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브람스

정준극 2013. 5. 25. 13:51

비엔나와 브람스

 

브람스 흉상. 하이든가쎄 19번지의 하이든 기념관의 이랫층은 브람스 기념관이다. 브람스는 하이든을 무한 존경했다. 이를 기념하여 1908년에 하이든 기념관의 아랫층에 브람스 기념관을 마련했다. 이곳에 이 흉상이 있다.

                            

요한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가 비엔나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하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브람스는 독일 출신인데 어째서 비엔에 와서 살다가 비엔에서 세상을 떠났고 비엔나에 묘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다. 브람스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독일에서 30대 초반까지 지냈다. 브람스는 30대 중반에 비엔나로 와서 살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64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러므로 비엔나에서 산 기간이 전생애의 절반 이상이 되며 더구나 가장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비엔나에서 브람스가 살았던 곳은 여섯 군데로 기록이 되어있다. 모두 사정상 철거되거나 전쟁 중에 폭격을 맞아 자취가 사라졌고 오로지 한군데만 남아 있다. 1구 포스트가쎄(Postgasse) 6번지의 집이다. 브람스가 1866년부터 약 1년 동안 살았다.

 

칼스가쎄 4번지. 붉은 원이 표시되어 있는 곳에 아래와 같은 명판이 붙어 있다.

브람스가 세상을 떠난 집에 부착되어 있는 기념명판. 지금 그 집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집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건물의 벽에 명판을 설치했다. 칼스키르헤 옆의 칼스가쎄 4번지에 있다. 브람스가 1872년 1월 1일부터 살았으며 1897년 4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브람스는 1862년에 비엔나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바라가쎄(Novaragasse) 39번지에 하숙했다. 지금의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타보르슈트라쎄 전철역 부근이다. 이곳에서 몇달 동안 지내다가 인근의 55번지로 옮겨서 1863년까지 살았다. 1863년부터 1865년까지는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7번지에 살았다. 슈테판성당의 뒷편이다. 1781년에 모차르트가 이 건물의 4층에서 살았었다. 1866년부터 1년간은 포스트가쎄(Postgasse) 6번지에 살았다. 1구 슈투벤토르 전철역 부근이다. 이어 1869년부터 1871년까지는 3구 운가르가쎄(Ungargasse) 2번지에서 살았다. 콘체르트하우스 뒷편이다. 이 집은 당시에 '황금 물레의 집'(Zur Goldenen Spinne)라고 불렸었다. 브람스는 비엔나 악우회의 디렉터로 임명되지 4구 칼스가쎄(Karlsgasse) 4번지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스키르헤 옆으로 3층에 살았었기 때문에 악우회가 바라보이는 방이었다. 브람스는 1866년에 집주인의 마지막 가족이 세상을 떠나자 아예 이 집을 매입하여 지냈다. 브람스는 결국 칼스가쎄 4번지의 집에서 지내다가 18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칼스가쎄 4번지는 비엔나공과대학교를 위한 도시계획으로 1907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모습을 볼수 없다. 브람스를 기리는 명판이 붙어 있는 집이 하나 있다. 3구 란트슈트라세 하우푸트슈트라쎄 96번지이다. 지멘스 회사의 오스트리아 지점장으로 있던 리하르트 펠린저 박사의 저택이다. 브람스와 펠린저 가족은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그같은 우정을 기념하여서 그 집의 외벽에 명판이 붙어 있다.


운가르가쎄 2번지. 1900년대에는 추르 골드슈핀네린이라는 호텔이었다. 오늘날에는 호텔 춤 골데네 슈핀네이다. 운가르가쎄 2번지는 반가쎄(Bahngasse) 1a 번지이기도 하다.


힐튼 호텔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 춤 골데네 슈핀네의 오늘날의 모습.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브람스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이 호텔은 필자가 IAEA 총회 참석차 비엔나에 왔을 때 여러번 묶었던 곳이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 랑군사태가 일어났던 바로 그 날도 이 호텔에 묶었었다. 외출했다고 돌아오니 호텔 리셉션의 양켈이라는 친구가 '너의 나라 큰일 났다.'면서 랑군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주었다.  


오늘날 반가쎄 1a 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브람스 기념명판. An diese Stelle stand das Haus 'Zur Goldspinnerin' 1869-1871 wohnte hier der Komponist Johannes Brahms. Zur 100. Wiederkehr seines Todestages 3 April 1997 Ein Musikfreund라고 되어 있다. 번역하면 '이 곳에는 워래 '황금 물레감는 여인'이라는 집이 있었고 작곡가인 요한네스 브람스가 1869-1871에 살았었다. 그의 서거 100주년에 악우회가 이 명판을 설치한다;이다.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Landstrasse Hauptstrasse) 96번지. 브람스의 친구인 리하르트 펠린저의 저택이 있었다. 당시의 건물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었다. 가운데 하단 붉은 원에 브람스를 기념하는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 96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브람스 명판. 브람스가 1893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펠린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집을 자주 방문하여 여러번에 걸쳐 그의 작품을 처음 연주했다는 내용이다. 내용은 In diesem Hause verbrachte Johannes Brahms vom Jahre 1893 bis zu seinem Tode viele Stunden im Kreise der Familie Fellinger. Viele seiner Werke erklangen hier zum ersten Mal. 이다.



비엔나악우회의 브람스 홀

비엔나악우회의 브람스 흉상

                             

요한네스 브람스라고 하면 스승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와의 정신적인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인지 또는 우정인지, 또는 그저 존경의 표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브람스는 클라라를 위해 무던히도 신경을 써주었다. 말하자면 브람스는 클라라가  '아, 이를 어쩌나!'라고 말하기만 하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당장 달려가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클라라도 클라라이니만치 브람스에게 이것저것 도와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청년 브람스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브람스가 독일을 떠나 비엔나로 온 것은 클라라와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어찌할수 없어서 일종의 도피로서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브람스의 그런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렀다.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 '에메부 브람스'(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실은 플라토닉 러브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비엔나에 온 브람스는 비엔나악우회를 운영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브람스는 악우회 도서실의 책임자로서 상당기간을 봉사했다. 1870년, 악우회 건물이 완성되어 오프닝 축하 공연이 있을 때에 클라라가 와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그런데 실은 그때 클라라가 사용했던 피아노는 오래전에 클라라와 슈만이 브람스에게 준 것으로 브람스가 비엔나까지 가져온 것이다. 브람스는 비엔나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면서 이 피아노를 사용하여 작곡을 했다. 지금 그 피아노는 노이에 부르크의 고대악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하고 있다.

 

노이에 부르크에 있는 고대악기박물관에서 어떤 관람객이 브람스의 피아노를 연주해 보고 있다.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이 브람스에게 선사한 것이다. 원하면 누구나 잠시 연주할수 있다.

 

칼스플라츠(Karlsplatz)의 레셀파르크(Resselpark)에는 한쪽에 브람스 기념상이 있다.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그 기념상이다. 루돌프 폰 바이르(Rudolf von Weyr: 1847-1914)라는 조각가가 만들어서 1908년에 제막되었다. 브람스 기념상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다가 전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아니, 저게 브람스잖아?'라면서 '왜 저걸 보지 못했지?'라고 한탄한다. 아마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브람스 기념상을 찾아온 사람들은 브람스의 모습은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별로 관심이 없고 그 아래 엎드려 있는 여인상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는다. 참으로 리얼한 표정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비애와 후회와 절망이 엇갈려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칼스플라츠 레셀파르크의 브람스 기념상. 칼스가쎄 4번지의 자택과 비엔나 악우회의 중간 지점이다. 루돌프 봐이어의 작품이다.

브람스 기념상 하단에 있는 리라를 잡고 있는 여인 디테일

                                               

브람스는 하이든을 너무나 존경했다. 비엔나 시당국은 그런 사실을 그냥 지나칠수 없다고 생각해서 1980년에 6구 하이든가쎄 19번지에 있는 하이든 기념관의 1층을 할애하여 브람스 기념관으로 만들어 오픈했다. 브람스 기념관에는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하이든 변주곡 Op 65b의 사본이 전시되어 있고 페르디난트 호프만이 1800년대 초반에 제작한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이 피아노는 원래 하이든의 소유였으나 나중에 브람스가 소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브람스가 칼스가쎄 4번지의 1층에 살 때에 사용했던 가구 들 몇 점도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는 피아노 의자도 포함되어 있는데 마리아 펠린저(Maria Fellinger)가 브람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다. 벽에는 칼스가쎄 4번지의 집을 루돌프 슈미트가 그린 수채화가 전시되어 있고 역시 그 집의 실내를 빌헬름 노바크(Wilhelm Nowak)가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프리츠 루카르트(Fritz Luckart)가 1893년에 그린 브람스 초상화와 마리아 펠린저가 찍은 사진들 몇 점도 전시되어 있다.


하이든가쎄 19번지의 하이든 기념관. 하이든이 살았었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층은 브람스 기념관이다.

하이든하우스의 브람스 기념실(Brahms Memorial Room)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에서 자주 친교하며 지냈다. 사진으로나 그림으로 보면 그렇다. 그래서인지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서 바로 이웃하고 있다. 세상을 떠나서도 우정을 다지는 모습이다. 브람스가 수염이 더 많아서 나이가 더 많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브람스보다 여덟살 더 많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는 브람스가 요한 슈트라우스보다 2년 먼저였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브람스와 그 옆의 요한 슈트라우스 묘지. 두 사람은 생전에도 친밀한 사이였다.

 

역사적인 사진

 

위의 사진은 1889년 12월 2일, 브람스의 연주를 처음 녹음하고나서 기념사진이다. 이날 비엔나에 살고 있던 지멘스 오스트리아 지사장인 리하르트 펠린저(Richard Fellinger)박사는 브람스와 첼리스트인 리하르트 하우스만(Richard Hausmann)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이들의 연주를 처음으로 축음기에 녹음토록 하였다. 이를 위해 펠린저는 토마스 알바 에디슨 회사의 유럽 총판책임자인 테오 봔게만을 초청하였다. 이날 브람스는 라프소디 G 단조 Op 79/2를 녹음하려고 준비했으나 녹음을 위한 준비 절차가 너무 복잡하여서 간단한 곡인 헝가리무곡 1번(WoO 1/1)을 연주하였다. 두번째로 연주한 곡은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폴카 마주르인 '잠자리'(Die Libelle: Op 204)였다. 옆에 있는 여인은 마리아 펠린저로서 펠린저 가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비엔나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브람스. 아마 하이든이 살던 집에서 촬영한 것 같다. 하이든가쎄 19번지의 하이든 기념관 1층은 브람스 기념관이기도 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 바드 이슐에서.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가 있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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