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동유럽의 오페라

폴란드 국민오페라

정준극 2014. 3. 9. 22:40

이탈리아 바로크로부터 폴란드 국민오페라까지

외세의 억압에 항쟁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작품들

 

스타니슬라브 모니우츠코. 폴란드 국민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폴란드 오페라라고 하면 우선 폴란드 작곡가들이 작곡한 오페라들을 폴란드에서 공연한 것들을 말한다.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오페라들도 폴란드 오페라라고 할수 있다. 일반적으로 폴란드어로 된 오페라를 폴란드 오페라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폴란드 작곡가가 폴란드어 이외의 외국어로 작곡한 오페라도 폴란드 오페라의 범주에 들어간다. 예를 들면 크르지츠토프 펜데레키(Krzysztof Penderecki: 1933-)가 작곡한 '우부 왕'(Ubu Rex), 또는 '로우둔의 악마'(Die Teufel von Loudun)는 대본이 독일어로 되어 있지만 폴란드 오페라에 포함된다. 물론 이들 오페라는 나중에 폴란드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말은 없다.

 

모니우츠코의 '할카'. 폴란드 국립오페라극장.

                                          

폴란드에서의 오페라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초에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한 바로크 오페라를 공연한 것이 시초이다. 하기야 비단 폴란드 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국산 오페라가 없으므로 어쩔수 없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수입해서 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로크 오페라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되고 오히려 민족적인 오페라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던중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인근 강대국들의 등쌀에 어쩔수 없이 분할되어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영토를 분할하여 차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힘없는 나라의 설음을 절실히 느낀 폴란드는 그때부터 국민오페라, 민족오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독립운동 내지 자아발견 운동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스타니슬라브 모니우츠코(Stanislaw Moniuszko: 1819-1872)였다. 모니우츠코의 오페라들은 대체로 폴란드 민속을 주제로 삼은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할카'(Halka)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17세기의 폴란도 오페라, 18세기의 폴란드 오페라, 폴란드 국민오페라, 2차 대전 후의 오페라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키로 한다.

 

 

펜데레키의 '로우둔의 악마'(Die Teufel von Loudun)

 

[17세기의 폴란드 오페라] 폴란드에서 오페라가 처음 공연된 것은 시기스문드 바사 3세(Sigismund III Vasa: 1587-1632) 치하의 바로크 시대였다. 몇년도에 처음 공연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분명치 않다. 그런데 시기스문드 3세 자신은 오페라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그의 아들로서 나중에 왕위에 오른 블라디슬라브 4세(Wladyslaw IV: 재위 1632-1648)였다. 그는 아직 왕자로 있을 때부터 오페라를 관람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래서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여류작곡가인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1640)는 1625년에 블라디슬라브 왕자가 플로렌스를 방문했을 때 이를 기념하여 오페라 '알치나의 섬에서 루지에로 해방'(La liberazione di Ruggiero dall'isola d'Alcina)를 작곡해서 헌정하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1628년에 바르샤바에서도 공연되었다. 이처럼 17세기 초반에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다른 나라에서 공연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1628년에는 산티 오를란디(Santi Orlandi)라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Gli amori di Aci e Galatea(아치와 갈라테아의 사랑)이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블라디슬라브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왕궁에서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도록 준비를 해주었고 이어 163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의 마르코 스카키 오페라단을 폴란드로 초청했다. 마르코 스카키 오페라단은 1635년에 구약성경의 유딧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주디타'(Giuditta)를 공연하였다. '주디타'의 작곡자는 아마도 비르질리오 푸치텔리(Virgilio Puccitelli)라고 한다. 아무튼 블라디슬라브가 왕으로 있을 때 여러 편의 오페라가 공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블라디슬라브 바사.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오페라의 파트론이 된 군주이다. 루벤스 작품

 

[작소니 시대: 1697-1763)]블라디슬라브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왕이 된 얀 카시미르 2세(Jan II Casimir), 미할 코리부트 비스니오비키(Michal Korybut Wisniowiecki), 얀 조비에스키 3세(Jan III Sobieski) 등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시간도 없고 또한 특별한 취미도 없어서 오페라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폴란드는 다른 나라 사람이 왕으로 선출되는 이상한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로 독일 작소니의 선제후들이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1697년에 작소니 선제후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폴란드 사람들로서는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약소국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선제후는 문화예술을 진작시키는 좋은 일도 했다. 작소니 선제후는 드레스덴의 자기 왕궁에 상당한 규모의 오페라 극장을 마련하고 시간만 있으면 오페라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얼마후인 1728년 바르샤바에 폴란드 최초의 일반인을 위한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폴란드의 오페라를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또 다른 작소니 출신의 왕인 아우구스트 3세(August III)였다. 그는 1748년에 왕립오페라극장을 세우고 이탈리아와 독일 작곡가들이 만든 오페라들을 공연토록 했다. 당시 유럽 오페라에서 스타 작곡가로 군림하던 독일의 요한 아돌프 하세(Johann Adolf Hasse)가 폴란드를 찾아왔다. 하세의 오페라는 폴란드 오페라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높여준 것이었다. 하세가 바르샤바에서 만든 오페라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오페라 세리아에 속하는 제노비아(Zenobia)였다. 대본은 유명한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가 썼으며 1761년에 바르샤바 왕립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제노비아(Zenobia)는 기원후 3세기경 시리아 지역에 있었던 팔미레느 제국의 여왕이었다. 제노비아는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전쟁을 일으켜 로마가 차지하고 있던 이집트를 점령하고 통치하였으으나 나중에 로마 군대에 패배하여 로마로 압송되어 수치스러운 최후를 맞이하였다. 로베르트 슈말츠 작품. 제노비아가 로마로 잡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국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오페라] 폴란드 오페라의 전성기는 포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슬라브 아우구스트 포니아토브스키(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통치 기간 중이었다. 이 기간 중에 인근 강대국들이 폴란드의 영토를 야금야금 베어 먹기 시작하더니 얼마후에는 급기여 폴란드라는 나라의 명칭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일이 있다. 폴란드를 놓고 마치 치즈를 베어 먹듯이 슬금슬금 베어 먹은 나라들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였다. 이 세나라는 1772년부터 1795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세번에 걸쳐 폴란드를 나누어 가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페라는 마치 특권이라도 누리듯이 대우를 받았다. 우선 1779년에 오페라와 발레를 전문으로 공연하는 국립극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폴란드어로 된 오페라가 처음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가 주류를 이루는 오페라들이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그 기간 중에 폴란드어 오페라가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어떤 것인지는 알수 없다. 다만, 1777년에 프란치체크 보호몰레츠(Franciszek Bohomolec)이라는 작가가 '가난이 행복을 만든다'(Nedza uszczesliwiona)라는 칸타타의 대본을 쓴 일이 있는데 그 대본을 보이치에크 보구슬라브스키(Wojciech Boguslawski: 1757-1829)라는 작가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어 마치에이 카미엔스키(Maciej Kamienski)라는 작곡가에게 음악을 붙이도록 하여 오페라로 만든 것이 있다. 이것이 아직까지는 폴란드어로 된 최초의 오페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보구슬라브스키는 그후 연극의 극본을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폴란드 극장의 아버지'라며 칭송했다.

 

폴란드 극장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보이치에크 보구슬라브스키

 

보구슬라브스키는 얀 스테파니(Jan Stefani)가 음악을 붙인 '사냥을 떠난 헨리 4세'(Henryk IV na lowach)의 대본을 썼다. 폴란드 작가와 작곡가에 의한 첫 오페라 부파이다. 두 사람은 이어 '상상의 기적'(Cud mniemany) 또는 '크라코우인들과 하일랜더들'(Krakowiaki i Gorale: Krakowians and the HIghlanders)을 완성했다. 이 오페라는 1794년 3월 1일에 바르샤바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오페라의 스코어는 그후 제정러시아에 항거하는 1863년의 '1월 항쟁'때에 분실되어 그런 오페라가 있었다는데 어떤 것인지 몰라서 속이 상했는데 다행히 거의 50년만인 1929년에 극장감독 겸 영화감독이며 극작가이고 작곡도 하는 레옹 쉴러(Leon Schiller: 1887-1954)가 우연히 발견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레옹 쉴러는 '상상의 기적'을 '폴란드 국민 오페라'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오페라가 초연을 가진 때로부터 몇 주 후에 폴란드 애국지사인 타데우츠 코스치우츠코(Tadeus Kosciuszko)가 주도하여 제정 러시아에 대항하는 코스치우츠코 항쟁(Kosciuszko stycznieowe)이 일어났는데 이 오페라에는 이미 코우치우츠코 항쟁을 지지하는 구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794년에 이 오페라가 초연 이후 대단한 인기를 끌자 제정 러시아 당국은 당장 이 오페라의 공연을 금지하였다.

 

1863년 1월 항쟁에 대한 그림. 제정러시아의 학정에 항거하는 폴란드 백성들의 항쟁이 무위로 끝나고 많은 백성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의 장면이다. 제정러시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어떤 대장장이가 어쩔수 없이 어떤 여인의 갸날픈 손에 착고를 채우려고 하고 있다. 폴란드 국민들은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조국을 나누어 가지고 압정을 했기 때문에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원한에 넘쳐 있다.

 

[폴란드 국민오페라]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강대국들의 손에 의해서 찟김을 당하고 갈라져서 쇠락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오페라 활동까지 몰락된 것은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폴란드 계몽주의 사상의 선구자이며 배우 겸 극작가인 보이치에크 보구슬라브스키가 있었다. 1790년대에 작곡가인 요제프 엘스너(Jozef Elsner: 1769-1854)가 보구슬라브스키의 팀에 합류하여 폴란드 민속음악을 살린 오페라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엘스너는 폴란드 국민오페라를 이끈 사람이었다. 엘스너는 여러 편의 오페라를 만들었지만 불행하게도 모두 분실되어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기록상으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존 사람들'(Amazonki 또는 Herminia)이다. 부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이다. 엘스너는 바르샤바 국립극장을 책임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폴란드 민속음악을 이용한 오페라들을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이스카하르'(Iskahar)는 보구슬라브스키가 대본을 쓴 것이다. 엘스너는 바르샤바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서도 활동했다. 1810년에 카롤 쿠르핀스키(Karol Kurpinski: 1785-1857)가 바르샤바 국립극장의 엘스너와 합류하였다. 쿠르핀스키는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엘스너와 쿠르핀스키는 서로 대단한 라이발이어서 사사건건 의견의 충돌을 보았다. 그렇게 13년을 지냈다. 결국 엘스너는 쿠르핀스키의 정치적인 계략에 물려 들어서 당국으로부터 사임을 종용받아 국립극장을 떠나야 했다.

 

요제프 엘스너

 

엘스너는 비록 국립극장을 떠났지만 그는 국립극장에 재직하는 동안 거의 30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1809년에 보구슬라브스키의 대본으로 완성한 '레체크 결백왕'(Leszek the White)였다. 레체크는 12세기 폴란드의 대공으로서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세번이나 왕위에서 축출되었다가 복위한 전력이 있으며 결국은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레체크 결백왕'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그후 코믹 오페라인 '일곱 곱하기 하나'(Siedem razy jeden)와 '팔을 휘젓는 임금님'(Krol Lokietek: King Elbow-High)을 내놓았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엘스너는 실레지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배운 언어는 독일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스너에 대하여 폴란드 말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폴란드 국민음악의 선구자가 될수 있느냐면서 비난했다. 나중에 엘스너는 폴란드어를 충분히 습득하여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엘스너가 폴란드 분할의 장본인 중의 하나인 제정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짜르를 찬양하는 오페라를 만든 것을 가지고 문제로 삼았다. 엘스너는 1830년 11월 항쟁이 있은 직후부터 지난날 그의 모든 행적을 후회하고 오로지 폴란드만을 위한 활동을 했다. 그는 폴란드어야 말로 노래 가사에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 기간에 카롤 쿠르핀스키의 오페라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끌었다. 쿠르핀스키는 18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모두 인기를 끌었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초르츠틴성'(Zamek w Czorsztynie: The Castle in Czorsztyn)이었다. 이 작품은 모니우츠코의 '유령의 장원'(The Haunted Manor)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또 하나 쿠르핀스키의 인기 작품은 '폴란드 왕국의 부활'(wskrzeszenie Krolestwa Polskiego: the Resurrection of the Kingdom of Poland)였다. 열렬한 애국자였던 쿠르핀스키는 그의 오페라를 폴란드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은 쿠르핀스키를 폴란드의 베르디라고 불렀다. 쿠르핀스키는 비록 엘스너가 순수한 폴란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국립극장에서 배격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립극장의 현대화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외국 오페라들도 무대에 올려서 폴란드에게 자극이 되도록 했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스폰티니의 '라 베스탈레', 다니엘 오버의 '프라 디아볼로', 베버의 '마탄의 사수' 그리고 도니체티, 마이에르베르, 로시니의 작품들도 상당수 공연토록 했다. 그러던 중 1833년에 리보르노(Livorno)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인인 안토니오 코라찌(Antonio Corazzi)가 바르샤바 국립오페라를 위해 새로운 극장을 지었다.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했다. 개관기념 공연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였다.

 

폴란드의 베르디라고 불리는 카롤 쿠르핀스키

 

여기서 잠시 스타니슬라브 모니우츠코에 대하여 좀 더 소개코자 한다. 모니우츠코는 폴란드 국민오페라의 창시자이다. 말하자면 러시의 글링카, 체코의 스메타나, 헝가리의 에르켈과 같은 역할을 했다. 모니우츠코는 1837년에 다른 나라에 가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폴란드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후에 그는 유명한 폴란드의 로맨틱 오페라인 '할카'(Halka)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2막으로 된 '할카'를 빌니우스에서 초연했다. 그로부터 10년후에 4막으로 만든 '할카'를 바르샤바에서 초연했다. '할카'는 폴란드 국민오페라 중에서 가장 세련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할카'에는 폴란드 민속 무곡인 폴로네이즈, 마주르카, 둠카(dumkas) 등이 나오기 때문에 대단히 흥겨우며 정겹다. 더구나 '할카'는 '일괄 작품'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일괄 작품(through-composed)이라는 것은 전체 대본에 음악을 붙인 것으로 대화체의 대사가 나오지 않는 작품을 말한다. 블로드치미에르츠 볼스키(Wlodzimierz Wolski)가 쓴 대본은 폴란드 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것이다. 평론가들은 '할카'가 괴테의 '파우스트'와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모니우츠코의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유령의 장원'(Straszny Dwor: The Haunted Manor)이다. 제목은 으스스할지 모르지만 실은 '할카'보다 더 코믹한 내용이다. 대본은 얀 체친스키(Jan Checinski)가 썼다. 폴란드 귀족들의 사르마티즘(Sarmatism) 전통을 폭넓게 암시한 내용이며 아울러 독립에 대한 감성을 표현한 것이다. 사르마티즘이란 것은 15-18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기에 귀족들의 생활양식, 문화, 사상을 표현한 것을 말한다. '유령의 장원'은 1865년에 초연되었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작품에 과거에 대한 향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것이라며 공연금지의 조치를 내렸다.

 

'할카'의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