 브루크너 명판

                                      

브루크너는 1868년부터 1876년까지 거의 8년을 9구 알저그룬트의 배링거 슈트라쎄(Währinger Strasse) 41번지에서 살았다. 브루크너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교향곡 2번, 3번, 4번, 그리고 5번을 작곡했다. 그런 내용의 명판이 배링거 슈트라쎄 41번지 건물에 부착되어 있다. 명판은 1961년 6월 18일에 알저그룬트 고향박물관(구박물관)이 설치했다.


배링거 슈트라쎄 41번지에 붙어 있는 브루크너 기념명판. 바탕이 밝아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이 써 있다. In diesem Hause wohnte 1868-1876 ANTON BRUCKNER Der grosse österreichische Komponist schuf hier siene 2, 3, 4, ind 5. Sinfonie  Errichtet am 18. Juni 1961 von Heimatmuseum Alsergrund 이다.

배링거 슈트라쎄 41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명판이 있다.


브루크너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결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결혼할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상대방들이 받아주지 않아서였다. 문제는 청혼을 한 대상자가 모두 10대의 어린 소녀들이었다는데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브루크너는 소아성애자였다. 그 중의 한사람은 친구의 딸로서 루이제라는 아가씨였다. 브루크너는 루이제가 청혼을 거절하자 절망한 나머지 칸타타 엔트자겐(Entsagen: 거절)을 작곡했다. 그리고도 몇 번에 걸쳐 10대 소녀들에게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성사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사실을 알게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브루크너는 상대방 소녀들과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서 결백을 주장했지만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브루크너의 1874년도 칼렌다에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소녀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상당히 긴 명단이었다. 브루크너는 비난이 일자 어쩔수 없이 여자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고 남자 아이들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브루크너는 소녀들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지 못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1866년에는 어떤 정육점 주인의 딸인 요제피네 랑(Josefine Lang)이라는 소녀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그 소녀가 브루크너의 나이가 많다고 하여 거절한 일이 있다. 1880년에는 17세의 어떤 소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농부의 딸로서 오버라머가우(Oberammergau)의 고난주간의 연극에 출연하는 소녀였다. 물론 그 사랑도 성사되지 않았다. 카롤리네 봐일른뵈크(Caroline Weilnböck)라는 예쁜 소녀도 있었다. 1891년에 브루크너가 써놓은 글을 보면 그는 이 소녀를 지극히 사랑했던 모양이다. 소녀의 사진을 매일 보면서 생각한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녀는 브루크너가 약혼했다가 파혼한 여인의 딸이었다. 당시 브루크너는 67세였다. 또 마리 데마르(Marie Demar)라는 소녀도 있었다. 호프오퍼(궁정오페라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였다.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 집인 오베레스 벨데데레 관리인 숙사의 명판. In diesem Hause starb Anton Bruckner am 11 Oktober 1896이라고 써 있다.

 

이렇듯 브루크너가 소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죄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이 든 여자들은 이미 죄악에 물들어 있으므로 결혼 상대자로서 곤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죄악에 물들지 않은 처녀와 결혼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소녀들에 대한 청혼은 계속 실패로 돌아갔지만 브루크너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10대 소녀에게 결혼하자고 요청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처녀가 브루크너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그 처녀와의 결혼이 거의 다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처녀는 브루크너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지 않으면 결혼할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러면 그만 두자고 했다고 한다. 아마 유태인 처녀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브루크너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참 별난 사람이었다. 1886년 7월에 프란츠 요셉 황제는 브루크너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영광스런 '프란츠 요셉 훈장'을 수여하였다.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 집.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연못 옆에 있는 집으로 관리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브루크너가 세상 떠난 집. 란트슈트라써 귀어텔 1번지이다.


브루크너가 살았던 곳은 아니지만 브루크너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는 곳이 있다. 8구 요도크 핑크 플라츠(Jodok-Fink-Platz)에 있는 피아리스텐키르헤(Piaristenkirche)이다. 명판에 적혀 있는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NTON BRUKNER unterzog sich am 21. November 1861 an der Orgel dieser Kirche der praktiischen Kompositionsprüfung. Johann Herbeck, der spätere Hofkapellmeister, fasste das Ergebnis in die denkwürdigen Worte "Er hatte uns prüfen sollen". 1861 Bezirksvorstehung Josefstadt  Josefstädter Heimatmuseum. 이다.


피아리스텐키르헤의 명판

피아리스텐키르헤와 브루크너 명판. 붉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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