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2. 15:37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영향

 

비엔나에는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축물들이 거의 없다. 르네상스는 16세기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이다. 음악, 미술,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던 운동이다. 16세기에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비엔나보다는 프라하에 가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프라하에 궁전을 짓고 지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을 유입하여 궁전을 지었다. 비엔나는 상대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을 지을 특권을 프라하에 빼앗겼던 것이다. 비엔나의 구시가지(1구 인네레 슈타트)의 좁은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간혹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을 찾아 볼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예를 들면 베커슈트라쎄(Bäckerstrasse) 7번지의 슈봐넨펠트 하우스(Schwanenfeld Haus)이다. 이 집의 내정(인너호프)을 보면 분명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임을 발견할수 있다. 로마의 팔라쪼 디 자코모 마테이(Palazzo di Giacomo Mattei)와 같은 형식이다. 자코모 마테이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깝게 지냈다고 하니 그런 연유로 르네상스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배케슈트라쎄 7번지. 슈봐넨펠트 하우스(Schwanenfeld Haus) 인너호프.

 

비엔나에서 대표적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현관 장식은 1구 살바토르가쎄 5번지에 있는 살바토르카펠레(Salvatorkapelle: Salvatorkirche)의 현관 상단 장식이다. 살바토르카펠레의 현관 조각 중에서 마돈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북부 이탈리아 스타일과 흡사하다. 합스부르크의 비엔나가 북부 이탈리아, 특히 베니스 또는 밀라노와 관련이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베니스와 밀라노는 샤를르 6세 이후에 상당기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안에 들어 있었다.

 

살바토르카펠레의 포탈 부조. 마돈나와 그리스도. 북부 이탈리아 스타일이다.

 

호프부르크(Hofburg)를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의 중심 지역은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 비엔나를 헝가리와 터키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요새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위해서 시내 중심지역의 둘레를 성벽으로 둘러쳤다. 그 성벽이 르네상스 스타일이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는 안전하므로 그곳에 황제들의 처소를 마련한 것이 호프부르크의 시작이다. 황제들은 호프부르크 궁전을 필요에 의해서 점차 확장했다. 확장은 되었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짬뽕 스타일이었다. 호프부르크의 초기 건물들은 이탈리아인인 피에트로 페라보스코(Pietro Ferrabosco)가 1577년에 설계한 것이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플로렌스의 부냐토(Bugnato) 양식을 가져다가 건물을 지었다. 부냐토 스타일의 특징은 벽에서 석재가 돌출해 나오도록 한 것이다. 로마의 팔라쪼 루스폴리(Palazzo Ruspoli)는 호프부르크의 초기 건물과 스타일이 비슷하다. 오늘날 비엔나의 많은 건물들에서 부냐토 양식을 찾아 볼수 있는 것은 16세기의 영향이다.

 

호프부르크의 아말리엔 트락트.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그 앞 광장의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기념상(프란시스 1세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여서 그런지 조각상에서도 토가를 입고 월계관을 쓰고 있다.

 

오토만 터키가 비엔나를 처음 공성한 것은 1529년 9월 27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비엔나는 함락되지 않고 버티었다. 겨울이 다가왔다. 오토만 터키군은 추위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 멀리 콘스탄티노플로 철수했다. 비엔나의 성벽이 견고해서 오토만 터키군이 함락을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비엔나의 성벽은 외적의 침입에 속수무책의 입장이었다. 오토만 터키군이 조금만 열심히 공격했더라면 성벽이 무너졌을 것이다. 터키군이 물러나자 합스부르크는 '이 때다'라면서 성벽을 새로 짓기로 결정했다. 이때 모델을 삼은 성벽이 베로나의 성벽이었다. 미켈레 산미켈리라는 사람이 설계한 성벽이었다. 당시로서는 베로나의 성벽이 외적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한 가장 최신 및 최적의 설계였다. 산미켈리가 설계한 비엔나 성벽은 19세기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지금의 링 슈트라쎄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비엔나의 성벽은 단순히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실제로는 도시 미관의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지은 것이다. 그것은 지금 호프부르크 앞의 부르크링에 있는 부르크토르(호프부르크의 문: 또는 헬덴토르)를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호프부르크를 지키는 듯한 웅장한 건축물이다. 호프부르크 내의 슈봐이처토르도 단순히 성벽에 배치되어 있는 문이 아니라 미관을 고려해서 세운 건축물이다. 1552년에  산미켈리는 슈봐이처토르의 상단에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의 호칭이 어떤 것들인지를 표시하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어떤 나라의 왕이며 대공인지 등을 문장으로 표현해 놓았다. 로마왕(ROM), 독일왕(GERMAN), 헝가리왕(HUNGAR), 보헤미아왕(BOEM) 등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호프부르크의 슈봐이처토르와 상단의 문장들 및 군왕 호칭 일람

 

술레이만이 이끄는 오토만 터키군이 비엔나 공성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간지도 1백년 이상이 지났다. 1682년에 일부 헝가리 귀족들은 아무래도 이제는 헝가리에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 왕국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 귀족들은 강력한 반합스부르크, 반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이었다. 이들 헝가리 귀족들은 오토만 터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당시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가 헝가리의 봉기를 은밀히 돕기로 했다. 프랑스는 오토만 터키와의 중간 역할도 자청해서 맡기로 했다. 아무튼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원수였다. 그런데도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사랑하는 망내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를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보내어 결국은 프랑스 혁명때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으니 이 노릇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1683년의 비엔나 도심.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볼수 있다. 성벽의 중간 중간에 요새가 마련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일부가 남아 있는 바슈타이이다. 오토만 터키군은 20만이고 비엔나를 지키는 병사는 시민군을 합해서 1만 6천이었다.

 

각설하고, 오토만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당시 합스부르크의 군주는 레오폴드 1세였다. 비엔나 시내 중심가의 그라벤에 있는 페스트조일레(페스트탑)는 레오폴드 1세 때에 만든 것이다. 레오폴드 1세는 오토만 터키이건 무어건 그런 부류들과의 전투를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했다. 전투를 하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나가고 재산만 피해를 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평화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헝가리의 반란 귀족들만 신이 났다. 반란 귀족들은 군대를 정비해서 합스부르크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헝가리의 상당부분이 이들과 이들의 동맹인 오토만 터키의 손에 떨어졌다. 오토만 터키의 카라 무스타파 바싸(파샤)는 합스부르크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1백여년 전인 1529년에 위대한 술레이만이 이루지 못한 비엔나 함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우선 비엔나를 공격해서 함락하면 전체 서유럽이 흔들거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라 무스타파는 당장 군대를 동원하여 비엔나를 공격코자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준비가 미흡했다. 더구나 겨울에 군대를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선 길이 나빠서 곤란했다. 그리고 오토만 터키군의 조직도 문제였다. 마치 봉건 농노제도와 같은 조직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지휘관들 사이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라 무스타파는 날씨가 좋은 4월과 9월에만 군대를 이끌고 조금조금씩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겨울에 군비를 잔뜩 준비한 후에 드디어 1683년 봄에 대병력을 이끌고 헝가리를 거쳐 비엔나로 진군했다.

 

오토만 터키군을 이끈 카라 무스타파 파샤

 

돌이켜보건대, 오토만 터키는 크레테 섬에 있는 칸디아 요새를 거의 20년만인 1669년에 함락했다. 참으로 끈질긴 전투였다. 오토만이 비록 함락을 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오토만에게 약점이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성들은 '오토만이 칸디아도 함락했다네!'라면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만일 오토만이 유럽으로 또 다시 진출해서 기독교 국가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라며 은근히 두려워했다. 교황 인노센트 11세는 기독교 국가들에게 단결해서 저 무지막지한 이슬람의 공격에 대응하자고 호소했다. 교황은 다행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폴란드로부터 병력과 자금을 지원 받아 합스부르크를 도와 줄수 있었다. 독일 지역의 가톨릭 영주들도 힘을 보탰다. 하지만 바티칸과 합스부르크는 오토만이 이번에도 비엔나로 몰려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비엔나는 반드시 합스부르크의 본거지라고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는 상황에 따라서 프라하에도 본부를 두었고 파사우에도 갈수 있었으며 인스부르크로도 옮길수 있었다. 오토만 터키는 마침내 1693년 6월에 진군을 시작하여 7월에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레오폴드 1세는 왕실의 모두를 데리고 파사우로 피신하였다. 카라 무스타파에게는 또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저 멀리 콘스탄티노플과 연락을 해야 하는데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서는 대단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20만 대군을 본부의 지시를 받아서 앞으로 진군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토만 터키군의 비엔나 공성

 

비엔나의 수비 병력은 군대 경험이 없는 민간인까지 합하여 1만 6천이었다. 오토만은 호프부르크에 면하여 있는 남쪽 성벽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비엔나 방위군들이 죽어라고 막는 바람에 번번히 실패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9월 10일, 폴란드왕 얀 조비에스키가 이끄는 기독교 병사들이 홀연히 비엔나의 서쪽, 칼렌버그 언덕에 모습을 보였다. 칼렌버그는 비엔나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높은 곳이다. 9월 10일 새벽에 비가 주룩주록 내리는 가운데 교황청의 특사인 마르코 다비아노가 전투을 앞둔 기독교 병사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이어 병사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와 오토만의 병영을 급습했다. 전투는 이삼일 만에 마무리 되었다. 오토만 터키는 또 한번의 레판토(Lepanto)를 경험해야 했다. 레판토 전투는 1571년 합스부르크가 오토만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이때 오토만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패전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었다.

 

칼렌버그에서 내려와 오토만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얀 조비에스키 폴란드 왕. 저 멀리 왼쪽 위에 칼렌버그 정상이 보인다.

 

오토만이 장시간동안 비엔나를 포위하고 심심하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비엔나에서는 오토만과 관련한 여러가지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볼수 있다. 심지어는 전투때에 날아왔던 오토만의 대포알도 그대로 보관하여 전시해 놓은 곳이 더러 있다. 그런데 두번에 걸쳐서 오토만의 침공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의 작품들에서는 군사적인 내용의 것은 찾아 보기 힘들다. 그저 풍속과 문화에 대한 내용이 많다. 하렘에 대한 내용이 많다. 오토만이 군사적으로 우세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오토만 병사들을 아예 야만인처럼 표현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1456년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승인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Giovanni da Capistrano: Jean de Capistran: 1386-1456)라는 사람이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 베오그라드에서 오토만 군대를 격파한 역사적인 사건을 1738년에 비엔나의 성슈테판대성당의 뒷편에 조각으로 만들어서 기념으로 삼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것을 보면 '병사 성자'(The Soldier Saint)라는 별명의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가 성삼위일체의 보호아래 십자가 군기를 높이 들고 있으며 그의 발 아래에 거의 발거벗은 오토만 전사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다. 오토만 전사의 모습은 마치 야만인처럼 표현되어 있다. 사실상 오토만의 무기는 15세기와 16세기에 유럽의 무기들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으나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과학기술이 더 발달하여 총기와 대포에 있어서 유럽의 것들이 더욱 우세했다. 그러므로 17세기 이후에 유럽 사람들이 보는 오토만 병사들은 신무기도 갖지 않은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토만이 퇴각한 후에 나타난 오토만 이콘들을 보면 그저 대수롭지 않게, 심지어는 코믹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성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 건물 뒤편에 있는 성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의 기념조각. 오토만 터키군을 제압하는 장면이다. 비엔나가 두번에 걸친 오토만 터키의 공성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1456년 그란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의 모습을 기념으로 제작해 놓았다.

 

비엔나 암 호프의 어떤 건물 벽에 전시되어 있는 오토만 터키군의 포탄. 기분도 그렇지 않아서 황금색을 칠해 놓았다.

 

비엔나에서 패배하여 줄행랑을 놓은 오토만은 병기는 물론이고 생활 용품까지도 그대로 두고 급히 떠났다. 오토만은 헝가리로 돌아갔으나 그해 11월에 그란(Gran) 전투에서 기독교 군대에게 또 다시 패배하여 멀리 베오그라드까지 퇴각하였다. 오토만은 베오그라드를 서방에 대한 경계선으로 삼고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보다도 오토만의 술탄들은 이번 비엔나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카라 무스타파를 먼저 교수형에 처하였다. 전쟁에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카라 무스타파라는 이름에는 '불운'(infelix)이라는 접두사가 붙을 정도로 비유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교황인 인노센트 11세는 비엔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는 처지가 되었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부조를 보면 교황 인노센트 11세가 검을 쥐고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가톨릭 병사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병사들처럼 표현했다. 물론 교황이 손수 검을 들고 적군들을 죽인 일은 없다.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의 부조. 교황 인노센트 3세가 검을 들고 오토만 터키 군대를 몰아내는 모습. 기독교 병사들은 로마제국의 병사처럼 묘사되어 있다.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에 있는 교황 인노센트 11세 묘소. 아랫쪽의 두 인물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왼쪽이 불멸의 신앙(Faith)을 비유한 것이며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오른쪽은 불굴의 용기(Fortitude)를 비유한 것이다. 가운데 하단의 부조가 교황 인노센트 11세가 오토만 터키군을 몰아내는 장면이다. 바티칸을 가게 되면 반드시 보시도록. 인노센트 11세는 한 손에 천국문을 여는 열쇠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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