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여인들 2

정준극 2013. 12. 6. 21:04

베토벤의 여인들 2

불멸의 연인은 누구인가?

 

게리 올드맨(Gary Oldman)이 베토벤의 역할을 맡은 1994년도 영화 '불멸의 연인'(Unsterbliche Geliebte: The Immortal Beloved)에는 "음악의 뒤에 숨어 있는 천재, 인간의 뒤에 숨어 있는 광기"(Genius behind the music, madness behind the human)라는 말이 나온다. 베토벤을 지칭하는 설명이다. 혹시 영어로 Immortal Beloved 라고 하니까 세인트 버나드 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베토벤의 미확인 러브 스토리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에 암시되어 있는 내용들을 모두 머리에서 지워버리기를 바란다. 새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영화는 영화일 뿐이므로 사실처럼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도 그렇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해서 독살했다는 식으로 몰아 간 것이 영화 '아마데우스'였다. 근거 없는 설정일 뿐이다. 그건 그렇고, 베토벤은 어느해인지 분명치 않지만 7월 6일과 7월 7일 이틀에 걸쳐 테플리츠에서 두번이나 편지를 썼다. 그런데 수신인의 이름도 쓰지 않았으며 받는 사람의 주소도 쓰지 않았다. 더구나 보내지도 않았다. 보내지도 않은 편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하면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후에 그 편지들이 그의 설합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베토벤이 1812년에 그 편지들을 썼다고 추측하고 있다. 1812년이라고 하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패배하여 회생불능이 된 해이다. 차이코브스키의 유명한 '1812년 서곡'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베토벤이 1812년 7월 6일과 7일에 쓴 편지들은 그가 '불멸의 연인'으로 삼고 있었던 사람에게 쓴 것이라는 얘기다. 그 '불멸의 연인'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누가 상대방인지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왕에 베토벤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으므로 '불멸의 연인'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1994년도 영화 '불멸의 연인'의 포스터

 

문제는 어느 누구도 '불멸의 연인'이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는 세 명의 후보자를 제시하였다. 베토벤의 친구 겸 비서인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는 베토벤이 말한 '불멸의 연인'이란 다름아니라 줄리에타 구이키아르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오늘날 대부분 학자들은 7월 6일이라고 적혀 있는 그 편지가 1812년에 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1811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편지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나 주소도 없고 다만 내용에 K라는 지명이 나온다. K라고 하면 아마 Karlsbad(칼스바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들이다. 칼스바드 온천장 역시 테플리츠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에 있다. 그런데 베토벤과 같은 시기에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이라는 아가씨가 테플리츠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베티나를 편지의 주인공이라고 보고 '불멸의 연인'의 후보자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베티나가 누군지 아직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베토벤의 다른 글을 참고해 보면 베티나는 당시 25세였고 베토벤과 한두번 만난 일이 있다고 한다. 베토벤은 베티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저 아는 사람으로서일 뿐이며 애인이나 와이프 후보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베토벤은 베티나를 The Child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25세의 젊은 여인이었지만 40 이 넘은 베토벤에게는 어린 아이로 보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베티나라는 여자는 좀 문제가 있는 여자였다. 행실이 바람직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베티나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하여 말할수 없는 관심을 표시하였고 특히 베토벤이 남긴 편지나 물건이라면 값을 불문하고 소지하려는 욕심들이 있었는데 베티나는 그것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 즉, 자기가 베토벤, 그리고 심지어는 괴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가짜 편지들을 만들어서 팔았던 것이다. 베토벤을 널리 홍보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베토벤을 알고 지낸 여러 여인들 중에서 베티나 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베티나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라는 확증은 하나도 없다.

 

베티나 폰 아르님

                        

그렇다면 누구일까? 우선 편지내용에 나온 주소에 K라고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상대방은 칼스바드(Karlsbad) 온천장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그리고 참으로 흥미롭게도 그해 여름 테플리츠에 가서 있었던 베토벤은 잠시 동안 칼스바드에 가서 콘서트를 가졌으며 칼스바드 온천장의 투숙객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을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이라면 누구든지 나름대로 '불멸의 연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어서 서로 바로 이 여자라고 내세웠다. 그중에서 몇명은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가 그 여자라고 주장했다.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의 동생이다. 요제피네는 그 즈음에 재혼을 하였다. 요제피네는 첫 결혼에서 딸을 하나 두었는데 공교롭다고 할까 하여튼 베토벤이 테플리츠에 머물렀던 때로부터 아홉달 뒤에 태어난 딸이었다. 혹시 베토벤의 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요제피네가 테플리츠에 머물렀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건 없었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비엔나에 있었다는 기록은 찾았다. 혹시 요제피네가 이름을 숨기고 몰래 테플리츠나 칼스바드에 갔었다면 가능성도 점칠수 있지만 그건 아닐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또 다른 후보자로 도로테아 폰 에르트만(Dorothea von Ertmann) 남작부인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로테아 폰 에르트만 남작부인은 그해 여름에 칼스바드에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베토벤은 도로테아에게 작품번호 101번인 피아노 소나타를 헌정했다. 그래서 '불멸의 연인'일지 모른다는 얘기들이지만 그건 지나친 비약이다. 도로테아는 일찍이 1804년에 베토벤의 피아노 학생이었지만 그후에 베토벤을 만났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토벤이 자기의 피아노 작품을 헌정했다고 해서 그 여인을 무조건 '불멸의 연인'의 리스트에 올리는 것도 문제는 있다. 베토벤은 1811년에 테플리츠에서 아말리 제발트(Amalie Sebald)라는 여인을 만나서 알고 지냈다. 1811년이라고 하면 베토벤이 문제의 7월 6일자와 7월 7일자 편지를 쓴 해라고 추측되는 해이다. 아말리 제발트는 1811년에 칼스바드가 아니라 테플리츠에 있었으므로 K로 시작되는 주소, 즉 칼스바드에는 없었다. 더구나 베토벤과 같은 시기에 테플리츠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베토벤은 아말리 제발트를 처음 만났을 때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말리 제발트는 베토벤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말리가 자기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농담이기는 하지만 베토벤을 '폭군'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마당에서 아말리 제발트가 '불멸의 연인'의 반열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아말리 제발트는 몇 년후에 결혼했다.

 

 

도로테아 폰 에르트만(왼편), 아말리 제발트(오른쪽)

 

베토벤이 1811년에 테플리츠에서 만난 또 하나의 여인은 배우인 라헬 레빈(Rachel Levin)이다. 에로틱한 배우였다. 그때 라헬 레빈은 애인인 바르나겐 백작과 함께 왔었다. 외교관인 바르나겐 백작은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해서 베토벤이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귀족들과 의논해서 돈을 모아 주기도 했다. 그해 여름에 바르나겐 백작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베토벤이 라헬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로 했는데 그건 비밀이다'라고 했다. 왜 비밀로 했을까가 궁금한 일이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다음해 여름에 베토벤과 라헬이 다시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어서 1814년에도 만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바르나겐 백작은 애인인 라헬이 베토벤과 별도로 만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마 바르나겐으로서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아무튼 백작과 라헬은 1814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후 라헬 레빈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다. 라헬이 백작과 결혼한 다음 해인 1815년에 베토벤은 송 사이클(연가곡)인 An die ferne Geliebte(먼 곳에 있는 연인에게)를 작곡했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번에는 '먼 곳에 있는 연인'이라는 표현을 했다. 학자들은 '먼곳에 있는 연인'과 '불멸의 연인'은 서로 다른 여자라고 주장했다. 왜 그렇게 구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해석은 가능하다. 베토벤이 1811년 또는 1812년에 '불멸의 연인'이라고 불렀던 여인이 1814년에는 결혼을 해서 이제는 더 이상 가깝게 지낼수가 없는 유부녀가 되었기 때문에 '먼곳에 있는 연인'이라고 불렀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라헬은 '불멸의 연인'도 되고 '먼곳에 있는 연인'도 된다? 아무도 모른다.

 

라헬 레빈

 

안토니 폰 브렌타노(Antonie von Brentano)라는 여인도 '불멸의 연인'의 후보자이다. 베티나 폰 아르님의 이복동생이다. 발이 넓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하는 일도 없다는 여인이었다. 1812년에 칼스바드에서 괴테와 베토벤의 처음 만남을 주선한 사람도 베티나였다. 안토니 폰 브렌타노는 1809년부터 1812년까지 비엔나에 살았었다. 그리고 1812년에 남편과 함께 칼스바드에 왔었다. 며칠후 안토니 부부는 프랑크푸르트로 떠났고 베토벤은 그후로 이들 부부를 다시 만난 일이 없다. 그런데 안토니는 칼스바드에 있었던 그해 여름에 임신을 하여 다음해 3월에 칼(Karl)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출산하였다. 그 아이가 베토벤과 무슨 관계에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흥미롭다고 말할수는 있다. 1804년으로부터 1812년 까지의 기간에는 베토벤에게 있어서 '비밀약혼설'까지 등장하는 등 상당히 복잡했던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이야말로 베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생산적인 기간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교향곡 7번과 8번을 완성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 그런 연후에 참으로 운명은 가혹한 것이어서 베토벤은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베토벤을 보고 솔직히 미쳤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짐작할만 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간혹 광폭할 정도의 성질을 보였다. 그런가하면 어린아이처럼 멍하니 있기도 했다. 이 기간 중에는 별로 작곡을 하지 않았다. '웰링턴의 승리'와 가곡 몇곡과 후기 피아노 소나타의 첫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817년부터 몇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장엄 미사곡'(미사 솔렘니스)과 불후의 교향곡 9번과 후기 현악4중주곡에 속하는 다섯 곡을 만들어냈다. 그가 작곡 이외에 할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처럼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안토니 폰 브렌타노

 

베토벤이 만났던 여러 여인 중에서 과연 누가 '불멸의 여인'인지는 알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ss)는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나 라이스는 베토벤의 제수(弟嫂)이다.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베토벤이 요한나를 그해 여름에 만나서 잠시 함께 지냈으며 그때 요한나가 임신을 하였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직후에 요한나는 베토벤의 동생인 카스퍼와 결혼하였으며 4개월 후에 아이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동생 카스퍼의 아들인 칼이 실제로는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암시하였다. 그래서 베토벤이 칼의 양육문제를 놓고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실제와 다르다.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이라고 쓴 편지는 1812년에 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때에는 요한나가 이미 베토벤의 동생 카스퍼 칼과 결혼한 후였다. 그렇다면 혹시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 운운한 편지를 1806년에 쓰지나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할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에는 7월 6일 월요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건 1812년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순전히 할리우드의 장사속이라고 보면 된다. 카스퍼 칼 반 베토벤은 1815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때 그의 아들 칼은 아홉살이었다. 그로부터 베토벤과 요한나는 칼의 양육문제를 놓고 지루한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요한나 (라이스) 베토벤

 

베토벤의 전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던져준 여인은 무어라해도 동생의 부인인 요한나였다. 베토벤은 말년에 몸도 아프고 특히 귀가 잘 들리지도 않는 어려운 시기에 거의 매일처럼 요한나와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조카 칼 때문이었다. 요한나가 어떤 여자냐는 것은 본 블로그의 '베토벤의 사람들' 편에 그나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못된 여자인것 만은 틀림없다. 아무튼 베토벤은 요한나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고 그러한 고통은 베토벤의 작곡 활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이 만일 청각에 이상이 없었다면? 더 훌륭한 작품들을 더 많이 만들었을 것이다. 만일 베토벤이 요한나 때문에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더 훌륭한 작품들은 더 많이 창조해 냈을 것이다. 베토벤에게 있어서 조카 칼의 문제는 자기 자신의 삶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 같다. 1826년, 즉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칼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리면서 별별 못된 짓을 다하고 다녔다. 베토벤이 모아둔 돈을 슬쩍 집어가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니, 삼촌이 그렇게도 걱정해주고 보살펴 주면 고마워서라도 공부나 잘 할 것이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헌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다니니 베토벤의 실망감이 크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심하게 걱정을 하자 칼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살소동을 벌였다. 그때 칼은 19세 청년이었다.

 

지휘하는 베토벤. 아마 교향곡 제9번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은 궁리 끝에 칼을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 군대에 가서 훈련도 받고 다른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사람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베토벤은 작품번호 131의 현악4중주곡 C 샤프 단조를 누구에게 헌정했다. 당시에 베토벤이 새로 여친이 생겨서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고는 볼수 없으므로 여러 정황을 짐작해 본 결과 칼의 부대장인 요제프 폰 슈투터하임(Josef von Stutterheim) 남작에게 헌정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조카 칼을 그의 보병연대에 병사로서 받아 주어 신경을 써주니 고맙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그 현악4중주곡 C 샤프 단조는 어찌나 복잡하고 깊이가 있었던지 웬만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곡이라고 한다. 그러니 헌정을 받은 폰 슈투터하임 남작으로서도 무슨 깡깽이 같은 음악인지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였다. 교향곡 10번의 스케치를 해 놓았지만 더 이상 발전을 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친구인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의 방에서 발견한 것은 '불멸의 연인에게'라고 연필로 쓴 편지와 작은 초상화가 들어있는 메달 한개였다. 초상화는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의 것이었다.

 

베토벤의 조카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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