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안익태

정준극 2014. 3. 20. 15:08

비엔나와 안익태

 

비엔나의 3구 로트링거슈트라쎄 20번지의 콘체르트하우스. 베토벤 기념상 바로 길건너이다. 전에는 비엔나음악원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안익태 선생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부터 작곡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기념명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힌국인이라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자라나는 세대 중에는 안익태 선생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애국가를 누가 작곡했느냐고 물어보면 어물어물하는 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다. 안익태 선생은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하는 분이다. 나라마다 국가가 있다. 고대로부터의 전통 음악을 국가의 곡조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새로 작곡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나라의 국민이라면 가장 많이 부르고 가장 사랑해야 하는 노래의 작곡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로 시작하는 The Star-Spangled Banner 라는 국가는 누가 작곡했는가? 많이들 모른다. 영국인인 존 스태포드 스미스라는 사람이 작곡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미국 사람들은 존 스태포드 스미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프랑스 국가인 La Marseillaise는 루게 드 리슬(Rouget de Lisle)이라는 사람이 작곡했다.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e 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이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 중에 루게 드 리슬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뛰어난 작곡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익태 선생의 경우는 다르다.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작곡했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가 그의 이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한국인으로서 참으로 대단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안익태 선생과 부인 롤리타 여사. 롤리타 여사의 원래 이름은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이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안익태 선생과 비엔나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안익태 선생은 음악활동을 위해 두번이나 비엔나에 머물렀었다. 1936년 후반기에 비엔나에 갔으며 1937년에 다시 갔다. 특히 두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는 유명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 가르침을 받을수 있었다. 안익태 선생은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후 유럽으로 왔다. 안익태 선생이 미국을 떠나 유럽에 도착한 것은 1936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치하였다. 유럽에 도착한 안익태 선생은 우선 베를린으로 향하였다. 나치가 세력을 잡고 있는 베를린이었다. 당시 베를린은 비엔나, 뮌헨, 파리와 함께 유럽에서 음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애국가는 바로 안익태 선생이 베를린에 있을 때에 작곡했다고 한다.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를 작곡하고 나서 악보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조선독립회의에 보내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집회에서 사용토록 했다. 안익태 선생은 베를린에서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Symphonic Fantasy Korea: 한국 환상곡)의 마무리를 위해 노력을 했다.

 

베를린에 머물던 안익태 선생은 그해 후반에 비엔나로 갔다. 베토벤 해석으로 유명한 작곡가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Bernhard Paumgartner: 1887-1971)에게서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일각에서는 선생이 뮌헨에서도 공부를 했다는 주장이 있다. 안익태 선생이 첫번째 비엔나 방문에서 얼마동안 있었으며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모른다. 아마 서너달은 있었을 것이며 시내 중심가의 보통 호텔에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듬해인 1937년에 안익태 선생은 헝가리로 향했다. 헝가리에서 헝가리 민족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 1882-1967)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의 민속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음악학자로 유명했다. 안익태 선생은 졸탄 코다이로부터 민속음악을 교향곡에 이용하는 기법에 대하여 많은 자문을 받았다. 안익태 선생의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에 한국의 전래 민요인 아리랑 등의 선율이 들리는 것은 아마도 졸탄 코다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렇듯 안익태 선생이 나치 독일의 깃발 아래에 있는 지역들을 그나마 어려움이 여행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본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에 일본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였다.

 

안익태 선생이 작곡을 배운 헝가리의 졸탄 코다이. 보글라르렐레 초등학교. 헝가리에서는 이름을 우리 식으로 성 먼저 이름 나중이다. 그래서 코다이 졸탄으로 적어 놓았.

 

안익태 선생은 헝가리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던 그 해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그때쯤해서는 안익태 선생의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가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저 멀리 더블린 교향악단이 연주를 하겠으니 지휘를 맡아 달라고 초빙을 했던 것이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의 압정을 받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정 안익태 선생의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를 듣고 싶어서 초청을 했던 것이다. 더블린에서 성공적을 지휘를 마친 안익태 선생은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이때 저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다. 안익태 선생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고 싶어했던 것은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에 대하여 자문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때에도 얼마 동안 어디서 머물며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현재의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인 비엔나음악원에 다녔으며 이 건물에서 첼로도 연습하고 작곡에 대하여 여러 작곡가들과 협의를 했다고 한다. 

 

부다페스트 시립공원에 있는 안익태 선생 흉상. 2012년 5월 11일 제막되었다.

 

이어 안익태 선생은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부다페스트 소재의 에외트뵈스 로란드 대학교(Eötvös Loránd University 또는 ELTE)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939년에 이 대학교를 졸업했다. 헝가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수준이 높은 대학교였다. 마침 그때 부다페스트에서 어떤 연주회가 계획되어 있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를 맡게 되어 있었다. 안익태 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안익태 선생을 대신 지휘자로 강력 추천하였다. 안익태 선생은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대신해서 지휘를 맡게 되자 많은 준비를 했다. 너무 지나치게 준비를 많이 해서인지 연주회의 마지막 노래를 지휘할 때에 불행하게도 그만 무대 위에서 쓰러졌다. 이렇게 쓰러졌지만 헝가리 신문들은 안익태 선생의 지휘를 높이 평가하여 찬사를 보냈다. 그후 안익태 선생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추천으로 로마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이어 유럽의 다른 교향악단들도 지휘하는 경려을 쌓기 시작했다. 안익태 선생으로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고마운 스승이며 비록 나이는 40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훌륭한 동료 지휘자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안익태 선생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1940년 12월 전쟁이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시기에 안익태 선생은 베를린 교향악단을 지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베를린 교향악단이라고 하면 당시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아마 이 때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를 지휘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당시 베를린의 주요 신문들은 안익태 선생의 지휘에 대하여 상당한 찬사를 보냈다. 안익태 선생은 계속해서 유럽의 주요 교향악단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로마교향악단으로부터는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의 연주를 금지 당했다. 일본 정부가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불편한 작품이라고 이탈리아에 압력을 넣는 바람에 금지되었다. 째째한 일본 놈들! 그후 안익태 선생은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의 지휘를 맡게 되어 파리로 갔다. 그러나 1944년에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아무래도 편하지 않아서 파리를 떠나야 했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파리를 해방시켰다고 선전했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어치우고 내선일체니 뭐니 선전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한 때에 마침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가 안익태 선생을 높이 존경하여 바르셀로나교향악단(Orquestra Simfonica de Barcelona)의 지휘를 주선해 주었다.  

 

여기가 안익태 선생이 잠시 활동했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안익태 선생은 바르셀로나교향악단의 지휘를 마치고 잠시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던 중에 누가 롤리타 팔라베라(Lolita Talavera: 1915-2009)라는 여인을 소개 하였다.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롤리타는 안익태 선생이 지휘하는 모습의 영화를 본 후로 안익태 선생에 대한 열렬한 팬이 된 여인이었다. 롤리타는 일본이 코리아를 점령하여 압정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익태 선생에 대하여 일종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고 드디어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7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후 안익태 선생은 마침 마요르카 섬에서 오케스트라를 설립코자하니 지휘자로 와서 수고해 달라는 초청을 받아 부인 롤리타와 함께 마요르카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안익태 선생은 미국에서도 지휘자로서 활동하고 싶어서 연락을 하였다. 하지만 안익태 선생이 과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관계가 깊었다는 것 때문에 결국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전쟁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명분으로 음악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익태 선생은 나치와 특별한 관계가 없으므로 결국 나중에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자로 초빙하여 2년 정도 활동할수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국가(國歌)의 자격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그러한 뜻깊은 행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익태 선생은 누가 특별히 초청을 하지 않아서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참혹했던 6.25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리승만 대통령이 안익태 선생을 초청하였다. 리승만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축하하는 음악회를 지휘해 달라는 것이 외견상의 요청이었다. 1955년 2월 19일, 안익태 선생은 25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가 드디어 조국의 땅에 발을 디뎠다. 안익태 선생이 여의도 공항에 도착하자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감격스러운 조국방문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리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마요르카 행정당국은 안익태 선생이 그곳에서 활동했던 것을 기념하여 '안익태 거리'를 명명하였다.

 

안익태 선생은 1960년 1월에 일본 동경예술대학(게다이: 藝大)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갔으며 2월 4일에 히비야공회당의 대음악당인 야온(野音)에서 콘서트를 지휘했다. 이어 오사카로 가서 지휘를 했다. 안익태 선생은 오사카에 있는 한인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조국이 어려운 때에 남북으로 갈라지지 말고 한데 힘을 합쳐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익태 선생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저 나라사랑의 마음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1960년에 아르헨티나에서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를 연주한 일도 있다. 이어 1964년도 도쿄 올림픽 때에는 NHK의 초청을 받아 기념 콘서트를 지휘하였다. 그후에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계속 지휘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안익태 선생은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를 준비하였다. 서울국제음악제는 3회까지 계속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속좁은 한국인들 때문에 마음 고생도 많이 했다. 그후 스페인으로 돌아간 안익태 선생은 1965년 9월 16일에 갑자기 병에 걸려 마요르카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익태 선생의 유해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10년도 더 지난 1977년 한국으로 모셔와 7월 8일에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제1이 아니라 제2 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안익태 선생의 부인인 롤리타 안 여사는 2009년 향년 94세로 마요르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롤리타 안 여사는 한국을 사랑하여서 남편 안익태 선생의 사후에도 스페인 국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유지하였다. 안익태 선생과 롤리타 여사는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다. 큰딸 레오노르의 아들인 미구엘 익태 안(Miguel Eaktai Ahn)도 한국을 크게 사랑하여서 한양대에도 다녔고 한국에서 잠시 관광업에서 종사했었다. 그도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여사(우에서 두번째)와 큰 딸 롤리타 안 여사(맨 오른쪽), 그리고 안익태 선생의 외손자인 미구엘(왼쪽). 왼쪽에서 두번째는 안문길 여사. (Credit: )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지휘자로서 선생은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럽의 정상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작곡가로서 안익태 선생은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 이외에도 한국 무곡, 논개 등을 작곡했다. 물론 대한민국의 애국가도 작곡했다. 그런데 어떤 한심한 사람들은 안익태라는 분이 작곡했다는 곡은 '애국가'이며 '국가'가 아니므로 국가를 다시 누구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국가'라는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국가'라고 부르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이미 오랫동안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노래인데 지금와서 다시 국가를 만들어서 보급한다면 그 무슨 웃기는 일이란 말인가? 공연히 열 받아서 한마디 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다시 선생의 작품과 관련해서 설명하면, 최근 발견된 선생의 유작으로 교향시인 '마요르카'(Mallorca), Lo Pi Formentor, 그리고 '고종 황제의 죽음'(The Death of Emperor Gojong)이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안익태 선생은 평양에서 천주교 미션 스쿨에 다녔다. 그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선생은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이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구니다치(국립)음악학교에 다녔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신시나티 대학교와 커티스 음악원에 다녔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 시기로서 모든 것이 어려웠던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비엔나로 갔고 이어 부다페스트에서 공부를 했다. 그 이후의 활동과 생활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다만, 한국에서 서울 필하모닉을 지휘할 당시의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복잡한 일이어서 설명을 피하고자 한다.

 

마요르카 팔마의 안익태 거리. 선생의 손자인 미구엘 익태 안. (Credit:)

 

안익태 선생은 평양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아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은 1910년이었다. 안익태 선생의 가문은 순흥 안씨 가문으로서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이 모두 이 가문의 출신이다. 멀리 고려시대로 올라가면 안향 선생이 순흥 안씨의 선조가 된다. 안익태 선생의 아버지는 안덕훈씨이며 어머니는 김정옥씨이다. 이분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이분들에 의해서 안익태 선생이 태어났으며 우리나라 애국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작곡자로서 길이 추앙되어야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나라 음악가로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안익태 선생은 세째 아들이었다. 선생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커다란 여관을 운영하였다. 안익태 선생은 어릴 때 동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서양음악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생의 큰 형인 안익삼씨는 동생이 음악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일본 유학을 갔다가 오면서 스즈키 바이올린과 유성기와 음반들을 구해서 주었다. 안익태 선생은 그때부터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안익태 선생은 1914년에 평양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1918년에는 평양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며 역시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큰형인 안익삼씨는 안익태 선생이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것을 축하하여서 첼로 하나를 선물하였다. 이 학교의 미국인 교장인 엘리 밀러 모우리 박사는 안익태 선생을 YMCA의 그렉이라는 분에게 소개하여 첼로 레슨을 받을수 있게 주선해 주었다.

 

1919년에 숭실학교의 모우리 목사는 이 학교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삼일 만세운동에 참여토록 했다. 안익태 선생은 이때의 경험으로 그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뜨거운 심정으로 도왔다. 선생은 그때 불과 13세의 소년이었다. 선생은 우선 숭실학교에서 일본인 선생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학우들과 함께 그런 운동을 주동하였다. 학교 당국은 그런 운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서 안익태 선생을 처벌하였다. 그해 9월에 안익태 선생은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삼일 만세운동으로 일경에게 잡혀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감옥소를 습격코자 모의했다. 그때 일경들이 어떻게 알고서 비밀집회 장소를 급습하였고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크게 구타하였다. 안익태 선생은 다행히 그 장소에서 도피하여 모우리 박사의 집으로 가서 숨을수 있었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서 큰 상처를 입었다. 모우리 목사는 안익태 선생을 1주일이 넘게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일경은 안익태 선생이 모우리 박사의 주택에 있는 것을 알고 모우리 박사에게 안익태 선생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모우리 박사는 그럴수가 없다고 하면서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서 담판을 하였다. 경찰서장은 모우리 박사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여 안익태 선생이 토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수 있는 허가증을 가짜로 만들어서 주어 선생을 체포하지 않고 음악공부를 할수 있게 도와주었다.

 

서울에 있는 숭실대학교의 안익태 기념관. 벽면에 애국가의 첫 소절 멜로디와 가사가 적혀 있다. 그런데 얼마후에 학교 당국은 가사를 없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서 였다는 것이다. 한심!

 

1919년 10월 6일, 안익태 선생은 평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으며 이어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선생은 도쿄에서 큰 형인 안익삼 씨와 함께 거주하였다. 그리고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입학할수 있었다. 아직도 13세의 소년시절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26년에 안익태 선생은 국립음악대학(쿠니다치)에 입학할수 있었다. 그해 여름, 선생은 평양으로 돌아와 불타서 잿더미가 된 교회의 재건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여하였다. 이때 안익태 선생은 우연히 이상재 선생을 만날수 있었다. 독립신문의 창립자였다. 또한 독립운동가인 조만식 선생도 만났다. 조만식 선생은 그때 국산품 애용운동을 펼쳐서 조선이 외채를 갚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익태 선생은 조만식 선생의 부탁으로 첼로를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연주를 하여 국산품 애용운동을 널리 홍보하였다. 1928년에 선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 혼자로서는 다섯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힘들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어떤 고급 식당에 첼로 연주자로 고용되었다. 그렇게 알바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등록금을 내기에는 턱도 없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첼로가 부러졌다. 선생은 학교 친구의 첼로를 빌려서 사용했다.

 

그때 어떤 일본인이 선생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스즈키 바이올린을 하나 새로 사주었다. 선생은 그의 스승인 한스포드 선생이 학비를 대신 내 주는 바람에 늦게나마 겨우 졸업을 할수 있었다. 안익태 선생은 한스포드 선생의 권유에 따라 도쿄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졌다. 일본 신문은 안익태 선생을 '장래가 촉망되는 전도 유망한 천재'라고 찬사를 보냈다. 1930년 5월,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평양 숭실학교에 갔더니 모우리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할수 있으니 그렇게 해 보라고 권고했다. 선생은 평양에서 콘서트를 가지려 했으나 일경이 허락을 하지 않는 바람에 열지 못했다. 선생은 결국 모우리 박사의 권고를 받아 들여 미국행을 결심했다. 1930년 여름에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머나먼 항해였다.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입국검사를 받으면서 관리에게 첼로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밤중에 선생은 간수의 허락을 받고 첼로를 연주할수 있었다. 선생의 첼로 연주에 감동한 간수는 범죄자와 첼리스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음날 선생을 석방하는 서류를 마련해 주었다.

 

젊은 시절의 안익태 선생

 

샌프란시스코에서 선생은 마우리 박사가 소개해 준대로 한인교회를 찾아갔다. 황목사라는 분이 인도하는 예배에서 교인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그것은 슬픈 곡조였다. 선생은 조국을 위해서 새로운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선생이 신시나티로 가기 위해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황목사가 급히 달려왔다. 황목사는 선생에게 검은색 서류가방과 만년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으로 새로운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선생은 신시나티 기차역에서 황목사의 연락으로 숭실 선배이며 일본 구니다치 음악학교의 선배이기도 한 박원정이란 사람을 만날수 있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그도 신시나티까지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익태 선생은 박원정 선배의 도움으로 신시나티 대학교 음악대학에 들어갈수 있었다. 선생은 생활비를 벌어 쓰기 위해 식당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대공황 시기여서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하던 때였다.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할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얼마후 선생은 신시나티 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로 입단할수 있었다. 이듬해에 선생은 방학 중에 미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리사이틀을 가질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카네기 홀에서 연주할수 있었다. 뉴욕의 신문들은 선생의 연주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도해 주었다.

 

신시나티교향악단. 안익태 선생은 1930년대에 이 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다.

 

선생은 미국내에서 첼로 순회연주를 마치고 돌아와서 첼리스트보다는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35년에 선생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36년에 커티스를 졸업했다. 그때 쯤해서 선생은 필라델피아의 칸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했다. 어느날 위대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스토코브스키는 안익태 선생의 지휘를 보고 난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그때 선생은 교향적 환상곡 코리어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다. 카네기 홀이 주관하는 작곡경연대회에 기간 내에 제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활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게도 선생은 집세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서 세들어 살고 있는 방에서 나가야 할 입장이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했다. 다행히 선생의 이웃들이 돈을 모아서 집세를 내주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나 앉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후 선생은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를 마무리하고 이를 카네기 홀의 경연대회에 제출했다. 선생의 작품은 카네기 홀에 수락되어 선생이 직접 이 작품의 초연을 위해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공연은 엉망이 되었다. 오케스트라를 콘트롤 할수 없었다. 선생은 몹시 화가나서 연주 도중에 바톤을 내려 놓았다. 청중들은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라고 소리치며 요청했다. 선생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실망을 표시하고 청중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주최측은 선생의 행동을 이해하고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사과를 하고 선생을 유럽에 가서 더 공부를 할수 있도록 경비를 대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36년 4월 8일 뉴욕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였다.

 

안익태 선생이 베를린에 있을 때인 1936년, 저 유명한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영광의 월계관을 받은 그 올림픽이었다. 선생은 일본 선수단에 포함된 한국인 선수들을 올림픽 스타디움 인근에서 만나서 애국가를 작곡한 것을 보여주고 들려 주었다. 애국가였다. 그때 쯤해서 애국가는 삼일운동 이후 국내에서도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 한국 출신의 선수들만이 따로 모여서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를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일각에서는 그건 지어낸 얘기일 뿐이며 베를린 올림픽 기간 중에는 애국가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애국가의 곡조는 안익태 선생이 지었다고 해도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확실치 않다. 윤치호 선생의 이름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나서 기념촬영

 

친북좌파 정권일 때에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라고 매도한 일이 있었다. 안익태 선생께서 일본이 괴뢰국가로 설립한 만주국의 창건 1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지휘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리고 선생이 유럽에 있을 때에 일본 외교관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도 트집이 되었다. 안익태 선생과 같은 위대한 지휘자가 지휘할수 있는 무대는 조선에 없었다. 그러므로 만주국의 창건 기념 콘서트에서 지휘를 하는 것은 정치를 떠나서 음악가로서 할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문제 삼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어떠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할것이다. 유럽에서 일본 외교관들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여행을 순조롭게 할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한군데에만 있는다면 무슨 수로 음악활동을 할수 있으며 자기의 재능을 표현할수 있다는 말인가? 1940년대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 상당수는 일본에 미상불 협조하며 지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협조는 예술을 위한 것이지 정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무용가인 최승희는 일본에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심지어 일본군을 위해 헌금도 했고 일선 위문도 다녔다. 그에 비하여 안익태 선생의 일본 관계 행동은 그저 사소한 것일 뿐이었다. 그걸 가지고 왈가 왈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부터 과연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사람들인지(impeccable)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안익태 선생이 수원의 서울농대에서 강연을 마치시고 수원여고를 방문하여 학생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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