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페스트 기념탑과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5. 16:30

페스트 기념탑과 이탈리아의 영향

 

그라벤거리와 가운데 보이는 페스트조일레(Pestsäule: 영어 Plague Column)

 

역사책들을 보면 전쟁, 왕권, 심지어 결혼 이야기까지 길게 늘어 놓았으나 한 나라의 흥망의 배경에 있는 중요한 사건들은 간혹 소홀히 다루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로마제국,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쇠락의 배경에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인간이 어찌할수 없는 역병도 한 몫을 차지했었는데 그 역병에 대하여는 별로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그저 신의 뜻으로만 접어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역병은 전쟁의 참화보다도 더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흘러 들어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흑사병(페스트)이 가장 문제였다. 흑사병 중에서도 이른바 림프절페스트, 즉 가랫톳페스트라고 하는 것이 모든 참상의 근본이었다. 1348년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으며 경제적으로도 말할수 없는 피해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비엔나는 콘스탄티노플, 또는 동방의 아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시아와 유럽에 이르는 무역로의 중심지점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로 인하여 흑사병에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629년에 림프절페스트가 비엔나를 강타하였다. 1629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 중반 인조시대였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피해로부터 50 여년 후인 1714년에 또 다시 흑사병이 비엔나를 찾아왔다. 1714년이면 조선 숙종조의 후반기에 해당한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

                 

서양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596년에 로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에도 로마는 물론이고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 흑사병이 만연하여 많은 피해가 났었다. 성그레고리 대제라고 불리는 교황 그레고리 1세(재위: 590-604)는 흑사병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원하여서 시민들과 함께 행진을 하면서 기도에 힘썼다. 행진을 하던 교황은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교황은 이것을 성령의 발현으로 보았으며 역병의 재난이 끝나게 된다는 상징이라고 믿었다. 푸치니의 '토스카'의 무대가 되는 로마의 카스텔 산탄젤로(Castel Sant'Angelo)의 꼭대기에 있는 천사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로부터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인지 아무튼 로마에서 역병이 물러갔다. 그후 바오로 5세는 역병이 물러간 것을 기념하여서 로마에 탑을 세웠다. 페스트탑이다. 이러한 기적과 같은 일이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에게 전파되자 역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교황처럼 행진을 하며 기도하는 일이 많아졌다. 혹시라도 하늘에서 칼을 빼어든 천사가 나타나지 않을까해서 행진하면서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것이다. 비엔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행렬을 이루어 걸어가며 기도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여 인간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상주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어떤 경우에는 성모의 이름도 부르고 비엔나의 수호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재해 줄것을 기도했다. 원래 마리엔조일레(Mariensäule: 마리아 기둥)는 성모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미에서 세워진 기둥이다. 사람들은 마리아의 기도가 조금이라도 빨리 하늘에 전달될수 있도록 마리엔조일레를 되도록이면 높이 세웠다. 마리엔조일레가 역병시대에 더욱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모가 역병을 물리쳐 달라는 인간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나님께 전달해 주기를 바래서였다. 비엔나에는 여러 마리엔조일레가 있지만 암 호프(Am Hof)의 마리엔조일레가 대표적이다. 이 기둥의 하단에는 아기 천사들이 칼을 빼어 들고 악귀들을 제압하는 모습들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역병 및 기타 천벌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금방 알수 있다.


암 호프 광장의 마리엔조일레

마리엔조일레 하단의 아기천사들이 악귀들을 물리치는 장면의 조각. 기념탑 하단의 조각이 있는 부분을 독일어로는 조켈(Sockel)이라고 부른다.

 

1667년에 레오폴드 1세 황제는 비엔나를 강타한 역병이 물러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성모 마리아가 중재하여 역병과 기타 하늘의 응징이 소멸될 것을 었다. 레오폴드 1세는 만일 역병이 물러가면 이를 기념하는 탑을 세우기로 했다. 마침내 얼마후 병이 물러가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이다. 비엔나의 랜드마크로 되어 있는 조일레(기둥)이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교황 바오로 5세가 1605년에 로마에 세운 역병기념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때의 탑은 아직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S Maria Maggiore)교회의 건너 편에 있다. 한편, 비엔나의 그라벤은 로마제국 시대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해자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라벤에 페스트조일레를 세운 것은 비엔나를 역병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후로 오스트리아에는 비엔나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를 닮은 기념탑들이 여러개가 세워졌다. 페스트조일레는 구름이 둘러싸고 있고 천사들과 성자들이 지키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빛나는 조형물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도 한마리 등장한다. 페스트조일레의 양 옆으로는 두개의 기념상 분수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성요셉분수이고 다른 하나는 성레오폴드분수이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루도비코 부르나치니(Ludovico Burnacini)의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칼스키르헤 상단의 부조.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있다. 아랫쪽에는 역병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의 똑같이 생긴 페스트조일레를 7구 노이바우의 장크트 울리히스플라츠 3번지에 있는 장크트 울리히 교회의 호프(내정)에서 볼수 있다. 이 탑을 세울 때에 노이바우 일대는 비엔나 성곽 밖에 있었다. 노이바우 일대는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매장하던 곳이었다. 8구 요제프슈타트의 피아리스텐가쎄(Piaristengasse) 43번지에 있는 피아리스텐키르헤에도  페스트조일레가 있다. 암 호프의 마리엔조일레와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의 중간 쯤 되는 조형물이다. 이런 조형물에는 비엔나 시민들이 하나님과의 중재에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성자의 상을 함께 만들어 세웠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 양 옆으로 성자들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그라벤의 두 성자는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성요셉, 그리고 성레오폴드이다. 칼스키르헤는 페스트가 물러간 것을 기념하여 샤를르 6세 황제가 성자 카를 보로메우스에게 봉헌한 교회이다. 비엔나 근교의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에도 안 마당에 페스트조일레가 있다. 비엔나에는 페스트조일레와는 별도로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있는 모습의 기념상이 더러 있다. 역시 천사가 페스트와 같은 역병을 칼로 제압해서 끝을 맺도로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암 호프(Am Hof)에 있는 마리엔조일레 하단의 네 천사상이다. 마리엔조일레로는 비너노이슈타트의 하우프트플라츠에 있는 조형물도 기억될만한 작품이다. 재언하지만, 마리아를 하늘 높이 올려 세운 것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좀 더 가깝게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엔나 근교의 성십자수도원(슈티프트 하일리겐크로이츠)의 구내에 있는 페스트조일레

비너노이슈타트의 마리엔조일레

8구 요제프슈타트의 요도크 핑크 플라츠(Jodik Fink Platz)에 있는 피아리스텐키르헤 앞 광장의 마리엔조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