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최초의 파미나 안나 고틀리브(Anna Gottlieb)

정준극 2013. 9. 3. 07:47

배우 겸 소프라노인 안나 고틀리브

17세에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파미나 공주의 이미지 창조

말년의 모차르트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던 여인

 

안나 고틀리브. 1795년 니콜라스 달라이라크의 오페라 아제미아(Azemia)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모습

 

안나 고틀리브라는 배우 겸 소프라노가 있었다. 대단한 재능이 있는 불세출의 배우 겸 소프라노는 아니지만 1791년 9월, 비엔나의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밤의 여왕'의 딸인 파미나 공주의 이미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런 연고 때문에 소개코자 하는 것은 아니며 그가 모차르트와 잠시 뿐이지만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얘기가 있어서 소개코자 하는 것이다. 물론 예쁘장하고 청순한 인상의 안나 고틀리브와 모차르트가 좋아 지내던 사이였다는 얘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분명치 않다. 다만, 1955년에 오스트리아가 제작한 '모차르트'(부제: 모차르트의 생애와 사랑)라는 영화에서 모차르트와 안나 고틀리브가 아주 서로 좋아하는 관계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 추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안나 고틀리브의 풀 네임은 마리아 안나 요제파 프란치스카 고틀리브(Maria Anna Josepha Francisca Gottlieb)이지만 간단히 안나 고틀리브라고 부르며 애칭으로서는 애니라고 부른다. 안나는 1774년(미국이 독립한 해)에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국립극장(Nationaltheater)의 독일어극단의 배우였다. 두 사람은 안나를 포함하여 딸만 넷을 두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네 딸들을 모두 배우로 키우기로 했다. 물론 딸들은 배우로서의 소질도 다분했다. 안나가 처음으로 무대에 나갔던 것은 불과 다섯살 때에 유명한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트(궁정극장)에서였다. 다섯살 짜리가 뭘 알겠느냐마는 그래도 배우로서의 기질과 소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열두 살 때인 1786년 5월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비록 별것도 아닌 역할이지만 정원사의 딸 바르바리나 역을 맡아서 그런대로 '잘한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오페라에 취미를 붙인 안나는 15세 때에 파울 브라니츠키(Paul Wranitzky)의 오페라 '오베론' 또는 ''요정의 왕(Oberon 또는 König der Elfen)에서 아만데 역을 맡아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오페라 '오베론'에서 왕비 역할은 나중에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의 이미지를 창조한 모차르트의 처형 요제파 호퍼(Josepha Hofer)가 맡았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자 한다.

 

1789년에 배우이며 극본가이고 바리톤이며 흥행가인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극단이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의 전속극단이 되었다. 안나는 쉬카네더 극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이런 저런 징슈필에서 소프라노를 맡아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중 1791년 모차르트가 쉬카네더 극단을 위해 '마술피리'를 작곡하자 쉬카네더는 안나에게 파미나 공주의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때 안나는 17세의 한창 때였다. 그때가 아마 안나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와의 섬싱도 그때 생긴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안나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내용이 나온다. 안나는 모차르트가 1791년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쉬카네더 극단을 떠나서 레오폴드슈타트극장(Theater in der Leopoldstadt)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안나는 10년 이상이나 레오폴드슈타트극장의 히로인으로서 수많은 연극에 출연하여 정상의 배우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더구나 안나는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연극에 출연하면서 간혹 노래를 불러 관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안나가 레오폴드슈타트극장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역할은 1798년에 페르디난트 카우어(Ferdinand Kauer)의 연극인 Das Donauweibchen(도나우아가씨)에서 훌다(Hulda)라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1809년부터 1813년까지 4년 동안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연극무대에 나가지 못했다. 안나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지만 그때에는 이미 안나의 음성이 전과 같지 않아서 극중에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연극에 출연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안나는 이제 거의 40대 줄에 들어섰다. 이어서 나이를 점점 먹게 되자 그나마 맡은 역할은 노파 또는 마귀할멈 등이었다.  

 

'마술피리'의 파미나 공주를 그린 그림

 

1828년에 루돌프 슈타인켈러라는 사람이 레오폴드극장을 책임 맡게 되었다. 새로 온 극장장은 우선 안나 고틀리브부터 해임하였다. 안나가 54세 때였다. 안나는 전임 극장장으로부터 연금을 준다는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극장에서 나가게 되자 수입이 없어서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안나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시스 2세에게 연금을 달라고 여러번이나 청원을 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1842년에 신문편집자인 L.V. Frankl (프랑클)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프랑클은 '최초의 파미나'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어렵게 살고 있는 안나에 대한 스토리를 게재하였다. 이어 프랑클은 '최초의 파미나 돕기 운동'을 벌여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 기념상이 제막을 갖게 되자 안나도 참석토록 주선했다. 안나 고틀리브는 당시에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 중에서 모차르트를 직접 만나 시간을 보냈던 마지막 성악가였다. 안나는 생전에 결혼한 일이 없다. 안나는 비엔나에서 향년 82세로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안나는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가 묻혀 있는 장크트 막스 공동묘지(St Marx Friedhof)의 한쪽에 매장되었다. 모차르트의 묘지는 1888년에 비엔나의 남쪽 짐머링 구역에 중앙공동묘지가 생기자 그곳의 저명인사 묘역으로 이장되었지만 안나 고틀리브의 묘소는 장크트 막스 공동묘지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파미나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 꽃의 이름이기도 하다. 저패니스 아네모네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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