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

부인 파울리네 드 아나(Pauline de Ahna)

정준극 2013. 6. 18. 06:57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인 파울리네 드 아나(Pauline de Ahna)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를 맡은 파울리네 드 아나

 

파울리네 마리아 드 아나(Pauline Maria de Ahna: 1863-1950)는 독일의 유명한 오페라 소프라노였다. 그러나 그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파울리네 드 아나를 위해 몇 편의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다. 파울리네 드 아나는 독일 바바리아의 잉골슈타트(Ingolstadt)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잉골슈타트는 아우디 자동차의 생산지로서 유명하다. 파울리네(폴랭) 드 아나의 아버지는 바바리아 육군대장인 아돌프 드 아나였다. 파울리네 드 아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1894년 9월 10일 결혼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29세였고 파울리네 드 아나가 30세 때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파울리네 드 아나를 깊이 사랑하여서(푹 빠져서) 파울리네 드 아나를 위해 여러 오페라의 역할을 작곡했다. 예를 들면 오페라 '군트람'의 프라이힐트(Freihild)이다. 파울리네 드 아나가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890년 '파미나'(마술피리)로였다. 그후 바이로이트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894년에는 봐이마르에서 초연된 '군트람'의 프라이힐트를 맡아 그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인터메쪼'에서 크리스티네는 파울리네를 표현한 것이다.

 

파울리네 드 아나가 태어난 뮌헨 인근의 잉골슈타트. 사진은 잉골슈타트 시청

                                                     

드 아나는 좋게 말해서 남의 위에 있어야 하는 보스 기질이 있고 나쁘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성격이었다. 드 아나는 오만하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리고 성미가 급하고(성깔이 있고) 괴팍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말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슈트라우스마저 드 아나를 '대단히 복잡하고 어쩔수 없이 여자다우며 고집이 세고 심술이 있기까지하다. 그래도 매력이 있고 애교도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금 전의 파울리네와 지금 이 순간의 파울리네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하는 것은 좋을수도 있고 나쁠수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941년에 슈트라우스 식구들은 바바리아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의 집을 떠나 비엔나로 와서 살게 되었다. 며느리인 알리스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독일보다는 비엔나로 와서 살면 위험이 덜 할줄로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총독인 발두르 폰 쉬라흐와 친분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비엔나로 이사 오면서 부인 드 아나에게 비엔나에는 나치의 고위층이 많이 있으므로 매사에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책을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재삼 당부하였다. 표현이 좋아서 당부했다고 했지만 실은 슈트라우스가 드 아나에게 '제발 혓바닥 좀 조심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비유컨대 베스비우스에게 폼페이를 잘 좀 대하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파울리네 드 아나

 

어느날 드 아나는 비엔나의 갈라 리셉션에서 어떤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알고보니 그 남자는 다름아닌 비엔나 총독 발두르 폰 쉬라흐였다. 드 아나는 남편 슈트라우스의 경고가 생각이 나서 비엔나 총독에게 솔직하게 '무슨 얘기든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좋은지,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한 쪽 구석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좋은지 조언 좀 해달라'고 말했다. 총독으로서는 당황스런 얘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있는 대화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드 아나에게 '부인,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라고 점잖게 물었다. 그러자 드 아나는 그렇다면 입조심하고 뭐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게 다름 아니라 헤르 쉬라흐!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모두 빼앗긴다면 총독께서도 어디론가 도망을 가야겠지요. 바바리아의 가르미슈에 당신을 위해서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할 테니 그리로 오세요. 하지만 다른 쓰레기들은 해당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언급이었다. 폰 쉬라흐도 보통은 아니었다. 드 아나와 막상막하였다. '부인,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인의 도움은 필요없을 것 같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슈트라우스는 이들 두 사람과 동격이 될수 없었다. 슈트라우스의 이마는 땀으로 만든 진주가 장식했다.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독일어로 기록한 것을 보면 슈트라우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Schweissperlen(슈봐이쓰페를렌)이라고 했다. 그것을 '땀(슈봐이쓰)으로 만들어진 진주'라고 번역했다. 드 아나의 말대로 라면 홀 안에는 전부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드 아나의 용맹성이 아마도 바바리아 육군대장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정신일 것이라고 얘기했다.

 

바바리아 지방 가르미슈 파트텐키르헨에 있는 '슈트라우스 빌라'. 지금은 개인소유이지만 슈트라우스기념관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집을 '살로메'의 로열티를 받아 구입했다. 처음에는 여름별장으로 사용했으나 190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49년까지 상주저택으로 삼았다. 부인인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드 아나도 이 빌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빌라에서 '장미의 기사'를 작곡했다. 그러므로 이 빌라야 말로 진정한 '장미의 기사'의 궁전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의 부인인 엘자 레스피기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아주 예의 바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무척 존경하였다. 그런 엘자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드 아나였다. 독일 여자들이 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드 아나는 원래가 말투가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우며 무슨 얘기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생각하지 않고 독선적이었다. 대사가 되었건 장군이 되었건 일단 드 아나의 구설수에 올라가면 형편없이 파죽이 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드 아나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아니, 이 여자분이 저 점잖으시고 사려가 깊으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인이란 말인가?'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왕왕이었다. 그건 그렇고, 레스피기의 자택을 방문한 드 아나는 조용히 앉아서 차라도 마시면서 얌전하게 있지를 못하고 대뜸 마치 내부반장이 소대원의 막사를 검열하는 것처럼 응접실의 이구석 저구석을 살피며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있는지를 살펴보지를 않나, 유리창과 테블 위에 먼지가 묻었는지를 손가락으로 확인하지를 않나 하여튼 손님으로서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였다. 그러다니 레스피기의 부인인 엘자에게 '부인, 아주 완벽한 가정주부올시다'라고 말하고는 '먼지가 하나도 없군요'라고 덧붙였다. 과연,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드 아나였다.

 

비엔나 총독인 발두르 폰 쉬라흐. 슈트라우스에게 적잖이 호감을 갖고 도와주었다.

 

그런데도 슈트라우스와 드 아나의 결혼생활을 행복한 것이었다. 더구나 드 아나는 슈트라우스의 작곡활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예를 들면 '네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는 순전히 아내 드 아나의 자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톤 포임(tone poem)인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에서 영웅의 반려자로, 그리고 '심포니아 도메스티카'(Symphonia Domestica)의 여러 부분에서 드 아나를 상징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드 아나는 남편 슈트라우스보다 더 장수하였다. 말이 장수이지 실은 남편보다 8개월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묘지는 카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의 '가르미슈 공동묘지'(Friedhof Garmisch)에 있다. 프리드호프슈트라쎄 5번지이다. 2007년에 세상을 떠난 손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이곳 가족묘지에 합장되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파울리네 드 아나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란츠 슈트라우스(1897-1980)라는 이름이었다. 현재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구소'(RS Institut)가 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의 가르미슈공동묘지에 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드 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들인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며느리인 알리스 슈트라우스, 손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손녀인 브리기테 슈트라우스가 함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부인 파울리네, 아들 프란츠. 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