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정준극 2013. 9. 12. 10:02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라이발이면서도 친구

 

안토니오 살리에리. 그는 누구인가? 모차르트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모차르트의 팬이라고  하면 살리에리라는 이름을 모를리가 없다. 모차르트의 비엔나 생활에 대한 얘기, 특히 말년의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살리에리의 이름도 뒤따라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비엔나에 와서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낸 작곡가이다. 살리에리는 비엔나에서 거의 60년이나 살았다. 그러므로 그만하면 비엔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할수 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비엔나에서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하여 독살했다는 얘기가 있다. 1984년도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그런 뉘앙스가 진하게 풍겨 있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단편을 썼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하여서 독살했다는 내용이다. 푸쉬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한술 더 떠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단막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가 자꾸만 그런 내용으로 확산되니까 사람들도  정말 그런줄 알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그러한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지만 그런 증거나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아마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다 신비스럽고 흥미롭게 하기 위해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실제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어떤 기록을 보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여서 모차르트의 앞길을 훼방만 놓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렇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는 있지만(살리에리가 여섯살 많다) 친구로서 서로 존경하고 도와주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런 저런 내용들을 짚어 본다. 모차르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로서는 독일의 알베르트 로르칭(Albert Lortzing: 1801-1851)이 작곡한 징슈필인 '모차르트의 생애'(Szenen aus Mozarts Lebens)라는 것도 있다. 1832년 독일 뮌스터에서 초연된 징슈필이다. 살리에리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의 에피소드, 특히 사랑에 눈을 뜬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오페라를 만든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모차르트의 생애'를 작곡한 알베르트 로르칭

 

우선 라이발이었다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1780년대에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살고 있을 때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아버지 레오폴드와 당연히 여러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편지들에 의하면 살리에리가 주도하는 몇 명의 이탈리아 도당들이 음모를 꾸며서 모차르트가 궁정에서 어떤 직책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또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고자 하면 어느 틈인지 미리 알고서 훼방을 밥먹듯이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모차르트가 1781년 12월에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황제의 눈에는 살리에리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라고 써서 살리에리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어째서 그런 소리가 나왔느냐 하면, 그때 모차르트는 요셉 2세의 궁정에서 어떤 직책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황제에게 영향력이 큰 살리에리가 아무런 힘도 써주지 않아서, 그리고 심지어는 은근히 방해까지하는 바람에 어떠한 직책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편지들을 보아도 그런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모차르트와 레오폴드는 이탈리아 도당들이 비엔나의 궁정에서 서클을 만들어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을 비난했으며 어떤 편지에는 살리에리를 특별히 지적해서 그 사람 때문에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자리를 잡는데 무척 곤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살리에리에 대한 또 다른 불편한 심경을 표현한 편지가 있다. 모차르트가 1783년 5월에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와 당대의 대본가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에 대한 내용이 있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 다 폰테를 개인적으로 그냥 만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리에리와 다 폰테가 찰떡 콤비를 이루어서 오페라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다 폰테로부터 이탈리아어 대본을 받을수가 없어서 걱정이라는 내용이다. 그런 사정이 조금 더 발전하여서 1783년 7월에 모차르트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가 나에 대하여 무언가 트릭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트릭이라고 하는 말은 실은 방해공작이었을 텐데 어떤 내용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20 여년이 지난 후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소문은 아마도 독일 작곡가들과 이탈리아 작곡가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더욱 퍼졌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비엔나에서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독일 작곡가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면서 지내야 했다. 베버는 바그너가 진실로 독일적인 작곡가 중의 작곡가라고 높이 찬사를 보낸 사람이었다. 베버는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와 사촌간이었으므로 모차르트로서도 친척이 되는 셈이다. 당시 살리에리가 주도하여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루들람스 횔레(Ludlams Höhle)라는 친교 클럽을 만들어서 모이는 것이 있었다. 살리에리는 베버에게 아주 선심이나 쓰듯 루들람스 횔레에 멤버로 들어오라고 제안했지만 베버는 거절했다. 베버는 살리에리가 무슨 일을 한다면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 베버로서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얘기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한때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가 되었고 심지어 독일의 알베르트 로르칭(Albert Lortzing: 1801-1851)은 Szenen aus Mozarts Leben(모차르트 생애의 장면들: 1832)라는 징슈필을 만들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여 모차르트의 앞길을 방해만 했다는 내용이다. 별 작품도 다 만들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1898년 모스크바의 어떤 개인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모차르트 역은 테너 바실리 슈카퍼(Vasilu Shkafer)가 맡았고 살리에리 역은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Fyodor Shaliapin)이 맡았다.

 

또 한가지의 예로서 1781년의 사건을 들수 있다. 모차르트는 뷔르템버그의 엘리자베트 공주의 음악 선생으로 응모하였다. 그런데 살리에리가 선정되었다. 이유를 묻자 살리에리가 성악 선생으로서 더 유명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 모차르트는 다음해에 엘리자베트 공주의 피아노 선생을 구한다고 하자 또 다시 응모하였다. 살리에리의 이탈리아 친구가 선정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아니, 살리에리인지 뭔지 하는 사람과 그 작당들이 다 해 먹는구나!'라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건도 있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비엔나에서 초연을 가질 때 살리에리는 Les Horaces(오레이스 가문)라는 그의 신작 프랑스 오페라의 공연준비로 바뻤다. 얼마후 모차르트는 다 폰테의 대본으로 '돈 조반니'를 완성하여 프라하에서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 폰테도 프라하에 와서 있었다. 그런데 살리에리가 다 폰테에게 연락하여 급히 비엔나로 오도록 했다. 왕실에서 어떤 결혼식이 있는데 자기의 Axur, re d'Ormus(오르무스의 왕 악수르)라는 오페라를 공연키로 되어 있으니 와서 리허설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다 폰테는 당연히 살리에리의 전갈을 받고 역시 세력있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을수 없었던지 '돈 조반니'의 초연은 어떻게 되던지 모르겠다면서 비엔나로 떠났다. 모차르트로서는 '아니, 별것도 아닌 리허설 때문에 사람을 오라가라 할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상당히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살리에리의 음악은 이탈리아 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쪽이었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글룩이나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smann: 1729-1774)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며 당시 파이시엘로 혹은 치마로사와 같은 이탈리아 쪽은 아니었다. 1772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독일 작곡가보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독일 작곡가로서 가스만, 글룩, 그리고 살리에리라는 이름을 거명했다. 살리에리를 아예 독일 작곡가로 분류한 언급이었다. 하기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살리에리는 비엔나에 거의 60년 이상이나 살았으므로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평론가인 프리드리히 로흘릿츠(Friedrich Rochlitz)는 아예 살리에리를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 작곡가로 분류하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톰 헐스)와 살리에리(머레이 에이브라함)

 

이번에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서로 친구사이였다는 주장에 대한 설명이다. 혹자들은 두 사람이 라이발 관계였다고 말했지만 비엔나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얘기였다. 서로 만나면 다정스럽게 얘기를 나누었고 서로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특히 1785년 이후에 그랬다는 것이다. 1785년이라고 하면 모차르트가 비로소 비엔나에서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하기 시작한 때였다. 말하자면 그렇게도 기다리던 성공을 이룬 시점이기도 했다. 한편, 살리에리는 1788년에 궁정극장(오늘날의 슈타츠오퍼)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다. 카펠마이스터는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말한다. 살리에리의 임명을 축하하기 위한 공연이 있었는데 살리에리는 자기의 오페라를 공연하지 않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리바이발했다. 우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1790년에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이 신성로마재국의 이곳저곳에서 열릴 때에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등 세편의 악보를 가방에 챙겨가지고 가서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연주되도록 했다. 모차르트를 끔찍히 생각하지 않으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칸타타를 공동으로 작곡하기도 했다. Per la ricuperata salute di Ophelia 라는 작품이다. 당대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낸시 스토레이스(Nancy Storace)가 사정이 있어서 잠시 무대를 떠났다가 복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이 곡은 1785년에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로서는 아무도 악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불행하게도 어떤 곡인지 알수가 없다.

 

락 오페라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모차르트의 칸타타 Davide penitente(참회하는 다윗: 1785, K469), 피아노 협주곡 KV 482(1785), 클라리넷 5중주곡(1789), 그리고 교향곡 제40번(1788)은 모두 살리에리가 주선해서 초연을 가졌다. 그만큼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도와주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뷔드너 극장에서 1791년 9월에 초연되었다. 초연이 있은지 얼마 후에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 비엔나 출신의 소프라노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Caterina Cavalieri: 1755-1801)를 초청하여 뷔드너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마술피리'를 구경하도록 주선했다. 이때 모차르트는 없는 살림에 마차를 빌려서 두 사람을 극장으로 모셔오도록 하기까지 했다. 살리에리는 '마술피리'의 공연을 정말로 열심히 보면서 너무나 좋아서 연상 '브라보' 또는 '벨로'(Bello)라고 외쳤다고 한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모차르트의 어린 아들인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Franz Xaver Mozart)의 음악교육을 자청하여 맡았었다. 프란츠 사버는 아버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인 7월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동료로서 상당히 친밀하게 지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34년을 더 살았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2세라는 별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