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오페라역사 속성정복

오페라는 어떻게 발전되어 왔나?

정준극 2013. 12. 23. 13:56

오페라 발전의 알파와 오메가

 

이미 본 블로그의 여러 파트에서 오페라의 5백년 연혁을 소개하였고 그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의 오페라, 프랑스의 오페라, 독일의 오페라, 영국의 오페라에 대하여 집중고찰한바 있지만 그래도 오페라의 역사, 즉 오페라의 발전과정(또는 진화과정)을 종합한 설명이 부족한 듯 해서 다시 한번 설명코자 합니다. 모쪼록 오페라 애호가 제위께서는 복습하는 셈 치고 참고자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무대.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오페라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오페라'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59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페라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오푸스(opus: 작품)의 복수형태로서 단순히 작품들이라는 의미이다. 1598년에 플로렌스의 자코포 페리가 역사상 첫 오페라라고 할수 있는 '다프네'를 발표했고 이어 1600년에는 '에우리디체'가 공연되었다. 그런데 '다프네'는 미안한 말이지만 스코어가 분실되어서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수가 없다. 그나마 현재 남아 있는 파트는 서막과 아리아 한 곡 뿐이다. 1600년에 공연되었다는 '에우리디체'는 실상 자코포 페리의 단독작품이 아니라 에밀리오 카치니(Emilio Caccini: 1550-1602)와 공동으로 완성한 것인데 그나마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여 잊혀져 있는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1607년에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오르페오'(La favola d'Orfeo)가 오페라 역사상 첫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오페라는 17세기 초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반연극형태(semi-dramatic forms)의 시제품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드리갈, 마드리갈 사이클(마드리갈 코메디), 파스토랄, 마스크, 그리고 인터메디(intermedii)가 오페라의 앞길을 예비하며 공연되었다. 이런 종류의 공연은 주로 목가적인 주제에 목가적인 배경이었다. 그러다가 '다프네'가 나왔고 '에우리디체'가 나왔으며 마침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원래 제목은 '오르페오 전설')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초기의 오페라들은 이름만 오페라이지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구조의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사가 주류를 이루었고 노래라는 것은 반주에 맞추어 레시타티브를 조금 감정을 넣어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막간에 간주곡(interlude)형식으로 연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오페라에서는 아리아 또는 앙상블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에 음악 반주가 곁들인 레시타티브를 모아 놓은 것이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간혹 오케스트라가 간주곡 형식으로 연주하는 것이라 전부라고 보면 되었다. 무엇보다도 초기 오페라의 목적은 음악을 활성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를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명분이 섰기 때문이었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조국귀환'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초기 오페라에서의 레시타티브는 혼자 부르는 노래 스타일로서 말하자면 오늘날의 노래와 일반 대사의 중간역할이었다. 그러다가 레시타티브를 조금 격상하여 솔로 노래가 마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아리아의 반주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악기로 단성부를 연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를 모노디(monody)라고 불렀다. 사실상 모노디는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을 할 때에 주인공이 서정적인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애도를 표현 할 때에 간단한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고대 그리스의 스타일이 초기 오페라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를 부활시키는데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곁들인 연극에 솔로를 비로소 도입한 사람들은 자코포 페리, 줄리오 카치니, 에밀리오 델 카발리에레 등으로서 이들은 모두 플로렌스 카메라타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오페라에서 스피치를 멜로디 스타일의 레시타티브로 말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에 저음부의 통주 반주를 사용하였다. 이를 콘티누오(continuo)라고 불렀다. 초기 오페라에서 모노디의 레시타티브를 사용하는 것은 당시 유행하였던 성악 형태인 합창(코랄), 대위법(콘트라푼탈), 다성음악(폴리포닉)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모노디의 레시타티브는 다른 성악 형태와는 달리 단어를 분명하게 알아들을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모노디에 리듬이 붙고 간단하지만 코드(하모니)가 붙어서 점차 다양한 모습의 솔로 노래로 발전하였다.

 

플로렌스와 만투아에서 비롯된 오페라는 1620년대에 로마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오페라에서는 노래부르는 스타일이 두가지로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레시타티브와 아리아였다. 단어(대사)보다도 음악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아리아는 레시타티브에 멜로디를 더 붙인 형태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간혹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구별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경향은 초기 바로크 오페라에서 일반적이었다. 베니스가 로마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두 오페라, 즉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과 '포페아의 대관식'은 베니스의 극장을 위해 작곡된 것이다. 몬테베르디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카발리도 베니스를 위해서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니스에서는 1637년에 이탈리아 최초로 상업목적의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산 카시아노 극장(Teatro di San Cassiano)이었다. 프란체스코 카발리는 1639년부터 산 카시아노 극장을 운영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베니스에서의 민간 오페라극장의 개장은 오페라가 더 이상 왕족들이나 귀족 또는 음악계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라도 즐길수 있는 공연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다. 베니스에서의 오페라는 레시타티브 이외에도 아리아와 듀엣 등이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페라의 공연 중에 합창 앙상블은 볼수 없었다. 다만,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이나 '포페아의 대관식'에서는 트리오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등장할 규모가 큰 합창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포페아의 대관식'에는 탄식의 노래(라멘트)도 있었다. 옥타비오가 부르는 Addio Roma(로마여 잘 있어라)이다. 초기 바로크 오페라에서 대단히 뛰어난 아리아이다.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

 

'포페아의 대관식'을 시작으로 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제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변천하였다. '포페아의 대관식'은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두 오페라에 있어서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사랑의 듀엣을 도입한 것이다. 사랑의 듀엣은 상당한 호응을 받았고 그로부터 그 이후의 오페라에서는 사랑의 듀엣이 마치 유행처럼 되어서 오페라의 피날레는 의례 사랑의 듀엣이 장식하였다. 베니스 오페라의 그 다음 단계는 카발리의 '지아소네'(Giasone), 피에트로 안토니오 체스트의 '황금사과'(Il pomo d'oro), 조빈나 레그렌치의 '주스티노'(Il Giustino) 등이 주도하였다. 그래서 베니스라고 하면 물론 무역항으로서도 유명했지만 오페라의 도시로서도 유명했다. 당시로서는 베니스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얼마후 부터는 나폴리가 베니스의 역할을 넘겨 받았다. 이렇듯 이탈리아에서 플로렌스-로마-베니스-나폴리를 통해서 오페라가 꽃을 피우고 있는 한편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700년 경에는 비엔나, 파리, 함부르크, 런던이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오페라의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이제 오페라는 초기와 중기 바로크 시대를 거쳐 후기 바로크 오페라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후기 바로크 오페라는 기교적인 노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로 짧은 다 카포 아리아가 모델이 되었다. 그 이전의 바로크 오페라가 형식적인 면을 계속 유지한데 비하면 상당한 발전이었다. 특히 초기와 중기의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대사가 음악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나 후기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대사보다 음악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카발리의 '지아소네'. 현대적 연출

 

프랑스 오페라는 장 바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장 바티스트 륄리는 루이14세에게 봉사하는 궁정작곡가로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삼은 트라제디 리리크(tragedie-lyriques)를 작곡하였다. 륄리의 트라제디 리리크에서는 노래를 부를 때에 대사가 분명하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말하자면 대사가 우선이며 음악은 대사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융합하였다. 륄리는 길고 복잡한 아리아를 지양하고 단순한 아리아를 선호하였다. 발레는 프랑스 오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륄리는 또한 그의 오페라에 프랑스 스타일의 서곡(overture)을 도입하였다. 륄리가 강조한 서곡은 영국의 퍼셀과 헨델도 마찬가지로 인용하였다. 퍼셀의 '디도와 이니아스', 헨델의 '메시아'와 '세르세스'(Xerxes)에서 프랑스 스타일의 서곡을 들을수 있다. 륄리의 뒤를 이은 위대한 작곡가는 라모였다. 라모는 발레성향의 오페라에서 보다 복잡한 오케스트라 효과를 만들었다. 영국의 헨델은 18세기 전반에 이미 약 40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대부분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였다. 어떤 사람들은 헨델이 그의 오페라에서 아리아를 지나치게 다 카포 스타일로 구성한데 대하여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아리아는 드라마의 진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 비판이 있자 헨델은 1738년에 내놓은 '세르세스'에서 엄격한 오페라 세리아 스타일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세르세스'가 나오기 10년 전부터 영국 전통의 발라드 오페라인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가 공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 여파가 헨델의 오페라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거지 오페라'의 한 장면

 

독일에서는 1627년에 토르가우에서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가 작곡한 '다프네'가 왕실의 결혼식에서 공연되었다. 비록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이지만 하인리히 쉬츠의 '다프네'는 독일인에 의한 독일 최초의 정식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다. 하인리히 쉬츠는 베니스에서 몬테베르디 등에게 사사했으므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만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상황,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사회상황은 오페라와 같은 공연예술의 발전에 별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상 독일에서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지체된 것이었다. 독일에서 오페라 그룹이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678년 함부르크에서였다. 당시 함부르크에서는 라인하르트 카이저(Reinhard Keiser)가 오페라를 주도적으로 작곡했다. 헨델도 함부르크에 있을 때에 라인하르트 카이저의 오페라를 보고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 오페라는 베버와 베토벤이 등장함으로서 비로소 국제적인 위상을 차지할수 있었다.

 

헨델과 같은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라모가 활동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알레산드로 스칼라티가 활동했다. 알레산드로 스칼라티의 아버지인 도메니코 스칼라티도 작곡가였다. 스칼라티는 평상적인 대사를 위한 레시타티보 세코(recitative secco)와 음악 반주를 곁들인 레시타티보 아콤피냐토(recitative accompagnato)가 분명히 구분되도록 했다. 그는 또한 오페라에서 시적인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리아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스칼라티의 아리아를 들어보면 대단히 기교적이며 장식적인 것을 알수 있다. 스칼라티의 오페라에서는 음악이 드라마보다 우선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폴리의 오페라는 레시타티브 파사지에 의해 연결된 일련의 아리아로 구성된 것을 특징으로 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아리아 위주의 오페라는 나폴리 오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후기 바로크 오페라에서 스토리의 내용과 진전상황은 레시타티브가 비교적 짧게 설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액션은 레시타티브 중에 일어나며 아리아는 어떤 특정 상황을 반영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스칼라티와 헨델의 오페라에서는 스토리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액션도 많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 성악가였다. 대단히 기교적인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이라면 더 중요했다. 관중들은 그런 성악가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돈을 주고 표를 샀다.

 

헨델의 '세르세스'

 

오페라에서 성악 파트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계속 발전을 이룩하자 뒤를 이어 오케스트라 반주 그리고 오페라 서곡(overture)도 아울러 발전하였다. 스칼라티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으로서 신포니아(sinfonia)를 도입하였다. 그는 17세기 말에 그의 오페라에 빠르기-느리기-빠르기 패턴의 오케스트라 서곡을 도입하였다. 이같은 서곡은 훗날 고전시대에 교향악이 완성되는 선도역할을 했다. 그리고 17세기 말에 상당수 시인들은 종래의 오페라 대본을 보다 정화되고 세련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오페라 대본은 너무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이면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당시 오페라 대본을 쓰던 시인들은 순수한 오페라의 격에는 맞지 않는 코믹한 장면은 되도록 삭제하였으며 초자연적이거나 마법적인 내용, 그리고 받아 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일종의 오페라 세리아의 대본개혁이었다. 대표적인 대본가들은 나폴리의 아포스톨로 체노(Apostolo Zeno: 1668-1750)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였다. 이들의 대본은 주로 도덕이나 덕성의 승리를 높이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역경과 난관을 거치면서도 군주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보여주며 나라를 위한 애국심 등도 좋은 주제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아리아와 레시타티브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아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반면에 코러스의 사용은 감소하였다. 아무튼 18세기에 여러 작곡가들이 체노와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하여 오페라 세리아들을 작곡했다. 독일의 아돌프 하쎄(Adolf Hasse)는 가장 뛰어난 메타스타시오 오페라 세리아의 작곡가였다. 그러다가 고전주의가 기치를 높이 올리게 되고 글룩의 개혁 오페라가 공감을 얻게 되자 오페라 세리아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대신에 오페라 부파와 구원 오페라(rescue opera)가 등장하였다. 18세기 말에 오페라 세리아의 마지막 예는 모차르트의 '크레테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또는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이다.

 

모차르트의 '크레테 왕 이도메네오'

 

한편, 18세기 초에 나폴리에서는 오페라 세리아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으로 오페라 부파(오페라 코미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페라 부파 스타일이 나오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우선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 1733)이었다. 아마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이만큼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 부파도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오페라 부파의 특징은 음악과 스토리가 모두 활기에 넘쳐 있다는 것이 우선이다. 이어 연기에 있어서 극히 자연스러움, 그리고 솔직함이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 스토리의 진행이 매력적으로 유창하다는 것이다. 오페라 부파의 스토리는 대체로 일반 사람들의 일상적인 얘기, 생활의 솔직한 얘기이다. 아리아에 있어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다 카포를 배제하였다. 전반적으로 볼때 오페라 부파에서는 드라마틱한 성격이 더욱 분명해 졌다. 그 예로서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들수 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라 세르바 파드로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714-1787)과 그의 개혁오페라라는 아이디어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페라에서 기악적 전주곡을 향상시켰다. 과거의 오페라에서 서곡은 사실상 본 오페라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음악이었다. 예외가 있었다면 라모의 서곡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글룩 이후의 오페라에서는 서곡이 다음에 나오는 본 오페라의 내용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전환되었다. 전편의 내용을 암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1막의 내용을 암시하는 음악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후기 나폴리학파의 오페라에서는 아리아가 완전히 오페라 전편을 압도하는 형식이 되었다. 레오, 빈치, 좀멜리의 오페라를 보면 아리아가 거의 모두 대단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며 사실상 그런 아리아들이 오페라 전편을 장악하였다. 그래서 내용의 극적인 진전 상황은 어찌 되었든지 상당히 길고 대단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아리아 몇 곡을 들으면 오페라가 끝나는 형편도 있었다. 글룩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들은 그건 오페라의 정신을 오용하는 것이라며 공격하였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은 바로 그런 허식적인 노래와 액션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결과, 단순하고도 감동적인 아리아들이 나오게 되었다. 글룩은 새롭고 보다 활기에 넘치며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드라마를 창출하였다. 그런 오페라에서는 과거와는 달이 대사(가사)가 음악과 더욱 밀착되었다. 글룩은 예술에 대한 순수하고도 진정한 접근방법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고전의 스토리에 대하여 더욱 흥미를 가졌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추구하였다. 글룩은 주인공의 감정을 보다 단순하고 진실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주인공의 감정과 감각에 더욱 의미를 두었다. 글룩은 그의 첫번째 비엔나 오페라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1762)와 그 다음의 '알체스테'(Alceste: 1767)에는 이미 형식이나 스타일을 과감하게 타파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산 카를로 극장

 

우리는 보통 글룩을 개혁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말하지만 과연 어떤 것을 개혁했는지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 서곡(Overture)에서는 다음에 나오는 극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예견토록 해주었다. 그 전에는 서곡이 본 오페라와는 의미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순한 기악 연주였다.

-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는 레시타티브를 폭넓게 사용하였다(레시타티보 아콤파냐토). 그전에는 레시타티브에 하프시코드의 반주만을 사용했지만 개혁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으며 또한 다음 곡으로 넘어 갈 때에도 오케스트라가 연결 역할을 맡도록 하여 드라마의 진행이 스무스하게 했다.

- 과거의 길고도 기교적인 아리아들은 전반적으로 단축되었다. 짧은 다 카포(DC: Da Capo: 처음부터 반복한다는 뜻)가 유행이었다.

- 노래에 장식음을 붙이는 관례를 지양하였다.

- 인간 감정의 집합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앙상블과 코러스를 폭넓게 사용하였다. (앙상블은 여러 명이 중창을 하는 것을 말한다.)

- 음악형태의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레시타티브, 아리아, 코러스, 기악 파트 등이 드라마틱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혼합될수 있도록 하였다. ('오르페오'에서는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다 카포 아리아가 없다. 대신에 상황의 필요에 의해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여러 곡의 아리아들이 마련되었다.

 

글룩이야말로 18세기 후반에 음악이 고전 스타일을 충분히 대표토록 한 최초의 작곡가이다. 그의 '터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Tauride)를 들어보면 고전적인 우아함과 절제를 느낄수 있다. 글룩의 개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이 많이 있다. 스폰티니, 케루비니, 모차르트는 대표적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글룩의 후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글룩의 후계 역할을 맡을 사람이 나타난 것은 아마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일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은 세월은 흘렀지만 글룩의 개혁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볼수 있다. 모차르트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이며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의 작곡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모차르트야 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이다. 모차르트는 22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이도메네오', '후궁에서의 도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티토의 자비',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품들이다. 모차르트는 글룩의 아이디어를 반형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오페라의 개혁자는 아니었다. 그는 원래부터 타고난 오페라 작곡가였을 뿐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보면 피날레에 큰 비중을 둔 것을 알수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피날레에서는 거의 모든 출연자가 등장하여 합창을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오페라를 그랜드 클라이막스로 장식한다. 이같은 그랜드 피날레는 과거 바로크 오페라에서 피날레를 사랑의 듀엣으로 마감하는 것을 대신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합창 피날레는 대단히 효과적이어서 다른 작곡가들도 모차르트의 피날레 패턴을 따르는 경향이었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휘델리오', 베르디의 '아이다'(이 경우에는 피날레가 아니라 2막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 등이다. 모차르트는 또한 독일어로 된 코믹 오페라를 처음으로 작곡한 사람이다. '후궁에서의 도주'이다. '후궁에서의 도주'는 독일어로 만든 오페라라는 전통을 처음으로 시작한 경우이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18세기 말에는 유럽이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낭만주의적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글룩 스타일의 순수 오페라(또는 심각한 오페라)로부터 영웅적인 내용의 오페라, 또는 난관에 처한 사람을 극적으로 구원해 주는 이른바 구원오페라(rescue opera)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웅적인 오페라는 케루비니의 '메데'(Medee: 1797), 메울의 '조셉'(Joseph: 1807), 스폰티니의 '베스타 여사제'(La Vestale: 1807) 등이 대표적이다. 구원오페라는 프랑스의 혁명으로부터 나폴레옹의 실각에 이르기까지(1789-1815) 격변하는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의 장르이다. 구원오페라는 새로운 오페라의 장르이지만 따지고 보면 오페라 코미크에 속한 분야라고 할수 있다. 초기의 대표적인 구원오페라로서는 베르통의 '가혹한 수도원 생활'(Les Rigueurs du Cloitre: 1790),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Lodoiska: 1791) 등이 있다. 비엔나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구원오페라는 1802년으로 '로도이스카'였다. 1800년에 발표된 케루비니의 '이틀간의 사건'(Les Deux Journees), 피에르 갸보(Pierre Gaveaux)의 '레오노르'(Leonore: 1798)도 대표적인 구원오페라이다. '레오노르'는 다른 제목으로 '부부애'(l'Amour conjugal)라고도 한다. '레오노르'는 나중에 고전적인 구원오페라의 모델인 베토벤의 '휘델리오: 1805)의 바탕이 되었다. 구원오페라에서 주인공은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그를 평범한 사람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구원한다. 그런고로 구원오페라의 주제는 죽음이 아니라 생존이다. 구원오페라는 비록 고전 시기의 작품이지만 오페라에서는 낭만주의 장르에 속한다.

 

케루비니의 '이틀간의 사건'

 

독일의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는 통상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려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인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 1821)와 '오베론'(Oberon: 1826)에서 음악은 서정적이며 음색이 풍부하여 표현적이다. 그리고 아리아의 연속으로 구성하지 않고 대사와 액션이 융합되는 음악을 만들었다. 어떤 주인공은 그 사람에 합당하는 주제 음악이 있다. 이것은 나중에 바그너의 라이트모티브에 영향을 준 것이다. 낭만주의 오페라의 뒤를 이어 나타난 장르가 그랜도 오페라이다. 그랜드 오페라는 스폰티니가 파이에서 주도하였다. 대표작은 1807년의 '베스타 여사제'(La Vestale)이다. 마이에르베르(1791-1864)는 스폰티니 뒤를 이어 그랜드 오페라의 꽃을 피우게 했다. 대표작은 '위그노'(Les Huguenots), '아프리카의 여인'(L'Africane) 이다. 그랜드 오페라는 주로 파리를 중심으로 활발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시각적으로 스펙터클한 그랜드 오페라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 해당하는 것이 징슈필(Singspiel)이며 영국의 경우에는 발라드 오페라(Ballad opera)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타일의 교차영향의 결과이며 코믹과 순수(serious) 오페라의 융합이라고 볼수 있다. 따지고 보면 낭만주의 오페라의 근원은 오페라 코믹의 전통에 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 오페라의 주제는 오페라 코믹과 다름이 없다. 보통 사람들의 순수한 이야기 또는 최근의 역사적인 사실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그런 주제를 더 선호했다.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들은 이른바 '넘버 오페라'(number opera)였다. 드라마의 각 막(act)도 분명하게 구분되었으며 각 막에는 장(scene)을 두어 상황의 변경을 유연하게했다. 한편,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는 주제를 주로 최근의 유럽 역사에서 가져왔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는 무대가 웅장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앙상블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근사하고 멋진 발레를 첨가하는 것이었다. 그랜드 오페라는 통상 전 5막으로 구성되었다. 

 

다시 오페라의 탄생지인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말에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이 일어났으니 베리스모(Verismo)라는 것이었다. 베리스모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의 베리타(Verita)라는 단어에서 비롯한 것으로 베리타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베리스모는 19세기 유럽에 풍미하여던 로시니의 코미디, 벨칸토 시대, 그랜드 오페라, 베르디의 스펙터클한 오페라의 한세기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베리스모는 그리스 신화나 전설, 초자연, 영웅주의 등을 다루지 않았다. 대신에 실생활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마스카니), '팔리아치'(레온카발로), '아드리아나 르쿠브러'(칠레아), '안드레아 셰니에'(조르다노) 등이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메트.

                           

19세기 전반을 통해 작곡가들이 선호하는 것은 오페라에서 아리아가 전체적인 흐름과는 크게 마찰을 하지 않으면서 마치 별개의 음악처럼 작용하는 것이었다. 베르디는 아리아의 중요성을 크게 인정하였지만(다만, 마지막 두 작품, 즉 오텔로와 활슈타프를 제외하고)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바그너는 아리아를 거의 완전히 무시하였다. 바그너의 오페라에서는 아리아만을 전체적인 음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전체 막이 하나의 계속되는 드라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위대한 개혁자인 바그너는 예술의 시각적 표현에 주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시, 드라마, 음악, 무대는 모두 하나로 연합된 예술이었다. 바그너는 또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f)의 장시자이다. 라이트모티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서 여러번 설명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아무튼 어떤 주인공, 아이디어, 사건에 연관된 음악적 모티프를 만들어서 오페라에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바그너의 오페라에서는 교향악단도 전체 드라마의 한 파트이다. 바그너는 교향악단을 오페라 하우스에 불러 들여온 사람이다.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에서 모든 예술 분야가 동등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모든 것에 우선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바그너의 아이디어와는 대조되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왔으니 그 작곡가는 클로드 드빗시였다. 베토벤이 단 하나의 오페라인 '휘델리오'로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남겼듯이 드빗시도 단 하나의 오페라인 '플레아와 멜리상드: 1902)로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남겼다.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종종 첫번째 현대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오페라에서는 대사가 음악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드빗시는 '플레아'에서 별도의 대본을 사용하지 않고 중세 미터를링크(Maeterlinck)의 대사 하나하나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같은 드빗시의 집약되고 응축된 언어의 통렬한 작품은 바그너의 복잡한 작품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드빗시는 '플레아'를 완성하고 나서 또 하나의 오페라를 준비하였지만 만들지 못했다. 그 후에 '플레아' 스타일의 오페라는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오페라 애호가들 중에는 고전 오페라가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반 베르크,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를 좀 더 새로운 분위기에서 선호하였다.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라상드'. 현대적 연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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