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비엔나의 성벽과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6. 05:15

비엔나의 성벽과 이탈리아 영향

 

오늘날의 비엔나는 도시 구조가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1구라고 하는 인네레 슈타트는 길도 좁고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아니, 도시계획 좀 하지, 이게 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반면에 링슈트라쎄를 중심으로해서는 넓은 길과 웅장한 건물들, 그리고 공원들까지 늘어서 있어서 시내 중심지와 비교할 때에 대조적이다. 링슈트라쎄는 원래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이 있던 장소이다. 그것을 프란츠 요셉 황제 당시에 성벽을 허물고 대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옛 성벽에는 요새와 능보와 삼각보루와 누벽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는 넓은 해자가 만들어져 있었다. 비엔나의 옛 성벽은 16세기에 베니스 패턴으로 축조되었다.

 

1683년의 비엔나.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오늘날의 1구이다.

 

1683년 오토만 터키군을 물리친 신성로마제국은 더 이상 오토만에게 겁을 먹지 않기로 하고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비엔나에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비엔나로'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옛 성벽 안의 비엔나(구시가지)로는 더 이상 증가하는 인구를 감당할수 없게 되었다. 성벽 외곽으로 마을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헝가리 농민들이 집단으로 비엔나를 공격해 왔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농민들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자 봉기를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1703-11년의 쿠루코크(Kurucok) 봉기였다. 비엔나의 성벽 밖에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비엔나는 외곽으로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원래의 성벽은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

 

비엔나 옛 성벽에 있던 보루가 아직 남아 있는 곳. 묄커바슈타이. 오른쪽 축대가 보루(바슈타이)였다.

 

1857년에 프란스 요제프 황제는 성벽으로 구분된 두 비엔나를 하나로 합치기로 작정했다. 우선 안쪽에 있는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로를 만들며 대로를 따라서는 공원과 공공건물들을 짓기로 했다. 옛 성벽의 축대와 보루의 일부는 어쩔수 놓아 두기로 했다. 층이 지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옛날에 이런 성벽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1683년 오토만 터키의 공성 때에 이러이러한 보루와 능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옛 성벽을 허물고 대로를 건설하는 등 일련의 대공사는 무려 30년이나 걸렸다. 건축가들로서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새도로 및 새건물 건설사업이 마치 보난자와 같았다. 건축가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이들은 자기 마음껏 네오 르네상스, 네오 고틱, 네오 클래식 건축 양식을 총동원하여 링슈트라쎄를 장식했다. 심지어는 네오 튜도 궁전까지 생겨났다.

 

밤의 링슈트라쎄. 멀리 라트하우스와 비엔나대학교 본관건물이 보인다. 링슈트라쎄는 원래 비엔나 성곽이 있던 자리였다.

 

그런 중에도 어떤 건축가들은 지난날의 건축 카탈로그를 구태의연하다고 보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다. 두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아돌프 로스(Adolf Loos)와 오토 바그너(Otto Wagner)였다. 아돌프 로스는 호프부르크의 정문 앞인 미하엘 광장에 로스 하우스라는 특이한 건물을 지었다. 사람들은 로스 하우스를 보고 얼굴에 눈섶이 없는 것과 같다면서 못마땅해 했다. 심지어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로스 하우스가 너무 못마땅해서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토 바그너는 옛 스타일에 의한 장식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옛 건축 양식의 복사는 아니었다. 오토 바그너는 링슈트라쎄에도 칼스플라츠 지하철 역사, 우편저축은행 건물 등을 완성했다. 아돌프 로스가 되었건 오토 바그너가 되었건 이들의 새로운 건축 양식은 그야말로 외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비엔나 오리지널이다.

 

오토 바그너의 칼스프라츠 지하철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