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동유럽의 오페라

헝가리 그랜드 오페라의 아버지 페렌츠 에르켈

정준극 2014. 4. 4. 21:24

헝가리 국민 오페라의 아버지 에르켈 페렌츠(페렌츠 에르켈: Erkel Ferenc)

헝가리 국가 '훔누츠'도 작곡

 

페렌츠 에르켈

 

페렌츠 에르켈(Ferenc Erkel: 1810-1893: Erkel Ferenc)은 헝가리 국민 오페라의 아버지이다. 헝가리의 민속적인 향취가 물씬 풍겨나는 작품들이다.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인 그는 주로 헝가리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들을 남겼다. 역사적 내용의 오페라는 대체로 그랜드 오페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렌츠 에르켈을 헝가리 그랜드 오페라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페렌츠 에르켈은 1844년부터 채택된 헝가리 국가(國歌)인 '힘누츠'(Himnusz: 영어로는 Hymn)도 작곡했다. 헝가리의 안익태 선생이다. 에르켈이 '힘누츠'를 작곡하기 전에는 '라코치 행진곡'(Rakóczi march: Rákóczi-induló)이 헝가리 국가로 사용되었다. '라코치 행진곡'은 1730년경에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작곡자는 미상이다. '라코치 행진곡', 또는 '라코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헝가리의 영웅인 프란시스 라코치(Francis Rakoczi: 1676-1735) 백작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여서 나중에 그런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라코치 백작은 1703-11년간 합스부르크에 항거하는 전투를 벌여 헝가리의 독립을 높이 외친 인물이다. 에르켈은 프랑스의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 '라코치 행진곡'을 소개해 주었고 베를리오즈는 '라코치 행진곡'을 '파우스트의 겁벌'(The Damnation of Faust)에 사용하였다. 페렌츠 리스트(프란츠 리스트)도 라코치 행진곡을 바탕으로 헝가리 광시곡 15번을 작곡했다.

 

'후냐디 라츨로'의 한 장면

               

에르켈은 헝가리의 동쪽 끝,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기울라(Gyula)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에서 불과 5 km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기울라는 독일어로는 율라(Jula)라고 하며 루마니아어로는 줄라(Giula)라고 부르는 곳이다. 중세의 고성과 온천장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아버지 요세프 에르켈은 음악가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에르켈은 헝가리의 유명한 배우이며 작곡가이고 대본가이며 번역가인 베니 에그레시(Béni Egressy: 1814-1851)와 친분이 두터웠다. 베니 에그레시는 에르켈을 위해 '후냐디 라츨로'를 포함한 첫 세편의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 에르켈은 오페라로서 유명하지만 피아노곡과 합창곡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관현악곡인 '축제 서곡'(Festival Overture: Unnepi nyitany)은 헝가리적인 장엄함이 배어 있는 곳이어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에르켈은 10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마지막 작품 '케메니 시몬'(Kemény Simon)은 미완성이었다. 에르켈의 오페라 중에서 '후냐디 라츨로'(Hunaydi László)와 '방크 반'(Bánk Bán)은 헝가리의 대표적인 국민 오페라이다. 헝가리 국민으로서 이 두 오페라를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한편, 페렌츠 에르켈은 독일어로 프란츠 에르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헝가리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성을 앞에 붙이고 이름을 나중에 붙이므로 실상 페렌츠 에르켈은 헝가리에서 에르켈 페렌츠라고 부르며 페렌츠 에르켈이라고 부르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에르켈 페렌츠의 풀 네임은 에르켈 페렌츠 기외르기 알라요스(Erkel Ferenc Györgyi Alajos)이다. 호적상의 이름을 길게 가지는 것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방크 반'의 무대

            

에르켈은 1853년에 부다페스트교향악단을 창단했다. 에르켈은 1886년까지 헝가리음악원장을 지냈으며 이 음악원의 피아노 교사로서도 활동했다.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은 1884년에 문을 열었는데 에르켈이 초대 음악감독을 지냈다. 에르켈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기울라, 엘렉, 라츨로, 산도르이다. 모두 작곡에 재능이 있어서 에르켈이 후기 오페라들을 작곡할 때에 참여했다. 에르켈은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체스(서양장기) 선수였다. 에르켈은 부다페스트체스클럽(페스티 사크 쾨르)의 창설자였다. 헝가리국립오페라하우스 이외에 부다페스트에는 또 하나의 오페라 하우스가 1911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극장은 1953년부터 에르켈을 기념하여 극장이름을 '에르켈 극장'이라고 변경하였다. 헝가리 국립은행은 2010년에 에르켈 탄생 200 주년을 기념하여 5천 포린트의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다.

 

헝가리 정부가 발행한 에르켈 페렌츠의 오페라 '후냐디 라츨로' 기념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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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냐디 라츨로' 이야기]

이 오페라는 1456-57년에 헝가리 왕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항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헝가리 군의 위대한 야노스 후냐디는 오토만 터키의 침공을 막아내어 헝가리를 위기에서 구출한 장군이다. 그의 기념상이 부다페스트의 영웅의 광장에 엄숙하게 서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헝가리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알수 있다. 후냐디 장군은 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을 떠난다. 후냐디가 가지고 있던 군사령관 등 모든 권력은 평소 그를 시기하던 적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새로 왕이 된 라츨로 5세는 연약한 성품인데다 주위에는 사악한 신하들만 있다. 라츨로 왕은 간신들의 얘기만 듣는다. 간신들은 왕에게 후냐디의 아들로서 역시 헝가리군의 뛰어난 장교인 라츨로를 죽이라고 주장한다. 라츨로를 따르는 사람이 그런 내용을 미리 라츨로에게 알려주어서 그는 다행히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전한다. 왕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세상 떠난 후냐디의 가족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친밀함을 보인다. 왕은 후냐디의 부인인 에르체베트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만 에르체베트는 라츨로 왕이 후냐디의 남아 있는 가족들을 해칠 것 같아서 두려워한다. 왕은 라츨로의 약혼자인 마리아를 보고 좋아하게 된다. 마리아는 왕에게 충성을 표명한 팔라틴 백작의 딸이다. 왕은 마리아의 아버지에게 만일 마리아가 반역자와 결혼하면 같은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압력을 넣는다. 얼마후 왕은 마침내 라츨로 장군을 체포하고 그를 반역자로 낙인을 찍어 사형선고를 내린다. 마리아는 왕에게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으니 라츨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왕은 그 간청을 듣지 않는다. 사형집행인이 칼로 라츨로 장군의 목을 내려치지만 네번째에 가서야 겨우 성공한다.

 

방크 반. 뉴욕 데이빗 코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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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크 반'이야기]

'방크 반'(Bank Ban)은 13세기 헝가리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나의 나라, 나의 나라는 나의 모든 것!'(My land, my land is all to me!)은 방크 반이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로  헝가리가 주권국가임을 천명하는 애국적인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외세의 압정을 받아온 헝가리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헝가리 국민들이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할 때에는 간혹 이 노래가 등장한다. 무대는 13세기의 십자군 시대이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게르트루트왕비에게 대항하기 위해 단결한다. 게르트루트는 독일인으로서 엔드레(Endre: Andrew)2세 국왕의 왕비이다. 게르트루트는 엔드레 국왕이 십자군전쟁에 나간 틈을 타서 측근들과 함께 헝가리의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헝가리 국민들의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약탈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귀족들이 항쟁을 다짐하지만 방크 반은 주저한다. 엔드레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크 반은 왕비의 사촌인 오토가 게르트루트 왕비의 묵인 아래 방크 반의 아름다운 부인인 멜린다를 능욕하자 급기야는 왕비를 살해한다. 엔드르 왕이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자 방크 반은 왕에게 자기가 저지를 행동을 고백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엔드르 왕은 오히려 방크 반의 세력을 경계하여 그에게 죄를 씌우려한다. 그러던 차에 방크 반은 사랑하는 부인 멜린다가 치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자 더 이상 참을수 없어서 과감히 국왕에게 맞서 항거한다. 이것이 오페라 방크 반의 대충 줄거리이다. 에르켈은 ‘방크 반’에서 헝가리 특유의 민속 멜로디를 상당히 사용함으로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 드높였다.

 

독재에 항거하여 싸우기로 결심하는 방크 반과 동료들


에르켈은 ‘방크 반’을 1815년경에 완성했지만 당시 헝가리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당국의 검열 때문에 1860년까지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에르켈은 아마도 낭만주의시대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작곡가일지 모른다. 에르켈은 ‘방크 반’이나 ‘후냐디 라즐로’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헝가리 이외에서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에르켈은 헝가리의 민족오페라를 국제 오페라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에르켈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헝가리의 프란츠(페렌츠) 리스트, 그리고 프랑스의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페스트(Pest)에서 ‘후냐디 라즐로’를 보고 감격하여 지원을 약속했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에르켈은 다른 음악가와는 달리 생전에 헝가리를 떠나본 일이 없다.

 

방크 반. 부다페스트 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