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윌리엄 헨리 프라이의 '레오노라' - 78

정준극 2014. 3. 6. 14:43

레오노라(Leonora)

최초의 미국산 오페라...윌리엄 헨리 프라이(William Henry Fry)의 3막 오페라

 

윌리엄 헨리 프라이

 

미국은 1774년 독립한 이래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아가서 문화예술 활동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신생 미국의 상류층은 유럽 오페라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으로부터 오페라를 수입하여 공연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꼈다. 유럽에서는 일부러 오페라단을 조직하여 미국에 가서 공연을 했고 성악가들이라면 너도나도 미국에서 활동하기를 선호했다. 그만큼 명예도 얻고 돈도 벌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미국인에 의한 오페라가 나와야 한다'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어주 필라델피아 토박이인 윌리엄 헨리 프라이(William Henry Fry: 1813-1864)가 그 중심에 있었다. 프라이는 이탈리아에서 베르디가 태어났고 독일에서 바그너가 태어난 바로 그 해에 태어났다. 프라이는 1845년에 그의 첫 오페라인 '레오노라'(Leonora)를 완성하여 필라델피아의 체스넛 스트리트 극장에서 무대에 올렸다. 미국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 스타일의 첫 오페라였다. 유럽 스타일이라고 말한 것은 스토리를 유럽에서 가져온 것이며 음악도 도니체티 또는 벨리니 스타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스토리는 미국이 아직 독립을 하기 전, 스페인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의 스페인을 무대로 삼았다. 음악이 도니체티 스타일이라고 한 것은 형식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며 벨리니 스타일을 닮았다고 한 것은 멜로디가 우아하기 때문이다.

 

'레오노라'의 대본은 작곡자 자신이 썼지만 바탕은 영국 작가인 에드워드 벌워 라이턴(Edward Bulwer-Lytton: 1803-1873)의 '리옹 부인'(The Lady of Lyons)이다. '리옹 부인'은 또 다른 제목으로 '사랑과 프라이드'(Love and Pride)라고 한다. 1838년에 발표된 로맨틱 멜로드라마이다. 에드워드 벌워 라이턴은 작가이면서 시인, 극작가, 정치가인 인물이다. 원래 '리옹 부인'의 무대는 제목이 말하는 대로 프랑스이지만 오페라에서는 스페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리옹 부인'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폴랭 데샤플레(Pauline Deschapelles)는 보세앙 후작(Marquis Beausenat)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자만심 때문에 결혼하기가 싫어진다. 폴랭은 결국 결혼식 직전에 보세앙과의 결혼을 거부한다. 폴랭의 집 정원사를 지내다가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멜노트씨의 아들인 클로드 멜노트(Claude Melnotte)는 폴랭을 홀로 사랑하고 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어찌 할바를 모르고 있다. 멜노트의 아버지는 얼마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멜노트는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다. 보세앙은 멜노트가 평소에 폴랭을 연모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멜노트를 이용해서 폴랭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갚아줄 생각이다. 보세앙은 멜노트를 마치 외국에서 온 왕자처럼 꾸며 폴랭에게 접근토록 하여 폴랭과 결혼식까지 올리게 한후 실은 비천한 정원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서 결혼이 무효가 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폴랭은 멜노트를 외국에서 온 왕자인줄 알고 기꺼이 결혼식을 올린다. 멜노트는 결혼식을 올리고 난후 폴랭을 어머니와 자기가 살고 있는 허술한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제서야 폴랭은 멜노트가 모든 것을 꾸며 자기를 속인 것을 알고 화를 내고 멜노트를 저주하며 결혼을 무효로 한다. 멜노트는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는 의미에서 군대에 입대한다. 한편, 폴랭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여서 빚 때문에 파산할 지경이 된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보세앙이 폴랭에게 만일 마음을 돌려서 자기와 결혼한다면 아버지의 빚을 갚아 주겠다고 제안한다. 폴랭이 보세앙의 속셈을 알고 그같은 제안을 거절한다. 다행히 폴랭의 아버지의 문제는 무난히 해결된다. 군대에 간 멜노트는 큰 전공을 세워서 많은 보상을 받고 승진도 한다. 멜노트는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 폴랭은 멜노트의 진심을 알고 어느덧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오페라에서는 폴랭을 레오노라로, 멜노트는 훌리오로, 보세앙은 몬탈보로, 폴랭의 아버지는 발도르로, 멜노트의 어머니는 마리안나로 등장한다.

 

에드워드 벌워 라이턴의 '리옹 부인'은 미국 대륙에서 처음 미국인에 의해 제작된 그랜드 오페라인 '레오노라'의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카를 밀뢰커(Carl (or Karl) Joseph Millöcker: 1842-1899)의 1882년도 오페레타 '거지학생'(Der Bettelstudent), 그리고 영국의 프레데릭 코웬(Frederick Cowen: 1852-1935)의 1876년도 오페라 '폴랭'(Pauline)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오페라 '레오노라'에 나오는 대표적인 음악 넘버들은 다음과 같다.

- 아리아: Return to Me, Ah Brother Dear

- 아리아: Grant Me only one Hour

- 아리아: Ah Doomed Maiden

- 카바티나: My Every Thought

- 아리아: Oh Fortune! In Thy Frown

- 아리아: Ah! Canst Thou Bid Me Smother

- 아리아: Oh! Moment Too Enchanting

- 아리아: No, Blame Her Not

- 카바티나: Oh Lady, Have I Sought Too Boldly

- 듀엣: How Had I Wronged Thee Even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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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헨리 프라이

 

윌리엄 헨리 프라이는 미국의 선구적인 작곡가이며 평론가이고 저널리스트였다. 프라이는 미국에서 태어난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대규모 교향악단을 위한 곡을 작곡했으며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미국 음악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신문을 통해 음악평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인에 의한 미국 음악의 작곡을 강조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미국에서 주요한 신문인 National Gazette and Literary Register 라는 신문을 발행한 언론인 겸 출판인이었다. 그는 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군대의 군악대장을 지냈으며 당시 음악재단협회(Musical Fund Society)의 음악 감독이었던 레오폴드 메이넨이라는 사람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런 인연으로 프라이는 나중에 음악재단협회의 사무장으로 일했다.

 

프라이는 세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스터 여사제 아우렐리아'(Aurelia the Vestal), 레오노라(Leonora), '파리의 노트르 담'(Notre-Dame of Paris)이다. 1845년에 초연된 '레오노라'는 대단히 성공적인 제작이었다. '레오노라'는 미국인에 의해 작곡된 최초의 그랜드 오페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라이는 1846년부터 1852년까지 6년 동안 유럽에서 지냈다. 저널리스트로서였다. 그는 Philadelphia Public Ledger, New York Tribune, The Message Bird(나중에 New York Musical World and Times가 된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파리에 체류했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1854년에 '나이아가라 교향곡'(Niagara Symphony)를 작곡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이 교향곡에서 웅장한 폭포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11개의 팀파니를 사용했고 후둑후둑 튀는 물방울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향현을 댄 사이드 드럼을 사용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지며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일련의 웅장한 불협화음과 반음계의 음악을 사용했다. 1853년의 '산타 클로스: 크리스마스 교향곡'은 색스폰을 교향곡 연주에 사용한 것으로 관심을 끌었다. 색스폰은 불과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개발된 악기로서 일반적으로 팝 음악의 연주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프라이의 '레오노라'와 '파리의 노트르 담'은 상반된 반응을 얻었다. 영국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이 작품들을 싫어했고 진보적인 애국주의자들은 찬양했다. 프라이의 또 다른 작품으로서 관심을 끈 것으로는 '맥베스 서곡'이 있으며 이밖에도 현악 4중주곡과 성가합창곡들이 있다. 프라이는 향년 51세로서 버진 아일랜드의 산타 크루즈(생 크루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과로에 의한 폐염 증상이 도져서였다.

 

윌리엄 헨리 프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