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18세기 비엔나의 궁전과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5. 11:56

18세기 비엔나의 궁전에 대한 이탈리아 영향

 

비엔나는 아름답고 웅장한 바로크 궁전의 도시이다.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웅장한 궁전이 없을 리가 없다. 호프부르크가 있고 슐로스 쇤브룬이 있으며 비록 황제들이 살지는 않았지만 슐로스 벨베데레가 있다. 슐로스 락센부르크가 있고 헤르메스 빌라가 있다. 비엔나에는 슐로스(Schloss)라는 타이틀의 건물보다는 팔레(Palais)라는 이름의 건물들이 더 많이 있다. 1구에 가보면 한집 건너 두 집이 팔레이다. 시내궁전들이다. 팔레의 상당수가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지은 것들이며 이탈리아 스타일이다. 로마의 스타일도 있고 북부 이탈리아의 스타일도 있다. 그런데 비엔나의 교회들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건축 양식에서도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비엔나의 팔레에서는 별로 두드러진 특징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교회는 로마의 건축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지만 팔레들은 고작해야 북부 이탈리아의 팔라디안 건축 양식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수 있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처소였던 벨베데레 궁전

 

비소네(Bissone)라는 마을이 있다. 스위스의 루가노 호수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코모(Como)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석공예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다. 비소네 출신으로 가장 뛰어난 재능의 석공예가는 아마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일 것이다. 보로미니는 로마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로마에서는 특히 성 베르도성당의 천사상 얼굴 부분을 만들어서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보로미니보다 거의 30년이나 젊은 조반니 피에트로 텐칼라(Giovanni Pietro Tencala)는 비소네를 떠나 비엔나로 와서 당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가 되었다. 텐칼라는 1685-1687년에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을 위해 시내 궁전을 이탈리아 스타일로 지었다. 현관 파트는 1709년에 요한 피셔 폰 에얼라흐가 수정하였다. 아무튼 이 궁전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비엔나의 궁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궁전을 1753년에 로브코비츠가 취득하였다. 그 후로 팔레스 로브코비츠(로브코비츠 궁전)라고 불렀다. 로브코비츠플라츠(로브코비츠 광장)에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인 '영웅'(에로이카)이 초연되었다. 그래서 로브코비츠 궁전의 메인 홀을 '에로이카 잘'(Eroica Saal)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팔레 로브코비츠에는 극장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로브코비츠 궁전. 극장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메인 홀을 에로이카 홀이라고 부른다.

 

뷔플링거슈트라쎄에 있는 알테스 라트하우스(구시청)은 누가 다시 설계했는지 모른다. 다만, 보로미니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현관의 커브 라인이 그렇다. 팔레 하라흐(Palais Harrach)는 1696-98년에 페르디난트 보나벤투라 폰 하라흐를 위해 도메니코 마르티넬리(Domenico Martinelli)가 설계했다. 마르티넬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루카 출신이다. 하라흐 가문은 17세기에 비엔나에서 대단히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식구 중의 한 명인 에른스트 아달베르트는 추기경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아달베르트 추기경의 조카가 페르디난트 보나벤투라로서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의 만투아 공국을 통치했던 곤자가 가문의 라비니아였다. 그래서 페르디난트도 이름을 이탈리아 스타일로 보나벤투라라고 붙였던 모양이다. 보나벤투라라는 말은 '행운'이라는 뜻이다. 합스부르크와 곤자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곤자가의 엘레오노라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3세의 세번째 부인이 된 것은 대표적인 일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비엔나와 이탈리아가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팔레 하라흐

 

대주교 궁전은 17세기 초반에 지은 것이다. 아마도 플로렌스 출신의 조반니 코카파니(Giovanni Coccapani)가 설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식이 상당히 단순화 된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하라흐 궁전에서 가까운 곳에 알베르트 백작의 시내 궁전이 있다. 알베르트 백작은 카프라라 백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알베르트는 오타비오 피콜로미니의 조카이다. 오타비오 피콜로미니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으로 비엔나에 와서 합스부르크 황제게에 봉사했으며 특히 30년 전쟁에 커다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알베르트도 삼촌인 피콜로미니의 뒤를 따라 군사령관이 되었으며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특사로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술탄의 궁전에 주재하기도 했다. 알베르트는 삼촌인 위대한 장군인 피콜리모니를 존경하여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에네아 피콜로미니(Enea Piccolomini)라고 지었는데 그가 나중에 교황 비오 2세가 된 사람이다. 에네아 피콜로미니는 교황이 되기 전에 1683년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알베르트 백작의 가정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비엔나에서 거처할 저택으로서 1698년에 이탈리아의 젊은 건축가인 도메니코 에지디오 로시(Domenico Egidio Rossi)를 초빙하여 지었다는 것이다. 도메니코 로시는 나중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건축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대주교 궁전과 카프라라 궁전의 현관

 

리히텐슈타인 궁전은 요한 아담 폰 리히텐슈타인 공자가 카우니츠 백작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구입 당시에 이 궁전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세명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초빙되어 궁전을 완성했다. 조각은 또 다른 이탈리아 조각가인 조반니 줄리아니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거장 건축가들은 더러 비엔나에 저택을 짓고 살면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렇게 훈련을 받은 제자들이 다음 세기에 건축예술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예를 들어 조반니 줄리아니도 도제를 한명 데리고 있었다. 그가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Georg Raphael Donner)였다. 돈너는 나중에 비엔나에서도 유명한 분수들을 제작했다. 리히텐슈타인 궁전을 보면 현관부분이 원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당시 이처럼 원주를 사용한 현관은 로마에서 유행하던 양식이었다. 로마에는 고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석재 원주들이 쉽게 구할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 원주들은 나중에 거인이 지구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지구는 아틀라스라고도 하고 텔라몬스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스타일을 18세기에 비엔나에서 인기있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반면에 로마에서는 오히려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부 이탈리아(주로 롬바르디)에서는 일반적인 스타일이었다.

 

리히텐슈타인 궁전 현관의 원주 장식과 거인이 텔라몬스를 받치고 있는 모습

 

유럽의 군주들이 궁전을 되도록이면 화려하게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권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데려다가 사치스럽고 재미있는 연회에 참석토록해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함이라고 한다. 그런 분야의 도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베르사이유라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을 지어서 여기에서 무도회를 개최하고 오페라를 공연하여 귀족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었다. 루이 14세는 과거에 귀족들의 불만 때문에 왕권이 흔들렸던 것이 한두번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로서도 시골의 저택에서 단조롭게 생활하느니보다 베르사이유에 와서 마시고 떠들면서 부인들과 놀아나는 것이 여간 구미에 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로마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파넴 에트 치르첸세스(Panem et Circenses)라고 하는 것이다. 번역하면 '빵과 서커스 쇼'라는 뜻이다. 황제가 화려한 연회를 베풀고 쾌락의 서커스 쇼를 마련해서 반항적인 로마인들의 기세를 진정시키도록 한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를 유럽의 군주들이 가져와서 적용했다. 합스부르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르사이유의 '거울의 방'

              

비엔나에는 헝가리, 보헤미나, 이탈리아, 루마니아 등지에서 귀족들이 와서 시내 지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궁정활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시내에 궁전들을 지었다. 슈타트팔레이다.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넓은 정원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크고 웅장한 시내 궁전들을 짓고 살았다. 대체로 18세기에 팔레들을 지었다. 시내의 좁은 골목길에 있는 옛날 집들을 허물고 다시 짓거나 그렇지 않으면 옛날 집들을 보수해서 팔레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보니 길을 넓힐수는 없으므로 그냥 그자리에 주저 앉은 모양이 되었다. 좁은 골목 길에 있다보니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관이나마 화려하게 만들어서 과시를 했다. 그런 팔레들을 자주 볼수 있다. 주로 바로크 현관들이다. 로마에 있는 저택들의 현관과 비교해보면 비엔나의 현관이 더 크고 넓다. 아마 마차가 들어갈수 있도록 문을 넓혔던 것 같다.

 

오이겐 공자의 슈타트팔레 현관

 

시내 중심가에 있는 보헤미아 수상관저(Böhmische Hofkanzlei)는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의 작품이다. 대체로 18세기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건축가 중에서 단연 두드러진 두 사람을 선정하라고 하면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와 관련이 있다. 폰 힐데브란트는 제노아 출신이다. 다만, 그의 부모가 독일인이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노아 공국군의 대위였다. 폰 힐데브란트는 로마에서 카를로 폰타나의 문하에서 도시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피에드몽 전투에서 제국군의 엔지니어로 참전했다. 그때 사령관이 저 유명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였다. 지안 루카(Gian Luc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폰 힐데브란트는 전투가 끝나자 오이겐 공자를 따라서 비엔나로 왔다. 비엔나는 또 하나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뵈미셰 호프칸츨라이는 1708-14년에 폰 에얼라흐가 완성한 건물이다. 18세기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이다. 뵈미셰 칸츨라이가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주현관 부분의 장식을 보면 알수 있다. 로마에서도 그런 식의 헛위세(라이온 스킨)가 유행했었다. 뵈미셰 칸츨라이의 현관 부조는 로마의 팔라쪼 마다마(Palazzo Madama)에서 볼수 있는 부조과 같다. 뵈미셰 칸츨라이는 1750년에 마티아스 게를(Mathias Gerl)이 확장했다. 그런데 현관 뒷면의 설계는 좀 부질 없는 것 같다. 왼쪽 아틀라스는 자기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바라만 보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보헤미아 수상관저 지붕의조각과 현관의 문장(왼쪽)

 

팔레 킨스키(Palais Kinsky)는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의 작품이다. 팔레 킨스키는 로마에 있는 팔라쪼 키지(Palazzo Chigi)의 영향을 받은 건물이다. 팔라쪼 키지는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팔레 킨스키는 프라이융 광장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받았다. 베르니니의 팔라쪼 키지는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오이겐 공자의 시내 궁전(슈타트 팔레)을 설계할 때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는 드믈게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건축가이다. 그라츠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폰 에얼라흐는 젊은 시절 로마로 가서 필립 쇼르의 공방에서 사사했다. 필립 쇼르는 당대의 장식조각가였다. 폰 에얼라흐는 로마에서 장식조각뿐 아니라 일반 건축에 대하여도 폭넓게 공부했다. 폰 에얼라흐는 아마도 로렌초 베르니니의 스투디오에서 여러 건축가들을 만나 견문을 넓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이겐 공자의 시내 궁전은 유감스럽게도 좁은 길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조각과 부조들로서 아름다움을 대신하고자 한다. 오이겐 공자가 오토만 터키군을 젠타에서(1697), 페테르바라디노에서(1716), 그리고 프랑스 군을 블렌하임에서(1704), 튜린(토리노)에서(1706) 물리친 장면들이 부조로 설치되어 있다. 오이겐 공자는 당시의 사령관의 복장으로도 등장하지만 참으로 의미있게 로마군의 복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알마 로마(Alma Roma)의 후계자로서 비엔나 글로리오사(Vienna Gloriosa)를 나타내 보이는 것 같다. 비엔나 글로리오사는 샤를르 6세가 주도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세계의 도시로서 비엔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이다. 비엔나 글로리오사의 결정판은 쇤브룬 궁전의 글로리에트일 것이다.

 

팔레 킨스키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