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정준극 2013. 10. 1. 05:35

크렘스뮌스터 수도원(Stift Kremsmünster)

8세기부터의 예술보고

 

오베레 외스터라이히의 크렘스뮌스터에 있는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슈티프트 크렘스뮌스터). 구내 한쪽에 높은 건물의 천문대가 있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오스트리아에서 봐하우의 멜크 수도원(Stift Melk)에 버금가는 대단한 규모의 수도원이다. 그런데 멜크 대사원은 일찍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아직 지정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94년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였지만 아직 검토 중이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오베레 외스터라이히의 크렘스뮌스터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다. 크렘스뮌스터는 비엔나에서 서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곳이다. 자동차로 빨리 가면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오스트리아에 있는 수도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777년에 바바리아의 군주인 타씰로(Tassilo)3세가 창설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수도원이 있는 장소는 타씰로3세의 외아들인 군터(Gunther)가 사냥을 왔다가 멧돼지에게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곳이라고 한다. 타씰로 3세는 아들 군터의 석관을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의 교회에 안치하였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타씰로3세의 후원을 받았지만 그 후에는 위대한 샬레만뉴 대제와 그의 후손들의 지원을 받아 존립하여 왔다. 현재의 웅장한 건물은 17-18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공중에서 바라본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10세기에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헝가리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들은 당시 바바리아의 군주가 연고권을 주장하여 상당부분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귀족들이나 주교들이 나누어 가졌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이 재건된 것은 12세기에 하이린히2세(야소미어고트)에 의해서였다. 재건될 때의 수도원장은 성고타르트(St Gotthard)였다. 그렇게 재건을 하였지만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행하게도 파싸우의 알트만(Altmann of Passau)가 고테스아우(Gottesau)로부터 여러 수도승들을 데려와 정착함으로서 문을 닫지 않고 견딜수 있었다. 알트만 수도원장은 엄격한 규율과 헌신적인 노력으로서 수도원을 점차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수도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교회의 쌍둥이 첨탑

                        

수도원의 도서실은 유명하다. 이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연구를 하고 귀중한 저서들을 썼다. 바바리아 군주기도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아마 역대 수도원장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울리히 쇼펜차운(Ulrich Schoppenzaun: 1454-1484)과 그의 뒤를 이은 제자 요한 슈라이너(Johann Schreiner: 1505-1524)일 것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이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도 크렘스뮌스터 수도원를 안전하게 지켜냈다. 그 후의 그레고르 레흐너(Gregor Lechner: 1543-1558) 수도원장은 수도원 내에 학교를 공식으로 설립하여 이 지역에서의 가톨릭을 유지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8세기의 수도원장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알렉산더 픽슬밀너(Alexandr Fixlmillner: 1731-1759)일 것이다. 그는 수도원 건물의 옆에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천문대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도원 인근의 길들을 닦아 주민들에게 편리를 주었으며 특히 수많은 자선활동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의 조카인 플라시두스 픽슬밀너(Plasicus Fixlmillner)는 명왕성(우라누스)의 궤도를 처음으로 계산한 천문학자로서 나중에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의 천문대장에 임명되었다. 현재 크렘스뮌스터천문대는 높이 51 m의 장대한 건물로서 '수학 타워'(Mathematical Tower)라고 부르고 있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도서실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요셉2세의 정책에 따라 수도원이 폐쇄될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하였으나 다행히도 재난을 피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하여 대단한 피해를 보았다. 이후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여러 기관들과 황실의 도움을 받아 복구에 나서서 마침내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봐하우지역의 멜크 수도원 다음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성실한 수도원이 되었다. 건축은 멜크 수도원의 교회를 건설한 경험이 있는 야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uer)가 맡았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의 남쪽 건물은 길이가 무려 290m 에 이른다. 수도원의 대부분 중요한 장소들은 이곳에 몰려 있다. 대식당(Refectory), 도서실, 황제의 홀, 성물보관실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자연사박물관은 '수학 타워'의 아래층에 있다. 세상의 모든 어류들을 정리하여 놓은 것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바다라고는 구경도 할수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이렇듯 어류에 대하여 세밀한 연구를 내 놓은 것은 놀랍기도 하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학교는 1549년부터 존속해온 것이다. 위대한 시인이며 작가인 아달베르트 슈티프터(Adalbert Stifter)는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2010년 3월, 몇명의 수도사들이 아동 성추행으로 직위를 정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장까지도 포함되는 스캔들이었다. 학생들에 대한 성추행은 1970년대로부터 자행되어 온 것이지만 누구도 함구하고서 나서지 않는 바람에 유야무야의 신세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연고로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도덕성에 상당한 손상을 입고 회복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교회의 바로크 첨탑과 '수학탑'의 위용

                                                      

18세기에는 또한 요셉2세의 정책에 따라 크렘뮌스터 수도원이 폐쇄될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하였으나 다행히도 재난을 피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하여 대단한 피해를 보았다. 이후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여러 기관들과 황실의 도움을 받아 복구에 나서서 마침내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멜크 수도원 다음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성실한 수도원이 되었다. 건축은 멜크 수도원의 교회를 건설한 경험이 있는 야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uer)가 맡았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의 남쪽 건물은 길이가 무려 290m 에 이른다. 수도원의 대부분 중요한 장소들은 이곳에 몰려 있다. 대식당(Refectory), 도서실, 황제의 홀, 성물보관실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자연사박물관은 '수학 타워'의 아래층에 있다. 세상의 모든 어류들을 정리하여 놓은 것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바다라고는 구경도 할수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이렇듯 어류에 대하여 세밀한 연구를 내 놓은 것은 놀랍기도 하다.  

 

타씰로켈르흐(가운데)와 기타 성물들

                           

크렘스뮌스터 수도원 학교는 1549년부터 존속해온 것이다. 위대한 시인이며 작가인 아달베르트 슈티프터(Adalbert Stifter)는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2010년 3월, 몇명의 수도사들이 아동 성추행으로 직위를 정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장까지도 포함되는 스캔들이었다. 학생들에 대한 성추행은 1970년대로부터 자행되어 온 것이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하여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연고로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은 도덕성에 상당한 손상을 입고 회복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수도원 교회는 '구세주 그리스도와 성 아가피투스(St Agapitus)'에게 봉헌되었다. 원래는 1277년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과 초기 고틱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서 완성되었다. 그후 1680-1720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교회의 내부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절정으로 거장 카를로 안토니오 카를로네, 조반니 바티스타 콜롬바 등이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교회에는 타씰로3세의 아들인 군터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도서실은 168089년에 완성된 것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실이다. 16만권의 장서가 있으며 1천 7백여개의 문서, 약 2천 점의 필경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도서실에서 가장 귀중한 서적은 코덱스 밀레나리우스(Codes Millenarius)라는 복음서로서 서기 800년 경에 몬트제 수도원에서 쓴 것이다. 수도원의 보물 중에서는 타씰로3세의 성배(Tassilokelch)가 특히 유명하다. 타씰로3세와 루이트피르(Luitpirga) 왕비가 사용하던 은도금 잔으로 그가 수도원에 기증한 것이다. 처음에는 혼례에 사용되었던 잔이었다고 한다. 타씰로 성배는 바바리아-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나온 중세 초기의 성만찬배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예술적으로 중요한 물건이다.

                           

수도원교회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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