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18세기의 비엔나 교회와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4. 17:26

18세기의 비엔나 교회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룬 후에 루터교는 비엔나에도 어느새 유입되어 상당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비엔나가 어떤 곳인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로마 가톨릭을 등에 업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로마 가톨릭의 제2의 본산이라고까지 할수 있는 비엔나에서 개신교(루터교)가 득세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반종교개혁운동이 필요했다. 로마 기톨릭이었다가 루터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해야했다. 그 사명의 첨병을 예수회가 맡았다. 1556년에 페르디난트 1세는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수회 소속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명설교자인 피에트로 카니시오(Pietro Canisio) 신부를 비엔나로 초빙하였다. 원래 그는 네덜랜드의 신학자로 이름은 페터 케니스(Peter Kenijs)였으나 이탈리아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터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카니시오에게 비엔나의 시민들로 하여금 옛 신앙, 즉 로마 가톨릭 신앙을 되찾도록 하는 전략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칸니시오 신부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1623년부터는 예수회 신부들이 비엔나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비엔나대학교가 아니라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 있는 구대학교이다.

 

구비엔나대학교(현재는 오스트리아학술원)와 예수회교회

 

예수회는 곧이어 구비엔나대학교의 옆에 교회를 지었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 1번지의 예수회교회(Jesuitenkirche)이다. 예수회교회는 로마에 있는 '예수교회'(Chiesa del Gesu)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특히 풍성한 내부장식은 두 교회가 더구나 닮은 점이다. 예수회교회는 1703년과 1707년에 외부는 물론 내부설계를 다시했다. 예수회 소속인 안드레아 포쪼(Andrea Pozzo)가 그 작업을 맡았다. 안드레아 포쪼는 로마의 산이그나치오(S. Ignazio)교회의 천정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안드레아 포쪼는 산이그나치오 교회에서처럼 예수이텐키르헤에 그림으로 돔을 표현하는 기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렇듯 비엔나에는 이탈리아 교회를 닮은 교회들이 상당히 있다. 예를 들면 페터스키르헤(Peterskirche)는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의 중심부분을 축소해 놓은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헤렌가쎄(Herrengasse)의 미노리텐키르헤(Minoritenkirche)는 비엔나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본부교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화려한 예수회교회(예수이텐키르헤)의 내부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회는 비엔나에 전도와 설교를 위해 왔다. 당연히 도미니코 수도회가 교회를 지었다. 1구 포스트가쎄(Postgasse) 4번지이다. 역시 이탈리아 스타일을 닮지 않을수 없었다. 외관도 그렇게 내부의 천정도 그렇다. 특히 천정의 패턴은 로마의 산티 도메니코 에 시스토(SS Domenico e Sisto)의 버티컬 트러스트와 같은 스타일이다.

 

도미나카너키르헤

 

암 호프(Am Hof) 1번지에 있는 암 호프 교회는 '천사의 아홉 콰이어 교회'(Ze den neun Choren der Engel)이라고 부른다. 비엔나에 있는 교회 중에서 이탈리아 건축 양식을 가져온 또 다른 훌륭한 예이다. 교회 이름이 특이하지만 예수회 소속이다. 암 호프는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병영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 로마 스타일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발코니는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다. 1782년에 교황 비오 6세가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고 강복을 하던 곳이 암 호프 교회의 발코니이다. 교황 비오 6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에게 제발 교회 개혁을 너무 서두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비엔나에 왔었다. 그리고 프란시스 2세가 1806년에 이 발코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정식으로 선언했다.

 

암 호프 교회와 발코니.

 

뒷편에서 바라본 천사의 아홉 콰이어 교회

 

옛날 슈테판대성당 그림을 보면 대성당 옆에 이탈리아 교회라고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지금은 없다. 아마 요제프 2세 황제가 통폐합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제프 2세는 비엔나에서 종교 단체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실제로 교황 클레멘트 14세도 예수회를 해산한바 있다. 요제프 2세는 슈테판대성당 옆에 있던 이탈리아교회(Italienische Kirche)를 없애고 대신 헤렌가쎄에 있는 미노리텐키르헤(Minoritenkirche)를 이탈리아 사람들이 구심점으로 삼도록 했다.

 

17세기에 비엔나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수는 상당했다. 대부분 이탈리아 북부, 즉 롬바르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 건축가들, 조각가들, 화가들은 비엔나의 교회들을 재단장하는 일들을 했다. 심지어 프라이융의 쇼텐키르헤도 18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재단장했다. 쇼텐키르헤의 측면은 유명한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가 재단장한 것이다. 비엔나의 교회 건물에서 이만큼 근사하게 보이는 측면도 없을 것이다.

 

쇼텐키르헤 내부. 쇼텐키르헤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비엔나에 와서 세운 교회이다. 스코틀랜드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군대 지휘관들도 많았다. 당시에 신성로마제국은 헝가리와 터키의 침공을 자주 받았으며 그것뿐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유럽의 열강들과 다투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스웨덴이나 러시아와 같은 세력들이 합스부르크를 탐탁하게 여지지 않고 심사를 건드리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군대 지휘관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위해 봉사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을 꼽아보라고 하면 오타비오 피콜로미니(Ottavio Piccolomini)일 것이다.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여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퇴역한 그는 비엔나에서 살았다. 그는 아마 전쟁에서 아무리 적군들이라고하지만 자기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속죄하는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엔나 근교(현재는 9구 알저그룬트)에 제르비텐키르헤(Servitenkirche)와 수도원을 지었다. 제르비테는 봉사한다는 뜻이다. 제르비텐키르헤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타원형(양파 스타일)의 첨탑으로 지은 교회이다. 그로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많은 교회들이 타원형 첨탑을 가지게 되었다. 제르비텐키르헤는 제르비텐가쎄(Servitengasse) 9번지에 있다.

 

알저그룬트의 제르비텐키르헤. 양파스타일의 첨탑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는 171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년 후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졌다. 결과, 샤를르 6세는 스페인의 왕으로 되려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저지대 네덜랜드와 밀라노, 나폴리, 사르디니아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사르디니아는 몇 년 후에 시실리와 교환했다. 그 이전에 합스부르크는 카롤비츠 조약을 통해서 오토만 제국과 새로운 국경선을 정했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가 오늘날의 헝가리 대부분과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의 일부까지 확보하였다. 1718년에는 파사로비츠 조약을 통해 영토를 세르비아(베오그레이드)와 루마니아(발라키아)까지 확보하였다. 이제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은 명실공히 유럽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물론 다른 나라들, 예를 들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은 아프리카와 신대륙 아메리카, 그리고 심지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별별 짓을 다했지만 합스부르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경제학자인 필립 빌헬름 폰 호르니크는 '오스트리아는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룰수 있다.'라고 말했다. 제국의 확대와 함께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는 교회들이 더 들어서기 시작했다. 옛날에 세운 교회는 협소하고 낡아서 재건축하는 경우도 많았다.

 

비엔나는 교회의 도시이다.

 

그러한 차에 1722년 로마 교황청은 비엔나를 대주교관구(Archdiocese)로 격상하였다. 하기야 교세가 당당히 성장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수도 없었을 것이다. 샤를르 6세 황제는 그런 결정을 크게 환영했다. 그는 비엔나를 새로운 로마로 보았다. 샤를르 6세는 비엔나의 시내, 왕궁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과거에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던 장소였고 중세에는 기독교 교회가 있었던 곳이었다. 교회 이름은 바티칸의 성베드로교회를 본따서 페터스키르헤(Peterskirche)라고 했다. 건축공사는 사실상 1702년부터 시작하여 1733년에 마무리되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대공사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가브리엘레 몬타니(Gabriele Montani)가 처음 설계를 맡았다. 그러다가 거장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마무리했다. 페터스키르헤는 그라벤의 끝자락에 있다. 콜마르크트의 좁을 길을 통해서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토르의 돔이 보이는 것이 특별하다. 워낙 좁은 지역에 세웠기 때문에 두개의 종탑이 다른 건물들에 가려서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페터스키르헤는 여러가지 특별한 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는 교회건물 옆 벽면에 샤를르마뉴 대제가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지시하는 장면의 부조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샤를르마뉴 대제가 과연 그런 지시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페터스키르헤가 신성로마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처사이다.

 

페터스키르헤 내부의 성요한 네포무크 순교의 장면 조각

 

페터스키르헤는 성베르로에게 봉헌되었지만 성요한 네포무크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있는 교회이다. 그래서 내부에 성요한 네포무크에 대한 조각품이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다. 비엔나의 교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하나인 페터스키르헤(베드로교회)는 로마의 산 아그네세 디 아고네(S Agnese di Agone)교회를 본따서 만든 것이다. 혹자는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의 중앙부분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는 것 같다.

 

페터스키르헤. 두개의 종탑과 가운데 돔이 인상적이며 현관 상단의 동상조각도 특별하다.

 

캐른트너슈트라쎄에서 슈테판스돔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의 안나가쎄로 들어서면 안나키르헤(Annakirche)가 있다. 성안나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성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성안나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있는교회들이 여럿이나 있다. 성안나교회의 내부는 갈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룬 장식으로 되어 있다. 갈색과 황금색은 비엔나 교회들이 즐겨 사용하는 색갈이며 바로 로마의 교회에서도 즐겨 사용하는 색갈들이다. 성안나교회의 제단 쪽에는 두개의 초록색 기둥이 당당하게 서 있다. 이것도 로마 교회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안나키르헤. 중앙제단 쪽에 두개의 기둥이 받이고 있다.

 

페터스키르헤에서도 언급했지만 성요한 네포무크는 비엔나 교회들이 즐겨서 모시고 있는 성인이다. 성요한 네포무크에 대한 기념상과 부조와 스투코가 여러 교회를 장식하고 있다. 제르비텐키르헤는 성요한 네포무크의 일대기에서 한 장면을 표현해 놓았다. 그는 왕비가 그에게 고해성사를 통해서 말한 내용을 왕에게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강물에 던져짐을 당하여 순교했다. 성요한 네포무크는 보헤미아에서 성자로서 크레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보헤미아의 인심을 얻어야 하는 합스부르크로서 기왕이면 성요한 네포무크를 올려주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제르비텐키르헤에 있는 성요한 네포무크 카펠레. 보헤미아의 왕비가 요한 네포무크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