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

정준극 2013. 6. 17. 20:1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

뛰어난 혼 주자이며 보수적인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 42년동안 바바리아궁정오케스트라의 혼연주자였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기 마련이지만 20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뒤에는 위대한 아버지도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위대한 아버지의 열전에 포함하는데 대히여 이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위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키운 사람이므로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22-1905)는 독일 바바리아의 파르켄슈타인(Parkenstein)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바바리아 토박이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바바리아 지방의 민속의상을 입기를 즐겨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바이올린을 배워서 겨우 일곱살 때에 마을의 결혼식 파티에서 바이올린으로 춤곡을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외삼촌들인 요한 게오르그 발터와 프란츠 미하엘 발터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어린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외삼촌들에게서 클라리넷과 기타를 배웠고 그리고 혼을 비롯하여 금관악기들을 배웠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특히 기타에서 재능이 뛰어나서 불과 15세 때에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작궁에 영입되어 기타리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소년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기타를 연주하면서도 혼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이 있어서 틈틈이 혼을 배웠다. 그리하여 혼은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평생을 책임지는 악기가 되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1847년, 25세 때에 바바리아 궁정오케스트라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그는 이 직업이 평생직업이 되어 1889년 궁정오케스트라에서 은퇴할 때까지 무려 40년 이상을 단원으로 활동했다. 40년 이상을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면 그건 그가 대단히 착실하고 성실하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주변머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읽을수 있는 일이다. 그는 또한 1871년부터 1896년까지 뮌헨음악아카데미의 교수로서 봉직했으며 1875년부터 1896년까지는 비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이지만 프로 못지 않은 '빌데 궁글'(Wilde Gung'l)이라는 악단의 지휘자로 활약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1851년, 29세 때에 연대군악대장의 딸인 엘리제 자이프(Elise Seiff)와 결혼하였다. 그 시기는 프란츠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작곡가로서 또한 연주자로서 대단히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불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태어난지 10개월이 된 아들이 폐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어 콜레라가 그의 젊은 아내와 어린 딸의 목숨도 앗아갔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32세로서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몸이 되었다. 그는 그후 10여년간을 하늘나라로 떠난 가족들을 추모하며 홀로 지내다가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41세 때에 부유한 양조장집 딸인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와 재혼하였다.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요제피네 프쇼르는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훗날 세계적인 작곡가가 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시대에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연주자로서 그의 재능을 입을 모아 찬양했다. 하지만 한 성깔 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깔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굽힘없이 그대로 주장을 이끌고 나갔다는 말이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음악적으로 볼때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같은 성향이 청소년 시절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바그너의 작품을 열성을 다하여 연주하였다. 바그너의 오페라들이 뮌헨에서 주로 공연되었기 때문에 궁정오케스트라의 멤버로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 '뉘른베르크의 명가수'(1868), '라인의 황금'(1869), '발퀴레'(1870)의 뮌헨 공연에서 혼주자로서 참여하였다. '트리스탄' 그리고 '명가수'의 초연을 지휘했던 한스 폰 뷜로브(1830-1894)는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혼의 요아힘'(Joachim of the horn)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 친구말이야. 성깔 깨나 있고 고집이 세어서 가끔은 화가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친구가 일단 혼을 연주하면 누구도 화를 낼수 없단 말이야'고 말했다. 바그너도 폰 뷜로브의 말을 이어 받았다. 바그너는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다. 성질이 아주 까다롭다. 하지만 그가 혼을 연주할 때에 어느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할수 없다. 너무나 아름다운 연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이상의 두 사람, 즉 한스 폰 뷜로브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관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폰 뷜로브와 바그너가 그에 대하여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훗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런 얘기를 했다. '어느날 바그너 선생이 혼 주자의 옆을 지나치게 되었지요. 혼 주자는 바로 저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케스트라의 자리에 남들이 보기에 기분이 시무룩해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계셨답니다. 그러자 바그너 선생께서는 '혼 연주자들은 우울해. 항상 우울하단 말이야'라고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어떤 이유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바그너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고 합니다. 또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드레스 리허설(최종 무대 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드레스 리허설은 오후 4시에 시작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리허설은 밤 9시에 가서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을 거듭하였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보조 혼 주자도 없이 혼자서 그 리허설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마침내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더 이상 참을수 없다고 생각하여서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에게 '이제 더 이상 혼을 불지 않겠다'고 말했다. 폰 뷜로브도 한 성질하는 사람이었다. 당장에 '그러면 퇴직금을 챙겨서 나가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기를 챙겨서 나갔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의 단장에게 가서 한스 폰 뷜로브의 지시에 의해서 퇴직금을 받으러 왔으니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단장은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달래느라고 밤새 고생을 했다고 한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뛰어난 교육가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훌륭한 레슨 선생님이었다. 프란스 슈트라우스의 레슨 방법은 무엇보다 음질(tone quality)을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항상 '아름다운 음색을 유지하고 정확한 음정을 공부할 때에 고귀한 톤을 이룰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레슨은 음색의 표현으로부터 시작하고 음질의 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작곡가로서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주로 혼을 중심으로 삼은 작품들이다. ○ Fantasie Op 2 ○ Les Adieux ○ Nocturno Op 7 ○ Concerto Op 8 ○ Empfingdungen am Meere ○ Thema und Variations Op 13

 

프란츠 슈트라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