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 - 호흐오스터비츠 성(Burg Hochosterwitz)

정준극 2013. 10. 2. 16:41

호흐오스터비츠 성(Burg Hochosterwitz)

카린티아의 랜드마크....160 m 산정에 위치

 

신비스럽게 보이는 호흐오스터비츠. 일이 있어서 아랫마을로 내려가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유럽에는 중세로부터의 성들이 많이 있지만 오스트리아 카린티아주의 장크트 바이트 안 데어 글란(Sankt Veit an der Glan) 마을의 동쪽 돌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부르크 호흐오스터비츠(Burg Hochosterwitz)만큼 놀라운 모습의 성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어찌보면 신비스럽기까지 한 광경이다. 해발 160 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30km 밖에서도 보인다. 온통 백운암으로 다져진 장소에 세운 기초가 튼튼한 성이므로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외적이 침입하더라도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그림과 같은 노이슈봔슈타인 성,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몽 생 미셸 성, 잘츠부르크의 페스퉁 호엔잘츠부르크 등에 버금하는 인상적인 성이다. 호흐오스터비츠는 카린티아의 랜드마크이다. 카린티아주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전체 오스트리아의 자랑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94년에 호흐오스터비츠 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도록 신청한바 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금명간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호흐오스터비츠 요새내로 들어가자면 14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가장 처음에 있는 요새문

 

호흐오스터비츠의 존재가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860년이었다. 호흐오스터비츠는 당시 카란타니아라는 지역에 속하여 있었다. 카란타니아는 동프랑크왕국(Kingdom of East Franks) 루이스왕의 소유였다. 동프랑크왕국은 동프랑키아(East Francia)라고도 하면 840년으로부터 962년까지 존재했었다. 동프랑크왕국의 루이스왕은 호흐오스터비츠를 사정상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게 기증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호흐오스터비츠는 9세기로부터 11세기까지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잘츠부르크의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카린타아 공작에게 이양하였다. 카린티아 공작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즉위에 대한 분규가 있었을 때 게브하르트 대주교를 지지했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선물한 것이다. 그후 호흐오스터비츠는 얼마동안 카린티아 공작 가문의 소유로 되었 있다가 오스터비츠(Osterwitz) 가문에게 이양되었다. 오스터비츠는 역대 카린티아 공작의 총신이었다. 원래 직책은 공작에게 술을 따르는 관원(컵베어러: cupbearer)이었으나 공작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아 호흐오스터비츠성을 하사 받은 것이다.

 

멀리 바라본 호흐오스터비츠. 바바리아의 노이슈봔슈타인 성을 연상케 한다. 정말 대단하다.

 

호흐오스터비츠성에 대한 재미난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다. 14세기에 티롤의 영주인 마울타슈(Maultasch) 백작의 부인 마르가레테는 군대를 이끌고 카린티아에 속하여 있는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해 온 일이 있었다. 호흐오스터비츠성은 카린티아의 영향력있는 오스터비츠 가문이 관장하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카린티아 왕국에 속해 있었다. 티롤의 마르가레테 백작부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아서 카린티아의 소유권을 얻지 못하였다. 속이 상한 마르가레테 백작부인은 군대를 이끌로 카린티아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마르가레테의 군대는 우선 호흐오스터비츠성을 포위하였다. 포위가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산 위의 호흐오스터비츠성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마르가레테의 군대는 성안에 식량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지막 대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안에 있던 카린티아의 수비대는 마지막 남아 있는 소 한마를 잡아서 소의 뱃속에 옥수수를 잔뜩 집어 넣은 후 그것을 성을 포위하고 있던 카린티아의 군대에게 마치 대포처럼 날려 보냈다. 마르가레테의 티롤 군대는 성안에 아직도 식량이 넘쳐 나서 식량을 포탄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라고 믿어서 호흐오스터비츠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는 얘기다. 이 얘기는 나중에 독일의 그림 형제가 중세 전설집에 수록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에 터키가 침공하여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점령하였다.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지키고 있던 오스터비츠 가문의 후손은 터키군에게 사로잡혔다가 1476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불행하게도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오스터비츠 가문의 그 사람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큰 빚을 졌지만 갚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478년에 호흐오스터비츠성은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의 손으로 넘어갔다. 프레데릭 3세라고 하면 비엔나의 슈테판스돔에 그의 대리석 석관이 장엄하게 남아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호흐오스터비츠성은 비록 프레데릭 3세의 소유가 되었지만 그 후 터키군이 빈번히 공격해 오는 바람에 거의 폐허가 되었다. 150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는 호흐오스터비츠성을 구르크의 대주교에게 관리토록 위임하였다. 구르크의 대주교는 호흐오스터비츠성을 열심히 수리하여 예전의 장엄한 모습을 유지토록하였다. 그후 1540년 경에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가 호흐오스터비츠를 카린티아 총독인 크리스토프 케벤휠러에게 넘겨주었다. 케벤휠러는 주로 터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1570-8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요새로 들어가는 문을14개나 만들고 무기고도 새로 만드는 등 요새의 방어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아무튼 이같은 증개축은 유럽에 있는 다른 요새들에 비하여 대단히 특별한 사항이었다. 특히 요새로 통하는 좁은 길목마다 문을 만든 것은 다른 곳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호흐오스터비츠는 외적의 공격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제4의 문인 엥겔스토르(Engelstor)를 넘어서 점령 당한 일이 없다고 한다.

 

난공불락의 호흐오스터비츠 요새(성). 어떻게 지었을까? 짓느라고 얼마나 고생들을 하였을까?

 

호흐오스터비츠는 16세기 이후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제국으로 존재하는 동안 케벤휠러 가문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호흐오스터비츠성의 일부는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겨울에는 문을 닫으며 부활절부터 10월까지 오픈한다.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14개나 되는 요새의 문들을 통과해서 걸어가야 한다. 거리는 약 620m 가 된다. 등산도 이런 등산이 없을 정도로 노약자에게는 힘든 방문이다. 각 요새문은 여닫는 메카니즘이 다르게 설계되어 있어서 관심을 끈다. 호흐오스터비츠에 가려면 인근인 클라겐푸르트에서 연결되는 기차를 타고 라운스도르프-호흐오스터비츠(Launsdorf-Hochosterwitz)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면 된다. 클라겐푸르트의 관광명소인 미니문두스(Minimundus)에는 호흐오스터비츠성을 25분의 1로 축소한 모델이 있다. 미니문두스(미니에이쳐 공원)는 클라겐푸르트에서 약 20km 떨어진 뵈르터제(Wörthersee)에 있다. 미니문두스에는 약 150개의 미니에이처 모델이 있다. 모두 실물보다 25분지 1로 축소한 것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파리의 에펠 탑,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브라질리아 대성당, 토론토의 CN 타워,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런던 타워, 워싱턴의 화이트하우스, 아그라의 타즈 마할, 나사의 우주선 발사장 등이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다.

 

클라겐푸르트의 미니문두스에 있는 호흐오스터비츠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