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말러

정준극 2013. 5. 25. 15:04

비엔나와 말러

 

비엔나 슈타츠오퍼 회랑에 있는 말러의 두상. 로댕이 제작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위용. 말러는 이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항목에서 비교적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이곳에서는 비엔나에 국한된 말러의 발자취를 다시 정리해 보는 것으로 마감하고자 한다. 말러는 1860년 7월 7일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인 칼리스테(Kalis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독일에서 이주해 온 아슈케나지 유태인이었다. 말러는 소년 시절을 인근 모라비아의 이글라우에서 주로 보내고 15세 때에 비엔나음악원에 들어가기 위해 비엔나에 왔다. 비엔나에 온 말러가 어디어디서 살았는지는 자료가 충분치 않아 잘 파악이 안되고 있다. 다만, 한두 곳은 확실하다. 한군데는 3구 란트슈트라쎄의 아우엔부르거가쎄(Auenburgergasse) 2번지이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서 렌베그(Rennweg)로 올라가다가 금방 나오는 골목길에 있다. 말러가 1898년부터 1909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말러가 알마와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차린 곳도 이 집이었다.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아르 누보 건물이다. 말러는 알마 쉰들러와 1902년 3월 9일 칼스키르회(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구 아우엔버그가쎄 2번지의 기념 명판. 구스타브 말러가 이 집에서 1898년부터 1909년까지 살면서 작곡했다는 내용의 명판.

 

칼스플라츠에 있는 칼스키르헤. 말러와 알마 쉰들러가 1902년 3월 9일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다.

                                           

말러는 1909년부터 1911년까지 19구 되블링에 있는 칼 몰 하우스(Carl-Moll-Haus)를 근거지로 하여 지냈다. 연주여행을 다니지 않을 때는 그 집에서 지냈지만 연주여행을 다닐 때에는 연락처로 삼았다. 호에 봐르테에 있는 볼러가쎄(Wollergasse) 10번지이다. 비엔나 제체시온의 창시자 중의 하나인 화가 칼 몰은 스승인 쉰들러가 세상을 떠나자 스스의 미망인인 안나(Anna: Anna von Bergen)와 결혼하였다. 쉰들러와 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알마가 말러와 결혼하였으므로 칼 몰은 말러에게 두번째 장인이 되는 셈이었다.

 

되블링에 있는 칼 몰 하우스. 말러가 1909-1911년에 비엔나에 있을 때묵었던 집이다. 화가인 칼 몰은 말러와 결혼한 알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재혼한 사람이다.

 

말러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꼭 10년을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말러는 그 기간 동안 슈타츠오퍼의 발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 슈타츠오퍼의 슈빈트 포이어(Schwind Foyer)에는 유명한 로댕이 제작한 말러의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말러가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 어느 집에서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추측컨대 현재의 브리스톨 호텔 뒤편 길인 말러슈트라쎄(Mahlerstrasse)의 어떤 아파트에서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년부터는 말러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말러슈트라쎄라는 명칭을 없애고 대신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명가수’(Meistersinger)라는 단어만을 가져와 마이스터징거슈트라쎄(Meistersingerstrass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에 다시 말러슈트라쎄로 환원되었다. 말러가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에 이곳의 아파트에서 슈타츠오퍼까지 매일 아침 모자를 들고 걸어가는 말러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고 한다.

 

말러슈트라쎄. 나치시대에는 말러가 유태계여서 마이스터징거 슈트라쎄라고 불렀었다.

 

슈타츠오퍼(호프오퍼)에서 나와 링 슈트라쎄를 걷고 있는 말러(오른편 끝쪽). 당시의 슈타츠오퍼 부근 링 슈트라쎄는 이처럼 복잡했다.


1구 자일러슈태테 30번지에 있는 '음악의 집'(Haus der Musik)에는 말러전시실이 있다. '음악의 집'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쇤버그, 베르크, 베베른 전시실도 있다. 말러 전시실은 말러의 손자인 페터 말러(Peter Mahler)가 디자인했다. 3구 란트슈트라쎄의 슈봐르첸버그플라츠 6번지에 있는 '아놀드 쇤버그 센터'(Arnold Schoenberg Center)에는 말러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아 다수 전시되어 있다. 아놀드 쇤버그 센터를 들어가려면 차우너가쎄(Zaunergasse) 1-3번지의 건물을 이용하면 된다.

 

하우스 데어 무직. 별도의 말러전시실이 있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집은 9구 알저그룬트의 마리안넨가쎄(Mariannengasse) 20번지에 있었던 뢰브정신요양소(Lŏw sanatorium)이다. 1911년 5월 18일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오스트리아철도청 청사이다. 말러의 시신은 19구 그린칭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어릴때 세상을 떠난 큰 딸 마리아와 함께 매장되어 있다. 말러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인이었던 알마 말러 베르펠(Alma Mahler-Werfel: 결혼 전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과 알마의 두번째 남편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농 그로피우스(Manon Gropius)의 묘지가 있다. 4구 뷔덴의 뷔드너 귀어텔(Wiedner Gürtel) 6번지에 있는 국제구스타브말러협회(Internationale Gustav Mahler Gesellschaft)에도 말러에 대한 자료가 다수 있으며 각국의 말러협회와 연락을 취할수 있다. 비엔나 중앙역(구남부역: 쥐드반호프) 부근이며 협회건물의 아래층에는 카페 벨베데레가 있다. 또한 콘체르트하우스의 외부 벽면에는 말러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으며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오스트리아갤러리에는 막스 오펜하이머가 그린  말러가 지휘하는 모습의 대형 미술작품이 있다. 자허 호텔에는 말러가 호프오퍼의 상임지휘자(음악감독)으로 있을 때에 자주 들렸던 카페가 있다. 말러를 기념하여서 구스타브 말러 홀이라고 이름 붙였다.

 

막스 오펜하이머가 그린 '지휘하는 말러'. 벨베데리 미술관 소장

 

자허호텔의 구스타브 말러 홀


말러가 세상을 떠난 9구 알저그룬트의 마리안넨가쎄 20번지 건물에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당시에는 뢰브 정신요양소였다.


비엔나의 9구 알저그룬트 마리안넨가쎄 20번지에 있었던 뢰브 정신병원 건물. 빨간 원은 말러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말러의 발자취를 얘기함에 있어서 비엔나는 아니지만  아터제(Attersee)의 오두막집을 거명하지 않을수 없다. 캄머제(Kammersee)라고도 하는 아터제는 잘츠캄머구트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말러는 아터제에 면한 슈타인바흐(Steinbach) 마을의 횔렌게비르게여관(Gasthof zum Höllengebirge)에서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매년 여름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 작곡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아터제 호반에 작은 오두막집을 빌려 지내기도 했다. 말러는 아터제의 호반 오두막집에서 그의 교향곡들과 가곡들의 상당부분을 작곡했다. 이를 기념하여 '작곡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터제에 있는 말러가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지난 오두막집, 콤포니어호이센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지금은 복잡하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한적한 곳이었다. 오두막집은 근자에 보수하여 새집으로 만들었도다.

 

말러의 그린칭공동묘지 묘소. 묘비에는 GUSTAV MAHLER 라는 이름만 적혀 있고 다른 아무것도 없다. 말러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묘비에 이름만 적어 놓아도 충분하다.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설명을 더 적어 놓아야 한단 말인가.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름만 적어 놓으면 충분하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더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구스타브 말러가 살았던 장소는 아니지만 관계가 깊은 곳에 그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는 경우이다. 3구 로트링거슈트라쎄() 20번지에 있는 콘체르트하우스의 외부에 붙어 있는 명판이다. 말러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반유태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1945년 6월 3일 비엔나를 관할하던 군정당국은 위대한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말러를 복권한다고 발표했다. 그 내용이 명판에 적혀 있다. Am 3. Juni 1945 wurde de Kunst des grossen Musikers dem osterreichischen Kulturleben wiedergegeben. 이다.


콘체르트하우스 벽면에 붙어 있는 말러 기념명판

 로트링거슈트라쎄에 있는 콘체르트하우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말러 기념명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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