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비엔나의 분수와 이탈리아 영향

정준극 2014. 3. 26. 18:31

비엔나의 분수와 이탈리아 영향

 

18세기에 로마는 분수로서 유명했다. 오늘날의 영화에도 로마와 분수에 얽힌 스토리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천'(愛泉)이라고 했던 Three Coins in the Fountain이 대표적이다. 로마의 분수 패션이 비엔나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심에 분수가 적당히 있다는 것은 도시를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연고로 비엔나에도 도심에 많은 분수가 있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비엔나의 분수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서 별도의 항목으로 소개하였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란다.

 

결혼분수(페어맬룽스브룬넨) 전경과 상당의 발다친(Baldachin: 닫집)

                            

비엔나의 도심 중의 도심인 호에 마르크트(Hoher Markt)에 있는 결혼분수(Vermahlungsbrunnen)는 성모 마리아의 결혼을 축하하여 봉헌된 것이다. 1732년에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의 아들인 요제프 에마누엘 폰 에얼라흐가 완성했다. 이 분수는 로마의 분수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다. 로마의 분수들은 물이 풍성하게 흐르지만 결혼분수는 물이 흐르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단의 청동 닫집(발다친)은 베르니니가 만든 성베드로의 닫집으로부터 유래했다. 닫집의 끝자락을 커브로 만든 것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솜씨가 아닌가 보고 있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의 문하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이 분수의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노이어 마르크트의 돈너 분스(Donnerbrunnen)

 

비엔나시는 1737년에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Georg Raphael Donner)에게 분수를 하나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돈너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서 거장 줄리아노 줄리아니(Giuliano Giuliani)에게 배운 사람이었다. 돈너는 비엔나시의 요청에 부응해서 네개의 강을 상징하는 분수를 만들기로 했다. 돈너는 이탈리아의 베르니니가 교황 인노첸트 10세를 위해 피아짜 나보나(Piazza Navona)에 설계한 분수를 그대로 인용해서 만들었다. 오늘날 1구 노이에 마르크트(Neue Markt)에 있는 아름다운 분수이다. 돈너는 오스트리아의 네 강을 표현하기 위해 노이에 마르크트의 분수를 제작할 때에 특별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젊은 어부를 강으로 표현했으며 분수의 중심에 두지 않고 외곽에 두었던 것이다. 젊은 어부는 마치 물 속에 있는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모습이므로 사람들은 그가 정말 고기를 잡는줄 알고 물속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오리지널 조각은 1770년에 납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어부들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분수를 철거했다가 훗날 다시 설치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조각가들은 조각의 어떤 부분을 중심 조각으로부터 떼어내어 다른데 둠으로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바로 그런 스타일을 돈너가 노이어 마르크트의 분수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 아이디아의 조각가들로는 베르니니, 멜키오페 카파(Melchiorre Caffa) 등이 있으며 그러한 예는 로마의 산 아고스티노(S Agostino) 분수에서 볼수 있다. 

 

로마의 피아짜 나보나 분수

 

로마에는 공공 분수이외에도 개인의 저택에 예술적 가치가 높은 분수들이 많이 있다.  1741년에 비엔나 시당국은 당시의 시청 내정(인너호프)을 장식하기 위해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에게 분수의 제작을 다시 부탁했다. 결과는 대단히 우아한 안드로메다 분수였다. 돈너는 플로렌스의 보볼리 정원에 있는 분수들을 제작한 지암볼로냐(Giambologna)의 작품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드로메다 분수를 제작할수 있었다고 본다. 지암볼로냐는 보볼리 정원에 바로 안드로메다 분수를 만들었다. 또한 페르세우스의 모습은 유명한 첼리니의 작품에 나오는 것과 흡사하므로 돈너가 첼리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돈너가 이처럼 지암볼로냐와 첼리니의 작품들을 참고로 삼은 데에는 1737년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 세상을 떠나고 투스카니 공국을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시스 스테판 황제에게 맡기게 되자 이탈리아와의 우호를 고려하여 안드로메다 분수를 만들지 않았나라고 생각된다. 프란시스 스테판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남편이다.

 

비엔나 구시청(알테스 라트하우스)의 안드로메다 분수. 윗쪽에 페르세우스가 천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플로렌스 보볼리 가든의 안드로메다

 

베르니니의 피아짜 노바노에 있는 분수의 거대한 조각상들은 네개의 강을 상징하는 것으로 암석 위에 세워놓았고 주변에 각종 동물들과 식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같은 디자인은 18세기에 만들어진 비엔나 구대학교 정면에 있는 분수들과 연결되는 점들이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 학술원(Akademie der Wissehnschaft)이다. 이곳의 대강당에서 하이든의 저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하이든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다.

 

오스트리아 학술원 앞의 분수. 오른쪽은 디테일로서 뱀이 개구리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다.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가 노이어 마르크트에 만든 분수는 오스트리아의 네개의 강을 주제로 한 것이다. 비엔나에는 제국의 강을 주제로 삼은 또 다른 분수들이 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어떤 강을 대표강으로 삼느냐는 것은 차이가 있다. 1846년에는 제국의 4대 강을 도나우(Donau), 엘베(Elbe), 포(Po), 비스툴라(Vistula)로 삼았다. 팔라멘트 앞에 있는 거대한 팔라스 아테나 여신 분수도 제국의 네 강을 표현했다. 그러나 포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탈리아의 영토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라멘트의 팔라스 아테나 분수에는 도나우, 엘베, 몰다우, 인 강을 의인화해서 표현했다.

 

팔라멘트 앞의 팔라스 아테나 여신 분수

엘베와 몰다우를 의인화한 조각