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호프부르크

호프부르크의 모든 것

정준극 2013. 10. 18. 07:05

호프부르크의 모든 것

 

호프부르크 레오두텐잘에서의 궁정무도회. 오른쪽에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모습이 보인다.

             

호프부르크(Hofburg)는 비엔나의 관광 1번지이다. 볼 것이 너무 많다. 조금 자세히 보려면 며칠이나 걸린다. 비엔나에 왔다가 호프부르크를 그냥 겉으로만 보고 간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 호프부르크는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들이 거처하고 정무를 보던 곳이다. 역사의 현장이다. 중세로부터 수백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막강했던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438년으로부터 1583년까지, 이어서 1612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거처였고 1806년부터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의 거처였다. 그러나 호프부르크의 연혁은 그보다 훨씬 오래여서 기록상으로는 합스부르크를 일으킨 루돌프 황제 치하의 1279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거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비엔나의 청와대이며 화이트 하우스이다. 그런 중요한 곳을 겉으로만 보고 지나친다면 오스트리아와 비엔나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노이에 부르크

 

호프부르크는 처음에는 슈봐이처트락트(스위스동)만으로 구성되었으나 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에는 호프카펠레(또는 부르크카펠레: 궁정교회), 각종 박물관, 국립도서관, 제국보물실(샤츠캄머),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 궁정승마학교(호프라이트슐레), 궁정마사(슈탈부르크 및 호프슈탈룽겐), 식물원(팔멘하우스)을 포함한 궁정정원(부르크파르크), 그리고 호프부르크 콩그레스 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다가 부르크토르(궁전문)의 건너편에 있는 미술사박물관(국립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도 원칙적으로 호프부르크의 가족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링슈트라쎄를 중심으로한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추진하면서 호프부르크의 대대적인 확장 계획도 수립하였다. 헬덴플라츠를 정리하고 노이에 부르크(신호프부르크)를 만들면서 노이에 부르크에 대칭되게 또 다른 건물도 지어서 하나의 커다란 궁전단지를 만들려고 구상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노이에 부르크만을 완성하고 차후를 기약해야 했다. 그러한 대대적인 구상을 카이저포룸(Kaiserforum)이라고 불렀다. 옛날 로마제국의 포룸(공회의 광장)을 본따서 제국의 영광을 나타내는 웅장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광장과 건물들과 공원을 두려고 했던 것이다. 현재의 호프부르크를 완성하는 데에는 주로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건축가들이 총동원되었다. 필리베르토 루케세(Filiberto Luchese)는 레오폴드동(Leopoldischiner Trakt)을 완성했고 로도비코 부르나치니(Lodovico Burnacini)와 마르티노-도메니코 카를로네, 바로크 건축가인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및 요제프 에마누엘 피셔 폰 에얼라흐는 제국수상동(Reichskanzler Trakt)과 스페인 승마학교를 완성했다. 그리고 현재의 국립도서관은 요제프 에마누엘 피셔 폰 에얼라흐의 아들인 요한 피셔 폰 에얼라흐가 지었다. 노이에 부르크는 188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인 1913년에 완성되었다.

 

초기의 호프부르크 전경. 노이에 부르크가 생기기 전. 부르크토르 양쪽으로 성벽이 있었음을 볼수 있다.

 

[스위스 동] Schweizerhof

호프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파트이다. 일찍이 13세기에 완성되었다. 바벤버그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건축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가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전에는 바벤버그 군주들의 궁전이 암 호프(Am Hof)에 있었다.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 근처이다. 현재의 스위스 동은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8-1564) 치하에서 르네상스 스타일로 완성되었다. 그래서 입구의 붉고 검은 색의 문인 스위스문(슈봐이처토르)에는 페르디난트 1세의 여러 호칭들이 적혀 있고 황금양털 종단의 인시그나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스위스 동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인너 호프(Inner Hof: 내정)가 있는 형태이다. 그 내정을 통해서 제국보물전시실(샤츠캄머)과 궁정교회(부르크카펠레)로 들어갈수 있다. 제국보물전시실에는 종교적인 유물들과 세속적인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속적인 전시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의 왕관, 보주, 홀 등 인시그나들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인시그나들은 라이히스클라이도디엔(Reichskleinodien)이라고 한다. 궁정교회는 궁정음악교회(호프무직카펠레)라고도 한다. 현재의 비엔나소년합창단이 궁정소년합창단이던 시절부터 이 교회에서 주일미사에 참여하여 찬양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다. 스위스동의 아랫층에는 황실주방이 있었다. 요즘에는 알테 호프퀴헤(Allte Hofkueche)라고 부르는 방이다. 여기서 음식들을 만들어서 호프부르크의 이 건물 저 건물로 운반해서 서브했다. 그러니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가끔은 음식 냄새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졌을 것이다.

 

슈봐이처토르(스위스문)

 

슈봐이처토르(스위스문)은 15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554년에 완공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1503-1564) 치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로마황제인 샤를르 5세(칼 5세)를 대신하여 1521년부터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세습영토를 통치하였다. 처음에는 대공으로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으나 1526년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1527년에는 크로아티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다가 형인 샤를르 5세가 1558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 때부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페르디난트 1세가 스페인과 관련이 되는 것은 아버지가 카스티유의 필립 1세였고 어머니가 카스티유의 호안나였으며 형인 샤를르 5세가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군주였기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호프부르크를 확장키로 하고 슈봐이처동 신축하였으며 아울러 슈봐이처토르를 건립하였다. 슈봐이처토르의 상단에는 페르디난트의 직함을 소개하는 글들이 적혀 있다. 로마왕 독일왕 헝가리왕 보헤미아왕 스페인의 황태자 오스트리아와 부르군디의 군주라는 내용이다. 상단 가운데의 방패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황제의 관과 독수리, 그리고 독일왕을 상징하는 황금양털 칼러(목걸이)가 그려져 있다. 슈봐이처코르의 안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세습 영토들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헝가리(적백선), 보헤미아(은사자), 오스트리아(수직선), 카스티유(탑), 부르군디(사선), 아라곤(수직선), 티롤(붉은 독수리), 플란더스(사자) 등이다.


슈봐이처토르의 상단


[황실 마사] Stallburg

슈탈보르크는 황실의 말들이 거처하던 마굿간을 말한다. 호프부르크와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지만 원래는 떨어져 있던 건물이었다. 막시밀리안 2세가 황태자였을 때 거처로 삼았던 별채였다. 마치 우리나라 궁궐에 동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막시밀리안 2세(재위: 1564-1576)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8-1564)는 아들 막시밀리안이 개신교에 눈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워하여서 호프부르크에 같이 살고 싶지가 않아서 별채를 마련해서 살게 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 황태자가 기거하던 이 건물은 나중에 페르디난트 3세(재위: 1637-1657)의 동생인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은 미술품 수집에 헌신적이어서 수많은 미술품들을 수집했다. 슈탈부르크는 그 수집품들을 보관하는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때 수집된 미술품들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사박물관의 기본이 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스페인승마학교(Spanische Hofreitschule)로 사용되고 있다. 어째서 스페인승마학교라고 부르냐하면 처음에 말들을 스페인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슈탈부르크는 1848년부터 잠시 동안 오스트리아 의사당으로 사용된 일이 있다.


슈탈부르크. 황실마사

 

[아말리엔부르크] Amalienburg

스위스문의 건너편에 있는 건물이 아말리엔부르크이다. 요셉 1세(재위: 1705-1711)의 미망인인 아말리에 빌헬미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하지만 건물은 그 전부터 있었다. 원래 루돌프 2세(재위: 1576-1612) 황제의 비엔나 거처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지붕 상단에는 돔이 있고 그 아래에 천문시계를 설치했다.

 

아말리엔 트락트와 프란시스 1세(프란시스 2세) 기념상

                        

[레오폴드 동] (Leopoldinischer Trakt)

아말리엔부르크와 스위스 궁을 연결하는 건물이 레오폴드 동이다. 레오폴드 1세(재위: 1658-1705) 치하 때에 건축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필리베르토 루케세가 건축하였으나 1683년 터키의 비엔나 공성때에 파손되어 조반니 피에트로 텐칼라가 재건하였다. 이때 한 층을 높혔다. 거의 새롭게 재건했지만 건축 양식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방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다. 아멜리엔부르크의 지하실과 레오폴드 동의 지하실은 호프부르크의 와인 셀라(포도주 저장소)였다. 황실의 와인 셀라가 얼마가 거대한지를 짐작케 해 준다.

 

레오폴드 트락트

 

[제국수상 동] Reichskanzleitrakt

레오폴드 동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건물이 제국수상 동이다. 이 건물에는 제국궁정참사원(Reichshofrat: Aulic Council)이외에 제국 부수상(Reichsvizekanzler)의 집무실이 있었다. 제국 부수상은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수상직도 맡아했다. 신성로마제국 수상은 중세로부터 마인츠 대주교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므로 제국수상동은 마인츠 대주교의 집무실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리자 이 건물은 나폴레옹 2세(라이히슈타트 공작)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가 나중에는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씨씨)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제국수상동

                 

[제국도서관] Hofbibliothek - 국립도서관

원래는 호프부르크와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건물이었다. 지금은 요셉스플라츠의 한쪽에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서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설립했다. 현재는 프룬크잘(Prunksaal)이라고 부르며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이 관리하고 있다. 프룬크잘의 건설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가 시작했으나 중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아들 요셉 에마누엘이 1735년에 완성했다. 프룬크잘에는 주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소장했던 서적들을 기증받아 간직하고 있다. 대규모의 천정 프레스코화는 다니엘 그란(Daniel Gran)의 작품이며 황제들의 조각상들은 파울 슈트루델(Paul Strudel)의 작품이다. 이러한 관계로 프룬크잘은 호프부르크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공간이 되었다. 건물 외부 상단의 아름답고 웅장한 조각은 로렌초 마티엘리(Lorenzo Matielli)가 1726년에 완성한 것으로 아티카의 인물들을 조각한 것이다. 현관 상단 지붕의 조각은 팔라스 아테네가 네마리의 말이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지붕 위의 왼편에는 아틀라스가 천체를 떠받들고 있는 모습의 조각이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천문학과 천체학을 상징하는 형상이 있다. 반대편에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지구와 함께 있는 조각이 있으며 그 양 옆으로는 수학과 지리학을 상징하는 형상이 있다. 

 

국립도서관 입구와 요제프광장의 요제프 2세 기마상

 

[아우구스틴 동] Augustinertrakt

아우구스틴 동은 국립도서관의 붙어 있으며 요셉스플라츠의 왼편(동남쪽)에 있다. 아우구스틴 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우구스틴 수도원과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 아우구스틴 수도원과 교회는 호프부르크와 연계가 되어 있지 않았으나 호프부르크가 확장됨에 따라 호프부르크의 한 파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알베르티나 미술관도 호프부르크의 한 파트로 간주되고 있다. 알베르티나는 알브레헤트 대공의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미술관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이 거처로 삼고 있을 때에는 타루카 드 실바 궁(Tarouca-de Sylva Palace)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틴 교회는 합스부르크 왕실 사람들의 결혼식장으로 이용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 이곳이다.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픈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교회 구내의 로레토 채플 뒤에는 합스부르크 왕실 사람들의 심장 납골당이 있다. 반아치 모양의 구조물로서 현재 54개의 합스부르크 왕실 사람들의 심장이 은단지에 보관되어 있다. 별것을 다 보관한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사람들은 죽으면 시신은 관에 넣어 카푸친교회 지하의 카이저그루프트(황실납골당 또는 영묘)에 두며 내장은 따로  꺼내어 단지에 넣어 슈테판성당의 지하 카타콤에 보관하고 심장은 별도로 단지에 넣어 아우구스틴교회에 간수하는 전통이 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부활할 때를 대비해서라는 설명이지만 혹자는 만일의 경우 적군이 처들어와서 비엔나를 점령하고 유해들을 훼손한다면 그러한 만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아우구스티니안 트락트. 국립도서관 및 여러 전시장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레도우텐 동] Redoutentrakt - Redoutensaele

이 건물은 원래 17세기에 궁정오페라극장이 있던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궁정오페라극장을 아름답고 우아한 콘서트 홀로 만들었다. 레도우텐잘이다. 그로부터 레도우텐잘은 비엔나 사교계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내부 설계는 장 니콜라스 자도 드 비유 이시(Jean Nicolas Jadot de Ville-Issey)가 맡았으며 외부 현관등의 작업은 니콜로 파카시와 프란츠 힐데브란트가 맡았다. 레도우텐이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흐두트(redoute)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아한 가면무도회를 말한다. 레도우텐잘에서는 가면무도회도 열렸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궁정음악감독으로서 레도우텐잘의 무도회에서 연주하였다. 레도우텐잘의 콘서트에서는 하이든, 파가니니, 리스트 등의 음악이 주로 연주되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은 1814년 레도우텐잘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지도를 어떻게 그리느냐를 가지고 모였던 비엔나회의가 회의는 하지 않고 무도회만 갖는다고 하여 저 유명한 '회의는 춤춘다'(Die Kongress tanzt)라는 말도 바로 1814-15년 당시 레도우텐잘에서의 무도회를 빗대어서 한 말이었다.

 

그로서 레도우텐잘에서의 음악회

                                                

1992년 11월 27일에 레도우텐잘에서 대화재가 일어났다. 거의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재건에는 5년이 걸렸다. 레도우텐잘은 클라이네(소) 레도우텐잘과 그로서(대) 레도우텐잘이 있는데 먼저 클라이네 레도우텐잘을 복구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그 동안에 그로서 레도우텐잘의 설례를 공무했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미클(Josef Mikl)이라는 사람의 설계가 당선되었다. 화가인 그는 그로서 레도우텐잘의 벽면을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페르디단트 라이문트,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 엘리아스 카네티 등의 작품을 표현하는 그림들로 채웠다. 천정화에는 칼 크라우스의 '청춘'(Youth)라는 시에서 34 구절을 손으로 쓴 것도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가 않아서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로서 레도우텐잘은 1998년 다시 오픈되었다. 오스트리아가 EU의 첫번째 의장국이 된 것을 기념하여서 오픈되었다. 1814-15년의 비엔나 회의를 다시 갖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현재 레도우텐잘은 호프부르크의 콩그레스 센터의 한 파트로서 이용되고 있다.

 

화재 이전의 레도우텐잘에서의 가면무도회 그림

             

[장크트 미하엘 동] St Michaeler Trakt

스페인 승마학교와 제국수상동을 연결하는 건물을 짓기로 했다. 요셉 에마누엘 피셔 폰 에얼라흐가 설계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구제국극장(Burgtheater: 궁정극장)이 스페인승마학교와 제국수상동의 중간에 있어서 새로운 건물을 지어 연결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몇 년 후인 1889-93년에 페르디난트 키르슈너(Ferdinand Kirschner)가 설계변경하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건물을 완성하고 장크트 미하엘동이라고 불렀다. 그전에도 호프부르크를 주변 건물과 연결하는 공사들이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1763-69년에 호프부르크와 장크트 아우구스틴 교회를 연결하는 건물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현재의 아름다운 요세프스플라츠(요셉황제광장)이 마련되고 그 한가운데에 로마 황제의 의상을 입은 요셉 2세의 기마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어 1820년대에는 알베르티나를 증축하고 보수하여서 현재의 모습대로 호프부르크와 연결되도록 했다. 그 작업은 유명한 건축가인 요셉 코른호이젤이 맡았다.

 

호프부르크의 정문 현관을 겸한 미하엘러트라트. 그 앞의 광장이 미하엘광장이다.


[영웅광장] Heldenplatz

원래 이곳에는 옛 성벽에 연결되어 있던 망루가 있었다. 그것이 1809년 나폴레옹 전쟁 때에 파괴되어서 볼품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가 옛날 성벽들을 다 정리하고 그 자리에 링슈트라쎄라는 대로를 설치키로 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옛 성벽의 망루가 있던 자리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문을 건립했다. 호프부르크로 통하는 문이었다. 이를 부르크토르(Burgtor:  궁전문)라고 불렀다. 부르크토르로부터 호프부르크 건물까지의 넓은 광장이 영웅광장, 즉 헬덴플라츠이다. 광장의 이름이 영웅광장이므로 궁전문을 헬덴토르(영웅문)이라고도 부른다. 부르크토르 바깥 쪽으로 1817년에 새로 성벽을 쌓았다. 그저 맨날 공사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성벽 안쪽으로 세개의 커다란 공원을 조성했다. 하나는 황실 전용의 부르크가르텐(궁정정원: Burggarten)이며 다른 하나는 테세우스신전(Theseustempel)이 있는 폭스가르텐(시민정원: Volksgarten)이고 또 하나가 넓은 풀밭으로 이루어진 영웅광장이었다. 부르크토르와 테세우스신전은 페터 폰 노빌레(Peter von Nobile)의 작품이다. 영웅광장의 양쪽에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장군들, 즉 샤를르 대공과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이 있다. 1938년 3월 15일(시저가 암살 당한 날), 히틀러는 노이에 부르크의 발코니에 서서 영웅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명의 비엔나 시민들에게 '오스트리아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면서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3제국과 합병되었음을 선포했다.

 

공중에서 바라본 헬덴플라츠. 가운데 녹색 잔디밭이 있는 곳

신고전양식의 부르크토르(궁전문)

 

[노이에 부르크] Neue Burg

1860년대에 비엔나 성벽을 허물고 도시계획을 다시 할 때에 호프부르크도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도록 계획되었다. 그래서 링슈트라쎄의 건너편에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들어서게 되었고 두 건물의 가운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을 두었다. 한편, 드 넓은 영웅광장에는 두 개의 새로운 건물을 지어 서로 대칭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 모든 계획을 거장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가 맡도록 했다. 이 전체적인 계획을 카이저포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오늘날의 노이에 부르크이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의 뒤편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그러나 노이에 부르크가 완성되기 전에 고트프리트 젬퍼가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작업은 칼 폰 하제나우어(Karl von Hasenauer)가 마무리했다. 노이에 부르크는 1차 대전의 전화가 타오르기 직전인 1913년에 완성되었다. 제국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웅장한 건물이다. 대칭되는 또 하나의 건물은 재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과연 또 하나의 노이에 부르크가 필요하냐는 논란이 있는 등 여러 사정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다행하게도 또 하나의 노이에 부르크가 들어서지 않는 바람에 영웅광장의 시야가 탁 티어서 저 멀리 라트하우스와 보티프키르헤까지 훤히 내다볼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노이에 부르크가 들어설 자리에 마리아 테레지아 공원이 조성되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쌍둥이 건물이 완성된 것은 1891년이었다. 현재 노이에 부르크에는 여러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다. 터키의 에베소 유물을 전시해 놓은 에베소 박물관, 각종 무기와 갑옷 등을 전시한 무기박물관, 유명 작곡가들의 초상화들과 그들이 사용하던 피아노 등도 전시되어 있는 고대 악기 박물관, 인종박물관 등이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열람실도 있다. 노이에 부르크에 연결되어서 호프부르크 콩그레스 센터가 붙어 있다.

 

노이에 부르크. 왼편의 돌출되어 있는 건물이 콘벤션 센터이다.

 

[콘벤션 센터] Congress Center

호프부르크에는 회의장 등 각종 행사를 치룰수 있는 방들이 많다. 35개나 된다. 가장 큰 회의장은 페스트잘이며 다음이 체레모니엔잘, 그리고 마모르잘(대리석홀)도 있다. 작은 방은 50여명을 수용할수 있으며 큰 홀은 5천명도 가능하다. 회의도 하고 연회도 할수 있으며 무도회도 개최할수 있다. 각종 전시회와 박람회도 할수 있다. 페스트잘에서는 우노시티에 오스트리아센터(ACV)가 생기기 전까지 국제원자력기구의 연례 총회가 열렸다. 현재는 유럽안전보장협동기구(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의 정기회의가 열린다.

 

호프부르크 콩그레스 센터 입구

 

● 페스트잘 (Festsaal) - Festival Hall

페스트잘의 넓이는 1천 평방미터나 된다. 호프부르크에서 가장 큰 홀이다. 원래는 대관식 홀로 만들었다. 하지만 대관식이 거행된 일은 한번도 없다. 내부장식은 1923년에야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등은 그때까지도 미완성이었다. 페스트잘은 세개의 대형 천정화로 유명하다. 알로이스 슈람(Alois Schramm)의 작품이다.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표현한 것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모토인 '단결된 힘으로'(Viribus Unitis)를 표현한 작품들이다. 반원형의 벽창인 루네트와 8각형의 파넬에는 에두아르드 바이트(Eduard Veith)와 빅토르 슈타우퍼(Viktor Stauffer)의 작품이 담겨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에 있어서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들이다. 막시밀리안 1세, 칼 5세, 페르디난트 1세, 루돌프 2세, 티롤의 페르디난트 2세의 모습을 천정화에서 볼수 있다. 벽면의 파넬에는 레오폴드 1세, 칼 6세, 오이겐 공자,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 3세이다. 페스트잘에서는 1967년에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열렸었다.

 

페스트잘에서의 모차르트-슈트라우스 음악회

                

● 세레모니 홀 (Zeremoniensaal - Montoyer Trakt)

노이에 부르크와 슈봐이처호프를 연결하는 건물로서 현재의 콩그레스 센터의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호프부르크의 코'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우뚝 붙어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2세 황제가 19세기 초에 벨기에의 건축가 루이 몽토이어(Louis Montoyer)에게 위임하여 지은 건물이다. 그래서 몽토이어동이라고도 부른다. 천정은 격자처럼 장식되어 있으며 26개의 아름다운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1천 3백개의 촛불을 밝혀야 했다. 세레모니 홀(체레모니엔잘)은 제국의 영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양쪽 벽에는 인조대리석으로 된 24개의 우람한 고린도 양식의 기둥이 천정을 받치고 있다. 바닥은 석재처럼 되어 있으나 실은 색칠한 깁섬이라는 재질이다. 이 곳에서 나폴레옹이 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인 마리 루이제에게 청혼을 하였고 수시로 화려한 궁중 무도회가 열렸다. 고난주간의 세족의 목요일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벳 황비가 12명의 빈곤한 남자와 여자를 초청하여 세족의 의를 가졌었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와 프린츠 오이겐 기마상

 

● 마모르잘(대리석홀: Mamorsaal) - Marble Room

체레모니엔잘의 옆에 있는 비교적 작은 방이다. 원래 16세기에 완성한 방이지만 내부 장식등을 완성한 것은 1840년 경이다. 체레모니엔잘의 매치가 되도록 설계했다. 제국 시절에는 주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체레모니엔잘에서 무도회가 열리면 황실 어린이들을 위한 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다.

 

마모르잘. 바박의 대리석(인조)이 아릅답다.

             

● 비밀회의실(Geheime Ratstube) - Privy Council Room

콩그레스 센터에 있는 개인회의실(비밀회의실)은 레오폴드 동의 한 파트이다. 이곳에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대표단들에게 교서를 낭독하였으며 그후 1900년 6월 28일에는 황제계승자로 선임된 페르디난트가 황제에 오르면 자기의 부인이나 자기의 아이들은 다음 황제의 자리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페르디난트와 결혼할 사람이 황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하이메 라트슈투베는 주로 연회장으로 사용된다.

 

● 대기실 겸 곁방(Antekammer) - Anteroom

마모르잘에 연결되어서 작은 비밀방이 있다. 말이 비밀이지만 다 아는 방이다. 스위스동에 있다. 다른 방들보다도 벽이 두터워서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수 없다. 원래는 스위스동의 탑방 중의 하나였다.

 

● 라데츠키 아파트(Radetzky-Appartements)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라데츠키 장군은 1848년 혁명의 해에 이탈리아에서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에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를 특히 존경하고 총애하였다. 그래서 스위스 동의 한 파트를 라데츠키 장군이 지낼수 있도록 할애하였다. 라데츠키 장군이 지내던 파트를 '라데츠키 아파트'라고 부른다.

 

● 기사의 방(Rittersaal) - Knight's Hall

스위스 동에는 기사의 방(또는 기사의 홀)도 있다. 이 방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1717년 5월 15일에 교황 클레멘스 11세를 대신하여 스피놀라 교황청 특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때에 사용한 물은 실제로 요단강에서 떠온 것이었다. 기사의 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방이 주로 황제 호위 기사들의 대기실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소연회장이나 회의실로 사용할수 있는 가르텐잘. 창밖으로 폭스가르텐이 보이기 때문에 가르텐잘이라고 한 것 같다.

                                

● 트라반텐슈투베(경호실: Trabantenstube) - Guard Room

기사의 방 바로 옆에 경비원들이 머물던 방이 있다. 트라반텐슈투베라고 부른다. 트라반트(Trabant)라는 단어는 '친위병'을 말한다. 호프부르크에서 황제를 경호하던 병사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 다흐포이어(다락방: Dachfoyer) - Rooftop Foyer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된 레도우텐잘을 복구할 때에 설계를 변경하여 지붕에 커다란 회랑을 만들었다. 이를 다흐포이어라고 부른다. 다흐(Dach)는 지붕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말하면 펜트하우스이다. 이렇게 만든 다흐포이어에서는 각종 회의, 모임, 연회를 가질수 있다. 건축가인 만레드 베도른(Manred Wehdorn)이 현대식으로 설계했다. 파노라마 창문을 통해서는 웅장한 미하엘 쿠폴라를 바라볼수 있다. 밤경치가 더욱 훌륭하다. 설계를 맡은 베도른은 페스트잘과 스위스 동의 남쪽 사이에 있는 공간을 호프부르크 갤러리로 개조하였다.

 

밤의 다흐포이어에서 바라보는 미하엘 쿠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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