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동유럽의 오페라

프라하를 사랑한 작곡가들

정준극 2014. 4. 6. 18:46

위대한 작곡가들의 프라하 사랑

 

프라하(프라그)는 과거의 찬란한 역사 중에서도 음악역사를 가장 자랑한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프라하를 마치 고향처럼 생각하여 애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프라하의 음악적 명성을 한층 높여 준 처사였다. 많은 음악가들이 프라하에 체류하면서 보헤미아의 정취를 그들의 음악에 반영하였다. 그리고 비록 프라하에 체류하지 않았던 작곡가들이라도 그들의 작품에 프라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어떤 작곡가들이 프라하를 사랑하였는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프라하에 대하여 '프라하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 준다'고 말한 일이 있다. 비엔나 사람들이나 그 전의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해 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멀리하였지만 프라하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제 처럼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생애에서 거의 반년 동안 프라하에서 살았었다. 모차르트와 프라하는 많은 인연이 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12월에 프라하의 에스테이트 극장에서 공연되어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피가로의 결혼'은 그보다 7개월 전에 비엔나의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었다. 프라하가 '피가로의 결혼'의 진가를 알아주었던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프라하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직접 프라하에 와서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이듬해에 프라하로 가서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다. 그때 그는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투노브스키 궁전에서 지냈다. 모차르트는 그 후에도 두번이나 프라하를 더 방문했다. 그때에는 스미초프에 있는 빌라 베르트람카에서 머물렀다. 당시에 빌라 베르트람카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교외에 있었다. 모차르트는 1787년 1월 19일에 프라하에서 '프라하 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D 장조를 지휘했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 프라하를 방문 중인 이탈리아 오페라단으로부터 오페라를 하나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비엔나에 돌아오는 대로 작곡을 시작하여 마침내 완성한 것이 '돈 조반니'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에서 그의 장례식은 대단히 간소한 것이었다.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다른 시신들과 함께 너무나 평범하게 묻혔다. 그래서 오늘날 모차르트의 유해를 찾기는 커녕 진짜 묘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라하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12월 14일에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성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장엄한 추도의 미사를 가졌다. 무려 4천명이 참석하는 대단한 추도식이었다. 프라하가 모차르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프라하의 성니콜라스 대성당.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9일 후인 1791년 12월 14일 이곳에서 모차르트를 추도하는 미사가 열렸다. 무려 4천명의 프라하 시민들이 참석하는 장엄한 미사였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베토벤은 프라하에서 두 번에 걸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그보다도 베토벤은 프라하는 아니지만  보헤미아의 유명한 온천장인 테플리체(Teplice)에서 저 유명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서한들을 썼다. 베토벤은 테플리체를 몇 번 방문했었다. 어느때는 괴테와 함께 체류한 일도 있다. 하루는 괴테와 함께 길을 산책하는데 괴테는 누군지 알만한 왕족들과 귀족들이 지나가면 모자를 벗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으나 베토벤은 그들을 못 본체 지나갔다. 그러자 괴테가 베토벤에게 '아니 여보시게. 저 분들에게 인사 좀 하면 안되나? 아주 영향력 있는 분들이라네'라고 충고하였다. 베토벤은 '아니, 저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야지, 왜 내가 저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단 말입니까?'라는 내용으로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과연 베토벤!

 

보헤미아 북서부의 테플리체에 있는 온천장(스파)의 하나. 테플리체에는 베토벤이 머물렀던 스파도 있다.

 

[안토니오 비발디] 베니스 출신의 비발디는 비엔나에 와서 잠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비엔나와 인연이 많지만 프라하와도 인연이 있다. 비발디의 오페라 '아르기포'(Argippo)는 1730년 프라하의 슈포르크 백작궁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수세기 동안 스코어가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6년에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체코공화국 출신의 온드레이 마체크(Ondrej Mocek)가 전체 스코어 중에서 거의 3분의 2을 발견함으로서 비발디 연구에 귀중한 공헌을 했다. 작곡가인 마체크는 비발디의 다른 아리아를 이용해서 이 오페라를 완성했다. 완성된 '아르기포'는 2008년 5월 3일에 역사적인 프라하성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프라하성의 위용. 프라하의 흐르드카니 지역에 있으며 9세기 경에 완성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전이다. 보헤미아 왕들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거처로 삼았었다.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는 1840년부터 1846년까지 6년 동안 프라하에서 살았었다. 리스트는 프라하에서 콘서트를 자주 개최하였다. 리스트는 보헤미아의 작곡가인 베드리치 스메타나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의 후원자 역할도 했다. 스메타나는 1847년에 독일에 있던 리스트에게 프라하에 음악학교를 설치코자 하니 경제적인 후원을 해 달라고 부탁했고 리스트의 지원으로 프라하 음악학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프라하 블타바 강변의 스메타나 기념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프라하법과대학생들이 어느때 프라하를 방문한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자기들의 무도회를 위해 왈츠를 한 곡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비엔나에 돌아온 요한 슈트라우스는 '몰다비아의 사운드'(Sounds of Moldavia: Czechen Walzer)라는 왈츠를 작곡했다. 이 왈츠는 1846년 1월 1일 비엔나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어 프라하의 법과대학생 무도회에서 연주되었다.

 

프라하대학교 (카를로바대학교) 본관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는 20대 후반인 1830년대의 어느 때에 프라하에서 살았었다.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였다. 바그너의 교향곡 C 장조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 차이코브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에 있으면서 프라하를 세번이나 방문했다. 그 중에서 두번은 1888년에 방문했다. 한번은 1월 31일부터 2월 12일까지 머물면서 그가 작곡한 두 편의 콘협주곡을 직접 지휘했다. 안토닌 드보르작을 만난 것도 이 당시였다. 그해 11월 15일부터 25일까지 머물 때에는 그의 오페라 '유진 오네긴'의 프라하 초연을 준비하고 자문하였다. '유진 오네긴'의 프라하 공연은 이 오페라가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 공연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의 방문은 1892년 9월 30일부터 10월 12일까지로 그의 오페라인 '스페이드의 여왕'의 공연을 위해셨다.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이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 공연된 프라하 국립극장

 

[프레데릭 쇼팽] 폴란드 출신의 쇼팽은 체코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쇼팽의 친척들이 체코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쇼팽의 피아노 선생이 체코인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는 사항이다. 체코공화국은 그런 쇼팽에 대하여 대단한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2009년을 '쇼팽의 해'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펼쳤던 것이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지 160년 만의 일이었다. 프라하는 2009년 10월에 프라하 성에서 쇼팽을 추모하여 모차르트의 '진혼곡' 연주회를 열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쇼팽의 요청에 의해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었다. 쇼팽은 보헤미아를 1829년에 처음 방문했었다. 프라하와 테플리체를 방문했었다. 쇼팽은 테플리체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콘서트를 가졌다. 그후 쇼팽은 테플리체를 세번 더 방문했었다.

 

프라하 성에 속해 있는 성비투스 대성당. 2009년 10월에 쇼팽을 추모하여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

(체코/보헤미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들)

 

[베드릭스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스메타나는 1824년 프라하 동쪽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국경에서 가까운 리토미슬(Litomysl)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후 열다섯 살 때인 1839년에 프라하로 가서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맨날 오페라나 보러 다니고 아마추어 앙상블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속이 상한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갔다가 19세 때에 수중에 돈 몇 푼만 집어 넣고 다시 프라하로 갔다. 스메타나의 꿈은 모차르트의 작곡 스타일에 리스트의 테크닉을 첨가하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1848년에는 이른바 프라하 봉기에 참여해서 합스부르크에 항거하는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스메타나는 프라하에서 음악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작곡가로서도, 피아니스트로서도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2년 동안 어린 네 딸 중에서 세 딸이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부인까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866년에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슬며시 미소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그의 오페라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그 사람들'이 상당한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그때 스메타나는 42세였다. 스메타나의 다음 작품인 '팔린 신부'(프로다나 네베스타: Prodana nevesta)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스메타나는 체코의 국민작곡가로서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나의 조국'(Ma Vlast)는 체코 국민들에게 한 없는 조국 사랑을 심어 주는 작품이어서 더구나 존경을 받았다. 스메타나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말년에 귀가 들리지 않아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작곡은 계속하였다. 스메타나는 질병에 걸려 1884년에 향년 60세로서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라하의 비세라드(Vysehrad)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라하 시민회관(Municipal House)의 '스메타나 콘서트 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Leopold Dvořák )] 우리는 보통 드보르작이라고 부르지만 체코어로는 드보락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더 가깝다. 드로락은 1841년에 프라하 부근의 넬라호체베스(Nelahozeves)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헤미아에 속해 있었다. 드보락은 16세 때에 프라하로 와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 때인 1861년에 프라하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멤버가 되었다. 드보락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때 스메타나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드보락의 작품을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요한네스 브람스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생을 절친한 친구로서 지냈다. 드보락은 점차 높은 명성을 얻었다. 프라하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그 먼 런던에 자기의 작품을 지휘하러 가기도 했다. 드보락은 캠브릿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에 가서는 국립음악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뉴욕에 있을 때에 유명한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했다. 프라하에 돌아와서는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루살카'(Rusalka)를 완성했다. 드보락은 1904년에 향년 63세로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메타나와 마찬가지로 프라하의 비세라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드보락의 생가. 프라하 동쪽으로 멀지 않은 넬라호체베스 마을에 있다.

 

[레오스 야나체크(Leoš Janáček)] 야나체크는 1854년에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모라비아-실레지안 지역의 후크발디(Hukvaldy: 독일어로는 Hochwald)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에는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다. 야나체크는 프라하에서도 공부했지만 비엔나와 라이프치히에서도 공부했다.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토박이이지만 브르노(Brno)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지냈다. 그래서 브르노에는 야나체크극장, 야나체크기념관 등이 있다. 야나체크는 1881년에 브르노에 오르가니스트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이 학교를 1920년까지 운영했다. 야나체크는 스메타나와 마찬가지로 가정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 아들인 블라디미르는 두살 때에 세상을 떠났고 딸 올가는 그가 모라비아의 국민오페라라고 하는 '예누파'(Jenufa)를 완성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야나체크의 오페라들은 프라하에서 공연되기 전에 항상 브르노에서 먼저 공연되었다. '예누파'도 브르노에서 1904년에 초연되었지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6년에 프라하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브르노의 '야나체크극장'(Janáčkovo divadlo)

 

[보후슬라브 마르티누(Bohuslav Martinů)] 마르티누는 1890년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폴리카(Policka)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장이였다. 현재의 체코공화국 파르두바체 지역에 속하 마을이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제죽에 속한 곳이었다. 모후슬라브는 폴리카 마을에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가 16세 때에 그를 프라하로 데려갔다. 마르티누는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2학기부터 시험에 계속 떨어졌고 그래서 어쩔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 다음에는 혼자서 음악회도 열심히 가고 작곡도 하며 지냈다. 1차 대전후 그는 체코필하모닉의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들어갔다. 이때 '체코 라프소디'를 작곡했다. 이 곡은 체코필하모닉이 1919년에 처음 연주했다. 마르티누는 파리에 가서 유명한 작곡가인 알베르 루셀(Albert Roussel)로부터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 기간 중에(1935) 그는 오페라 '흐리 오 마리'(Hry o Marii)로서 체코슬로바키아국가상을 받았다. 마르티누는 2차 대전이 터지자 스위스로 갔다가 1941년에 미국에 도착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에 스위스로 돌아갔고 1959년에 스위스의 바젤 남쪽에 있는 리스탈(Liestal)의 어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체코공화국의 폴리카 마을에 있는 보후슬라브 마르티누 기념관에서 어린 보후슬라브가 어머니 앞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있는 장면의 전시. 이 방은 폴리카 마을의 성제임스교회의 탑에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 36미터 높은 곳에 있는 곳이어서 어린 보후슬라브 마르티누는 시간만 있으면 창문을 통해서 폴리카 마을을 내려다보며 장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얀 야쿠브 리바(Jan Jakub Ryba)] 모차르트 시대에 보헤미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인 리바는 필젠 부근의 프레스티체(Prestice)에서 1765년에 태어났다. 그는 1780년에 프라하로 가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다. 1784년에는 네포무크에서 음악교사의 자리를 얻어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해직되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로즈미탈 포드 트렌시넴(Rožmitál pod Třemšínem)이라는 마을에서 지낼 때에 부인이 될 안나를 만났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아홉 자녀를 두었다. 그는 1796년에 그의 대표작인 Hej, mistr를 썼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체코공화국에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공연이 되고 있다. 1815년에 리바는 숲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로즈미탈 포드 트렌시넴의 페스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리바가 태어난 로즈미탈 포드 트렌시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