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집중탐구

정준극 2013. 6. 15. 09:4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집중탐구....그의 생애와 작품세계

바그너 이후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완성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즐겨 듣던 사람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들으면 처음에는 '무슨 음악이 이래?'라며 돌리려고 하지만 좀 더 듣다보면 '야, 거참 이상한 매력이 있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요한 슈트라우스는 알겠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또 누구란 말인가?'라며 초보적인 궁금증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두 사람은 사촌간도 아니고 서로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다. 아마 잘 따져보면 아주 먼 친척 쯤은 될수 있을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람 나치에 협조했다고 해서 곤혹 좀 겪은 사람 아냐?'라며 아는체를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야, 거저 살로메하구 엘렉트라하구, 대단하단 말이야!'라며 특별한 감탄을 발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그의 음악에 대하여는 굳이 코멘트할 입장이 아닌,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그저 '그 노인네, 오래두 살았지!'라고 말한다. R. 슈트라우스를 무시하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 1830-1894)에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한스 폰 뷜로브는 '리하르트라면 바그너가 더 좋고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요한을 더 좋아 합니다'라고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한스 폰 뷜로브는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의 첫번째 남편이었다. 코지마는 한스 폰 뷜로브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그너와 동거했다가 나중에 이혼이 성립되자 결혼신고를 했다. 아무튼 이런 모든 코멘트와 궁금증들을 다시 정리하는 의미에서 리하르트 게오르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가 어떻게 살아 왔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실상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들>의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소개하였고 또한 <오페라 잡기장>의 <오페라 작곡가 일화>에서 "나치 독일과 R. 슈트라우스"편에 소상히 소개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습하는 의미에서 기술하는 바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을 장식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현대 음악을 선구적으로 이끈 사람이다. 이런 설명을 하면 '이건 또 무슨 어려운 소리인가?'라며 관심을 접으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으므로 더 이상의 추가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리하르트가 어떻게 살아왔고 대표적인 작품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만 설명코자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우선 생각나는 작품으로 오페라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 등이 있다. 하지만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네 개의 노래'(Vier letzte Lieder)는 기본 레퍼토리이다. 한편, 일반적인 음악애호가들은 그의 교향시(또는 음조시)들을 머리에 떠 올린다. '죽음과 환생'(Tod und Verklärung: Death and Transfiguration),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알프스 교향곡'(Eine Alpensinfonie) 등이다. 실로 그는 평생을 통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렇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작곡가로만 기억하면 곤란하다. 그는 지휘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보다도 그는 구스타브 말러와 함께 바그너 이후 독일 낭만주의를 꽃피게 만든 인물로 기억되야 할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섬세하고 미묘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진보적인 하모니 스타일의 선구자였다.

 

[프란츠 슈트라우스] Franz Strauss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지금부터 약 150년 전인 1864년 6월 11일 독일의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궁정오페라의 혼(Horn) 주자였다. 아버지 프란스 슈트라우스는 바바리아의 파르켄슈타인(Parkenstein)에서 태어났다.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첫 부인은 콜레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한참 후에 양조장집 딸인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와 재혼하여 뮌헨에 가서 살게되었고 그로부터 우리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태어났다. 슈트라우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집중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슈트라우스는 불과 6세 때에 첫 작품을 작곡했다.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까지도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거의 80년을 작곡으로 보낸 셈이다. 슈트라우스는 노년에 더욱 열심으로 작곡활동을 했다. 그런 그를 보고 훗날 사람들은 '인디안 섬머'와 같다고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어린 슈트라우스는 아버지가 오케스트라의 멤버로 있는 뮌헨 궁정오페라에서 리허설이 있으면 다른 일은 제치고라도 가서 한쪽에 앉아 구경했다. 어릴 때부터 극장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 그를 부지휘자가 기특하게 여겨 '야, 너 음악가가 될래?'라고 물어보았더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기에 부지휘자는 얼마후부터 개인적으로 그에게 음악이론과 오케스트레이션을 가르쳐 주었다. 어린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마는 그래도 슈트라우스로서는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슈트라우스는 8세 때에 왕립음악학교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선생인 베노 발터(Benno Walter)는 아버지의 사촌이었다. 그러니까 슈트라우스로 보면 우리식으로 당숙이었다. 슈트라우스는 불과 10살 때에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았다. '로엔그린'과 '탄호이저'였다. 슈트라우스는 감격했다. 독일 음악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과연! 바그너가 슈트라우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 보수적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소년 슈트라우스에게 바그너의 음악은 지나치게 혁신적이니 본받지 말라고 지시했다.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음악과 그의 사상과 그의 행동이 싫어서 심지어는 궁정오페라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 같으면 일부러 빠지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슈트라우스의 집안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일종의 금기이기까지 했다. 그러한 처지에서 슈트라우스가 바그너의 음악에 감동하였지만 집안 분위기를 고려하여 관심이 없는 척했다. 슈트라우스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스코어를 처음으로 손에 쥔 것은 그가 16세 때였다. 훗날 슈트라우스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바그너의 진보적인, 또는 혁신적인 작품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으로 적대시하였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슈트라우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음악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무어라해도 그의 아버지였다. 간단한 예를 들면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악기인 혼을 평생을 통해서 사랑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서 되도록이면 혼의 역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 나중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를 기념하여 프란츠 슈트라우스라고 지었다.

 

1882년 초, 슈트라우스가 18세 때에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이 비엔나에서 연주되는 기회가 있었다. 협주곡이지만 오케스트라 파트를 슈트라우스가 피아노로 연주하였고 바이올린은 그의 선생이며 아버지의 사촌인 베노 발터가 연주했다. 슈트라우스는 바로 그 해에 뮌헨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음악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예술사를 공부했다. 슈트라우스는 뮌헨대학교에서 1년을 보낸 후에 베를린으로 갔다. 슈트라우스는 잠시 음악을 공부하다가 지휘자로 유명한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를 보조하는 지휘자로서의 직분을 갖게 되었다. 한스 폰 뷜로브는 슈트라우스가 16세 때에 작곡한 '목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를 보고 매우 감동하였다. 슈트라우스는 폰 뷜로브가 지휘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스스로 지휘공부를 하였다. 얼마후 폰 뷜로브는 마이닝겐의 지휘자가 되었다. 폰 뷜로브는 1885년 마이닝겐의 지휘자 자리를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슈트라우스를 강력히 천거하였다. 그 즈음해서 슈트라우스의 작곡 스타일은 로베르트 슈만이나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타일을 많이 따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혼 협주곡 제1번, 작품번호 11'은 당시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혼 레퍼토리로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폴랭 슈트라우스 드 아나] - Pauline Strauss de Ahna

슈트라우스는 1894년에 소프라노 폴랭 드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와 결혼하였다. 슈트라우스보다 한 살 위였으며 결혼생활 56년을 기록하였다. 폴랭 드 아나는 독일의 잉골슈타트 출신으로 여러 편의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예를 들면 '군트람'의 프라이힐트 역이었다. 폴랭 드 아나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성미가 급한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거만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남편 슈트라우스를 쥐고 흔든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수다스럽기가 이를데 없었으며 말을 앞 뒤 생각 없이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와의 결혼생활을 행복한 것이었다. 그리고 폴랭 드 아나는 슈트라우스의 작품활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1948)는 폴랭 드 아나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폴랭 드 아나는 여성 1인의 오페라인 '그림자 부인'(Die Frau im Schatten)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원래 이 곡은 소프라노 데임 귀네스 존스(Dame Gwyneth Jones)를 위해 작곡한 것이었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의 부인의 영향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1897-1980)이었다. 슈트라우스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아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유태인인 알리스 폰 그라브(Alice von Grab)와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가톨릭 의식으로 치루어졌다. 아무튼 슈트라우스는 유태인 며느리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 수많은 곤경을 겪어야 했다. 그 얘기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오페라 작곡가 일화>에서 "나치 독일과 R. 슈트라우스"편에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슈트라우스의 단막 오페라인 '자유의 날'(Friedenstag)와 관련하여 대강 이야기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인 소프라노 폴랭 슈트라우스 드 아나

 

[자유의 날] - Friedenstag

슈트라우스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것과 때를 같이하여 제국음악협회장에 임명된 사실은 다 아는 내용이다. 나치 선정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슈트라우스를 이용할 생각으로 제국음악협회장에 임명했다. 슈트라우스는 평생 동안 나치당에 입당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음악협회장 자리를 받아 들인 것은 두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나치로 인하여 쇠퇴해질수 있는 독일의 음악을 최대한으로 보존하며 나아가 조금이라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에서 그 직분을 맡았다. 또 하나는 그 직분을 이용하여 사랑하는 며느리인 알리스와 손자들을 나치의 유태인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서였다. 슈트라우스에게는 손자가 둘이 있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티안이었다. 손자들은 어머니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유태인의 모계전통에 따라 유태인으로 분류될수가 있다. 슈트라우스는 유태인과 결혼한 아들, 유태인인 며느리, 그리고 유태인으로 간주될수 있는 손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알리스 슈트라우스 폰 그랍] Alice Strauss von Grab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자유의 날'을 완성한 것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합병하고 폴란드를 침략하기 위해 작전을 꾸미던 1938년이었다. '자유의 날'은 30년 전쟁 당시 어떤 포위 당한 요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찬가이다. 그러면서 제3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가 희미하게나마 깔려 있다. '자유의 날'은 자유와 속박, 전쟁과 평화, 광명과 암흑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코자 하는 내용이며 일견 베토벤의 '휘델리오'와 흡사한 작품이다. '자유의 날'은 1938년 7월에 뮌헨에서 공연되었다. 나치가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했다. '자유의 날'은 1939년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공연금지되었다. 이와 함께 나치의 유태인 사냥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슈트라우스의 며느리인 알리스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의 슈트라우스의 저택에 1938년부터 연금상태로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베를린의 영향력있는 사람들과 연락하여 알리스의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나마 가택연금으로 지낼수가 있었다. 그런데 알리스의 친정 어머니인 마리 폰 그랍 여사가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이 일어났다. 슈트라우스는 테레지엔슈타트까지 찾아가서 담당자들에게 사정을 하고 석방시켜 줄것을 간청했지만 나치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며느리 알리스의 형제자매들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슈트라우스는 이들만이라도 구하려고 SS 당국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등 힘든 노력을 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며느리인 알리스 슈트라우스 폰 그랍(1901-1991). 체코의 프라하 부근 흘라브니에서 태어났으며 요행히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지내다가 바이에른의 가르미슈 파르텐티르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1942년에 식구들을 데리고 독일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을 떠나 비엔나로 왔다. 천만다행으로 비엔나 총독(Gauleiter)인 발두르 폰 쉬라흐의 배려로 알리스와 두 손자들은 비엔나에서 무사히 지낼수가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음악회 때문에 잠시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나치는 슈트라우스가 집에 없는 것을 알고 집에 있던 슈트라우스의 아들 프란츠와 며느리 알리스를 강제로 연행해 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슈트라우스는 급히 비엔나로 돌아와서 요로요로에 청탁하여 다행히 두 사람을 빼내 올수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비엔나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식구들을 데리고 가르미슈-파르켄키르헤로 돌아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난 바바리아 지방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마을

 

[변형] - Metamorphosen

슈트라우스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에 '23개 솔로 스트링을 위한 메타모르포젠(변형)'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괴테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원래 슈트라우스는 합창곡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현악기를 위한 곡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23개 현악기를 위한 곡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현악기 앙상블의 걸작 레퍼토리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비극적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을 2차 대전 종전 직전의 암흑시기에 완성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독일 문화의 파괴에 대한 탄식과 비통함을 표현하였다. 슈트라우스는 물리적으로는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독일의 전통있는 유명 오페라극장들이 파괴되는 것을 탄식하고 슬퍼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독일의 전통있는 음악이 더 이상 갈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을 탄식하고 슬퍼하였다. 슈트라우스는 그 즈음에 개인일기에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험악한 시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무지와 반문화 그리고 금수와 같은 잔혹한 통치가 1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시기였다. 그것은 가장 심각한 범죄행위였다. 이로써 독일의 2천년 문화발전은 파멸을 맞이하였다."라고 썼다.

 

슈트라우스는 2차 대전의 마지막을 바바리아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서 맞이하였다. 1945년 4월이었다. 미군이 진주하여 슈트라우스의 가르미슈 저택을 접수코자 하였다. 이때 슈트라우스는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미국의 밀튼 웨이스 중위에게 '나는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요'라고 말했다. 웨이스 중위는 입대하기 전에 음악가였다. 웨이스 중위는 슈트라우스를 알아보고 당장 집 앞에 출입금지 팻말을 붙이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하여 슈트라우스와 식구들은 미군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 진주한 미군부대에는 존 드 랑시(John de Lancie)라는 사람이 있었다. 입대하기 전에 오보이스트였다. 존 드 랑시는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보에 작품을 어느 작품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존 드 랑시는 슈트라우스를 만나게 되자 놀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존 드 랑시는 슈트라우스에게 오보에 협주곡을 하나 작곡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처음에 건방지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으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여 몇 달 후에 오보에 협주곡을 완성하였다. 존 드 랑시가 그 곡을 받아 나중에 연주를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슈트라우스의 오보에 협주곡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다.

 

[마지막 작품들]

영어 표현에 '인디언 섬머'(Indian Summer)라는 것이 있다. 늦가을인데 초여름처럼 화창하고 더운 날씨를 말한다. 저널리스트, 전기작가, 음악평론가들은 슈트라우스의 1942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작품활동을 '인디언 섬머'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작곡활동을 접고 노년의 생활을 할 때에 그는 청년시절과 다름 없이 작곡활동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가 70대와 80대를 거치면서 작곡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생각하여 작곡한 '혼 협주곡 제2번', 그리고 독일의 파괴된 문화를 비통하게 생각하며 작곡한 '메타모르포젠', 그가 살고 있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 진주한 미군 장병의 요청으로 작곡한 '오보에 협주곡', 그리고 부인 폴랭 슈트라우스 드 아나를 생각하여 작곡한 '네개의 마지막 노래'라고 할수 있다. '네개의 마지막 노래'는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작곡한 것으로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마지막 노래인 '황혼에서'(Im Abendrot)는 '이것이 죽음이란 말인가?'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말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음조시 '죽음과 변형'(Tod und Verklärung: Death and Transfiguration)에 나오는 변형의 주제를 노래에 인용하였다. 육체가 죽은 후에 환생(변용)과 영혼의 완성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죽음과 유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향년 85세로 1949년 9월 8일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게오르그 솔티는 6월에 슈트라우스의 85회 생일을 축하하는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게오르그 솔티는 슈트라우스의 장례식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했다. 장례식에서는 '장미의 기사'에 나오는 유명한 트리오가 연주되었다. 세명의 성악가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렸고 그중 한 사람은 도저히 계속 노래를 부르기가 어려워서 밖으로 나가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나와서 노래를 마무리했다.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폴랭 드 아나는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난지 8개월 후인 1950년 5월 13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20세기 초반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20세기 음악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의 작곡가 중에서 오케스트라의 표현에 있어서 슈트라우스에 필적할만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바그너 이후 슈트라우스만큼 오페라의 역사에 기여한 사람은 없다. 세계의 작곡가 중에서 80대의 연로한 나이에 슈트라우스만큼 활발한 작곡 활동을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노년의 슈트라우스는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감사함으로 활용하였다. 사람들은 슈트라우스를 20세기 초반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추앙하지만 슈트라우스 자신은 그런 견해에 대하여 1947년에 '나는 1급 작곡가가 아니올시다. 하지만 나는 1급의 2류 작곡가올시다'라고 말하여 겸손을 표시했다. 캐나다의 피아니스트인 글렌 굴드(Glenn Gould)는 1962년에 슈트라우스를 거론하면서 '그 양반은 금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사람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의 음악발전을 주도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데 다른 의견들도 있다. 예를 들면 구스타브 말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하여 '저런 별로 호감을 주지 않으며 까다롭고 상대하기 힘든 성격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썼는지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영국의 작곡가인 프레데릭 들리우스(Frederick Delius: 1862-1934)도 비슷한 발언을 했고 역시 영국의 작곡가인 에릭 펜비(Eric Fency: 1906-1997)도 그런 내용의 얘기를 한바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싫어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리하르트라고 하면 바그너만 생각나며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요한을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냐?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한 슈트라우스에도 못미친다'는 말이었다.

 

[명지휘자 슈트라우스]

지휘자로서 슈트라우스는 많은 지휘를 했고 여러 음반들을 취입했다. 자기 자신의 작품도 지휘했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도 지휘했다. 하지만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의 작품을 지휘했다. 슈트라우스가 1929년에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취입한 '돈 후안'과 '틸 오일렌슈피겔'은 음반계에서 오랫동안 가장 뛰어난 레코딩으로 간주된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은 1941년에 '알프스 교향곡'을 처음으로 레코딩한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이 연주에서 '알프스 교향곡'의 오리지널 스코어에 표시된 전통적인 타악기들을 모두 동원했다. '알프스 교향곡'은 그 이후에도 여러 지휘자들의 지휘로 레코딩되었지만 타악기의 사용에 있어서는 완벽하지 못했다.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Poerre Boulez)는 슈트라우스에 대하여 '자기 특유의 지휘기법을 마스터한 뛰어난 지휘자이다'라고 말했다. 슈트라우스의 지휘기법이 어떠하냐에 대하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기가 어려우므로 생략한다. 다만, 아놀드 쇤버그는 슈트라우스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더 할수 뛰어난 연주였다고 찬사를 보냈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에 대하여는 '리타르단도라는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이나 뉘앙스의 변함이 결코 없었다'라고 말했다. 쇤버그는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서 천천히 연주되어야 하는데 이를 마치 비바체처럼 지휘하여 보통은 7분이나 8분이 걸리는 파트를 슈트라우스의 지휘 아래에서는 4분 25초가 걸렸다'면서 슈트라우스의 특별한(?) 지휘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쇤버그는 슈트라우스의 모차르트 교향곡에 대하여 '힘도 없고 매력도 없다. 그저 메트로놈처럼 정확할 뿐이다'면서 못마땅해 한 일도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그림자 없는 여인'을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44년에 슈트라우스는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의 연주회를 지휘했다. 그가 작곡한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그 중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는 발레음악인 '휘핑 크림'(Schlagobers)이 들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을 지휘하면서 종전에는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감정을 쏟아 부었다. 아마 80회 생일에 대한 감동 때문일 것이다. 도이치 그라마폰이 처음으로 CD를 발매했을 때 그 첫 CD에 수록된 곡은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었다. 1980년에 허버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자기의 피아노 작품을 직접 연주하여 레코딩한 첫번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