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정준극 2014. 3. 21. 19:00

독일 국가의 신성로마제국(The Holy Roman Empire of the German Nations)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교황이 독일의 샬레마뉴 대제를 임페라토루 로마노룸(로마인들의 황제)로 임명하여 시작

 

샬레마뉴 대제(742-814)

 

비엔나는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6백년이 넘도록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유럽을 제패하였던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는 로마였지만 그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새로운 로마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는 비엔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마제국과 비엔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다가 역사의 변화와 함께 로마제국을 이어받는다는 신성로마제국이 생겼고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비엔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로마제국이면 로마제국이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로마제국이라는 단어의 앞에 신성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바티칸 교황청이 인정한 로마제국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국가들의 연합이다. 국가, 공국, 추기경 영토, 자유도시 등등 약 3백개의 법인격들로 구성된 사상 초유의 거대 제국이었다. 비록 실체보다는 형식에 가까운 제국이지만 사실상 유럽에서 역사상 이만한 규모의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스캔디나비아 몇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세계에는 수많은 제국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 바빌론 제국, 나폴레옹 제국 등등. 하지만 그것들은 영토는 넓었지만  신성로마제국처럼 거의 4백개에 이르는 별개의 주권국가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역사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문화와 전통이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있는 곳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아무래도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 받은 이탈리아의 영향은 음악, 건축, 미술, 연극,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두드러져 있음을 볼수 있다. 비엔나가 이탈리아(로마)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주로 건축물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 홀, 보주. 비엔나 제국보물박물관 소장


그보다도 우선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샬레마뉴 대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기는 서기 800년 12월 25일, 장소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크리스마스 미사가 올려지는 중이다. 이때에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대제(742-814)에게  임페라토르 로마노룸(Imperator Romanorum: 로마인들의 황제)이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의 관을 씌어주는 대관식도 거행되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 사건을 앞으로 수백년에 걸쳐 유럽의 대부분을 우산 아래에 두는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임페라토르 로마노룸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관식을 치루어 받았지만 자기가 로마인도 아닌데 과연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해도 되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잠잠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 비교적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기왕에 교황이 자기를 로마황제라고 불렀는데 너무 가만히 있는 것도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야 말로 바티칸의 교황이 인정한 로마황제인데 그건 바티칸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서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므로 기왕이면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로마제국(동로마제국을 말함)으로부터도 정당하고도 유일한 후계자라는 것을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바티칸 시티

 

어째서 교황 레오 3세는 샬레마뉴에게 임페라토르 로마노룸이라는 호칭을 주었을까? 그는 로마와 자기 자신을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압박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있는 로마는 서로마제국에 속하여 있었고 반면에 동로마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은 은근히 로마의 서로마제국을 무시하고 로마의 교황도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속상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건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사연부터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는 기원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으며 수도를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겼다. 되도록이면 성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깝게 있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바티칸의 교황은 그대로 로마에 남아 있었다. 베드로가 순교한 거룩한 장소인 바티칸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음을 맞자 그의 아들들이 제국을 멋대로 나누어 가지며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본거지로 삼는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은 그런대로 별고 없이 지내게 되었지만 서로마제국은 476년 로물루수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황제로 있을 때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로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선포되었던 로마제국은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로마제국의 영토는 여러 군주들이 나누어 갖는 작은 나라들로 분할되었다. 그렇게 나누어진 나라 중에서 프랑크왕국의 세력이 가장 컸다. 오늘날의 독일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였던 왕국이었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은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동로마제국은 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티칸의 교황이지만 동로마제국에 대하여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더구나 동로마제국은 별도로 교황을 두기까지 했으니 로마의 바티칸 교황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없어진 판에 굳이 동로마제국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로마제국이라고 불렀고 아울러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렀다.

 

이스탄불. 나중에 비잔틴제국이라고 불렀던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세월은 계속 흘러 8세기 후반이 되었다. 프랑크왕국의 걸출한 인물인 샬레마뉴(샤를레마뉴대제: 칼대제: Charlesmagne)가 유럽의 강호로 급격히 부상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후예인 샬레마뉴 대제(大帝)는 차츰 영토를 넓혀갔으며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프랑크 왕국에 병합하며 기세를 올렸다. 샬레마뉴의 생각은 유럽에 옛 로마제국처럼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편, 바티칸에 있던 교황 레오3세는 비잔틴 제국인지 동로마제국인지 때문에 교황의 위상이 쇠약해졌다고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교황의 위상을 강화할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황은 샬레마뉴를 느닷없이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Augustus 또는 Imperator Romanorum: 아우구스투스 황제: 로마인들의 황제)로 임명할테니 바쁘시더라도 로마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즉, 로마인도 아닌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라는 사람을 325년간이나 존재하지 않았던 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것이다. 샬레마뉴 대제는 줄리어스 시저, 또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로마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교황이 옛날 로마제국 황제의 타이틀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내리겠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지, 내가 누구인데,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샬레마뉴는 비록 타이틀에 불과했지만 드디어 그 옛날 대로마제국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샬레마뉴 대제


샬레마뉴는 이어 덴마크와 독일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스페인에서 무어족을 몰아내는 일도 주도하였다. 샬레마뉴의 위세가 날로 강력해지자 유럽의 제후들이나 영주들은 교황이 임명한 샬레마뉴의 권위를 고려하여 그를 마지못해 옛 로마제국의 황제와 같은 위대한 인물로 간주하고 복속하였다. 그러한 샬레마뉴가 세상을 떠나자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놓고 약 30년 동안 분열시대로 들어갔다. 그 때에 독일에서 오토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다시 제후국들을 추슬러서 이번에는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아래 샬레마뉴 대제가 누렸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로서 재출범하였다. 그것이 서기 926년이었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은 샬레마뉴 대제에 의해 출범하였으나 오토(Otto) 1세가 완성한 지도상의 대제국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얼마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건네졌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거의 7백년 동안 유럽의 맹주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이끌었으나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에 버금하는 대제국을 유럽에 만들고자 하자 세상 돌아가는 것은 어쩔수 없구나라며 결단을 내려서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내렸다. 1806년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때였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간략한 역사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


다시 오토 1세로 돌아가서, 그는 새로운 제국의 비전과 고대 로마제국과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여 고대 로마제국을 계승한 제국이므로 그렇게 알고들 있으라는 얘기였다. 이같은 주장은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 오토 3세에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계승되었다. 특히 오토 3세는 자기를 신정(神政)국가의 수장으로 내세움으로서 고대 로마의 영광과 권세를 재현코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 사촌인 카린티아의 브루노를 교황 그레고리 5세로 세웠다. 그레고리 5세는 독일인이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이 된 인물이다. 베드로의 후예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무효화시킨 것이다. 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 5세는 996년 5월 21일 바티칸에서 자기 사촌 형인 오토 3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으니 그거야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교황에 의해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 3세는 로마를 신성로마제국의 행정센터로 만들고 고대 로마의 관습을 부활토록 했으며 비잔틴 궁정의 의식도 그래도 살리도록 했다. 오토 3세는 한술 더 떠서 자기의 호칭을 '세계 황제'라고 불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독일 황제이기도 했다.


오토 1세. 베를린 리하르트 바그너 플라츠 지하철역 내의 모자익 작품

 

얼마후 독일 황제들과 로마의 교황들 사이의 밀월은 이른바 '임명 논란'(Investiture Controversy) 때문에 갈라졌다. 문제는 누가 교회의 책임자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느냐는 것이었다. 교황은 당연히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신정일치를 내세우며 자기들이 임명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 일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두개의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귈프(Guelph)는 교황을 지지하는 측이었고 기벨린(Ghibelline)은 황제 편을 드는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파벌 분쟁은 이탈리아에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발전하여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기구를 두게 되었다. 일곱 명으로 구성된 선제후(Elector)들의 모임이었다. 그중에서 세명은 독일의 주요 도시국가의 대주교들이었고 나머지 네명은 주요 지역의 영주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세습제를 존중하여서 일반적으로 황제의 후계자를 당연직 차기 황제로 선출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주로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문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바톤을 넘겼지만 말이다.

 

임명논란. 바티칸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간의 세력 다툼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여러 나라들 중에서 어쩐 일인지 이탈리아는 계속 말을 잘 듣지 않고 황제에게 복종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는 '우리가 로마제국의 후손들인데 독일 사람들이 로마인의 왕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은근히 따로 놀았다. 호엔슈타우펜 출신의 프레데릭 1세(바바로사: 일명 붉은 수염)와 그의 뒤를 이은 프레데릭 2세는 이탈리아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계속 요구하고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전쟁을 할수 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프레데릭 1세와 프레데릭 2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번번히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크게 패배하였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결과적으로 그 가문 출신으로서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던 콘라딘(슈봐비아의 콘라딘)은 1268년에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과거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토레 아스투라(Torre Astura)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고 결국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알프스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어느 지역에 대해서도 영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일대의 지역에 대한 통치권만 갖게 되어 그로부터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레데릭 1세 바바로사가 할렘시에 보검과 방패를 수여하고 있다.


그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쇠퇴로 독일 지역은 일대 혼란기를 겪게 되었고 마침내 1273년에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으로서 합스부르크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이 문을 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는 원래 오늘날 스위스의 한쪽에서 조용하게 지내던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세력을 넓혀서 현재의 오스트리아 대부분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루돌프가 제국의 도읍을 기왕에 바벤버그 왕조가 도읍으로 정했던 비엔나를 합스부르크의 도읍으로 정했다. 돌이켜보건대 비엔나는 로마제국 시대에 변방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빈도보나라는 지역이었을 뿐이었다. 로마제국이 북방 경계선인 라인-도나우 라인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일찍이 180년에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빈도보나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마르코마니(Marcomanni: 변방 경계선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빈도보나에 군대 사령부를 설치했었다. 그러던중 4세기경에 빈도보나는 고트족의 침공을 받아 곤경을 겪었고 그후에는 아바르족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바르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왔으며 오늘날 파노니아 평원에서 헝가리를 일군 부족이다. 그 후에는 바벤버그 왕조가 비엔나를 변경지역인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삼아 비엔나의 발전에 바탕이 되어주었다. 

 

로마시대의 빈도보나 요새. 상상도. 지금의 비엔나.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타이틀을 다른 인물들에게 빼앗겼다가 130년만인 1438년에 알베르트 2세(Albert II: 1739-1439)가 다시 찾았다. 알베르트 2세는 장인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고 아울러 헝가리 왕, 독일 왕, 보헤미아 왕에 올랐다. 그러나 알베르트 2세는 보헤미아에서 후스파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얼마후 터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인 프레데릭 3세(Frederck III: 1415-1493)가 1452년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프레데릭 3세는 교황과 서로의 통치 영역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다. 그 협약은 1806년 프란시스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내릴 때까지 효력이 계속되었다. 아무튼 '평화의 황제'라는 별명의 프레데릭 3세와 니콜라스 5세 교황이 맺은 협약(Vienna Concordat)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간의 강한 동맹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첫 조치가 비엔나에 별도의 로마 가톨릭 교구(Bishopric)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프레데릭 3세가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라를 신부로 맞아들이고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은 부르군디의 메리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의 영역을 저 멀리 유럽의 저지대에까지 확대하였다. 게다가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핸섬왕 필립은 스페인의 호안나 공주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의 영역을 스페인까지 확장하였다. 필립과 호안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샤를르 5세가 제국을 승계했을 때 신성로마제국은 스페인에서 네덜란드까지, 오스트리아에서 나폴리 왕국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막강한 영토를 거느리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샤를르 5세 때에 스페인은 영향력을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까지 뻗도록 했다. 샤를르 5세(카를로스 5세: 카를 5세)는 '나의 제국에서는 태양이 지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 정도로 신성로마제국은 대단한 위세를 떨쳤었다. 샤를르 5세는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샤를르 5세는 1556년에 양위를 결정하고 아들 필립(필립 2세)과 동생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 1세)에게 제국을 분할하여 주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샤를르 5세의 뒤를 이어 1558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1564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가 처음에 소유했던 영토만을 통치하도록 했다. 샤를르 5세의 아들 필립 2세로부터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계가 시작된 셈이다. 필립 2세의 아들이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로 유명한 돈 카를로스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르 5세. 폴 루벤스 작. '나의 제국에서는 태양이 지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은 두 가지 사항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하나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의 상당부분을 물들인 개신교의 위협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당연히 로마 가톨릭이 중심이 되고 있으므로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개신교는 위협일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위협은 오토만 터키였다. 오토만 터키는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529년에는 술탄 술레이만이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비엔나를 포위하고 집요하게 공성을 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와 그 후의 황제들은 로마 가톨릭을 복구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유지했다. 결국 비엔나와 로마의 연계가 더욱 확대될수 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제국내에 여러 다른 인종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통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역할도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세계를 포용하는 황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합스부르크의 모토도 A.E.I.O.U로 삼았다. 이 말은 라틴어의 Austriae Est Imperari Orbi Universo 라는 말의 첫글자를 딴 것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오스트리아의 운명이다'라는 뜻이다. 또 하나  세계의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합스부르크는 문장을 쌍두의 독수리로 삼았다. 하나는 동쪽을 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서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심볼은 사실상 비잔틴 황제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A.E.I.O.U.

 

[A.E.I.O.U의 의미에 대하여는 여러 해석이 있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약자(略字)는 일찍이 프레데릭 3세(1415-1493)가 슈티리아 공작으로 있을 때인 1473년에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약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A.E.I.O.U.가 독일어로 Alles Erdreich ist Osterreich Untertan의 약자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All the World is Subject to Austria(세상 모두는 오스트리아에게 복속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독일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가 되며 역시 첫 글자를 모으면 A.E.I.O.U가 된다. 또 다른 주장은 Austria est imperio optime unita의 약자로서 Austria is best united by the Empire, 즉 '오스트리아는 제국에 의해 최고로 통일된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해석은 Austria erit in orbe ultima라는 문구의 약자라는 것으로 Austria will be the last in the world, 즉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나라'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의 약자라는 것으로 It is Austria's destiny to rule the world, 즉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오스트리아의 운명이다'라는 뜻이다. 어쨋거나 A.E.I.O.U라는 약자는 프레데릭 3세 이후의 군주들도 즐겨 사용하는 문구가 되었으며 오늘날 까지도 오스트리아의 여러 곳, 여러 물건들에 적혀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군사아카데미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A.E.I.O.U.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가급적 로마 분위기를 내어 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이같은 경향은 1713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끝나고 그 결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에게 저지대 네덜랜드(현재의 벨기에 일대)와 이탈리아, 즉 시실리와 나폴리와 밀라노 공국을 통치토록 하자 그동안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해서 속상해 하던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이제야 고대 로마제국과 연결이 되었다고 해서 좋아했다. 샤를르 6세는 본인이 단지 오스트리아 공국의 군주가 아니라 세계의 군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샤를르 6세는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비엔나에서 로마의 분위기가 나도록 발전시키는 노력을 했다. 샤를르 6세가 1740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군주가 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도 샤를르 6세의 의중을 따라서 비엔나의 로마화를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5년에 로레인의 프란시스와 결혼함으로서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비가 되었지만 실제적인 정치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관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영어로는 마리아 테레사). 우리는 그를 황비라고 부르지 않고 여제라고 부른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중에서 두명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막내 딸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은 요제프 2세는 할아버지인 샤를르 6세, 그리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생각이 달랐다.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다. 우선 그는 종교문제부터 개혁을 단행했다. 교회와 수도원의 세력이 너무 커진 것을 걱정해서였다. 그래서 수도원들을 정비하고 교회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만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제국 내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리고 독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선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다.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요청한 것도 그같은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후궁에서의 도주'였다. 요제프 2세의 이같은 조치들은 앞으로 독일 국가가 신성로마제국의 주도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라고 풀이할수 있다. 그런데 잘 아는대로 독일국가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이 아닌 루터교였다.

 

비엔나의 요제프스플라츠에 있는 요제프 2세 기념상

 

오늘날 호프부르크에 연결된 요제프스플라츠에 세워진 요제프 2세의 기념상을 보면 로마 황제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말을 타고 한 손을 들어 저 앞을 가르키고 있는 모습은 로마의 피아짜 델 캄피돌리오(Piazza del Campidoglio)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념상과 그렇게도 닮을 수가 없다. 더구나 비엔나의 요제프 2세 기념상 하단의 부조들은 요제프 2세의 생애에서 중요한 이벤트들을 표현한 것으로 요제프 2세의 로마 방문 장면과 루마니아 일부지역을 정복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면에는 학문적인 사항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종교가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의 부조는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이렇듯 의미심장한 요제프 2세의 기념상이 제막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시스 2세가 1806년 8월 6일에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시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문을 닫고 대신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격상하여 프란시스 1세로서 그 첫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비엔나에서의 로마 성향은 더 이상 고수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로마의 피아짜 델 캄피돌리오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비엔나의 요제프스플라츠에 있는 요제르 2세 기마상과 비슷하게 생겼다.

           

본 블로그에서는 비엔나에 있는 기념상들과 일부 조각들, 또는 건물들이 이탈리아와, 구체적으로는 로마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소개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일부 랜드마크적인 건물들, 예를 들면 슈테판스돔, 슐로스 쇤브룬, 기타 현대적 건물들은 참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하기야 교회의 내부가 이탈리아 스타일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근세에 들어와서 비엔나의 건축물에 이탈리아적 요소를 반영하는 일은 두드러지게 사라진 것도 유념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